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창39:4~6, 20~23)
여기에 모인 CBMC회원 여러분은 경제전문가들입니다. 목사인 제가 경제 얘기를 한다면 그건 매우 유치한 얘기가 될 것입니다. 설교를 부탁받고 “그럼 뭘 말하지?”하며 며칠 간 고심을 하다가 “성경에는 경제인이 없었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몇 사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4명의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단군조선 시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거느린 하인은 318명이었는데 인구가 희박하던 시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브라함은 엄청난 기업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 부자였지만 제가 오늘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살 때에 형들의 미움을 사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던 사람입니다. 당시 애굽은 아프리카와 중동과 지중해 지역의 최강대국이었는데 요셉이 30세 나이에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진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밑바닥 노예에서 출발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비결은 그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여기서 요셉의 주인은 1절에 나오는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입니다. 그는 막강한 실력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요셉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친위대장 집에는 수많은 병사와 관리와 노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출신인 젊은이에게 어떻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기는 총무 직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뀔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음식점을 보면 주인은 가업의 맛을 내기 위해 주방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주인은? 카운터에 앉아 있습니다. 왜 카운터에 앉아 있을까요? 믿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신용’입니다.
은행, 주식, 약속어음,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등은 모든 유대인들이 만들어 냈습니다. 금융산업은 신용을 바탕으로 발전합니다. 유대인들이 금융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사람들끼리의 약속도 철저히 지키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무엇입니까? 신용입니다.
보디발 장군이 자기의 소유를 모두 요셉에게 맡겼답니다.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면 자기의 소유 100%를 다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돈에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지만 간수장에게도! 사람에게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보디발 장군이나 간수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들에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교인이나 유교인이나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하면 됩니다.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따라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실패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없으면 지금부터 개발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삼상17장을 보면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러 갔다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고함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독의 소리를 듣고도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숨어서 꼼짝을 못한 거예요. 그 이유는 골리앗의 무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투구와 갑옷과 칼과 던지기 창과 단창으로 무장했는데 이 중에서 제일 무서운 무기는 단창이었습니다.
단창은 쇠로 만든 무기였는데 골리앗 같은 장수가 찌르면 상대의 놋방패와 갑옷을 뚫고 들어가 상대를 즉사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겁을 먹고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보겠다고 하니까 사울 왕이 “얘. 넌 안 돼! 넌 나가면 뼈도 못 추려. 골리앗은 백전의 용사야!”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이 계속 나가서 싸워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사울 왕이 하도 기특해서 자기의 갑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칼도 있어야 합니다! 그거 없으면 개죽을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뭘 말하고 있습니까? 삼상17:39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내게 익숙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는 싸우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평상복에 한 손에는 막대기와 또 한 손에는 물매를 쥐고 나갔습니다.
고대에는 세 종류의 전사가 있었는데 첫째는 말을 탄 기병과 전차병입니다. 둘째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진 보병입니다. 셋째는 발사병으로 궁수와 물맷돌을 날리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병사들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보병은 긴 창으로 기병에 맞설 수 있었고, 말을 탄 기병은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발사병을 무찌를 수 있었고, 발사병은 활이나 물맷돌을 이용하여 보병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보병입니다. 보병끼리 붙으면 골리앗을 이길 장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물맷돌을 날리는 투석병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이 창을 던질 수 있는 거리에 오기 전 골리앗의 취약점인 이마를 노렸습니다. 뭘 가지고 노렸습니까? 자기에게 익숙한 물맷돌로 노렸습니다.
물맷돌에 이마를 맞은 골리앗은 “어~ 이럴 줄 몰랐는데...” 그러면서 쓰러졌습니다. ‘어~ 이럴 줄 몰랐는데...’했을 때는 때가 늦습니다. 때가 늦으면 공룡 같은 대기업도 무너집니다. 샤오미란 ‘좁쌀’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샤오미와 화웨이가 지금 스마트폰 대기업인 삼성을 흔들고 있습니다. 금년 화웨이에서는 플렉시블 스마트폰을 내놓겠다고 합니다. 삼성의 반응은 “어~ 이럴 줄 몰랐는데” 그러고 있습니다.
50절은 과거 제가 아주 큰 영감을 받았던 구절입니다.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칼이 없는 사람이 칼을 갖고 있는 사람을 굴복시켰습니다! 대기업은 자본력과 인력 면에서 막강합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중소기업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합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은 꼼짝도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다윗이 전쟁의 영웅 강자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잡았습니까?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잡았습니다. 이것을 기업에 적용시킨다면 돈과 인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중소기업이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대기업을 굴복시켰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라’ 그런 말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새벽기도를 하지요, 금요 철야기도도 하지요, 그것도 모자라면 산기도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찾으라’고 했습니다. ‘두 발로 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은 기도한 후 가만히 있습니다. 움직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다음은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부딪쳐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철문도, 거대한 문도 일단 두드려야 열립니다. 철문이라고, 거대한 문이라고 겁을 먹고 포기하면 열 방법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일단 부딪쳐봐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하여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살 때였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600명 쯤 되었는데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다윗이 600명을 데리고 출타한 틈을 타 아말렉이 시글락 마을을 급습하여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잡아갔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시장에 내다 팔면 돈이 되거든요.
다윗이 600명을 데리고 사흘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와 보니까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여자와 아이들은 단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600명의 남자들이 밤새도록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울었을까요? 성경을 보니까 아내 때문에 울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 울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30:6)
다윗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마을 습격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향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간지 알아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방향도 모르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요? “기도했냐?” 그러면 두 발로 뛰어보라는 것이지요.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무작정 찾아 나섰습니다. 얼마를 돌아다니다가 길가에 병들어 누워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를 도와줄 때가 아닙니다. 가족을 찾는 일이 더 급하잖아요. 그런데도 다윗은 그 소년을 불쌍히 여겨 물과 빵과 무화과와 건포도를 먹여주었습니다. 소년은 사흘 밤낮 물도 먹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는데 다윗이 주는 것을 먹고 기운을 차린 거예요. 다윗이 물었습니다. “넌 누구냐?” “예. 저는 애굽인인데 내가 병들었다고 주인이 나를 길에 버리고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다윗이 묻지도 않을 말을 그 소년이 스스로 했습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시글락을 불살랐습니다.” 시글락은 다윗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묻지도 않은 ‘정보’가 그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지금 다윗에게 가장 필요하고 필요한 정보가 튀어나오 거예요. “그러면 네가 우리를 너희의 본거지로 인도해줄 수 있겠느냐?” “예. 저를 살려주셨는데 제가 그리하겠습니다.”
다윗이 소년을 따라 아말렉 본거지로 가보니 술을 먹고 춤을 추면서 난리가 난 거예요. 포로로 잡아온 여자들과 아이들을 노예시장에 팔면 돈이 굴러들어오거든요. 다윗이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새벽에 다들 곯아떨어지자 급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빼앗겼던 재물까지 다 찾아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정보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아닙니다. 길에 버려진 소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윗이 기도만 했습니까? 아니지요. 두 발로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길에 버려진 한 소년에게서 은혜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사람에게도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철문도, 거대한 문도 두드려야 열립니다. 부딪쳐봐야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