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국에서 전쟁고아복지사업으로 여생 헌신
처음 6.25전쟁시 후방지부사령관으로 와서
드문 미국인으로 인자하면서 강직한 인품이
에두르는 미국에서의 안락한 노후 삶을 접고
스며든 한국에서의 善業후 UN군묘지에 안장
爲韓國한 충정 프랑스계 미군장성으로
트집잡힌 복구지원 미의회청문회장에서
캄캄한 전쟁처럼 부산역전대화재도 같다고
장구한 38선의 응어리진 한 이제 풀리니
군인으로 참전했던 혼백도 반가워하리
2018.11.25
* 부친께서는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계 재직중 .. 미8군통역관으로 대구에서 미군복무당시의
친구의 소개로 위트캄장군과 1950년대 중후반 처음 만나 평생 금광업에 일조하시다가 사업
부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나는 70년대 중후반 고2시절부터 부친이 지방광업소에 장기체류시
당시에 반도호텔과 내자호텔에 심부름으로 가서 장군님을 뵙고 부친 월급을 받아 온 일이 몇
번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82년초 89세로 돌아가셔서 나는 같은해 육군복무 제대전 휴가때 부산
UN군묘지에 들러 한번 참배한적이 있다. 장군은 1차세계대전시 처음 학사장교로 참전하고 2차
세계대전시 노르망디상륙작전에 투입된 몽고메리장군의 직속 통역 및 군수보급장교로 배속 참
전하고 이후 한국전쟁시 후방지부사령관으로 참전 종전후에는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대학시절 장군님께 프랑스어 개인 사사를 받은 누님은 고교시절 학교불어선생님의 프랑스동행
요청에 너무 가난하여 어린 동생들을 두고 갈 수 없다 하여 자살을 시도한적이 있는데 가정형편
상 대학을 못 가 산업체에 직공으로 일하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조달이 어려워 당시
국회부의장을 지내신 의영할아버지가 성신여대 이사로 계시는 관계로 도서관 알바자리를 얻어
겨우 대학을 마치고 이후 대일학원 경일학원 강사로 활동한 바 있고 결혼즈음 5년간 프랑스에
유학 겸 체류를 하였다. 아버지는 4살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모시고 9살때 작은 아
버지가 계시는 일본 오사까(대판)에 가서 형편상 고교까지 졸업후 당시 대동아전쟁중이라 부득
이 일본관동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이 패망 한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주벌판에서 일
본군복을 벗고 일반 복장으로 옷을 갈아 입고 38선을 통해 남쪽으로 귀환 작은아버지와 상봉하고
이후 사법고시 1차시험에 응시 당시 최연소 7등으로 합격 곽씨문중에 천재 나왔다는 소리를 들
었다고 했는데 ..이후 6.25동란으로 2차고시도 연기되고 이후 먹고 사는것이 막막해 포기하게 됐다
는 부친 생전에 들은 적이 있다. 6촌 아저씨도 너희 아버지 아무리 두꺼운 책도 한번 보면 그냥 통
째로 외워버리는 분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 반도호텔은 일제시절 일본인이 상용호텔로 1930년대 당시에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로 해방과 전쟁
후 국가의 재정은 최하위권이라 전쟁후에는 국가부처 청사가 자리했으며, 국회일정도 호텔에서 일을
보는 국회의사당의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에 미군PX가 광화문 대로에 있었다고 하면 짐작이 가는
일로 74년 롯데호텔이 인수 을지로2가자리에 있던 이 호텔을 헐고 새로 신축건물이 들어서 일제잔재
의 근대건축물이 청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 통일을 열망한다. 올리다 보니 개인가정사까지 쓰게 됐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제가 왜 이토록
통일에 집념하는지 .. 여러 사연이 있다보니 .. 누구나 가족 이웃 친지 친구의 과거사를 들쳐 보면 이산
가족이 있으실거고 전쟁으로 난민 됐다거나 희생된 가족이 있을겁니다. 인류역사는 전쟁사라고 하는데 ..
우리의 근대 전쟁의 상처. 눈물의 언저리. 통일로 빨리 치유해야 되겠기에 계속 올린 점 이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