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해방 전 1923년, 1926년 및 1939년 선거 광고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1923년 11월 20일 경성(서울) 남대문 부근 지금의 상공회의소 가까이에 있던 남대문 소학교
운동장은 크고 작은 깃발이 물결을 이루었다. 조선에서 두 번째인 부(시), 읍, 면 협의회(의회) 회원 선거가 있었다.
11월 21일 자 동아일보에는 큼직한 사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다.
동아일보 1923년 11월 21일
선거 장소인 남대문 소학교 운동장은 온통 입간판의 물결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큰 간판 (깃발)은 크기가 사람 키의 3~4배나 되어 보인다. 적어도 30여 개쯤 되어 보이는 대소의 깃발이 빈틈 없이 서 있다. 위의 사진 해설 끝부분에는 <보라 후보의
이름으로 장식된 장식 터 기분이 있는 회의장 광경>이라고 되어 있다.
선거가 끝나고 당선자가 발표되자 이번에는 당선사례 광고가 신문 광고 면을 장식하게 되는데 1923년 11월 22일 자
동아일보 광고이다.
(1) 인천부(시) 당선자 3명과 대구부(시) 6명 합계 9명의 당선 사례(當選 謝禮) 광고
(2) 경성부(서울시) 협의원 당선자 8명의 당선 사례 광고. 크기는 세로 2단 가로 4.6cm 쯤으로 추정된다.
(3) 개성군 송도면(현재 개성) 협의원 2명의 일본인을 포함한 11명의 당선 사례 광고. 광고는 이름을 연이어 적었다.
그 아래는 신의주(新義州) 부(시) 협의원 5명의 일본인(이름 글자가 4개) 당선 사례 광고. 세로 2단 크기이다.
이 무렵 당선 광고는 서울(경성), 인천, 대구, 신의주, 개성 다섯 도시의 협의회원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글자 하나도
다르지 않고 꼭같게 되어 있다. 마치 법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1926년에는 세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남대문 옆 남대문 소학교 입수로서 깃발의 크기가 전선대보다 더 높아 보이고(?)
3년 전보다 더욱 즐비한 시장터 같다. 옥외 광고 상인은 톡톡히 벌이를 했을 것이고 모름지기 사람이 저렇게 모였으니 음식
장사도 쏠쏠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26일. 투표장 남대문 소학교 입구인 듯
조선일보 1926년 11월 11일 자에는 남대문에 세워 놓은 대형 입간판이 너저분하게 서 있다. 여남은 개쯤 되어 보이는데, 한국인 후보 이름은 작은 것 2개뿐이고 큰 것은 모두 일본인 이름이다. 아직 남대문이 국보는 아니었지만 한국 최대 도시 대문이라기에는 망측하다. 연도는 분명치 않으나 같은 무렵인 듯한데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은 온통 비슷한 크기의 후보 이름 20여 개가 적힌 입간판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다. (나라 잃은 터라지만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칭경기념비(稱慶紀念碑)가 초라한 모습이다.)
1926년 11월 11일 조선일보. 남대문(위). 광화문 비각(아래)
광화문 비각(칭경기념비) 현재 모습(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1920년대와 1930년대 협의회원에는 차이가 있는데 ‘20년대 의원은 자문이었다. 이것이 30년대에는 의결권을 가진 협의회가 되었다. 조선일보 기사 헤드라인에 “석일(昔日. 옛날)의 행세선거(行勢選擧)와는 다르다”라는 보도가 생기는 이유이다. 따라서 1939년 5월 11일 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서울 시청 앞에 걸린 대형 간판 네 개의 내용에도 무엇인가 달라진 듯하다.
“총후(銃後)의 의무(義務)“라는 말은 전쟁 중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는 국민의 의무라는 뜻이다. 일본은 이 지방의회 선거를 일본 통치하의 한국이 지방의회 회원을 선출하는 민주제도를 갖춘 것으로 선전하였다 한다.
후보들의 연설이 있다는 기사는 안 보이고 유일한 광고 매체가 간판이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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