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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에베소서의 교회와 현실교회의 차이는 얼마일까요?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삼을까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나름 큰 교회라고 여겨지는 교회를 통해
에베소교회와 같은 교회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설교에 발만 구릅니다.
교회는 상대적으로 좋은 교회여야 함이 아니라 오직 원형교회 하나뿐입니다.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는 무리라 칭함을 받는자들이라”
우리는 말씀을 받지 못했을 때에는 육체로는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세요.
항상 옛날의 자신을 생각해 보고 지금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 파악해야죠.
사실 진정한 할례는 육신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곧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찢고 우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때에는 칼과 같이 다가옵니다. 심령이 찢어지므로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수술이 되고 난 다음에
치료됩니다. 영과 혼과 육이 강건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만병통치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굶주리다가 허겁지겁 주워 먹다가 그만 독약을 먹고 맙니다.
귀신이 들어갑니다. 지금 이단 사이비에 가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걸 보세요.
영적인 은총의 유일한 창구는 성령과 성경입니다. 절대로 유명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 은밀한 거래를 하도록 하십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증인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 속에 항상 살아있습니다.
바로 히12:1절의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성령을 통해 말씀 위에서
신앙의 트랙을 달리고 난 다음 우리의 믿음을 보증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관계될 것이 없었습니다. 사돈집의
100촌도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참 놀라운 겁니다. 어메이징입니다.
모압에서 시어머니를 따라온 남편 잃은 과부 룻은 죽은 남편의 족보에 의해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이 이스라엘의 기업에 끼일 인연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이 없고 성령에 의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때엔 예수교 즉 기독교는 서양종교라고 여기던 우리가 지금은 그 중심에 서 있고
오히려 율법을 맡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곁가지로 보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그리고 그 분이 한 잔으로 주신 언약의 피, 그 피를 의지하고
빛 가운데로 나아갈 때에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는 피로 생각해야 합니다.
찬송 중에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하는 가사는 재고해야 합니다.
지금 성경은 한 잔으로 주신 언약의 피를 말합니다. 피는 생명입니다(레17:11)
그리스도의 생명을 마시면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피를 마시므로
그 분과 하나 되어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게 됩니다(요6:53-56)
이것이 그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가르(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화평은
둘을 하나로 만드신 일입니다. 둘을 하나로 이것이 화평의 참 의미입니다.
둘로(암포테라) 이 둘은 운명적으로 도저히 같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남북한의 진짜 장벽은 휴전선이 아니라 이질화된 사고방식인 것과 같습니다.
동질성이 아닌 두 민족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중간에 끼어 있는 장벽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휴전선이 아니라 이질적이 요소가 바로 큰 장벽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설픈 신학은 지금도 영화로운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얻는다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심은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함이라고(요17:22)
말씀하시는데 왜 영광이 죽어서나 얻는 구원이라고 말할까요? 덮어쓰고 있는
유대교식의 수건 탓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지 못하면
그 수건은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하는데 간혹은 죽을 지경이 되어 밀린 숙제를 합니다.
15절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율법(노몬), 계명의 율법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율법은 윤리 도덕의
이성적인 차원입니다. 의문은 도그마 곧 교리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윤리 도덕의 문제를 끌어들였고, 갈라디아교회는 율법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의 교회부터는 이런 논쟁이 없어졌습니다.
율법이나 의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아무 쓸모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아직 살아있지만 그 분의
몸 안에 있으면 율법이 못쓰게 되었고, 그 안에서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한 것은(히나) 자기 안에 한 새 사람을 지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는 보시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만 보십니다.
법궤 뚜껑 시은소에 바른 피를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고 그 안에 있는
돌비를 보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을 입고 먹고 거하는 체질이
되는 경건의 연습으로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습관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속사람이 커지면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쇠하여집니다.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하는 부활신앙의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의 줄기 찬 주장 두 가지 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 안이며
그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면 그 안에서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겁니다.
죽는 만큼 주님께 삼킴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부인 주님긍정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한 새사람을
지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십니다. 평강(에이레네)입니다. 그 느낌은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join)이 되었을 때에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16절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은 어떤 상태에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죽음과 다시 사심의 대속입니다.
주님은 죽으셨으나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으면 끝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 분과 함께 죽고 그 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본 값이 죽었다가 다시 산자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죽으면 다시 산다는 부활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인해
역사상 수많은 순교와 박해를 이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의 십자가의
다시 사심(3일)은 표적입니다.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는 죽음은 모든 것을 처리하고 맙니다. 지금
현행법도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죽으면 공소가 끝나 재판이 중단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든 의문이든 우리에게 대해
싹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17절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그리고(카이) 오셔서(에르돈) 여기 '오셔서'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 분이 오셨다고 하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이 난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지금 보혜사 성령으로 임마누엘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분은 우리에게 오십니다(coming) 이 분이 화평의 복음이 되십니다.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그러느냐 하면(호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복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자격요건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14:6)
천로역정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가장 힘이 든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파악하여 먼저 진리를 알고
그 다음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히12:1-2) 따라서 항상
자신을 들여다보고 하나님께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체크해봐야 합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외인 즉 손님과 같이 옆에서 슬쩍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도(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하나님의 한 집안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묵상하세요.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는 신약, 선지자들은 구약입니다. 그 터는 곧 성경입니다.
그 위에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한 영 한 생명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지어지는 건물입니다. 반석 위에 그 모퉁이 돌과
똑 같은 돌로 짓는 집입니다. 이 모퉁이 돌은 항상 기준입니다(foundation)
군대에서 우측 선두 기준하고 우로나란히 하면 꼭 그대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기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담은 성경입니다(Canon)
성경 어디를 펴도 내가 믿고 살고 있는 것이 막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곳에서 내가 살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요5:39)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증거의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강조하면 성경이 토막으로 잘리고 말게 됩니다.
21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성령과 말씀으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거처, 장막)이 되도록 말씀에 의해 자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의 초막이고 전체 그리스도인들의 장막이기도 합니다.
개별적인 집들이 큰 타운으로 이루어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져 갑니다.
2장은 1-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이랬는데 이런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이룩하신 일입니다. 11절 이후는
우리에게 되어 지고 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분사형으로 말씀하므로 지금
현재 우리가 그 길을 따라 나아가므로 되어 가는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1-10절은 우리가 한 일이라고 아무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된 일이고
11절 이후에는 우리가 그 은혜의 부르심을 따라 마땅히 행할 선할 일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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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처소(many mansions)가 많도다.(요한복음 14장:2)
한때 대한항공 광고중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완성하신 사역으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앞으로 나아갈수 있는 길이 열려고
그안에서 영.육간의 쉼을 누릴수 있는 아버지 집에 거할 처소가 무궁무진 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과연 어디까지 처소를 가봤는지
나 자신에게 항상 묻고 도전해 봅니다.
요새 저는 기쁨의 방에서 주로 놀아요.^^
기쁨의 골방! 주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셨네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안에서 행복하시길...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