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21-35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플라스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수학자로서 나폴레옹 정부에서 잠시나마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주어진 한 순간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위치와 운동 상태를 아는 악마가 있다면 그 악마에게는 어떤 것도 불확실한 것은 없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 상태를 안다면, 미래는 결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고전역학이 말하는 결정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결정론적 사고를 기초로 욥에게 자꾸만 너의 죄로 인해 이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인정하라고 강권합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이시기 때문에 욥도 당연히 그 결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죄를 졌기에 고통을 당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굴하지 않고 반박하며 말합니다. 내가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너희는 어떠하냐.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모두 의롭지 않은데, 너희는 의로워서 하나님 앞에 떳떳한 것인가 반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던 대거리를 마저 이어갑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가(21-24)
(21-24)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21절은 특별히 해석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새번역은 21절과 22절을 이렇게 옮깁니다.
(21-22)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 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께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굉장히 불경한 발언입니다. 이제 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욥은 거침없이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며 하나님께 비판의 강도를 높여 갑니다. 이 지경이 되어서는 잘못이 있다, 없다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의인과 악인을 다 절멸하실 것 아닌가 빈정거립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고 무죄한 자가 절망해도 하나님은 비웃으시리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이 당한 죽음과 더불어 자신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가족의 절멸을 보시면서도 방관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조롱하는 가학적인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악인의 손에 넘기고, 재판관의 눈을 가리는 장본인으로서 이 세상에 악을 조장하는 본체라고 비난합니다.
이렇게 보면 욥은 어느 전투적 무신론자보다도 더한 악담을 하나님께 퍼붓고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욥이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고 쳐도, 어떻게 이런 내용이 성경에 들어올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성경에 들어온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악에 받친 진물투성이 사내의 악다구니를 굳이 기록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런 불경한 내용을 자신의 말씀으로 허용하셨습니까? 그건 바로 하나님께서 그만큼 사람이 절박할 때 어떠한 모습을 취할 수 있는지를 잘 아신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깊이 알고 보듬으시는 분이신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욥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악인이 득세하는가?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다른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공정한 재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믿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아픔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히브리서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런데 이러한 욥의 심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인생의 여건이 또 있습니다.
비천한 욥의 삶(25-31)
(25-26)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인간의 삶이 너무나 짧다고 말합니다. 빌닷은 앞서 옛 조상과 전통의 무게 앞에서 욥에게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하자면 욥이 누리는 세월은 신속하게 지나가는 잠깐의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땅과 물과 하늘에서 빠른 것들을 대며,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점층적으로 표현합니다. 경주자나 빠른 배나 독수리처럼 지상의 것들은 속절없이, 심지어 폭력적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신속함으로 인해 욥은 복을 볼 수조차 없습니다. 욥이 보니 하나님과 인간의 시간을 비교할 때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하거나 선한 것을 누릴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또 한탄합니다.
(27-28)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유한한 시간 가운데 즐거움을 내 보려고 노력 해보자. 불평하지 말고 즐거운 척이라도 해보자! 하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는 즐거운 양 그렇게 가장해 보겠다는 결의도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자신을 죄 없다고 여겨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상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절규입니다. 하지만 이 점에서 욥은 제대로 된 인간 인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죄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악다구니를 해대도,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하여 기쁜 마음을 내고자 해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다고 여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 따른 고통도 당연한 일입니다.
(29-31)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보기에 최상의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어차피 정죄함을 당하고 멸망할 것이라면 어떤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최선의 방식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을 진창에 밀어 넣어 더럽게 만드시기 때문에 자신은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인간 현실에 대한 처절한 이해입니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이러한 당혹감과 절망감밖에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궁창에 처넣고 더럽고 추악한 존재임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절대적인 타자이요, 공포의 대상이요, 어떤 회유도 통하지 않는 순수한 분노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욥은 아직 손을 놓거나 희망을 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22장 13절, 14절은 임박한 심판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그립니다.
(이사야 22:13-14)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심판을 앞두고 이스라엘에게 경고의 말씀을 내리자, 그들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내일 죽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 먹고 마시겠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죄악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욥은 불경한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아뢰는 일에 머무른다는 점이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짖음 가운데 무언가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중재자에 대한 간절한 소망(32-35)
(32-35)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욥은 하나님을 재판정에 부르고 싶습니다. 한 번 제대로 논변을 펼치고 싶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가? 내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이런 고통을 안기시는 하나님이 맞으신가 대면하여 논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질적 차이로 인해 그것조차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답변도 불가하고, 재판도 불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소하시는 검사이자, 우리를 판결하는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승소 가능성은 없습니다. 나를 죽일 기세로 고소하는 전능하신 분이 또 심판자가 되시는데 어떻게 우호적인 판결이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판결자도 없습니다. 이 판결자는 변호사라고 할 수 있는데, 새번역은 중재할 자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70인역에서는 중보자로 표현하는데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아직 희미하지만, 욥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을 이을 중재자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막대기가 자신을 징벌하고, 그 위엄에 짓눌리는 상황에서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의 시름은 깊어갑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욥의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담대히 나아가 아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어느 한 순간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물질보다도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하나의 틀에 구속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욥이 예전에 이해하던 하나님, 그리고 세 친구가 이해하던 하나님은 법칙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 인과율과 인과응보라는 틀에 갇힌 하나님이었다면, 이제 욥은 점점 그러한 이해를 깨쳐나가고 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러한 세계관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현을 가능케 합니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고통이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절대로 당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유 없는 고통, 자신의 책임이 아닌 죽음을 당하심으로 더 나은 아담일 뿐 아니라, 더 나은 욥이심을 입증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영생, 즉 영원히 사는 것을 시간적인 개념, 또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국한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생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관계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욥은 자신의 한계를 깨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할 것입니다. 알아도 알아도 충분하지 않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이뤄나가야 할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오늘도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과 예기치 않은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인식을 넓혀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욥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모습을 봅니다. 비록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이지만, 그 연약함도 아시기에 성경에 기록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 역시 고통 당할 때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쓸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게 고정된 하나님 이해의 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틀을 어떻게 깨십니까?
2.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게 된 경험이 있다면 묵상해 보십시오.
3. 지금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지 생각하고 결단해 보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