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무렵 나치 독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의 세 나라는 나치의 침략을 받을 경우 서로 힘을 합해 싸우기로 협정을 맺는다. 가장 먼저 독일의 침공을 받은 나라는 폴란드였고, 폴란드는 대항해 싸우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이웃 헝가리도 대항하다가 힘에 부쳐 결국 항복하였는데, 체코는 승산 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재빠르게 항복하여 큰 전화를 입지는 않는다.
그러나 체코는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해방된 후 다시 소련의 간섭과 지배를 받게 된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들이 이에 항의하여 일어난 민주화 운동 시기를 가리킨다. 1968년 1월 5일 개혁파 지도자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나, 8월 21일 소련과 바르샤비 조약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당시 둡체크는 경제와 정치 면에서 분권화를 실시하여 시민의 자유를 좀더 보장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보도, 표현, 이동의 자유 제한을 폐지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는 '공산주의는 착취 계급의 지배에서 노동 인민을 해방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자유주의 체제보다도 개인의 풍족한 삶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 비밀 경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두 동등한 나라로 연방화하기호 한다. 서방 국가와도 좋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과 다른 공산 국가들과도 협력하는 내용도 있었다.
답갑지 않게 여긴 소련 측에서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무력으로 침공해 진압한 것이다. 대규모 이주 물결(총
30 만 명이 탈주함)이 휩쓸고 한 학생이 항의 자살까지 하는 등 비폭력 시위로 대응했지만 군사적 저항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음을 당해(당시 72 명의 시민이 죽음) 전 세계 여론의 비판이 일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까지 점령 상태에 놓인다.
소련군은 민주화 지도자 둡체크를 실각시키고, 구스타프 후사크가 후임 대통령이 된다. 그는 둡체크의 모든 개혁을 무효로 돌린다.
1987년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시장 경제화 정첵인 글라스노스티와 페레스트로이카가 둡체크가 제시한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임을 밝혔다.
프라하의 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불씨는 체코 국민들의 가슴에 살아남아서 마침내 1989년의 벨벳 혁명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종식시키는 결실을 맺게 된다. 둡체크는 연방 의회 의장에 선출되었고, 1992년 6월까지 재직하다가 11월에 세상을 떠난다.
억눌렸던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요구가 들불처럼 번지며 타오르자 권위주의 정권들을 무너뜨리는 변화가 현대 세계사에서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고 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민주화 투쟁이었던 벨벳 혁명이다.
11월 17일 청년사회주의연맹에 속한 젊은이들이 프라하에서 독일 나치정권의 점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살해당한 대학생의 50주년 추도식을 열었다. 오후가 되자 인원은 1만 5천 명으로 늘었고, 행사는 민주화 시위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프라하 시내를 행진했다.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 막아서자 시위대는 경찰에세 꽃을 건네며 평화적 시위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찰은 곤봉으로 두들겨패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이는 타오르는 민주화 시위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현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등에서 다음날부터 27일까지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68년 프라하의 봄 당시에도 참여했던 극작가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중심이 되어 시민포럼이란 단체가 조직되고, 슬로바키아에서도 '폭력에 반대하는 민중'이란 단체가 조직되어 시위를 주도했다.
프라하의 봄 이후 정권을 장악한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은 대리인을 앞세우고 2선 후퇴하는 무마책을 내세웠으나 민중들은 속임수를 알아채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발표 다음날인 25일과 26일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 광장에 운집하고, 27일에는 전국민의 75%가 2 시간 동안 총파업을 감행한다.
결국 체코 공산당은 시민포럼과 대화하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후사크는 12월 사임을 발표하고, 둡체크가 연방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의회에서 하벨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후사크 대통령은 공산당에서 제명되었지만, 처벌은 받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0년 체코에서는 40년 만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벨벳혁명의 열기가 번져 다음 달인 89년 12월, 같은 동구권의 루마니아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20 년 넘게 철권 통치를 벌이던 나콜라에 차우세스쿠 정권은 체코 정부와는 달리 총을 쏘며 유혈 진압에 나섰다. 시위가 격화되자 결국 차우세스쿠는 헬리콥터로 대통령궁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시민들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한다.
첫댓글 어두웠던 프라하의 정리한 역사를 잘 읽었습니다.
역사는,"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임"을 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