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데마고그의 사기’와‘참주의 폭력’
그리스 아테네 시대 ‘데마고그의 사기’와 ‘참주의 폭력’으로 점철된 정치질서의 변화는 결국 사기와 폭력이 근본 원인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도시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정의를 논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인간의 덕성을 주장했다. 그러니까 정치에서의 사기와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철학의 근본 과제였던 셈이다.
근대에 와서는 정치사상이 달라졌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여우처럼 영악한 간계와 사자처럼 용맹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사기와 폭력으로 이탈리아를 보전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며 인간 모두에게 사기와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때문에 공통의 권력 리바이어던를 창출하여 사기와 폭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은밀한 욕망으로 얽혀있는 인간은 모두가 위선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권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이뤄서 사기와 폭력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칸트 또한 인간이 타인을 도구로 삼으려는 사기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야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밝혔는데, 이처럼 인류는 사기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서 결국 정치철학의 근본 과제가 사기와 폭력을 없애는 일로 점철되어 왔다.
사기와 폭력을 없애는 방법은 강제적 제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강제적 제도는 힘을 쓰거나 힘을 쓰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통제한다. 그래서 국가가 만들어졌고, 국가는 법을 만들어 사기와 폭력을 규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법을 집행하는 국가는 정당한 권위를 가져야 한다. 공통의 이성과 공통의 도덕에 근거를 둔 권력이 바로 권위를 갖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목표는 권력 행사의 도덕성을 따지는 법이고, 그리고 그 도덕성은 사기와 폭력을 없애는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을 잃은 정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12.3 계엄령 선포는 정치 철학적으로도 수용될 수가 없는 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사상 측면에서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반민주적이다. 민주 정체가 내포한 헌법과 법률에도 위배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사상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정치체다. 기원전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200년간 지속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논쟁거리였다. 이러한 논쟁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에서도 있었는데, 당시에도 민주정은 법 앞에 평등과 인민 주권을 내세워 무지하고 무능한 다수에게 권력을 주어서 다수의 전제를 낳는다고 우려했다. 아테네 역사에서도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의미하면서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과 평등이라는 이름의 무례와 폭력이 점철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래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멸망은 선동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대중에게 아첨하고 대중의 욕구에 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플라톤 역시 민주주의 꺼린 이유는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이 어떻게 행사될지를 가늠할 수가 없으며, 어떠한 형태의 권위도 확립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안전을 제공할 수가 없다는 측면을 갈파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온건한 민주정‘으로 진화시켰지만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체제가 아니란 점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다.
17세기가 되면서 민주주의의 나쁜 이미지가 불식됐는데 이는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왕권에 대한 복종 의식이 생겨나고 로크와 같은 정치이론가들의 인민 주권론과 계약론이 널리 퍼지면서 정부 신탁론이 등장하여 이것이 미국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물론 오늘날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라는 대의 민주주의형태로 발전되면서 미국 링컨 대통령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주장으로 민주주의는 개념화됐다. 여기서 ‘인민의 정부’는 정부의 정당성이 전적으로 인민의 의지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며, ‘인민에 의한 정부’는 모든 인민이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민을 위한 정부’는 정부의 정책이 모든 인민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세기가 되면서 민주주의는 산업화와 함께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발전하면서 대중민주주의로 이행되는 다수 지배가 생기면서 이른바 ‘다수의 전제’라는 민주주의의 맹점을 드러나게 했다. 토크빌이 그래서 자발적 동의에 의한 ‘민주적 전제’를 우려했고,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여론의 전제가 군주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희망찼던 2024년 갑진년이 저무는 연말에 참으로 느닷없는 대통령의 계엄령이 선포되어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혼돈의 시기가 도래됐지만 성숙한 민주 시민의 적극적 참여 속에 민주주의 회복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이다. 아무리 원인을 이해한다고 해도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법이다. 성경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양초를 훔칠 수는 없듯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무엇보다도 헌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정당성이기 때문에 헌법을 위반한 폭력은 반민주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옹지마’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정치가 실종된 정치권과 권력욕에 취한 권력자들의 비이성적 정권 다툼이 빗나간 우월감과 비뚤어진 허영심으로 번지면서 국민을 참담하게 만들어도 이 또한 전화위복이 될 것을 기대한다.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