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한국의 기도 도량 / 월출산 무위사
청자골 달빛 아래 천년 세월 숨겨둔 파랑새의 신비 찾다
‘달빛 아래 첫 마을’에 위치
도선국사가 갈옥사로 중창
명종 10년에 무위사로 개칭
무주고혼 달랜 수륙재 도량
세종 12년 세워진 극락보전
국보 아미타여래삼존불 벽화
벽화 뒤 백의수월관음 ‘영험’
▲오랜 편견이 깨졌다. 관음보살님의 여성성에 기댄 생각은 여기서 무너졌다.
넓은 얼굴과 어깨, 두꺼운 목과 근엄하지만 자애로운 눈빛을 지닌
강진 월출산 무위사 백의수월관음보살님. 선재동자가 예배 올리리란 예상도 빗나갔다.
어깨에 파랑새 한 마리 앉은 노스님 한 분 있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깨어났다.
천년 전에 사라진 신비에 홀렸다.
달빛은 등에 업고, 신비는 입에 물고 사라진 파랑새의 흔적을 좇았다.
꽁지깃이 하늘 위에 남긴 궤적을 따라 갔다.
천년이 지난 뒤에야 나선 길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 꾸짖었다.
찬바람은 눈과 비를 흩뿌렸고, 희미해져가는 궤적은 청자골로 향했다.
궤적은 남도 답사 1번지라 불리는 강진 월출산 자락 어디쯤에서 사라졌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였다.
‘달빛 아래 첫 마을’인 월하마을에 있는 무위사(無爲寺)에 다다랐다.
파랑새, 예서 달빛 등에 업었으리라.
무위사(주지 법정 스님)는 비바람만 자욱했다.
주차장 앞 공원 조성을 위해 심어놓은 묘목들은 헐벗고 따듯한 봄날만 기다렸다.
일주문도 외로웠다.
일주문 지나고 나서야 차 향기 새어나오는 전통찻집이 왼쪽에 다소곳이 앉았다.
벽화 없다고 함부로 계단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사천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한 분 한 분에게 합장하고 마음을 반으로 접었다.
▲월출산 무위사 입구인 일주문.
조계종 제22교구본사 대흥사 말사인 무위사는
617년인 신라 진평왕 39년에 원효 스님이 창건해 관음사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617년은 원효 스님이 출생한 해라 그대로 믿기엔 무리였다.
헌강왕 원년이던 875년 도선국사가 처음 중창하면서 갈옥사라 했으며,
조선 명종 10년이던 1555년 태감 선사가 네 번째로 중창하고
절 이름을 무위사로 했다는 기록은 의미가 있었다.
보제루 아래로 난 계단에 접어든 순간, 천년 세월이 눈앞에 펼쳐졌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었다. 천년이라는 시간은 무거운 화장을 씻겨냈다.
화려했을 단청도 벽화도 없었다.
세월이 주는 무게를 견뎌온 나무기둥만 본연의 색을 드러냈다.
계단을 다 올라서니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극락보전에 드는 첫 관문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둥지 하나 덩그러니 걸쳤다.
둥지는 떠나간 주인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보제루 지나 극락보전이 정갈하게 앉았다.
극락보전은 얌전했다. 아니 조선선비처럼 정갈하고 단아했다.
1934년 일본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됐다.
다행히 우리 정부가 1962년
다시 국보 제13호로 지정하면서 세월은 극락보전의 치욕을 덜었다.
극락보전은 1983년 몸을 해체, 복원하면서 탄생사가 밝혀졌다.
중앙 칸에서 명문이 발견됐다. 조선초 1430년(세종 12)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
월출산이 비바람에 으스스 떤다. 극락보전은 옆구리 열고 객을 받아들였다.
손가락이 얼어갔다. 발끝과 코끝에 한기가 맴돌았다.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좌상(보물 제1312호)은 미동도 없다.
어간문 열린 틈으로 자애로운 미소를 흘려보낼 뿐이었지만
그 미소는 차갑게 식어가는 도량에 온기를 전했다.
눈 대신 내리는 겨울비는 남도 대지의 푸근함에 녹아내린 게다.
관음도량인 무위사 부처님 안에 돌고 있는 뜨거운 피가
얼어가는 우리네 신심을 녹여내는 것처럼. 환희심이 마음에 뜨겁게 차올랐다.
▲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편액.
훈훈한 마음으로 법당을 나서려다
아미타삼존불좌상 뒷벽에 그려진 후불탱화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서 있는 아미타여래삼존불도(국보 제313호)다.
구름이 머리 위로 흘렀고 좌우에 각각 3명씩 나한이 자리했다.
아미타삼존불좌상의 그림자 같았다.
1950년 극락보전 수리 때 발견된
벽화 아래 쓰인 기문엔 1476년(성종 7)에 그려졌다고 기록됐다.
법당 사방 벽면에 모셔진 아미타내영도 등 벽화는 통째로 드러내
2006년 4월 개관한 성보박물관에 29점을 보관 중이라고 했다.
한데 관세음보살 눈만 스러지고 없었다. 세월 탓이려니 넘기려했다.
진여성(65) 법당보살이 아미타삼존불좌상 뒤로 돌아 가보라 일렀다.
오랜 편견이 깨졌다. 관음보살님의 여성성에 기댄 생각은 여기서 무너졌다.
넓은 얼굴과 어깨, 두꺼운 목과 근엄하지만 자애로운 눈빛을 지닌
강진 월출산 무위사 백의수월관음보살(보물 제1314호)님.
선재동자가 예배 올리리란 예상도 빗나갔다.
어깨에 파랑새 한 마리 앉은 노스님 한 분 있다.
눈 없는 아미타여래삼존불도의 관세음보살과 노스님,
파랑새의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깨어났다.
▲월출산 무위사 전경.
“이 일을 어쩐다.” 젊은 주지스님은 곤혹스러웠다.
극락보전을 완공했으나 법당 안 벽화를 그리지 못해 못내 안타까웠다.
불사할 만한 사람도 찾질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무위사를 찾아온 노스님이 물었다.
“이 좋은 도량에서 왜 그렇게 한숨만 쉬는지 알려 주게나.”
주지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노스님이 일렀다.
“그 불사를 내가 할 테니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게나.”
그 길로 노스님은 한 달이 지나도 법당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주지스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48일째 되던 날, 주지스님은 문틈으로 몰래 안을 엿봤다.
노스님은 안 보이고 파랑새 한 마리가 세필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놀란 주지스님은 그만 인기척을 냈고, 파랑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관세음보살의 눈을 점안하지 못한 채.
진여성 보살이 전해 준 설화는 믿기 힘들었다.
백의수월관음도에 선재동자 대신 그려진 노스님과
그 어깨 위에 새 한 마리가 증거라 했다. 백의수월관음보살의 영험도 놀라웠다.
1988년 봄, 50대 전후의 중년 남성은 극락보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걸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는 스님에게 절절한 심정을 토했다.
“경북 포항서 작은 개인사업을 하던 오씨라고 합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겁니다.
유명하다는 안과는 다 찾아다녀봤고, 눈에 좋단 약은 모조리 먹어 봤습니다.
사업해서 벌어놓은 돈은 약값으로 썼고 남은 건 빚과 가족 걱정뿐입니다.”
그는 관음기도도량 무위사를
추천하던 친척 한 분의 말로 경북에서 전라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스님은 관음기도를 가르쳤다. 그는 삭발하고 100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그리고 50일이 지났다.
수월관음보살님의 흰 옷이 보이기 시작했고 90일째, 그의 시력은 회복됐다.
100일 기도를 회향한 오씨는 무위사를 떠나며 다짐했다.
“관세음보살님이 천수천안을 빌려주셨으니, 눈먼 이들의 눈으로 살겠다”고.
극락보전 기도소임을 맡고 있는 비구니스님이 말을 더했다.
보통 잘 보이지 않는 새 그림이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올려다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다시 수월관음보살님을 올려다 봤다.
하얀 옷을 입은 수월관음보살님은 당당한 체구에 천의를 휘날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았다.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었다.
아무리 선재동자 자리를 봐도 노스님뿐이었다.
“중생들은 자신이 저지른 업화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겨우살이 준비하면서도 반드시 오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생에서 선업을 쌓아야 한다.” 법당 안에서 울려 퍼지던 음성이 마음에 파고들었다.
범부 눈엔 어깨 위 새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
법당보살과 기도스님은 오래전 무위사가 수륙사였다는 말도 전했다.
실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돼 있다.
극락보전이나 아미타삼존불도 등 벽화들과
49일이라는 설화의 시간적 제약 등은 무위사가 수륙사임을 추정하게 한다.
무주고혼들을 부처님 법에 의지해 살아있는 자들의
애도와 죽은 이들의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수륙재는 무위사의 따듯한 부처님 품과 닮아있었다.
▲극락보전 삼존불. 후불탱화가 국보다.
관음보살님 눈만 점안하지 못하고 떠난 파랑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책은 도끼다’ 저자 박웅현 크레이티브 디렉터는 말했다.
깨달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획득’하는 게 아니라
숨겨져 있던 무엇을 ‘발견’하는 경험이라 했다.
파랑새는 청자골 달빛 아래 무위사에 천년의 신비를 숨겨 놨다.
무위사의 신비를 천년이란 세월에 파묻었다.
그리고 달빛 등에 업고 어디론가 떠났다.
파랑새는 ‘낡은 것’에 담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환희를 남겨둔 게다.
달빛은 오늘도 ‘걸림 없는 도량’ 무위사에 내려앉는다.
찬 기운이 어둠을 틈타 무위사를 에워싸면 달빛은 온기를 더하리라.
극락보전 앞에 선 앙상한 나뭇가지 꼭대기에서
찬바람에 신음하는 새둥지는 달빛 같은 주인의 온기가 그립다.
2013. 12. 05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
첫댓글
보제루 (普濟樓)
사찰의 중심 불전 앞에 세워지는 누각을 지칭하는 용어.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 등이
대중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넓지 못하다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중심 불전을 마주 올려다볼 수 있는 누각에서 법요를 베푸는 옛 방식의 하나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이 누각에서 예불하고 설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즉, 초기 가람 형태에서 금당(金堂)의 뒤편에 배치되었던
강당(講堂)의 기능을 이 누각이 금당의 앞쪽에서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 누각이 있는 절은 대부분 불이문(不二門)이 없으며
불이문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이 누각 옆에는 법회 등을 알리는 의식 용구를 보관하는
종각(鐘閣)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제루 [普濟樓]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