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이야기
기온이 섭씨 십도가 되면 해마다 침대위에 전기장판을 깐다.
저온에 맞춰 놓으면 아래 묵 같이 따뜻해서 좋다. 오늘은 초겨울 날씨 같다.
게다가 잔뜩 흐려있다. 침대 밑에 보관하고 있던 전가장판을 꺼낸다.
옆에서 남편이 참견을 한다. “여보, 올해는 전기장판 없이 지내봅시다. 저 홍선생 댁....”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다.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지인 댁에 화재가 났다.
이불 속에 늘 찜질기를 넣고 자는데 이게 폭발하면서 침대에 불이 붙었다.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 않고 진화 되었는데 “겨울 철 온 열기 위험합니다.”
라는 전화 속의 그분의 말을 남편이 기억한 것이다.
전기장판이 없는 대신 솜이불을 꺼내 덥고 잠을 청한다. 환자인 노인에게는 써늘 하려나?
염려하는데 바닥에 마치 군불을 지피고 있는 듯 서서히 기분 좋은 온기가 올라온다.
이게 뭐지?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자리도 따뜻해 져요?”
“응!, 당신이 혹시 뭐 넣었어?”
아닌데? 무슨 일일까? 25센티 두께의 라텍스 바닥이
체온을 뺴앗지 않고 몸을 따뜻하게 보존해 주는 모양이다.
그 동안은 전기장판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와, 좋다. 이 침대 참 좋다. 나는 이 침대가 좋아. 너무 좋아..”
새삼스럽게 남편이 이 말을 또 한다.
이 침대는 병원에서 퇴원하기로 작정한 날 아들이 마련해 준 것이다.
메트레스 크기가 세로 230센티, 가로 210센티. 두께가 25센티 이다.
나무로 된 프레임 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의 지인이 해외 카다로그만 보고 주문했는데 자기 집 방에는 들여 놓을 수 없어 싼 값에
아들이 인수하여 우리에게 준 것이다. 평수로 따지면 1.461평, 한 평 반이나 되는 크기의 침대다.
나는 22평 단독주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그 집에서 아들 넷을 낳고 기르며 23년을 살았다.
아이가 셋이 되는 결혼 10년차부터 십 여 년은 이 22평집에서의 탈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푼이 생겨도 쓰지 않았고, 두 푼이 되면 저축을 하였다.
집을 팔지 않고도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집 . 종로구 충신동 43번지의 대지 72평, 건평 22평의 벽돌 이층집.
시어머님의 지참금으로 사신, 72평 땅에 초가(草家) 일곱 채가 있었다는 집.
거기서 나온 월세로 칠남매를 교육시키셨다는 집.
장남이 혼기에 차자 초가집을 헐고 지은 붉은 벽돌의 22평 양옥집.
건축이 전공인 아들이 직접 설계한 집.
걸어서 15분이면 시댁에 갈 수 있는, 부모님 가까이에 있는 집.
여섯 식구가 살기에 비좁다 하여도 부모님도 남편도 이구동성으로 “이사는 불가” 하는 마당에
며느리가 감히 팔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큰애가 대학교 4학년, 둘째가 1학년 때
나는 통 큰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 간에 저축한 돈과 충신동 집값만큼의 융자를 얻고
강남으로 떠나온 것이다. 가문의 유서(由緖?)보다 아이들의 편리가 더 중요한,
자식을 기르는 어미였기 때문이다.
대문 열쇠를 남편에게 주며 내가 말했다.
“애들 데리고 가오니 부모님의 섭섭함이 가실 즈음에 남쪽으로 찾아 오십 시오”
남편은 언제 이사를 반대했던가 싶게 그 날로 따라 왔고 시어머님은
“네가 큰 굿할 여편네로다!! 충신동 집 팔아서 융자를 갚아 라” 체념하듯 말씀하셨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대지는 두 배. 건평은 4배의 크기였고 방은 다섯 개가 있었다.
큰 아이가 곧 유학을 떠나서 세 아이들이 제 방을 갖고도 안방 말고 방하나가 남았다.
나는 오랜 숙원인 내방을 갖게 되었다. 이후 내가 만끽한 것은
자유와 해방이었고 남편이 감내해야 할 것은 외로움이었다.
원래 우리는 같은 방을 쓰기에 무리한 부부이다. 나는 야행성이라 새벽 두 세 시에 잠이 들고
남편은 불이 켜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 한 귀퉁이에서 책을 읽곤 했었다.
1984년에 이사를 왔으니 남편이 병을 얻은 2015년 까지 삼십년을 남편은 “쓸쓸 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생활은 안방에서 같이 하고 있으니 각방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아내와 한 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이었다.
의사도 아이들도 반대하는 퇴원을 앞두고, 솔직히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내 마음 편하자고 내가 환자를 데리고 나오는 게 옳은 건가?
환자를 낫게 할 책임과 의무를 전적으로 내가 저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환자 곁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둘이 누워도 넉넉한 크기의 침대를 만나서
남편은 그토록 원했던 “아내와 같은 침대”를 원도 한도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나는 이 침대가 좋아, 너무 좋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침대”라는 물건이 아니라
아내와의 “동상(同床)”을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한 평 반이 행복의 원천이다.
요즈음은 늘 잠을 잔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잔다.
자는 얼굴이 아기 같다. 8시간 이상의 잠은 뇌세포를 죽이는 일이라지만
나는 그대로 곤히 자도록 방해하지 않는다. 언제 이 남자가 이렇게 편하게 잠든 적 있었던가?
늘 쫓기듯 살았고, 유난한 열등감, 가장(家長)이 되어서는 책임감에 눌려서
언제나 힘에 겹 던 날들. 마음 놓고 편히 자보지 못했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자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깊게, 근심 없이 잠을 자는 노인.
이 가엾은 노인의 편안한 잠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다독여 준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내 안에 가득가득 기쁨을 채운다.
(2020년)
첫댓글 출판사에 추가 글로 보낸 여섯편 중의 하나.
급히 쓴 것이라 좀 그렇네? 소재도....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요?
어찌 이런 생각이? 역시!
저는 절대로 줄수 없는 선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년이 되어서 비로소 찾아온 평화,
그리고 편안한 잠, 그것을 방해 하지 않는 아내,
아름다운 노부부의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애잔하고 훈훈한 노부부의 삶에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