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를 극락으로 천도해 주신 큰스님
솔직히 처음에 나는 관징 스님의 도력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관징 스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천도재 때문이다.
1999년 음력 6월 4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멀리서라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49재를 준비하였다. 그래서 미국에 계시는 관징 스님에게 전화해서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49재를 지내야 하겠는데, 어느 절에서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러자 관징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너의 아버지 49재는 내가 직접 해 줄 터이니 따로 할 필요 없다.”
관징 큰스님은 내가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것도 잘 아시고, 또 내가 벌어서 중국에 돈을 보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늘 나에 대해 신경을 써 주셨고, 큰스님이 직접 2번이나 우리 집으로 돈을 송금한 적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정을 감안하여 직접 천도재를 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징 스님을 모신 덕분에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자식노릇을 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2000년 5월 22일 관징 스님이 한국에 오셔서 전남 강진 백련사, 경주 백운암 같은 10곳이 넘는 순회법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6월 16~18일 까지 상주 석문사에서 법회를 하실 때의 일이다. 저녁에는 늘 아무 말씀 안하시고 참선만 하시기 때문에 심심해진 나는 아버지 천도재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 천도재를 하셨다면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극락에 가셨다.”
너무 간단히 대답하여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극락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여쭈었다.
“그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관징 스님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내일 천도재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루라고 하셨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주지 스님에게 말씀드려 오전 천도재를 오후로 미루었다.
그날 저녁 공양을 하시고 잠깐 주무신 뒤 12시에 일어나셔서 세수하시고 양치질을 하신 뒤 결가부좌를 하시고 앉아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내가 ‘읽어라’고 하면 ‘중국 길림성 용정시 △△번지 강윤철이 아버지 강△△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중국말과 한국말로 읽어라.”
12시 40분쯤 ‘읽어라’고 하셔 나는 ‘중국 길림성...’이라고 중국말과 한국말로 읽었다. 10분 뒤, “또 읽어라”고 하셔 ‘중국 길림성...’이라고 중국말과 한국말로 읽었다. 20~30분 뒤, “또 읽어라”고 하셔 ‘중국 길림성...’이라고 중국말과 한국말로 읽었다. 계속해서 “읽어라”고 하시면 읽고, “또 읽어라”고 하면 또 읽었다. 이렇게 무려 4시간을 계속한 뒤 새벽 4시 반이 되어서야 말씀하셨다.
“찾았다.”
“너 원래 나를 믿지 않았지? 종이 가져 오너라.”
종이를 가져다 드렸더니 아버지의 화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다 그리신 뒤 물었다.
“너의 아버지 맞나? 천도한 것 틀림없지?”
“예, 맞습니다.”
종이에 그려진 모습은 정확하게 아버지 모습이었고, 심지어는 금이빨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정확하게 그리셨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여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극락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천도한 사람들은 모두 업을 가지고 왕생했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가도 자식이 아버지를 간절하게 부르면 망상이 뜨고 옛날 본디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상생부터 너에게 ‘읽어라”하고 망상이 뜬 모습을 찾기 시작하여 9품을 다 훑느라고 시간이 걸린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하품하생에서 찾았다.“
나는 이 말씀을 듣자마자 관징 스님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말씀 드렸다.
“이제부터 저는 사부님께서 소를 보고 돼지라고 하면 돼지라고 하고, 팥을 보고 옥수수라고 하면 옥수수라고 하겠습니다.”
다음날 오전에는 쉬셨다. 이제야 오전 천도재를 오후로 미루라는 큰스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 내 9품을 다 다니시느라 힘들어 천도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루셨던 것이다.
4) 드러나는 도력
(1) 한국에서 만난 도인들
철원 심원사에서 법회가 있을 때 북한산 용암사(은평구 진관동) 주지 스님이 찾아오셔 관징 스님에게 보시금을 주시고 법문을 들으셨다. 법회가 끝난 뒤 나에게 지시하셨다.
“저 스님의 이름과 전화를 써놓아라. 저 스님에게 후광이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법문을 하러 다니시며 만난 스님 가운데 수행이 깊은 스님들을 말씀해 주셨는데, 한마음선원의 대행스님, 송광사 방장 보성스님을 드셨는데, 다른 한 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 청주 정토마을의 천도재(1차 2003년 3월 5일 천도재)
서울 여래선원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2월 12일 한국에 오셔서 20일쯤 지났던 3월 4일 저녁 갑자기 관징 스님이 말씀하셨다.
“내일은 호스피스 절에 좋은 일 하러 가자. 일체 돈을 받지 말고 천도하러 가자.”
호스피스 절이라는 것은 청주에 있는 정토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거두어 돕는 호스피스 절이다. 법주사 스님이 여래사에 와서 호스피스 절에서 능행 스님이 얼마나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했기 때문이디. 그 법주사 스님에 따르면 정토마을에서 세상을 뜬 사람이 있으면 법주사 스님들이 가서 천도를 해주기 때문에 잘 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정토마을의 능행 스님에게 연락하여 관징 스님의 뜻을 전하고, ‘이번에 드는 비용은 모두 보시하신다.’고 했다는 말씀을 전했다. 큰스님 모시고 정토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쩐 일인지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머리가 아프고 냄새가 나며 밥을 못 먹을 정도였다. 더구나 말기환자들은 입원한 방을 한 칸 한 칸 돌며 환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실 때는 정말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관징 스님이 가는 곳은 언제나 함께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정말 간신히 따라다닐 수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관징 스님에게 나의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곳에는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영가들이 많아 그 나쁜 기운이 눌러서 그런다.”
그러면서 과자 같은 것을 집어먹으라고 했다. 내가 아무 것도 먹기 싫다고 했더니 과자에다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난 뒤 말씀하셨다.
“먹고 나면 나을 것이다.”
과연 먹고 나니 정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끔히 나았다.
다음 날 아침 천도재를 할 때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천도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큰스님이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무 불쌍하다. 저것 봐라. 목매 죽은 사람, 농약 먹은 사람.....”
이렇게 7명의 영가를 천도하셨다고 했다.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최후를 마치면 법주사 스님이 오셔서 천도재를 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영가들이 떠돌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영가들이 보통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 법력이 있어야 영혼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다.”
(3) 쉬운 천도재
종로에 있는 망경산사 포교당에서 한 거사가 부탁하여 천도재를 하게 되었다. 한 40분쯤 천도를 하신 뒤, 그 거사에게 말씀하셨다.
“이전에 비구니 절에서 천도했는가?“
“예, 한마음선원에서 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쉬웠다. 그 비구니 스님이 수행을 많이 해서 천도를 잘 했더라.”
(4) 내리는 눈을 그쳐라
2002년 10월 22일 강원도 영월에 있는 망경산사에서 대구 광덕사로 가야하는 날이다. 망경산사는 해발 800m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도로에 얼음이 남아있는데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날씨 때문에 법회를 미룬 적이 없다. 차에 올라라.”
“그렇다면 큰스님 도력으로 눈이 그치게 해 보십시오.”
“그래 알았다, 앞으로 15분 안에 이곳에 눈이 안오게 하겠다. 모두들 차에 타라.”
4명의 스님이 차에 오르시자, 혼자 밖에 서서 두 손을 모아 수인을 하며 하늘을 향해 올리고 발을 몇 번 구르신 뒤 뭐라고 주문을 외우셨다. 그리고 나서 “떠나자.”고 하셔서 출발하였다. 15분 뒤, 산을 내려와 달리는 차 안에서 망경산사에 전화를 해보도록 하였다. 망경산사 스님이 대답하셨다.
“방금 눈이 그쳤습니다.”
(5) 전두환 각하의 출옥
1997년 8월 25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큰스님을 모시고 군위 압곡사에 가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압곡사 자해 스님이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강거사님 전두환 전 대통령 친누나가 대구에 사는데 내일 우리 절에 오기로 했습니다. 내일 나와 그 누나, 그리고 통거사와 관징 스님, 이렇게 4명만 조용히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다음 날 우리 4명은 조용한 방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누나 : “각하께서 지금 감옥에 계십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 특별사면에 석방이 된다는 설도 있고, 석방에 절대 반대하는 여론도 우세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면이 될 수 있을지 스님께서 법력으로 그 방편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징 스님 : 감방을 혼자 쓰고 있을 터이니, 감방 출입문 위에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써 붙이고, 때때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석방될 것입니다.
그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시키는 대로 해서 그 해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 . 복권되었다. 그 때 자해 스님을 비롯하여 몇 분의 스님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결과가 좋게 나오자 관징 스님의 도력에 대해 굳게 믿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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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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