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 교단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반갑다."
아침 시간 아이들의 밝은 인사를 들으며 만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교문을 들어서는 출근길의 발걸음이 가볍다.
내가 다시 교단에 선 것이다.
사표 내고 지낸 지 8년 만에 교단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꿈같은 일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첫 발령을 받아 교직에 선지 10년째이던 86년도에
나는 중요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개구쟁이 어린 아들 둘을 돌봐줄 분이 일년새 두 세번이 바뀌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남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아이들도 중요하구나 싶어 과감히 사표를 내게 되었다.
부산 만덕초등학교에서의 일이다.
사표를 써 가지고 교장선생님께 갔을 때
"김선생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교육은 백년대계입니다.
한번 교육에 뜻 을 가졌으면 중간에 어려움 이 있어도 끝까지 지키셔야지요."
진심으로 만류하시는 교장선생님의 권함을 뒤로 한 채 사표를 내고
다섯 살과 세 살의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그만 둔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 후 아이들은 자라서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를 볼 때 마음 설레도록 대견스러웠다.
반면 집에서도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데 학교생활은 잘 해 낼 수 있을까,
친구들과는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심히 걱정스럽던 그 심정은
모두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마음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학교에 간 아이는 일학년부터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조금만 속상해도 교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양
크게 울어 버리기도 하고 준비물을 잘 챙기지도 않고
과제는 끝까지 완성하지를 못하며 공부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절망이 섞인 그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일학년을 어떻게 보내는 줄 모른 채 지내고 이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이학년이 된 아이의 행동은 일학년때와는 180도 달라졌었다.
어떤 이유인지 일기도 또박또박 써 가려고 하고 준비물도 열심히 챙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신발도 미처 벗지 못한 채
헐레 벌떡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엄마, 엄마, 나 칭찬 받았어요."
생전 칭찬이라고는 받아 보지 못한 아이는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되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왜? 뭣 때문에 우리 아들이 칭찬을 받았을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물었다.
"공부시간에 태도 좋다고 선생님이 칭찬 하셨어요."
특별히 칭찬 받을 일이 아닌데도 지나가는 말처럼 하신
담임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이 우리 아들을 구름 탄 듯이 기분 좋게 했고
생전 듣지 못하던 칭찬 그 한마디에 아들의 행동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학교하고는 담 쌓은 것처럼 아침마다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학교에 가던 아들이 학교에 가기를 기다리며 즐거워하고
행동이 적극적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도 변하는 것을 보면서
엄마 된 나의 마음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마음이란 자식과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구나.
삼열이가 기뻐하는 걸 보니 내가 이렇게 기쁘구나........'
아들이 자신감 있어 하고 아들의 행동이 변하는 걸 보는 엄마의 마음은
정말 날개 달아 올라갈 것처럼 가볍고 즐거운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지난 교직에 있을 때를 되돌아 보았다.
'우리 아이처럼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자신감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태도로 대했던가?'
그 당시는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동행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 아이가 학교에 가고 보니 교사의 위치와 존재가 하늘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교사의 한 마디, 교사의 행동 하나가 아이들의 장래를 좌우하는 구나.
인생관이 확립되는 기본이 되는구나. 부모들이 사는 보람을 가지게도 하고
하늘이 꺼질 듯 낙망하게도 하는구나.'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아이까지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한 달이라도,
아니 단 일주일이라도 교단에 다시 서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미 교직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나 한번 교단에 다시 서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니
갈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무작정 동부교육청에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쭈뼛거리며 들어서는 나에게 장학사님이 물으셨다.
"저는 전에 교직에 있다가 사표를 냈는데요. 교단에 잠깐만이라도 설 수 없을까요?"
"정식으로 교사로 다시 오실 수 있는 길은 없고 강사자리도 지금은
교대 졸업한 임용고시 합격자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가기 어렵겠는데요."
"그러면 교대 졸업 발령대기자가 다 발령 난 뒤 강사가 필요할 때
연락을 해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교육청에 강사로 등록하고 온 몇 달 뒤
교육청에서 강사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연일초등학교에 몇 달 강사로 있던 92년 임용고시가 있다는 공고가 신문에 났다.
그 해에는 어찌 된 일인지 막 교대를 졸업한 신규뿐 아니라
복직을 원하는 사람중에서도 133명을 뽑는 정원의 10%인 14명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준비기간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했다.
하루에 3시간도 자지 않고 시험과목인 교육과정과 교육학, 논술 공부를 했다.
'아, 예전 학생때 이렇게 공부를 했다면 지금쯤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하면 할수록 재미 있는게 공부라는 걸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공부도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절감할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부산교육청게시판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얼마나 기뻤던지....... 그동안 고등학교. 대학 시험등 몇 번의 시험이 있었지만
그 어떤 합격의 순간보다도 감격스러웠고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렇게 다시 교단에 다시 돌아 온 지 어언 십년이 넘었다.
오늘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아이들 앞에 서면서
그 때 그 순간, 정말 열심히 해 보리라고 다짐하던 복직하여 처음 가지던
그 감격을 다시금 떠 올려 본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처음같은 마음가짐으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이들 눈높이에서 오늘도 즐겁게 출발할 것을.....
< 윗글은 올해(2005년도) 저희 학교에서 일년에 한번씩 내는 교지에 낸 글입니다.
동기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실어 봅니다.>
첫댓글 모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글을 읽으니 많은 것이 느껴지네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자주 하면서도 특히 경상도 안동네들은 칭찬에는 무척 인색하니 큰일인것 같네요. 다시 시작한 교직 생활이 얼마나 보람있는 나날인지 짐작이 갑니다.
선생님의 감격에야 못 미치지만...저도 회사에서 잘리고(명예퇴직) 나서 충남에 까지 가서 복직시험을 쳤지만....너무 기뻤답니다. 꼭 나의 일기장 같은 글이네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만 남들은 모두 나보고 당연히 기회주의자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좋아요.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고 계시죠?
지도요 82년 어느날 사푤던지고 ...다시는 이자리에 못선다고 느끼던 서운함이 아직까지 머리에 맴돌아요...
저만 아니고 동기님중에서도 교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 오신분들이 있다니 공감이 되시겠네요. 교직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교직을 떠나 보니까 느끼겠더라고요. 지금도 교단에 다시 섰다는게 꿈같이 느껴질때가 많답니다. 오늘 방학식 했지만 방학때도 봉급 받는다는게 미안도 하고 고맙기도 하답니다.
맞아요. 진짜 미안하고 고맙고 신기해요. 두 달을 놀고 먹으려니??? 봉급은 또 꼬박꼬박 나온다니요???
미안해 할 것 없어요. 년봉을 쪼갈라서 주니까요. 미국에서는 방학에는 월급이 없어요, 허나 년봉을 강의하는 달만큼으로 나누어 주니까요.
그렇구나. 그러이 맨날 쪼매씩만 주지....
어제 부산가서 목소리라도 듣고 오니까 돌아오는 길이 무척 행복했단다. 다음에 만나서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 실컷하자.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영자야, 나도 너무 반가웠다. 실과반 모임때 만날 시간이 기다려진다. 30여년만에 만날 동기들의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많이 보고 싶다.
해화님 글 읽어 봅니다. 그런저런 사연들이 있었네요...새로 오는 병술년 한해 더욱 행복하세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