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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성당 → 좌포도청 터(종로3가역 9번출구) → 의금부 터(종각역 1번출구) → 전옥서
터(종각역 6번출구) → 우포도청 터(광화문역 5번출구) → 형조 터(세종문화회관 앞) → 경기감영 터(적십자병원 앞) → 서소문밖 성지
→ 중림동 약현성당 ( 총 5.19km, 78분 소요 - 순례예상시간 2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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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성당 |
위치
종로구 인의동 167 (02-765-6101)
소개
포도청 순례지 성당
기억해야 할 인물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성당 지하)
묵상과 기도
서울대교구 성지 순례길을 걸으며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처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청합시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안내 센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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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성당은 종로구 인의동 167번지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종로 본당은 2013년 2월 28일자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받았습니다. 포도청 순교지는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 오위가 장살,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입니다. 그러나 현재 좌·우포도청 터를 알리는 표지석에는 그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터임을 알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종로 본당에서는 본당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좌·우포도청에서 일어났던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 성당 내에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안내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서울시에 순교터 표석 설치를 요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안내소에는 포도청 순례지 안내 지도와 리플릿, 그리고 조선 후기 포도청과 천주교 순교사를 정리한 ‘포도청 순례’ 안내책자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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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포도청 터 |
위치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함께 볼 곳
‘하느님의 종’ 최인길·윤유일·지황
묵상과 기도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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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개항기에는 궁문수비 ․ 외국공사관의
경비 ․ 반역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 ․ 체포하여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좌포도청은 정선방 파자교 동편에 설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단성사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좌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동부 ․ 남부 ․ 중부와 경기 좌도, 즉 강화, 광주, 김포, 수원,
시흥, 안성, 용인, 인천 등지였습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 ․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 ․ 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순교했다고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1795년 을묘박해 때는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가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다가 1795년 6월 28일에 포도청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좌포도청 표지석은 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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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 터 |
위치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
소개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조신철, 성 남이관, 성 김제준,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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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습니다. 박해 당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은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황사영 알렉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이었습니다. 현재 의금부 터 표지석은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호선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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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 터 |
위치
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소개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김제준, 성 전장운, 성 최형, 성 이호영
묵상과 기도
말이 아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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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습니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습니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습니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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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도청 터 |
위치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이병교·김덕빈·이용헌
묵상과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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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은 종2품 무반인 포도대장, 종6품 무반인 종사관 그리고 포교와
포졸 등을 합하여 모두 235명의 구성원을 가진 기관으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 운영되었습니다.
1878년에 전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던 리델 주교의《옥중기》에 의하면 우포청은 죄인을 심문하여 죄를 말하게 하고, 좌포청은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좌 ․ 우포도청의 업무의 한계가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에 설치되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입니다. 1879년 5월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입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 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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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터 |
위치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소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윤운혜·정철상, 성 이광헌, 성 남명혁
묵상과 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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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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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 터 |
위치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소개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한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조용삼·최필공·최필제
묵상과 기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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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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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
위치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
소개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정하상, 성 남종삼,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주 예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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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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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림동 약현 성당 |
위치
소개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
기억해야 할 인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모든 순교자
함께 볼 곳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묵상과 기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체적이고 끈기 있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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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입니다.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로 1892년 11월에 건축 공사를 완료하고, 1893년 4월 23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이며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서 1977년 11월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약현 본당이 설립된 당시에는
서울에 두 개의 본당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할 구역은 아주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현 본당은
도성 안을, 약현 본당은 사대문 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고, 약현 본당은 가깝게는 도성 주변의 서울 지역과 경기도 일대, 멀게는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개성을 지나 황해도 배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은 1991년 3월에
개관하였다가 지난 2009년에 성당 내 피정 집을 수리하여 재개관하였습니다.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미사용
제구, 나무 제대, 약현 성당 목재 종틀, 성당에서 사용하던 오르간, 1998년 성당 화재로 검게 탄 성당 제대와 성모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약현 본당 출신 신부로 만주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김선영 신부의 유해와 친필 서한 등도 전시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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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성당 |
위치
종로구 가회동 30-3 (02-763-1570)
소개
최초의 미사 터인 ‘계동 최인길의 집 터’ 관할 성당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주문모 신부·최인길
묵상과 기도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항상, 기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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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으로, 천주교회 창설 초기, 조선 신자들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고,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주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1794년 12월 24일에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렀는데 주 신부는 여기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났고, 주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주 신부의 입국과 활동에 도움을 준 최인길은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하였습니다. 현재 이 지역은 가회동 본당 관할 구역인데, 1955년 8월 9일에 병인박해를 일으킨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본당 박성춘 레오 신부로부터 안국동 별궁에서 ‘비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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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 터 |
위치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
소개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조신철, 성 남이관, 성 김제준,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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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습니다. 박해 당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은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황사영 알렉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이었습니다. 현재 의금부 터 표지석은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호선 1번 출구 SC제일은행 앞 화단에 있습니다.
※ 자세한 성지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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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 터 |
위치
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소개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성 김제준, 성 전장운, 성 최형, 성 이호영
묵상과 기도
말이 아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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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습니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습니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습니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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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도청 터 |
위치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소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지
기억해야 할 인물
이병교·김덕빈·이용헌
묵상과 기도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로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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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은 종2품 무반인 포도대장, 종6품 무반인 종사관 그리고 포교와
포졸 등을 합하여 모두 235명의 구성원을 가진 기관으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 운영되었습니다.
1878년에 전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던 리델 주교의《옥중기》에 의하면 우포청은 죄인을 심문하여 죄를 말하게 하고, 좌포청은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좌 ․ 우포도청의 업무의 한계가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에 설치되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입니다. 1879년 5월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입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 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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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터 |
위치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소개
천주교인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윤운혜·정철상, 성 이광헌, 성 남명혁
묵상과 기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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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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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
위치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
소개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정하상, 성 남종삼, 성 유진길
묵상과 기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주 예수님을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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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 자세한 성지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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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림동 약현 성당 |
위치
소개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
기억해야 할 인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모든 순교자
함께 볼 곳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묵상과 기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구체적이고 끈기 있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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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입니다.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로 1892년 11월에 건축 공사를 완료하고, 1893년 4월 23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이며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서 1977년 11월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약현 본당이 설립된 당시에는
서울에 두 개의 본당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할 구역은 아주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현 본당은
도성 안을, 약현 본당은 사대문 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고, 약현 본당은 가깝게는 도성 주변의 서울 지역과 경기도 일대, 멀게는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개성을 지나 황해도 배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은 1991년 3월에
개관하였다가 지난 2009년에 성당 내 피정 집을 수리하여 재개관하였습니다.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미사용
제구, 나무 제대, 약현 성당 목재 종틀, 성당에서 사용하던 오르간, 1998년 성당 화재로 검게 탄 성당 제대와 성모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약현 본당 출신 신부로 만주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김선영 신부의 유해와 친필 서한 등도 전시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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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 터 |
위치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소개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한 곳
기억해야 할 인물
‘하느님의 종’ 조용삼·최필공·최필제
묵상과 기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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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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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성지 |
위치
소개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을 참수해 처형했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이붕익, 김이쁜, 이의송 등 절두산 순교자
함께 볼 곳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매주 월요일 휴관)
묵상과 기도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로할 때 우리 주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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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 사적지로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입니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봉우리는 그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성지 내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는 순교자들의 유품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한눈에 보여 주는 교회 유물도 다수 전시 보관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지는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근대와 개화기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장소이기에, 지난 1997년 11월에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
절두산 순교성지는 순교 성인들을 공경하는 교회 정신을 따르려는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심 덕분에 한국의 성지로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성지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순교자들의 전구를 통한 기도의 은총을 체험하려는 국내외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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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 성지 |
위치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
소개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 4년간 묻혀 있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묵상과 기도
젊은이들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투명하게 지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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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입니다. 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그리고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묻혀 있다가 삼성산으로 이장되었고, 지금은 명동 대성당 지하소성당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이들 세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지난 2010년 서강대학교에서는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세 성인을 기리는 ‘순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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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신학교 성당 |
위치
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소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김대건 신부와 한국 교회의 모든 사제들
함께 볼 곳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사
묵상과 기도
순교 성인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후대에도 전할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합니다.
✽순례 가능 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 (평일 및 주일 포함 / 공휴일은 전화 문의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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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 성당은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가
용산으로 옮겨 개교한 이후인 1902년 4월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그리하여 1899년 6월 9일에 성당 기공식을 가졌고 3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신학교 성당인 “성모 성심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한편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결정하였고, 1901년 5월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년 6월 23일에 성당 내 제의방에서 제대로
들어서는 오른 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습니다. 이때 순교자임을 상징하는 ‘빨마가지와 1821~1846 A.K’라고 새긴
대리석 판을 덮어 봉인하였습니다. 한편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년 6월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년 4월 14일,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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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순교성지 |
위치
소개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이인덕·홍영주·권진이·이문우·박종원·손소벽·최영이·이경이·홍병주와 ‘하느님의 종’
이성례
묵상과 기도
신앙이 가정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가족 간에 먼저 복음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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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입니다.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날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월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습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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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고개 성지 |
위치
용산구 용산동 5가 2-65번지 (02-798-2457)
소개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베르뇌 주교, 성 김대건 신부, 성 남종삼, 성 최형
묵상과 기도
평신도 순교자들의 영혼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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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고개는 현재 군종교구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입니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두 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입니다. 또한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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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순교성지 |
위치
소개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베르뇌 주교, 성 모방·샤스탕·도리·브르트니에르·볼리외· 김대건 신부와 프티니콜라·푸르티에
신부, 성 현석문·우세영·정의배와‘하느님의 종’ 주문모 신부
묵상과 기도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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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는 원효로 남부와 한강로 서편 사이와, 남으로는 한강변까지의
황량한 모래터였습니다. 남대문 밖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토
황무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성직자 없이 천주 신앙공동체 조직을 이루고 천주
신앙생활을 시작한 조선 천주교인들의 성직자영입운동에 따라 선교활동을 펴고 있던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그 후 한강가,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년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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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
위치
영등포구 여의도동 2 여의도공원 잔디마당 세종대왕상 좌측 언덕
소개
1984년 5월 6일에 열린 103위 한국 성인 시성식
기억해야 할 인물
한국의 103위 성인과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묵상과 기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줄만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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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순교자들의 믿음을 기리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한국 교회 순교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동료 101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전 교회에서 그들을 경건히
공경해야 함을 선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시성 선언의 순간은 이 땅에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은총의 때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친히 한국 교회를 찾아와 103명의 복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림으로써 한국 교회에 새로운 빛과 평가를
부여했습니다. 시성된 한국 성인 중에는 10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의 사랑과 선교 열의는 국적과 신분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일치시켜 영광에 빛나는 성스러운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2009년 9월 19일,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행사 때, 과거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제단자리인 여의도공원 잔디마당에 기념 표석을 세워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며, 온
민족과 누리에 그들의 신앙이 이 민족의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 전면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라는 제목 아래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시성선언문 일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표석 후면에는 시성 선포의 역사적인 사실을 명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4년 5월 6일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 2009년 9월 1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니콜라오 정진석”이라는 문구를 한글, 불어,
영어로 각각 새겨 순례자들에게 기념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은 여의도 공원 세종대왕상 좌측 언덕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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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 |
위치
관악구 신림동 산 57-1
소개
기해박해 순교자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묘소
기억해야 할 인물
성 앵베르 주교, 성 샤스탕 신부, 성 모방 신부
묵상과 기도
순교하신 성직자와 수도자의 영혼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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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입니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 사적지로 조성되었으니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죽음을 맞이했고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습니다. 신자들은 이들 유해를 거두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고 마침내 박 바오로 등 여러 명의
교우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임시로 매장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박 바오로 등이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으로 이장했습니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다시 명동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