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정명토론에서는 대안학교와 일반 사립학교의 차이를 중점으로 대안학교의 기준에 대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발제자인 김희동님은 향 대안가치, 향 대안적인 내용을 담은 대안교육을 강조하며 근대 소비와 욕구, 개발사업, 다국적 기업으로 인한 식량과 에너지 문제, 불공정 거래로 인한 수탈, 등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한 때이며 학교 교육내용에서 스며들어간 내용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내어야 함을 강조했다. 발제자는 이어 우리가 향해야 할 가치는 욕망을 넘어서 자기 삶의 과제발견, 자본에 덜 구속된 지역경제 기반의 삶, 생태적이고 소박한 생활 등 인간성의 회복, 다양성의 존중, 자연과의 조화, 내면과 통견되는 외현들을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서로에게 배운다는 본질적인 교육행위에 깊이 들어가고 가정과 사회가 함께 배우고 있다는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교와 더불어 대안가정과 대안 학부모가 되어 대안사회운동으로 우리 삶 자체를 바꾸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교육철학, 교육과정, 시간표 간의 관계와 대안적 가치가 교육과정에 어떻게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진행되었다.
토론자인 고양자유학교 교사 배정황님은 현장에서 느낀 교육에 대한 가치와 현실적 고민들 속에서 이기적인 아이로 키우지 않기 위한 교육이 보편적인 양적팽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어떠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교육과정에 교육철학적 관점을 담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토론자 전재철님은 학부모의 입장에서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교사와 하드웨어에 집중하는 학부모의 다른 입장에서 대안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현실적으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교사들에게 기다림이 필요하듯 학부모들 또한 교사들의 성장을 위한 기다림이 필요함이 종합토론시간을 통해 논의되었다.
[발제문]
대안학교의 기준 : 대안학교와 일반 사립학교의 차이
김희동(통전학림)
대안학교와 사립학교에 관한 상당한 전문가나 쓸법한 이러한 제목으로 발제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민들레 60호 <수업 시간표를 보며 드는 생각; 이러다가 사립학교 될라>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를 사립학교 나온 것 말고는 그쪽으로 전혀 문외한인 제가 사립학교를 가벼이 운운한 것 같아 은근히 그쪽으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은데 이런 제목의 발제까지 맡게 되니 괜한 악연을 만들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러다가 사립학교 될라>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대안학교 교실 벽에 걸린 수업 시간표를 일반학교 교실 벽에 옮겨 놓았을 때 그 교실에 들어온 이들에게 별다른 혼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게 대안학교의 시간표가 맞겠는가, 다시 말해 그 시간표가 걸린 학교가 대안학교가 맞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작은 차이들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현대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지는 분과중심의 사고가 시간표를 도배하고 있다든지, 과목 이름도 다를 게 없고 게다가 대학입시와 관련된 특정 과목명이 자주 출현한다면 일반학교와 뭐가 다르다고 대안이란 이름을 쓰는가 말이다. 이건 남더러 하는 말이 아니라 어느 날 우리학교 시간표가 말을 걸기에 쳐다보니 그런 상황이었다. 그 한탄스런 자각을 계기로 꽃피는학교는 정신 차리기에 맹렬히 돌입하였고 지금은 그런대로 덜 부끄러운 시간표를 갖게 되었으니 드러내놓기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그러니 자각과 고백은 이 외롭고 먼 길을 가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언제나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이러다가 사립학교 될라>는 말 안에는 일반학교와 다를 바 없는 시간표를 가졌다면 일반학교인 것이고 굳이 대안학교라고 하는 게 뭐냐는 뜻이 들어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일반학교에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있고, 우리 학교와 같은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국가나 그에 준하는 공공기관이 설비한 것이 아니고 사법인이나 개인에 의해 설립된 곳이니 그럼 사립학교일 테고 그래서 이러다 사립학교 될라 했던 것이지, 뭐 딱히 사립학교를 낮잡아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 밑바닥에는 분명 대안학교는 일반학교, 특히 사립학교와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이쯤 되니 사전을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립학교?
사립학교[私立學校]
국어사전 : [명사] [교육] 개인 또는 사법인이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
브리태니커 : ‘공공법인 이외의 법인, 학교법인 또는 사인(私人)이 설립한 학교.’
사립학교법 2조 정의 : "사립학교"라 함은 학교법인 또는 공공단체외의 법인 기타 사인이 설치하는 「유아교육법」 제2조제2호와 「초·중등교육법」 제2조 및 「고등교육법」 제2조에 규정된 학교를 말한다.
아니 이건 대안학교에 그대로 적용해도 틀린 게 없는데? 꽃피는학교의 경우 ‘청소년평화꽃네트워크’라는 사단법인이 설립했으니 틀림없는 사립학교네! 이런! 대안학교가 사립학교라고? 그래서 교육부가 저리도 달려들었구나. 자기들의 관리와 서비스를 받으라고!
사립학교 특별법 개정을 ‘다음’에 검색해보니,
‘국·공립학교와는 달리 원칙적으로 학교가 학생선발권을 가지며, 학부모측에서도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러한 특성은 사립학교가 독자적인 건학이념(建學理念)을 실현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러나 사립학교도 국민교육을 담당하는 공공교육기관으로서 일정한 의무를 가진다. 한국의 사립학교법 제1조에 "사립학교의 특수성에 비추어 그 자주성을 보장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 것은 이러한 두 측면을 반영한 것이다.’라는 설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만 보니 대안학교도 다 사립학교였군요. 사립학교를 정의하는 저 말들 중에 대안학교에 해당되지 않는 말을 찾지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이 법은 사립학교의 특수성에 비추어 그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사립학교"라 함은 학교법인 또는 공공단체외의 법인 기타 사인이 설치하는 「유아교육법」 제2조제2호와 「초·중등교육법」 제2조 및 「고등교육법」 제2조에 규정된 학교를 말한다.
수업시간표를 보며 드는 생각, ‘이러다 사립학교 될라.’
대개의 경우 대안학교들은 입학지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학교, 예비학교 같은 것으로 전형을 실시하는데, 꽃피는학교 중등과정의 경우 학기 중 일주일 동안 아예 학교를 다니도록 해서 재학생들과 똑같은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체험이나 예비가 아니라 실제의 학교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 그렇게 한다.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선택하도록 하는 아주 솔직한 방법을 쓰는 셈이지만 사실 별 효과가 없다. 집중적인 서비스(?)도 없고, 선생님들은 바쁘고, 아이들은 서로 멀뚱거리고, 극적인 순간도 없고, 잠자리는 낯설고, 밋밋한 일과들만 줄줄 이어져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무래도 재밌고 신나는 학교 모습을 보여줘야 오고 싶은 마음이 들 텐데, 와 보면 아닌 게 다 들통 날 거고…. 하, 그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이 아이들이 돌아서면서 하는 말,
“선생님들이 친절하고 아이들이 착하다 뿐이지 일반학교랑 다른 게 별로 없어요.”
에잉? 이 무슨 섭섭한 말씀? 우리 꽃피는학교는 노래도 많이 부르고, 힘껏 걷기에 아침열기라는 것도 하고, 평화학이니 생명학이니 진지한 공부에, 민화 그리기, 고전공부, 바깥공부, 생활수업 같은 좀 특별한 과목도 있고, 무엇보다 ‘공연과 전시의 밤’에 자기들 하고 싶은 것 발표하는 시간도 있고 심심찮게 영화도 보는데... 일반학교랑 다를 게 없다고?
“시간표가 똑같다는 거죠.”
시간표? 아니, 특별한 과목이나 순서들도 있다니까?
“그래도 시간표가 똑같아요. 국어(말본이라고 부르지만 어쨌거나), 수학, 영어, 과학, 사회, 역사, 음악, 미술, 체육 다 있고, 50분 수업하고 10분 쉬고, 선생님들은 가르치려고만 하고, 아이들은 또 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려고 들어요?”
아~ 그건 초등과정에서 실컷 놀아서 이젠 공부 좀 해야겠다는 아이들이 많아요. 억지로 하는 공부는 아닌데….
“에이~ 그럴 리가요. 어쨌거나 시간표가 똑같아요.”
으윽!
시간표를 본다. 정말 그렇군. 이거 떼다가 봉양중학교 2학년 1반 칠판 옆에 붙여놓아도 눈치 챌 사람 있을런가 싶다. 종 치면 시작하고(우린 징을 치지만), 선생님은 앞에서 설명하고 학생들은 앉아서 듣고, 달랑 10분 쉬고, 또 다른 수업이 시작되고…. 일주일에 열 몇 개의 과목들이 있고... 아이는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대안학교냐. 일반학교에 갖다놔도 아무런 혼란을 주지 않는 시간표에 무슨 대안적인 교육철학이 있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문화가 있을 것인가? 괜히 돈만 잔뜩 많이 받고 아이들만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고생시키는 것 아닌가?
국어를 왜 하나? 영어, 수학은? 과학, 사회는 왜 하나? 이 질문에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보자. 사실 이런 노골적인 명칭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이름 뒤에는 ‘대학은 가야지?’ 하는 의도가 숨어 있으니까. 대학 가는 게 나쁜 것일 수는 없지만 대학만을 교육의 목표로 하는 학교의 횡포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 대안학교가, 대학이 전제된 과목들을 진지한 반성도 없이 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자기 존재의 부정이나 다름이 없다.
다 아는 얘기지만 대안학교 졸업생들의 8,90퍼센트가 대학을 진학하거나 준비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뭔가? 대학을 가는 좀더 인간적인 방법이 대안학교인가? 친절하고 따뜻한 선생님들과 느슨하고 자발성을 중시하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 크게 경쟁하지 않으면서 ‘좋은 대학’ 가는 것. 이것이 대안학교의 몫인가? 우리 학교 교실 칠판 옆에 붙어 있는 시간표가 그걸 말하고 있다. ‘대안학교에서 대학가기’. 아이들을 대학에 들여보내기 위해 내가 지금 이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부분 부분을 잘 연마하여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과목화의 원래 의도였을 것이다. 온전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삶을 떠받치는 요소들에 두루 정성을 들이는 것. 적어도 내게는 이것이 공부의 의미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등과정에서는 그 ‘부분’의 이름들이 저 모양이 되었지? 초등에서는 ‘아름다운 우리말’, ‘수에 깃든 얼’, ‘자연 그리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빛칠하기’ 같은 시어로 삶의 이루는 부분들을 떨리는 손으로 가꾸어가는데, 왜 중등에 오자 이런 무미건조 차가운 이름을 낼름 받아 적었을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온전한 성장에 대한 기대가 큰데 그들과 이어지는 끈을 영어의 칼, 수학의 가위 따위로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다. 그런 짓을 가볍게 비웃어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그대로 받아쓰고 있으니 수학교육학회에 나도 모르게 얻어먹은 게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대학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 또한 별 수 없는 학벌주의자이고, 그럴 듯하게 꾸며대고는 있지만 근시안적인 ‘대안’으로 현실을 잠시 모면하는 중이란 말인데…. 아니라고 발뺌 해봐야 소용없어. 시간표가 말하고 있잖아? 분과주의를 넘어선 통전적인 공부란 건 순전히 말뿐이라고!
존 테일러 개토가 <바보 만들기>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표의 충실한 종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든 과목에 관한 사사로운 감정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이 과목에서 저 과목으로 메뚜기 뛰듯 건너다녀도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을 만큼 강인해져야만 하는가? 50분으로 토막 난 배움에도 즐거워하고 행복해야 하는가? 윤동주의 시와 이차방정식의 해와 부정사의 용법과 리아스식 해안 등등등을 하루 만에 다 만나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전제에서 짜인 시간표를 이제 갓 열네 살 된 아이에게 들이밀다니, 이건 이성을 전제로 한 시간표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시공간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종횡무진의 수박 겉핥기. 정말 지식세계를 이렇게 만나도 되는 것일까? 나는 무슨 배짱으로 이런 시간표를 짜서 교실 벽에 붙여 두고 있단 말인가.
시간표를 보며 가장 가슴이 뜨끔한 것은 문명에 대한 반성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근대 물질문명이 빚어낸 소비와 소유의 욕구충동, 개발주의에 의한 자연파괴, 다국적기업이 틀어쥐고 있는 식량과 에너지 문제, 부의 불균등한 집적과 불공정한 거래로 인한 수탈, 기후온난화와 생태계 교란으로 인한 숱한 문제들, 광우병 같은 괴질로 세계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는데도 시간표는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국어, 영어, 수학…. 정말 이래도 된단 말인가. 석유와 항생제와 자동차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도 길러주지 않고서 닥쳐올 위기들을 어떻게 맞이하라고 국어, 영어, 수학만 들고 파게 한단 말인가.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대안은 도대체 무엇의 대안인가? 무엇을 대체하고 싶어서 대안학교를 하려 했던 거지? 나는 왜 굳이 공립학교를 뛰쳐나와, 현실 모르는 낭만주의자니 철학을 내세워 제맘대로 하려는 독재자니 그딴 소리를 들어가며 대안학교를 세우려 했을까? 교장 교감의 감시가 싫어서? 교육청의 지도감독이 싫어서? 결국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대안학교를 했다는 뜻인가? 그건 아닌데….
일관성 없는 교육, 철학이 없는 교육,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교육, 과목끼리 서로 통하지 않고 분리 단절된 교육, 사회현실과 관련이 없는 교육, 삶과 동떨어진 교육, 공적인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교육이 싫어서 새로운 교육을 찾아 나선 것인데 지금에 와서 시간표를 보니 학교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일관성과 철학, 삶과 통전된 앎을 그토록 갈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시간표는 내게 말한다. 그게 뭔데?
이렇게 개인적인 자각과 갈등극복조차도 부실하니 범지구 규모의 임박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며 대안을 모색한단 말인가?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던 것일까? 내가 시도하려는 대안의 정체가 수상하다. 부의 집중을 노리고 시작된 세계화의 논리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영어시간을 늘려대는 정신머리로는 이제 막 불어닥치기 시작한 경제공황의 광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만 이야기하고 있는 수업, 자연의 변화에 아무 상관이 없는 교실, 지역사회와 무관한 학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고 안에만 들어앉아 있는 교육…. 시간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도 보인다. 이런 모습을 대안학교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사립학교일 뿐이다. 사립학교법 적용을 받기 싫어서 그 울타리에 안 들어가려고 대안교육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간섭은 하지 말고 돈이나 달라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집단인 게다.
학교를 막 세우던 처음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싱싱한 상상력으로 학교에 생기가 넘쳤는데 안정 안정 안정을 찾다가 이제는 밋밋한 시간표를 마주하게 되었다. 학교가 전반적으로 안정된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를 휘어잡던 뜨겁던 사랑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도가 높아진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이 대안교육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말인가? 동지는 간데없고 고객만 찾아온다던 양희창 교장의 말이 이렇게 뼈저리구나. 학부모가 고객이 되는 순간 학교는 고객의 요구에 끌려다니는 사립학교가 되고 만다. 교육청이 학부모로 대체되는 셈이겠지.
그런 학교가 되지 말자. 나는 그런 학교 하려고 이걸 시작한 게 아니야. 공공의 가치를 교육과정화하고 물질문명의 폐단을 극복할 구체적인 대안을 실천하는 학교를 하자고. 그런 뜨거운 마음을 사모하는 학부모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 아니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날 거야. 안 생겨나도 하는 수 없지만 동지를 찾는 태도로 학교를 운영하지 않으면 대안학교는 간판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 못 먹어도 고다. 대안학교를 하자고. 사립학교 말고.
대안사회로 나아가야 할 대안교육
대안교육 현장들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근래 통계로는 대안교육연대 회원단체가 51개, 비회원 단체로 파악된 곳이 65개 해서 100여 개가 됩니다. 기독교 대안학교 계통은 안식교처럼 드러나지 않은 곳까지 치면 100곳은 더 되는 듯하고, 거기에 가정학교 형태의 그룹홈 현장이나 지역 공부방도 대안교육의 한 형태라 볼 수 있으므로 그 수는 더욱 늘어납니다. 게다가 웬만한 학원들도 사관학교식 기숙형 대안학교를 구상하고 있다고 하니, 공교육의 안과 곁에서 이뤄지는 여러 대안적인 시도들도 모두 포함하면 그 수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추세면 머지않아 동네마다 대안교육 현장이 생겨날 것 같군요. 과히 대안교육, 대안학교 시대라 할 만합니다.
십여 년 전 열 곳 남짓 되던 대안학교가 그새 이렇게도 널리 퍼지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공교육이 죽어가는 마당에 너도나도 나서서 대안을 이렇게도 많이 모색하고 시도하고 있으니 분명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나라마저 앞장서 법을 뜯어고치면서까지 이 길을 넓혀주고 있어요. 국가에 도전한다며 불온하게 여기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만큼 우리 사회에 상상력이 불어넣어지고 있고, 또 그만큼 아이들이 숨통을 틀 수 있을 테니 앞날은 마냥 밝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품어야 하건만, 제게는 무슨 병이 있는지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뿌리쳐치지 않아 괴롭습니다. 정말 앞날이 밝을까? 그런 희망을 품어도 될까? 과연 대안학교들은 건강한 상상력으로 아이들의 숨통을 터주고 있는 것일까? 공공연히 대학진학 성적을 자랑하고 있고, 점심밥에는 공장식 사육으로 항생제에 절은 육고기가 나오고, 석유 에너지를 펑펑 쓰고, 아이들은 엠피쓰리에 매달려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놀음에 빠져 있고, 국제엘리트를 꿈꾸면서 미국 교과서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앞으로 전 지구적인 재난을 맞이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상상력으로 그 다음을 준비하게 한단 말인가요? 그저 공교육에서 안 하거나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걸 하기 때문에 대안일까요? 그래서 갖게 되는 희망이라면 가짜가 아닐까요?
이런 처지에 나라에서 대안학교 관련 법을 대폭 손 봐서 아무나 원하면 인가해준다는 지금의 상황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기반을 부정하는 대안학교법을 파격적인 방법을 써가며 만들었을까요? ‘거기에도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에 대안교육에 몸담은 아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순수한 교육부 관리도 분명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공교육체제를 무너뜨리고 교육을 시장에 내맡기려는 국제자본 하수인들의 꿍꿍이에 순진하게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이건 음모랄 것도 없습니다. 대안교육을 한다면서 늘 찜찜한 것이 우리가 혹시라도 교육을 자유경쟁시장으로 내모는 선봉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율형 사립고니 자립형 사립고, 개방형 자율고니 하며 이젠 뭐가 뭔지도 헷갈릴 만큼 학교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자율이란 이름으로 공교육 영역에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대안교육이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같이 소심한 이들은 이런 걱정 저런 우려로 개정된 대안학교 관련법의 손을 잡을까 말까 별 생각을 다 하는데, 이런 고민은 아랑곳없이 그동안 한 발 비켜 서 있던 구경꾼들은 좋아라 하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짝입니다. 그렇다고 왕서방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죠. 참으로 우려스러운 집단들은 공교육 체제 밖의 헐거워진 규제를 틈타 사교육보다 더욱 강력하게 지금의 병든 문명과 돈의 체제를 강화시킬 자들입니다. 그들은 대학입시를 주류 진입의 기회 말고는 달리 해석하지 않죠. 그들의 상상력 범위는 매우 의심스러워 대학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할 뿐더러 그 뒤의 코스도 뻔합니다. 대학 입학이 나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수많은 교육의 폐해들이 바로 대학입시로 인해 생긴 것인데 깊은 숙고도 없이 너무들 손쉬운 선택을 합니다. 강남의 잘나가는 엄마들이 자녀교육을 보내려는 순위로 1위는 유학이고 2위는 특목고, 3위는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한 대안학교를 꼽는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요?
하지만 저도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닌 것이 제가 몸담은 학교도 머잖아 고등과정 졸업생들을 세상에 내보내게 되었는데 어찌될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애써 공부하고도 삶의 의미와 목적도 모른 채 일단 대학엔 가고 봐야 한다는 한심스러운 계획을 듣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선택이니 어떤 결정이든 존중해야겠지만 우리 노력의 결과가 생각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음이 많이 헛헛할 듯합니다.
왕서방들의 사회는 멀쩡한 곰들도 하나둘 왕서방으로 변신시킵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노력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끝까지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자 하는가 하고. 칭송이 아니라 비난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고, 장대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인디언처럼 묵묵히 나아가게 하는 내면의 참된 빛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대체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인가, 묻게 됩니다. 이 물음들에 집중하게 되면 잡다한 비본질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갑니다.
그 대답은 학교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마땅한 지향점이라고 여깁니다. 인격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 욕망을 넘어선 자기 삶의 과제 발견, 자본에 덜 구속된 지역경제 기반의 삶, 생태적이고 소박한 생활,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의 문화, 평생에 걸친 진리추구의 공부 자세,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분리 단절되지 않은 통전적인 세계 인식, 영성에 바탕을 둔 가치체계, 발달단계에 기초한 배움과 문화…. 이중 일부는 다시 생각해볼 것도 있고,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아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마음만은 간절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학교마다 개인마다 여기에서 몇 개를 빼고 대신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 창조적인 삶의 진로 개척, 민주성의 구현’ 같은 개체주의적 성향을 더하기도 하고, ‘왜곡된 자기 인식의 극복, 기초적인 관계의 회복, 사회생활의 기본능력 함양’ 같은 치유중심의 성향을 더하기도 하겠죠. 이는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인간과 자연의 고유한 가치들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호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선택했겠지만 이제는 개인을 넘어선 큰 사회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 특정 분야가 아니라 사회의 전 방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국가에서 공동체로 나아가는 이 흐름은 근대화의 폐해와 거대자본의 횡포에 맞서서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대안운동의 진정한 동료들입니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대안사회라 한다면, 이 사회에 어울리는 교육이 바로 대안교육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가지 끝에 매달려 전체를 못 본 채 그저 대안교육 대안학교만 끌어안고 살아남으려 아둥바둥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눈으로 지금의 대안교육의 현장들, 대안학교들을 봅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제가 몸담은 학교를 보면, 그 동안 노력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미흡합니다.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가진 것, 가지려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과연 대안적인가 되묻게 됩니다. 답하기가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귀신도 구별할 수 없을 만치 똑같습니다. 비싼 돈 받아가며 일반학교와 아무 차이도 없는 것을 대안교육이랍시고 하고 있다면 결국 거짓말을 한 셈입니다.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교육계획서는 멋진 문구와 정교한 내용들로 찬란하지만 수업시간표는 아예 딴청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아찔했습니다.
대안적인 사회와 연결된 교육이 대안적인 교육이라고 한다면 그 교육을 하는 학교에서 대안사회운동의 내용이 다루어지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생색내기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을 다해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조금씩 영성 수행, 생명가치 존중, 식량 자립, 지역기반 경제, 생활자치, 대안의료, 대체에너지, 자연 중심의 절기생활, 다문화 존중… 이런 것들에 성실을 다 해보기를 제안합니다. 이런 것을 주 내용으로 하여 말과 글을 다루고, 수와 셈을 다루고, 관계와 법칙을 다루고, 노래와 그림이 펼쳐지고, 하루가 시작하고 저문다면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회는 대안학교의 정체성을 묻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냐? 뭣 하자는 사람들이냐? 하고. 뭘 대안이라며 그렇게 야단이냐? 하고. 이 엄정한 질문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는 자기변명에 바쁩니다. 우리 사회는 반성 없는 변명을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더욱이 대안사회의 길로 온 삶을 바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이들은 단번에 알아보겠죠.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교육. 이것이 대안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을 하는 곳이 대안학교이고요. 그럼, 그런 교육을 하지 않는 학교는 대안학교가 아니란 말인가 하고 묻지 마시길.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하며 무례한 말을 불쑥 할까봐 걱정됩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대안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것입니다.
[토론문1]
나는 어떤가?
- ‘대안학교의 기준 : 대안학교와 일반사립학교의 차이’ 에 함께 이야기 나누며
배정황_고양자유학교 교사
김희동 선생님의 삶을 푸른숲 학교에 계시던 초기부터 관심 있게 보아온 지 어느 새 7년이 되어 간다. 친근한 인연은 아니었지만 민들레를 통한 글이나 배움과 연대를 나누는 자리에서 가끔씩 뵈면서 안면은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초심을 등불처럼 밝히고 계셔서 기쁘게 존경하는 분이다. 내게 영향을 준 00인을 뽑으라면 아마 꼭 들어가실 듯하다.
김희동 선생님의 <수업시간표를 보며 드는 생각: 이러다가 사립학교 될라> 라는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매 학기 교육과정을 짜고 그걸 진행하면서 들었던 고민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에 다시 볼 때처럼 논의의 거리들을 발견하지는 못했었다.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쌓여진 경험과 의문, 공부들이 고민을 깊어지게 하기도 했고 작년 제도화 및 초중등교육법 논의와 이번의 제도화 논의 속에서 더욱 이 주제와 겹치는 고민들이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김희동 선생님의 고민의 시작 <시간표>부터 들여다 보자. 생각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고양시의 초등대안학교 6년차 교사인 올 해 내 시간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과 함께, 김희동 선생님의 고민과 지향 속에서 이야기 나눠 보고자 한다.
2010년 1학년 1학기 교육과정 계획안
<한 주 시간표>
월
화
수
목
금
열기
시작이야
전체 노래배우기
리듬활동
리듬활동
꽃밭 가꾸기
1
주말 이야기
말과 글
/수와 셈
도리와 기타
(도리)
흐름 꼴
흐름 꼴
2
덩실덩실
말과 글
/수와 셈
전래놀이
(티티)
내 힘으로 알거야
3
꽃밭 가꾸기
덩실덩실
맘대로
4
동네방네
/식구총회
동아리 마실
고운 붓
맛있다!
(보리)
빨래터
닫기
옛이야기
그림책
그림책
노래
노래
학년 교육 목표
1. 자유
- 감각과 사고의 확장 (말과 글, 수와 셈, 춤, 습식수채화, 꼴 그리기, 과학놀이, 요리)
- 자아와 관계의 확대 (주말 이야기, 꽃밭 가꾸기, 동네방네, 동아리 마실, 빨래터, 춤)
- 자립과 정직 (점심 식사 노동, 청소)
- 건강한 몸 (춤, 꽃밭 가꾸기, 식사 습관, 먹거리 안전)
2. 규율
- 배려를 위한 절제, 민주성 훈련 (언어 습관, 공동 규칙, 갈등 조정, 식구 총회)
3. 심성
- 가슴으로 깨닫는 배움, 감정의 수용과 승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수업과 두레 생활 전반)
수업 소개
[말과 글] 주 4시간, 주기 집중 수업 (3월, 5월, 7월)
1) 읽기, 쓰기 : 한글 만나기 (자음 모음의 창제 원리에 따른 활동과 익히기)
2) 말하기, 듣기 : 주말 이야기, 옛이야기, 식구총회, 두레 생활
3) 형태그리기 : 자아와 관계에 대한 이해와 힘을 기르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 외에
말글에서는 읽기, 쓰기의 힘을 기르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다.
4) 주요 참고 자료
- MBC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 (2003. 10. 8), EBS 기획다큐 ‘문자’
- 발도르프 교육 방법론적 고찰 / 밝은 누리
- 통전교육연구소 우리말에 깃든 얼
- 초등학교 1학년 우리말 우리글 / 전국국어교사모임, 나라말아이들
[수와 셈] 주 4시간, 주기 집중 수업 (4월, 6월, 7월)
1) 수와 연산
- 수 만나기 (1~9, 0, 10)
: 수의 느낌과 의미(양, 순서, 관계), 내 주변의 수, 도형과의 연계, 숫자 쓰기
- 수세기 (1~100)
: 열 손가락 수세기, 10단위 수세기, 묶어 세기, 띄어 세기, 반구체물(블록, 바둑알), 입말
- 가르기 모으기 : 반구체물 연습, 덧셈과 뺄셈의 기초, 10의 보수 익히기
- 크기 비교
2) 도형
- 자연물, 인공물의 모양 관찰 : 공통점과 차이점 발견
- 원, 사각형, 삼각형의 느낌과 특성, 각 도형의 관계
: 기본 평면 도형 / 조합, 분할, 반복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도형
- 만들기 활동 : 칠교, 종이 접기, 무늬 만들기
- 입체 도형과의 연계 : 과학 놀이와의 통합
(공, 정육면체, 정사면체, 원기둥, 사각 기둥, 삼각 기둥을 이용한 실험)
3) 주요 참고 도서
- 자연 예술 과학의 수학적 원형 / 경문서
- 초등 수학 학습지도의 이해 / 양서원
- 살아있는 1에서 10 / 슈타이너 교육예술 연구소
[시작이야] 월요일 하루 열기
- 교실 먼지 닦기 : 한 주를 시작하는 마음의 태도를 위한 활동
[주말 이야기] 월요일 1교시
- 주말 지낸 이야기 친구들에게 들려주기, 듣기
- 타인에 대한 관심, 가족에 대한 개념
- 말하기, 듣기, 지난 일의 기억과 재구성, 따로 겪은 일의 공유
- 다양한 표현과 매체 선택 : 이야기와 듣기, 질의응답, 손 인형, 녹음
[꽃밭 가꾸기] 주 1시간 + 아침 열기
- 흙과 생물 체감, 농사의 기초
[동네방네] 주 1시간, 월 2~3회
- 학교 동네에 대한 관심 기르기, 산책
[덩실덩실] 주 2시간
- 어린이 율동, 우리춤 체조 : 균형과 리듬감, 협동심 익히기
[동아리 마실] 주 1시간
- 위 학년의 동아리 활동 구경, 따라 하기
- 다른 학년과의 통합 경험
[고운 붓] 주 1시간
- 습식 수채화 / 물감 작업의 느낌, 색에 대한 느낌, 자유로운 표현
- 참고 도서 : 색채의 본질 / 물병자리
[흐름 꼴] 주 2시간
- 발도르프교육의 형태그리기 (흐름 꼴 그리기)
- 참고 도서 : 포르멘 / 해오름
[내 힘으로 알거야] 주 2시간
- 과학 놀이 (물리 영역) : 중력, 탄력, 진자 운동, 물의 이동을 느끼는 실험 활동
- 참고 도서 : 물리적 지식 활동 -피아제이론이 암시하는 과학교육- / 창지사
[빨래터] 주 1시간
- 손과 발로 하는 빨래 (방석 빨기, 물, 비누, 비틀어 짜기, 널기)
- 사지의 힘, 사물과의 친근감, 흐름 꼴의 일상 속 체험
- 몸과 마음의 남은 힘 다 쓰기 : 한 주 정리
[노래] 주 1시간 + 아침 열기, 닫기
- 전체 노래 배우기 : 전 학년이 함께 화요일 아침 열기
- 도리와 기타 : 1학년끼리 노래 배우기
- 하루 닫기 : 배운 노래 부르기
[맛있다!] 주 1시간 / 보리 수업
- 스스로 할 수 있고, 한 두 가지 재료 자체의 맛을 잘 느낄 수 있는 간단한 요리
[전래놀이] 주 1시간 / 티티 수업
- 짧은 노래와 풍물 소리의 리듬, 몸 놀이
[맘대로] 주 1시간 / 자유 시간
두레 운영
1. 관계 맺기
- 교사와 아이들
1학기 두레 운영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두는 점이다. 교사와 아이들의 내면적인 연결이 긴밀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수업 시간과 내용에서 늘 여유를 둔다. 1학기 수업 계획은 세밀하게 두지 않고 학기의 내용 안에서 관계 맺기에 중점을 두며 변경, 조정해 간다. 교사의 일상적인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는 매우 큰 모방의 대상임을 잊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충실한 관찰과 객관적 시선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기록을 일상화 한다.
- 교사와 학부모
개인 메일, 3월 중순의 학년 모임, 4월 초의 방과후 생활 설문지, 4월 개별 면담, 학년방의 주제토론, 질의응답을 통해 아이들의 학교와 가정 생활, 교육관을 공유한다. 나들이 도우미로 학부모들이 참가하여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느끼고 다른 아이들을 볼 수 있고 또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사전 사후 교사 지도)
- 또래 관계
놀이와 규율, 협동 수업을 통해 서로에 대한 애정과 배려를 익힐 수 있도록 한다.
4명씩 4모둠으로 수업과 두레 생활을 함으로써 작은 관계 안에서의 조절, 협동과 자기 역할을 찾아갈 수 있게 한다. 모둠 구성은 한두 달 간격.
- 장애 통합 교육
장애 아동과의 적극적이고 자연스러운 관계 맺기가 될 수 있도록 학년 전체 학부모들의 이해와 소통, 장애아동 학부모와의 통합교육모임을 한다.
2. 일상생활
점심 식탁 준비 및 설거지, 뒷정리의 식사 노동과 교실 청소, 자기 물건 관리에서 자기 몫은 반드시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한다. 교사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살피고 철저히 연습할 수 있게 한다.
또 하나 함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얼마 전 대안교육 연대가 추동한 대안교육의 제도화 논의 과정 속에서 내 안에 고민의 거리로 남은 주제들 중 김희동 선생님의 글과 연계된 것들이다.
- 지금까지의 대안교육은 이기적인가?
- 사회의 공공적 가치는 ‘교육현장’ 이라는 특성과 과제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 ‘학교’ 라는 틀은 교육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갖는가? (학교가 무엇인가?)
- 대안교육의 상상력은 아이들의 학습의 권리를 지켜주었는가? 지켜줄 수 있는가? 아이들의 학습(배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른의 학습(배움)과 어떻게 다른가?
[토론문2]
대안학교운동이 아닌
대안사회운동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 대안사회 지향에 걸 맞는 지역사회에서 대안학교의 역할이 필요하다 -
전재철_금산간디학교 학부모
1. 우리가 처음 추구했었던 대안학교는?
김희동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대안 학교 초기의 철학과 정신은 모두가 공감하는 공통의 가치였습니다.
현재 공교육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문제들-대학입시위주의 경쟁적이고 분절된 과목교육, 교육이 아닌 관리되는 학생들, 진정 교육주체로써 교사와 학생관계의 부재 등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생태, 지역, 장애통합, 민주, 공동체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교육, 학생과 교사의 전면적인 관계와 또 다른 교육주체로서의 학부모, 등등.
저희가 처음 대안초등하교를 준비할 때 주변의 시선은 무척 따가웠습니다.
신자유주의 교육의 변형이 아니야? 아이들이 실험대상이냐? 심지어 대안교육 진영 내에서 조차도 학교공간을 보면서 너무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우리를 낙천적이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던 큰 목소리는 다음과 같은 것 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이와 교사는 황량한 벌판에서도 씩씩하게 성장하고 커 나갈 것이다! 아이와 교사의 관계만 이루어지면 모든 상황과 공간은 학교이다.”
2. 지금 우리의 모습은?
2001년 처음 2개의초등대안학교(산어린이학교, 볍씨학교), 1개의 중등대안학교(실상사작은학교)가 시작된 이후로-물론 그전에 간디학교, 푸른꿈학교,등이 있었지만 설립주체가 교사만이 아닌 다양한 모습의 설립주체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보면.
현재 대안교육연대 회원현장이 51개학교, 2000가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홈스쿨러와 기독교 대안학교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고하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그렇다면 양적으로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인데, 질적인 면은 어떨까요?
김희동, 양희창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동지는 간데없고, 고객만 찿아 오고 있습니다.
처음의 생생하고 진지하고 진취적인 모습과는 달리 안정적인 틀을 고민하다가 보니, 우리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일반 공교육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힘겹게 열어놓은 교육공간을 학원재벌들이 우리와 닮은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놀이판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각 학교 현장은 어떨까요?
이번에 대안교육진영내에서 시도했던 교육부 지원금 반납운동의 결과는 우리들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교육부에 “당신들이 의도하는 방식으로 우리들을 길들이려 하지 말라! 당신들이 어떠한 교묘한 탄압을 하더라도 우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 갈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우리의 의지는 각 현장 형편(?)에 따라 뿔뿔히 흩어져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습니다.
학교 현장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의견이 많이 나뉘는 모습은 현재 대안교육진영내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현실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김희동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교육프로그램은 기존의 공교육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없습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학부모, 학생들의 불안감을 (대안학교에 다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사람구실(?)을 하려면 최소한 대학은 졸업해야...)해소 해주려는 타협의 산물입니다.
초기의 학부모들의 씩씩하고, 건설적이고 의기에 찿던 모습은 간데없고, 그야말로 근시안적 사고로 자기 아이의 미래만 고민하는 소심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의 세대 구성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안학교 10년의 역사는 끊임없이 안정된 학교 틀을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교사를 모집하고 안정된 학교공간을 마련하기위해서는 보다 많은 재정이 필요하고 보다 많은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서는(학교에서 애초에 목표로 했던 인원에 비해), 선발기준을 완화시켜야 하고, 이렇게 해서 만나는 학부모들은 학교에 많은 것을 요구만 하는 고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의 프로그램은 물론 학교의 철학과 지향하는 가치조차도 도전을 받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속한 학교 현장만 바라보는 이기적인 모습은 대사회적인 연대에 소극적이고, 각 현장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현장은 다양성과 깊이가 거의 없는 고만고만한 프로그램으로 현장을 유지하고 지켜내기에도 버거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3. 처음의 마음으로!
그리고 지금까지의 성과를 딛고 멀리 바라보기
대안학교 10년은 대단한 양적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많은 학교 현장이 고군분투하며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영역들을 지켜내고 대안교육에 대한 인식과 역할을 사회 저변에 많이 확장하는 성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의 10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할 것 인가? 하는 질문 속에는 대안교육진영의 존폐를 걸어야할 만큼 중대하고 힘겨운 과제를 품고 있습니다.
대안 진영 내에 목표는 우리학교와 우리 아이에서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사회를 건설하는 주체로써 학교와 교사와 아이들, 부모들,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4.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할 것인가?
- 학교현장간의 전면적인 교류와 공동의 교육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진행 되어야합니다.
교사 교환 연수와 공동 수업는 공동의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진행의 전단계로 자리를 잡아야하고, 각 학교 영역을 넘어서는 다양한 공동프로젝트가 다방면으로 진행되면서 각 학교의 역할을 줄여나가면서 가능하면 각자 고유의 영역과 장점을 심화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각 현장간의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프로그램들은 공동수업으로 교사들의 연구역량을 강화시켜 내야 할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연구소가 설립이 되어야합니다,
- 지역안의 학교를 건설해야합니다.
더 이상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고립되지 말고 지역에서의 학교 모습을 정립해야합니다.
우리는 학교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을 해왔습니다.
학교가 있고, 학교 주변으로 학부모와 학교와 관계된 여러 인연들이 모여있는 공동체가 있고, 지역 사회 내에서 학교와 학부모들이 일정한 지역 봉사활동(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저소득층 아이들, 독거노인들)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면서 지역 내에서의 공공성 확보를 통해 대안학교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고, 지역자치단체와 지역의 일반 공교육과도 일정한 교육연대프로그램을 공유해 나가면서 자치단체에 장기적이고, 저렴한 시설들을 활용할 수 있는 명분과 권한들을 확보 해나갈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학부모들이 다양한 모양(예를 들면 성미산학교의 지역사업모델과 같은)의 자치 공동체를 시도하는 노력들과 자치단체에 일정한 정치적 목소리를 낼수 있을 것입니다.
- 대안 사회에 대한 상을 만들어 내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학교현장간의 벽을 허무는 많은 노력으로 각 현장에 소요되는 재정을 최소화 시켜야하며
지역사회의 공공재(시, 구청시설, 동사무소 문화센타,등)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만들어 내야합니다-우리 대한 교육진영들은 많은 인적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센터를 위탁 운영하면서 지역주민들과 만나고 우리의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여러 노력들 속에서 지역 대안 교육센타를 만들어서 우리 대안교육진영과 일반 공교육이 만날 수 있는 접점들을 확대해 나가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사회의 상을 지역사회내에 더 넓고 깊게 각인시키고 우리들 스스로도 그 과정에서 공부하면서 우리가 처음 대안학교를 만들면서 꿈꾸어 왔던 여러 가치들을 이젠 실현시켜 나가야합니다.
학교건물이나 시설이 우선이 아닌 교사와 아이의 관계만 형성되면 학교가 만들어 진다는 간단명료한 사실은 우리의 역량을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시설을 확충하고 재정을 만드는 부차적인 곳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진취적이고 폭넓은 연대로 대안 사회에 대한 상을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량을 이 부분으로 집중시켜서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