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온 자료>
조선시대의 향교
1. 향교 - 중등교육
1) 향교
서원이 사림들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세워진 사립학교였다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사립 중등학교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보다는 낮은 학교로서 한양의 사학(四學)과 등급이 같았다.
원래 향교가 세워진 것은 지방에 유교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육 뿐 아니라 각종 제사 거행과 향촌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 목, 군, 현에 각 하나씩 설치되었고, 학생수도 부와 목은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연이어 들면서,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겼다. 결국 향교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해갔다. 하지만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 향교의 생활
향교는 서원과 동등한 중등 교육기관이었으므로, 배우는 과목도 모두 동일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 그리고 역사와 문학을 배웠으며, 간간히 역법, 산술, 의술 같은 실용 지식도 습득했다. 향교 안에서 학생들이 생활하는 것도 서원과 비슷했다. 선생님과 일대일 문답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각종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여 「시도기」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다만 서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향교의 학생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출석수와 지방 관찰사의 평가를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출석률이 저조하고 성적도 좋지 않은 학생은 학생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3) 향교의 선생님
향교의 선생님은 중앙 조정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에서는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교수관(敎授官)'이라는 호칭을 주고 지방 각지의 향교의 교사로 파견했다. 교수관은 '교수'와 '훈도(訓導)'로 구분된다. 교수는 6품 이상의 직급으로 주나 부처럼 큰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고, 훈도는 7품 이하의 직급으로 군이나 현처럼 작은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모든 향교에 교수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향교에서는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향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런 향교의 선생님들은 당연히 정식 관리가 아니었고 조정의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글공부를 한 선비들은 향교의 선생님이 되려 하지 않았다. 힘든 과거 시험공부를 해서 급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정에 나아가 포부를 펼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향교에는 선생님이 부족했고, 급기야 향촌의 유림들이 나서서 자치적으로 선생님을 임명하고 향교를 운영해 갔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향교도 점차 사립 교육기관으로 변모해갔다.
4) 향교의 학생
향교에는 보통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했다. 향교 학생 열 명의 추천을 받고 <소학>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양반 평민이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또 향교의 학생이 되면 신분 차별 없이 군역을 면제 받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도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과거 시험을 응시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같은 향교에서 공부한 동학이라 할지라도, 양반의 자제는 소과나 문과에 응시한 반면 평민의 자제는 주로 각종 잡과에 응시했다.
조정의 지원이 뜸해지고 향교 교육의 질이 저하되면서, 향교의 교생 중에는 평민이 많아졌다. 부유한 양반집 자제들이 점차 이름 높은 선비가 운영하는 서원으로 입학하면서, 공교육의 권위를 상실한 향교에는 가난한 평민의 자녀가 많아진 것이었다.
2. 과거
1) 선비와 벼슬길
선비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신념을 가진 지성인이다. 그래서 선비는 늘 벼슬길에 올라 위로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공부의 중요한 목표는 바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다. 과거 급제는 자기의 포부를 실천해갈 수 있는 첫걸음일 뿐 아니라, 본인과 그 가문에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비가 반드시 벼슬길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하에 도가 없을 때 선비는 자기를 감추고 수양을 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무턱대고 벼슬에 나가 무도한 세상에 휘말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사림파 선비들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를 수양하고 도를 실현하여 향촌 사회에서 덕망을 쌓아갔다. 그들은 처사로 은거하고 있었지만, 그 덕망은 조정의 대신들보다 훨씬 높았다. 선비는 수기치인의 이상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과거와 벼슬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조선의 향촌 선비들이 보여준 위대한 일면이었다.
2) 과거의 종류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잡과(雜科)로 나뉜다. 이 중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과거는 단연 문과였다. 성리학적 이념 위에 건설된 조선에서는 지식인을 최우선으로 대접해왔기 때문이다.
문과에는 예비 시험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가 있었는데, 이것을 합쳐 소과(小科)혹은 사마시(司馬試)라도고 불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과 하급 문관에 등용될 수 있는 자격, 그리고 대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무과는 고급 무관을 뽑는 시험으로 용호방(龍虎榜)이라고도 불렀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분 없이 한 번만 치렀다. 시험과목은 각종 무기술과 격투술, 그리고 경서 및 병서에 대한 것이었다. 보통 무관 자제나 향리, 양인(兩人) 등이 응시했다.
잡과는 통역사 시험은 역과(譯科), 의사 시험인 의과(醫科), 천문 지리 역법의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법률가의 시험인 율과(律科)로 구분된다. 이 역시 소과와 대과의 구분은 없었고 중인 이하의 사람들이 응시했다.
3) 과거 시험공부
옛 말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집에서는 엿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당분 섭취가 두뇌 활동을 촉진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사자나 가족 모두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문과의 시험은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가 있었고, 그것들은 각각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로 나뉘어 치러졌다. 초장에서는 경전에 대한 암기와 이해를 평가했고, 중장에서는 문장력을 평가했으며, 마지막 종장에서는 조정 현안에 대한 논술 시험, 즉 시무책(時務策)을 치렀다.
따라서 과거 준비생의 공부는 경전의 암송과 이해가 기본이었고, 거기에 더해 문학적 자질과 표현력도 충분히 배양해야 하며, 국정 현안에 대한 진지하고 참신한 견해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또 보기 좋은 답안 작성을 위해서는 서예 연습도 빠뜨리지 말아야 했다. 한 마디로 조선 사회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소양을 다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4) 과거시험장 광경
과거 시험은 어떤 식으로 치러졌을까? 큰 시험과 작은 시험에 따라 절차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녹명(錄名) : 응시원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외조의 관직과 이름, 본관을 기록한 사조단자(四祖單子)를 낸다.
시지(試紙) 구입 : 시험 답안지를 구입하여 녹명과 같은 사항을 기록하고, 그 위를 종이로 봉한다. 감독관이 개입하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시험장 입장 : 시험 당일 새벽에 문을 열면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들어갈 때는 일일이 소지품을 검사했고, 입장 완료 후엔 문을 걸어 잠근다.
시험문제 풀기 : 시험은 보통 필답고사와 구술시험으로 나누어 치러졌다.
답안 제출과 채점: 수험생은 수권소(收卷所)에 답안지를 제출한다. 채점은 당일에 이루어지고 평가는 모두 9등급으로 나뉜다.
출방(出榜) : 합격자를 발표하는 절차이다. 이 자리에는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다. 장원 급제자에게는 어사화, 홍패, 양산, 주과(酒果)가 내려진다.
은영연(恩榮宴) :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베푸는 축하 잔치이다.
유가(遊街) : 급제자는 3 - 5일 동안 거리 행진을 한다. 이 때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시골 출신들은 고장 현령의 후한 대접을 받는다.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순간이었다.
5) 부정행위
어떤 시험이든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었다. 옛날 과거 시험에서도 다양한 부정 행위가 일어났다. 컨닝페이퍼를 만드는 단순 행위에서 집단적으로 모의한 조직 부정까지 형태도 무척 다양했다. 순조 18년(1818) 성균관 사성 이영하가 올린 상소에는 8가지의 부정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차술차작(借述借作) : 남의 글을 몰래 베껴 쓰는 것
수종협책(隨從挾冊) : 책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
입문유린(入門蹂躪) : 수험생 아닌 사람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
정권분답(呈券分遝) : 미리 써놓은 답안지로 바꿔치기 하는 것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장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써서 주는 것
혁제공행(赫蹄公行) :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것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감독관을 바꾸어 들여보내는 것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답안지를 가지고 갖은 농간을 부리는 것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부정 행위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또 지방의 향시(鄕試)에서는 수험생들이 작당하여 시험장을 습격하고 감독관을 폭행하는 난동사건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