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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전 축구로 속상해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한국 연속 8번 째 올림픽 출전 획득, 일단 축하는 하고 보자! 이미 올림픽 출전권은 획득해 놓고 아시아의 축구 최강국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경기나 다를 바 없는 결승전이 벌어졌다. 헌데 한일전이 운명의 장난처럼 격돌을 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2012년 올림픽 전 때 “한국 축구, 일본에 져서는 안 되는 그 이유” 아마 제목이 이랬던 것 같다. 아마 몇 천 명 부족한 20만 명의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글을 읽었을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예상대로 극적으로 이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기거나 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은 비길 것으로 더 무게를 두었지만 말이다. 함께 축구를 관람하는 가족들과 며 칠 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그냥 관람하라고 말을 건넸던 것이다.
헌데 여지없이 지고 말았다. 내심 이기기를 바라며 관람 했지만 전반 후반 초반까지 이기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답답한 기류가 흘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이 너무 못하고 한국 위주의 축구 경기가 그라운드에 펼쳐지는 그림이 너무 예상대로 느낌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끝나고 막내가 조용히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막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울 필요가 없구나! 라는 말로 위로하고 자도록 권유한 다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축구를 비롯하여 모든 스포츠는 그 자체로는 결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의미들이 있다, 노래 부르기나 듣기, 운동하기, 놀기 등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는 인간 놀이 문화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통해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무기로 활용하는 배경이 개입 된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서 숭고하고 순수해야 할 스포츠 대회가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목적이나 이유들로 조작이 주도하는 타락의 스포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박 등 어떤 좋지 못한 목적들에 의해서 승부조작은 물론 감독, 선수기용 등에서 정직하지 못한 방법들이 주도되어 암암리에 사회를 무너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같은 일들이 지엽적(枝葉的)이고 어떤 특정한 개체(個體)에 국한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 지구적인 통합 배경이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국제 대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개인 국가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범죄가 이 스포츠를 통해서 진행되는 시점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으로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정해 진 룰대로 축구가 진행되는 이것이 능력이고 기술이 되는 스포츠 시대가 되었다.
즉, 선수들조차도 순수하게 공을 차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축구를 할 때, 선수가 될 수도 없고 상처를 받아야 하는 비상식의 축구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맞춤형 축구시대라 할 수 있다. 분명히 예로부터 내려오는 인간 사회의 정의롭고 규칙적인 사회 규범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유형들이다.
헌데 버젓이 음성적으로 주도하고 통용되는 시대가 열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범위 내에서 승부가 결정 되는 맞춤형 축구 시대이다. 인간성 상실이 스포츠를 통해서 더욱 가중 되는 시대 한 가운데에 들어 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 한일전도 이 같은 배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고도로 축구 경기를 흥미롭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구색을 갖춘 축구를 펼치고자 했지만 진실의 눈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너무 그럴 듯하게 구색을 갖춘 경기 운용이었다. 처음부터 한국이 공격력, 기술력, 패스, 어시스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잘 하는 것에 비해 일본 선수들의 몸놀림이 둔탁하고 벌써 지친 듯한 동작들로 안 돼는 경기를 펼쳤던 것이다.
이는 후반 한 골 주고 난 후 곧 바로 연속 두 골을 넣으면서 드러나는 몸놀림들에서 바로 반영을 해 주었던 것이다. 일본이 살아나니까 상대적으로 한국 선수들이 전반에 열심히 뛴 관계로 지쳤다는 식으로 몸놀림과 경기 운용이 떨어졌다.
골이 들어가는 것도 얼마나 계산 되어 적절하게 경기 운용 때에 잘 맞추어져서 한국 관중들과 국민들에게 전해지도록 배정 되었는지, 인간의 기술시대와 정보시대는 이 같은 인간 세계의 맞춤형 프로그램 짜기를 얼마든지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한일 축구 시대는 하나 주고 하나 받고 식으로 운용이 짜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계속 한일이 축구 시합을 통해서 격돌하면서 지거나 이기거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스포츠 문화로 이웃나라 관계를 이룩해 가는 것이다.
물론 이전, 즉 IMF 이전과 이후 초반까지는 주로 원수 관계처럼 격돌이 강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응어리진 부분들을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시소게임으로 두 나라 사이의 간격을 본격적으로 좁혀가는 맞춤형 경기를 펴는 것이다.
한 번은 일본이 이기고, 한 번은 한국이 이기고, 이 같은 시소게임으로 진행을 해가면서 언론이나 중개를 하는 멘트 여론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들의 귓전을 파고드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필자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너무 소설 쓰는 식의 생각이 아닌가? 라며 강력하게 의문을 가지고서 반문을 할 줄로 안다.
하지만 얼마든지 가능하고도 남는다. 아시아에서 한일 축구 기술은 두 나라가 결승적인 조별 리그에서 만날 확률이 높고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제적으로 세계화를 구상해 가는 집단들은 아시아에서 한일 관계가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서 두 나라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얼마든지 이 같은 대진표를 짤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의 정복욕과 한국사회 안의 일본 협력자들의 적극적인 동조 행보들이 결합 된 인간 동력들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사회를 유린하는 파괴적 에너지로써 작용되는 불리한 나라 환경이기 때문이다.
근현대에 이르러서 일본은 지배국이고, 우리는 피지배국의 관계였다. 헌데 이것이 완전히 완결되어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 같은 불합리한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유리한 고지에 서 있고 우리 한국은 매우 좋지 못한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반도를 겨냥하여 세계화의 목적을 지향하는 세력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우리사회는 자국의 현실에 대해서 방임적 편리주의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 스포츠의 맹점이다.
우리의 맹목적이고 저당잡힌 스포츠 운용으로 오히려 국민들이 이 같은 내막을 알지도 모른 채 심성들이 농락당하고 나라가 졌다는 것 때문에 울어야 하는 현실만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본과 연합의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맞장구 쳐줘야 하는 아시아에 스포츠 국가로 담당해야 하는 위치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올림픽 개최 직후부터 세계 스포츠 대회에 열을 내지 않기 시작했다. 지나친 강함도 그렇다고 모자람도 없이 자신들 체면 정도만 유지하는 차원에서 지속해 왔던 것이다. 헌데 96년부터 아시아 대표로 출전표를 획득하기 시작하며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는 물론 일본 전국 축구 붐과 과학적인 축구 운용은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축구로 한국과 척을 지는 것처럼 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를 스포츠 문화로 거리를 좁혀가는 붐의 장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 일본의 전략은 우리 사회 내부 동조자들의 손바닥처럼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싸우면서 정든다”라고 회자되는 말이 있다. 부부 관계도 싸우지 않는 부부보다 싸우면서 사는 부부가 정이 더 깊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싸우면서 사귀다보면 정이 들어서 결혼까지 간다고 했던가?
바로 이 같은 인간과 사회 심리를 축구라는 스포츠로 이용해서 한일 양국을 말 그대로 이웃 관계로 만들어가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큰 문제들이 발생하여 우리에게 좋지 못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다.
먼저는, 우리의 순수한 스포츠로써 축구가 한일 양국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하는 축구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먼저는 감독과 선수들이 상처 받는 대상들로 전락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축구 영웅들이 감독들이나 선수들 사이에서 나오지 못했고, 나왔어도 어딘가 모르게 우리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진정으로 심어주지 못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진정한 영웅이란 그 사회에 위로가 되고 자긍심이 되어 주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 왜인가? 바로 순수해야 할 스포츠가 바로 한일 관계를 위한 도구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속임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룰이 주도 되는 사회로 전락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 사회 안에 속임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는가? 나라를 팔아서라도 자기 혼자, 가족이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속임수를 부리는 환경이 깊어져 있다. 이것을 능력으로 치부하는 사회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 같은 구조에서는 팀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선수나 감독, 혹은 코치와 스텝진들 중에 자국 중심이 아니라 오로지 한일 양국을 엮어주는 역할자들이 숨어 있는데, 오로지 그 일 때문에 축구부에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진정한 결합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바로 이 같은 배경이 우리 한국 사회를 갈라놓는 파괴적 힘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축구로 이루어가는 한일 양국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전락 된다는 사실이다. 즉, 결국 일본이 지배하는 길을 열어가는 도구로 전락되는 과정의 역할일 뿐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그것이 목적이고 우리는 그 같은 일본의 백년대계에 이용되는 조선이란 과거의 종노릇한 자들이 축구를 통해서 그 일을 추구하는 행보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순수한 축구 관계를 통해서 이웃나라로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의 주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의 이 같은 주장을 들으면서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자신들이 계획한 패권주의적인 발톱을 드러내는 현실을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축구대회라는 마당을 빌려서 일본은 명분 쌓기를 부지런히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언론 플레이인가? 국제 로비의 귀재들인 일본은 자신들의 목적사회를 위해서 여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세계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에 반해서 우리는 어떤가? 초점이 다른 곳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국을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에 정리와 체계조차도 잘 안 되는 구조이며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자기 줏대가 없는 나라 형국이 되고 있지 않는가?
끝으로 일본이 후반전에서 한 순간에 3골을 넣어버리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점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바로 끄집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 사회가 갖고 있지를 못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구상한 자들이 슬그머니 흘리지 않는 한 모르고 지나면서 농락만 당하는 현실이 아닌가?
언제나 그랬다. 우리 사회는 자주 국력이 아니기에 자국에 불어 올 위험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으로 파악해 내는 사회적 힘이 많이 결여되어버린 사회라는 사실이다. 왜인가? 자력을 잃어버린 사회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과거 자신들에게 종노릇했던 자들을 대상으로 던지는 메시지이다. 일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받들도록 쇄기를 박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정도는 얼마든지 무너트려 버릴 수 있다는 오만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부지런히 이 같은 사실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일상에서 가만히 퍼트려서 친일본적인 국민들이 많아지도록 활용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는 음성적으로 일본을 좋게 알리고 선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래서 젊은이들이 일본 자동차나 일본식 문화에 대해서 많이 선호하기 시작했고, 일본에 대한 동경을 하는 젊은이들이 소리 없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 안의 일본식 음식점은 너무 잘 된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일본이 침략을 보이지 않게 진행하면서 조금씩 먹어 들어오는 문화적 관계라면 그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방식이 일본의 제3차 침략의 물결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유학을 하는 청년들에게 지극히 자연적인 일상의 관계 속에서 일본에 푹 빠지도록 어떤 이야기 거리들을 만들어 느끼고 체험하도록 조작한다니. 물론 우리 청년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자연스런 관계나 사건의 만남을 통해서 체험토록 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젊은이가 공원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전혀 손상 없이 전달해 주는 배경, 또는 지하철 등지에서 위험에서 구해주는 일들과 엮이도록, 특히 우리 사회 안에 유능하고 독특한 젊은이들은 반드시 그렇게 엮이도록 하는 방법들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 한국에 전해지는 일본인 작가들이 쓴 책들의 내용들 또한 우리를 사로잡는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우리의 정신을 파괴시키거나 성문란으로 유도하는 내용들, 왜? 그렇게 위안부 문제를 늘고 늘어지고 성문란을 조성하는 로멘스들을 우리사회에 소개했던지?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이유들이 명확해지지 않았는가? 특히 근친상간과 같은 성문제는 매우 지능적으로 유도하는 배경들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후반 단 몇 분 만에 넣은 3골은 단순하지 않은 문제였다. 우리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정신 못 차리는 손바닥이 되었던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우리 사회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일본으로부터 정신적 침략을 당하는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침략은 갈수록 강성한 기류를 타면서 우리 한반도를 제압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항상 필자는 주장해 오고 있다. “일본이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우리 한국의 존재는 약해지고, 일본이 약해지면 우리가 강해진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 그 어떤 나라도 믿어서도 의존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의 기류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기류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거대한 목적과 지역 맹주 국가 차원의 목적이 주도하는 지구적 환경시대가 되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지구 공간을 어떻게 명확하게 규명해 내지를 못한다. 정보화 시대까지 명확하게 지적을 했지만 그 이후의 세계의 방향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세계 저명한 역사학자가 정보시대 이후 현재를 “지혜의 시대”로 규명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지혜는 이미 지구 역사 이래 그 어느 시대에도 추구했고 가장 주요하게 적용되는 인간과 인간세계의 보편적 산물로써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대란 공간적 의미를 규정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통제시대’로 말하고 싶다. 정보는 통제시대를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는 힘으로 기반을 구축해 주었다. 현재 지구의 테러 문제는 이 통제시대를 가져오게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문제로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테러 문제를 제압한다는 그 이유가 통제체제를 가져오는 빌미로 삼게 될 것이다.
식량과 식품을 비롯한 인류의 주식 문제는 통제시대를 여는 것을 종결짓는 마지막 역할로 연결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포츠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들어 가면서 자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 등의 감성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한일전 스포츠, 특히 축구 등은 우리가 이러한 점에서 애착을 둘 필요가 없다. 어떤 국민들도 이기든 지든 편안하게 대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기왕지사 이기면 좋지만 져도 상관이 없다.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의 이 같은 꼼수 부리기와 이들 편에 서서 자국을 등지게 하는 부류들이 펼치는 스포츠에 우리가 함몰되지 않도록 각성되는 우리와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대비하는 민족은 반드시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지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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