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
이것은 교사들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들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문제를 상담하면서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히 교사가 어떤 것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그들을 도와야 할지를 생각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무엇보다 교회에서 학생들이 이제 기술할 내용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할 것을 예상한다. 왜냐면 이런 것들이 강조되어야 할줄을 거의 생각지 못하고 오늘도 교회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교사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생들을 우리가 '전인격적'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이 무너진 교육을 행한다면 결코 이 아이들이 장차 하나님나라를 변화시킬 그릇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물을 높이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를 깊이 다지는 작업이 우선이다. 교회학교 교육은 그 기초를 다지는 일이라고 믿는다. 당장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진정한 부모의 심정이 아니다. 일전에 아내와 만 4세된 딸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 원장은 아내에게 '찬송가 반주위주로 가르쳐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피아노 배우는 목표를 그정도에서 정하고 쉽게 하겠느냐는 뜻이었다. 그 때, 아내는 단순히 대답했다. '아니요. 처음부터 차근 차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찬송가 반주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 당장 아이들이 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한다고 그들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영혼의 내면적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자칫 신기루와 같은, 모래위에 집을 짓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모든 교사들이 학생들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베드로를 일컬어 "너는 장차 게바라"하시고는 오랜 시간동안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인내하셨던 주님처럼 우리 학생들을 대해야 하리라고 믿는다.
1. 그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육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그것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제자 삼는 이 사역이 제일 첫 번째로 이루어져야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구원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일학교나 학생회에 참석한 아이들, 그리고 청년들도 두 가지 종류의,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학생이라고 볼 수 있다. 구도자일 때는 인생을 배워야 하는 학생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학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그에게 해결해 주어야 하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 영혼의 문제, 죄와 하나님의 은혜, 심판에 대한 문제,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문제를 그가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우리는 참된 교회의 교육이 이뤄진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이 부분에 신경을 쓰고, 무엇보다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애를 쓰길 바란다. 정말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교사로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내가 전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복음을 잘 못 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렇지만 복음에 대한 열정은 결코 뒤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스펄전이 "설교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담겨있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설교라고 할 수 없다"고 역설한 말의 의미가 조금 이해되는 듯 하다. 복음과 십자가의 능력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처음 주님을 믿고 난 후 3, 4년을 돌이켜볼 때, 그 때 내가 한 일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 같다. 가까이 있는 친구중에 날 통해 복음을 듣지 못한 친구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가 주님 안에서 나의 은사를 발견하면서부터 차츰차츰 시간분배가 치우치기 시작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실은 더 열심히 해야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주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있고, 요즘도 나의 개인적인 숙제는 다시 복음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정리해 두는 것이다. 이것이 올 한 해 다시 내가 해결할 숙제이다. 지금도 매일 십자가의 능력과 바울의 심령처럼 "그리스도 예수만 증거하기로 작정하는" 간절함을 배우고 있다. 뜨거움이 마음속에 있고, 모든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울 수 있게 되는 축복을 경험하고 있다.
교사라면 누구나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명확한 복음의 진리를 알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될 수 있도록 내가 축복의 통로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이 그것을 분명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은 배워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많은 교회학교에서 어쩌면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강조되었을 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학교는 우리가 '학교'라는 개념으로 접근을 해야한다. 성경적인 전인교육을 시켜야하는 것이지 복음만 전하는 곳이 아니다.(성경은 복음을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진리'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구원받게 하는 십자가 메시지로 제한시킬 때가 많다) 학생들이 계속 복음 메시지(좁은 의미에서)만 듣고 자란다면 균형 잡힌 전도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격적인 미숙함과 그 외에 배워야하는 것들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날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1)교사를 통해 그들이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서 보호와 안정과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교사는 그것을 해주어야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현대 교육과 사회문제를 보면 사람들이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 말은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나란 존재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이것을 상실해버렸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붙들고 '왜 사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과연 누가 제대로 답변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큰 문제요, 교육의 맹점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이 공부하는 기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점수가 좀 적게 나오면 빌딩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공부좀 잘 하면 왕따당하기도 하는 비극... 이런 이상한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사람의 가치, 나란 사람의 그 영혼의 가치,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아이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교사는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는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누가 그것을 해줄 수 있는가? 심지어 부모도 그 일을 못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조차도 그 아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오늘날 아이들이 교회에서 그런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는가? 위로 받는 경험을 하는가? 보호받는 경험을 하는가? 아니면 조금 실패했을 때, 교사로부터의 책망과 질책과 견제와 꾸중과 같은 이러한 경험을 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영혼을 보호해주고, 돌봐주고, 사랑 받을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주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그것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로 힘을 내게 하고, 더 살아 볼만한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이런 경험이 있었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서울북부교회에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참석했을 때 말씀을 전하고 내려왔을 때였다. 그 때 나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메시지를 전했었다. 그리고 내려와서 나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박준형 형제님께서 상기된 표정으로 나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너무 훌륭한 메시지야. 정말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어."
그리고는 열린문 사무실로 함께 차를 타고가는 내내 그 이야기를 하셨다. 계속 같은 이야기를... 그 때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이 일을 해야하겠다. 누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지 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겠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평생 힘을 낼만한 그런 힘을 얻었다.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줄 때. 나는 칭찬받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교사가 학생에게 해 주어야 할 일이요, 그들이 우리에게서 반드시 받아야 할 축복인 것이다.
2)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이 왜곡되어 있는가? 얼마나 비기능적으로 가고 있는가? 가정이 제대로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좋은 가정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고, 어머니가 정말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훌륭한 일을 하고 있고, 자녀들은 그 위치에서 순종과 섬김을 통해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나가는 그러한 가정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은 그러한 가정인가? 아닐 것이다. 많은 가정이 속된 말로 지지고 볶고 싸우는 그런 모습이지 않는가? 교회에서는 성도들과 따뜻한 교제를 나누고, 행복을 느끼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이 믿지 않는 집이라고 가정하자)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고 어머니가 화를 내며 소리지른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그 순간 교회에서 충만해 졌던 내 심령안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없는가? 이것이 왜곡된 가정의 모습이다. 비기능적인 가정이라는 말이다. 그 순간 충만했던 모든 기쁨은 비둘기처럼 날아가 버리고 우리 또한 소리치는 것이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서.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때로는 뭘 열심히 해도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법이 없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은 많은 칭찬을 받고 자랐는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든 가정이든 칭찬을 많이 해야한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많이 칭찬하라. 이번에 낸 책에도 '설령 사단이 틈탈 수 있을지라도 칭찬하라, 칭찬을 아내서 사단이 틈타는 것이 문제지 많이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뭔가를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지 않은 적이 많았다. 너무 속상해서 더 이상 그 일을 하고싶지 않았다. 어떨 때는 교회에서 뭘 열심히 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칭찬을 안 해준다는 말이다. "야, 잘했다."이 한마디면 되는데 말이다. 누가 그 일을 계속하고 싶겠는가? 속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바로 우리의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정말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정말 살아있을 만하다. 내 인생이 정말 가치가 있다'라는 것을 못 느낄 수가 있다. 가정에서부터 못 느낄 수가 있다. 교회에서는 어떠한가? 교사가 바로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이 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자! 아이들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축복하는 삶]인 것이다. 참고로 학생들에게 교사가 말을 할 때, 때로 격려하거나 충고할 때 주의해야 할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 하겠다.
첫째, 아이에게 말할 때 주의하라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께서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리 작고 비천하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 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맡기셨다. 그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일일이 그 사람의 삶을 보호하고 있지 않는가. 그만큼 귀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한다. 자칫 그들의 심령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아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교사들은 학생들이 어리다고 함부로 '하대'하는 것을 쉽게 본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들이 어리다고 그들의 인격적 가치까지 낮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앞에서 한 형제, 자매로 봐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신사적으로 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아이에 대해 말할 때 주의하라
자칫 잘못 말하면 그 아이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한 말이 어디로 사라져서 어디에 가있을지 모른다. 학생들에 대해서 말할 때,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그 아이의 미래를 기대하면서 말해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시각이 바뀌어야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그 친구 말이야..."하고 쑥덕거리기 시작할 때 한 영혼을 죽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맞아, 선생님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냐. 내가 생각해도 그래."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쯤이면 벌써 한 영혼은 반쯤 죽어있을 것이다. 그 말이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아이가 '잘못했을 때' 주의하라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책망과 권면의 원리를 여기서 제시하고 싶다. 함부로 책망하거나 권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사는 반드시 학생들 책망하고, 경계하고 바로 잡아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해야 참된 교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행할 때, 우리가 정말 신중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성경적인 책망과 권면은 '호랑이 입에서 가시를 빼내는 일'에 비유하고 싶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특별히 바울이 말하는 이 본문에서 '신령한 너희는'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한다. 이 말은 아무나 책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책망하라.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난 신령하지 않은데...'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바로잡아주는 책임마저 회피할지 모르겠기에 다시 말하겠다.
교사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내 삶을 먼저 본이 되게 세우고 난 후, 내 눈의 들보를 빼내는 일을 하면서 학생들을 바로 잡아 주자는 뜻이다. 교사는 매일 지각을 밥먹듯이 하면서 학새들이 학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으로 권면한다면 속된 말로 '씨도 먹히지 않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또한 교사가 그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상호 공감대가 형성될 때, 비로소 권면과 경계는 최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일을 할 때는 반드시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하고 하고 난 뒤에 해야할 일이 있다. '너도 네 자신을 돌아 보라' 는 것이다.
학생들을 책망할 때, 가르칠 때, 꾸짖을 때, 바로잡아줄 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세상에서도 아이들이 꾸중들었다고 집을 뛰쳐나오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에서 이 문제는 너무나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비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무원칙적인 체벌과 책망에 익숙하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그 아이를 바른 방법대로 꾸짖고 벌주는 것을 못 해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종종 한다. 나도 가끔씩 다른 집에 갔을 때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는 아이가 뭘 잘못해도 별 지적 없이 넘어가는데, 반대로 기분이 굉장히 나쁠 때는 똑같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화를 내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도대체 뭐가 기준이야? 기분 좋을 때는 봐주고 나쁠 때는 때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인생에 기준이 없어지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이다. 말씀에 따라, 성경적인 원칙하에서 징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가정에서 자라왔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교사가 어떻게 반응해주느냐가 그 아이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실수를 용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방종하는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 경계에는 원칙이 있다. 지금 이것을 상세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나중에 대인관계문제를 다룰 때 생각하기로 하자. 어쨌든 아이들에게 신사적으로, 온유한 태도로 그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해줄뿐아니라 무엇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칠 때도 그렇게 한다. 부모와 약속을 한다. 아이에게 '네가 이런 일을 잘못했을 때 널 어떻게 대우해줬으면 좋겠니?'라고 말을 한다. 우리 집에서더 하영이에게 가끔 그렇게 한다.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아이가 잘 못했을 때 묻는다.
"너 또 이렇게 했을 때 아빠가 어떻게 해줄까?"
그러면 스스로가 말한다.
"다섯대 맞을께요"
그렇게 정해진 것은 스스로 정했기 때문에 다음에 잘못을 해서 혼이 나더라도 마음에 앙금이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약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부모가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심하게 꾸중을 하는 경우, 아이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것이다. 심각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그런 삶의 원칙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럼 교사와 학생사이에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하는 내용은 특별히 주일학생들에게 더 적용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 스스로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주라.그러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나 교사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어제 괜찮았는데 오늘 안되다. 이런 것은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진리도 바뀔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그러므로 어제 안 되는 것은 오늘도 안 되는 것이다.또한 저 교사가 "No!"하는 것은 이 교사도 "No!"여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안 되는 것은 아빠도 안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상당히 영리하다. 엄마한테 가서 "엄마, 이거 해도 되요?"했을 때, 엄마가 "안돼."라고 말해도 다시 아빠한테 가서는 똑같은 걸 묻는다. "아빠, 이거 해도 돼요?라고. 그럴 때 부모가 사전에 의논이 없으면 아이의 작전은 성공한다. 아빠는 승낙을 해주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아이는 묘한 것을 깨닫게 된다.
'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구나. 사람만 잘 고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겠구나'
바로 이러한 때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집에서는 하영이가 그런 식으로 물을 때면 하영이를 혼낸다. 하영이를 앉혀 놓고
"엄마가 안 된다고 했으면 안 되는 거지, 왜 아빠한테 또 물어?'
라고... 원칙이 분명한 것이다. 하영이는 엄마가 "노"한 것을 아빠에게 묻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혼나기만 하니까. 그러므로 교사들 간에도 원칙이 통일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은 성실히 지켜져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아이는 '구속받는다, 제제받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한 자유를 느낀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의 생각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면으로부터 자기가 표현은 할 수 없지만 안식을 느낀다. 정말 자유함과 평안함을 느낀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아빠라도 허락해 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런 경우는 인생에 기준이 없어지는 것 같은, 허무함이 찾아온다. 아이는 소속감이 사라져 버리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나뉘어졌기 때문에 어디에 속해야할 지 굉장한 갈등에 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시켜야 한다. 당장은 아이에게 "NO!"라고 말해서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진정한 평화를 심어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가정을 이루더라도 이것을 꼭 생각해야할 것이다. 결론은 하나님이 보시는 가치를 학생들은 알아야한다는 것이 두 번째 내용이었다.
3.진정한 권위를 배워야 한다.
권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교회에서 권위에 대해 학생들에게 잘못된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을 종종 본다. 이런 식으로 전달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순종하라. 설령 잘못되었을지라도 순종하라"
이렇게 가르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옳다. 그러나 옳지만 이것만 가르쳤을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성경은 그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쉽게 합리화시키는 말일 가능성이 많다. 마치 남편이 아내를 향해, "섬겨!"라고 말했다고 하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말을 듣고 있으면 화가 나느냐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왜 속이 상하느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방법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그 말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권위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청년 중에 나와 함께 공부하는 형제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권위를 알기 때문에 이 형제들은 성장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무슨 일을 할 때 굉장히 조심한다. 오히려 너무 조심해서 탈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좀 대범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조심성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행동했을 때 이 교사가 뭐라고 생각할까? 이것이 맞는 것일까? 두려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내 위에 누군가가 있다'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유함을 준다.나도 그런 경우가 있다. 내가 존경하는 앞선 분이 계신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분을 의식한다. 이 분이 뭐라고 말할까? 나중에 이걸 보고 어떤 말을 하실까? 그것이 내게 기준이 되기 때문에 나는 굉장한 자유감을 느낀다. 어느 정도 평가의 기준이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일을 하면서 안심하게 된다. 그게 없다면 나는 마치 스프링처럼 사방으로 튀어다닐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권위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문제를 횃불지에 실은 적이 있는데 교회에서의 권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때 나는 네 가지를 제시했었다.
1)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사랑과 자비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심으로 주님의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다시말해서 사랑하는 존재,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권위자라는 것이다. 그를 우리가 존경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권위는 먼저 사랑과 자비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목자와 같은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2) 권위는 공의로써 나타난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권위의 문제였다.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4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권세를 준 것은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교회에 권위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장로와 집사, 이러한 권위들을 주신 이유도 역시 교회 내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러므로 공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정당하게 꾸짖고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해줘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볼 때 사랑과 자비를 말했다.
3) 하나님의 권위는 섬김으로 나타난다.
교사가 "내가 교사니까 내 말 들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적인 방법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의 방식은 그것이 아니었다. 섬김으로 본을 보이셨다. 발을 먼저 씻김으로써 "너희도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으로 박혀 버린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어도 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해야할 일이 있다. 섬겨라! 서로의 발을 씻겨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무 제자들은 "네."하고 가서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처음엔 되다가 안 된다는 것이다. 왜? 본 게 없기 때문이다. 섬김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섬기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심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분명히 알게 하신 것이다. 대개의 경우 리더를 따라가게 된다. 앞선 교사들이 하는데로 학생들이 따라간다. 다른 지역에 날 좋아하고 많이 교제 나누는 형제가 하나가 있는데 그 형제와 같은 교회에 있는 한 학생 자매가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형제님이 최기관형제님 말투까지 닮아가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분의 스타일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꾸 보고, 듣고, 생각하다 보니까, 흉내내려고 하니까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섬김을 베풀 때 진정한 권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정말 큰 자구나.
4) 하나님의 권위는 순종을 통해서 전달된다.
벧전 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 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누가 권위를 얻는가? 순종해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순종한 경험 없이, 배운 경험이 없이, 가르치고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다. 다시말해서 나이가 차서 어느 정도의 위치가 되어서 그 위치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까지 사람들 눈에 배운 간증이 없다고 하자.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차근차근 배워왔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교사로 나섰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그 사람의 말을 듣겠는가?
'당신이 순종을 압니까?'
이런 질문들이 학생들의 마음속에 떠오를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배우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사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할 때 우리 생각에는 '교사가 뭘 배워, 가르쳐야지...'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방법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니, 배우는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야한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너희를 위해서 나는 계속 배워야 해"
그러면서 세미나에 참석하고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그 교사를 보고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보는가?
"에이, 우리 선생님은 아는 것도 없어. 저렇게 매일 공부만 하고... 모르니까 공부하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그런 교사를 존경한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연약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부하고 배워나가고 순종해 가는 교사를 보고 학생들은 권위를 느낀다. 그 사람의 말을 따르고 싶은 것이다.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는 그 교사를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하는구나...'하고 권위를 느낀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권위가 표현되는 네 가지 방식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교사의 이러한 삶을 통해서 권위를 배워야한다. "나는 교사니까 내 말 들어."이런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무익한 교사가 하는 말이다. 교사는 오히려 "내가 교사일지라도 너한테 배우고 싶다." 학생들에게 그러한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 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야한다. 정말 학생에게까지 배우는 자세를 가지는 교사, 그 교사는 존경받을 것이다. 그 교사 밑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의 권위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카리스마가 권위라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좋은 의미에서의 카리스마는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흔히 '밀어붙이기식'의 카리스마, 즉 군대 지휘관식의 카리스마는 교회에서 곤란하다. 주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당신의 권위를 세우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4. 공동체를 배워야 한다.
1) 그룹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참여 시키라
우리는 다 그룹에 속해있다. 첫 번째 그룹은 가정이다. 두 번째는 교회라는 그룹이다. 어떤 교회에 속해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은 만약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래도 남부 교회를 선택하겠는가?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속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못 죽어서 사는 것처럼 억지로 '하나님이 내게 맡긴 운명이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에서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안타까운 것이다.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주님, 빨리 오십시오."그건 건강한 신앙이 아닌 것이다. 소속감은 중요하다. 우리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 하고, 학생들에게 그들이 좋은 곳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건강한 프라이드가 필요한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길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좋은 공동체에 소속되어있다면 그 가치를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그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것을 가꾸기 위해서 애를 쓰도록 해야한다. 신앙은 개인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 하나가 잘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우리가 애를 써야한다. 우리 모두 가족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청소년시기는 사회활동을 배우는 시기고, 그룹의 파워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연령이다. 아이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그것을 안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그러한 그룹활동을 통해서 그룹을 발전시키는 것을 배우도록 해주고 소속감을 강화시켜 주어야한다. 그것을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계획해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가 있다.
2)공동체를 배워야 한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선 공동체 신앙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내가 강조했던 것은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 속에 담긴 진리였다.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왜 우리 아버지라고 했는가?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이 구절을 잘 바꾼다. 복음을 전할 때, 그 상대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읽으면 안돼요. 나의 아버지라고 해야 해요."라고 종종 말한다. 물론 필요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 이 후, 주님 안에서 성숙해 가는데 필요한 것은, 왜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신앙]이다. 함께 더불어서 주님을 믿고, 아버지를 섬겨가고, 아버지의 시각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식이다. 세상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들러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왜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사는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 내가 주인공도, 중심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께서 주인공 되시는 것이다. 엑스트라여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영화 자체가 멋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너무나 멋지면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싶기 마련이다.
학창시절에 연극을 했었는데, 주인공이었던 연극보다는 오히려 조연으로 출연했던 어떤 영화가 훨씬 기억에 남는다. '처용'이라는 유명한 극단이 있는데 거기서 예술제에 나가는 연극을 위해서 우리 학교(경북대학교)에 엑스트라를 요청했다. 학생 몇 명만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강 역할이라곤 하인으로 나가서 춤출 때 같이 몇 바퀴 돌고, 대사라고는 "예이~."라는 그 짧은 말 한 마디정도였는데도 왜 내가 주연을 했던 연극보다 더 기억에 남을까? 그것은 시민 회관 대강당에서 했던 아주 큰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그 극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고 자랑스러운 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시다. 이 인류역사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나는 이 역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져가는 엑스트라이다. 먼 아프리카에서 어느 한 사람이 "나는 예수님 사랑해요."하고 화면이 지나가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잠깐 살다 가면서 사람들에게 "나도 예수님을 사랑해요." 라고 말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다 끝났을 때 이제 천국에서 모이는 것이다. 그 때,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 한 사람뿐이다. 주님 밖에 없다. 다 주님을 높이지 '아, 나 연극 잘했어.' 이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잠깐 연극하러 왔다가 돌아가야 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다. 교회를 섬기도록 해라.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5.삶을 배워야 한다.
다섯 번째로 학생들은 삶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운다. '경험이 훌륭한 선생이다'라는 말도 있다. 죤 듀이는 유명한 교육학자지만 난 싫어한다. 이 사람의 교육철학 때문에 오늘날 교육이 이렇게 엉망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반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교육철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날 20세기의 교육철학은 죤 듀이를 의해서 이끌어져 왔다. 그런데 아무튼 그가 했던 좋은 말 한 마디는 이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은 이제 진짜 세상에 나가게 되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이렇게 말해서는 않된다. 왜냐면 교실 안이 교실 밖과 같도록 같은 현실을 배우도록 교사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실 안에서 이미 교실 밖의 현실을 배울 수 있도록 미리 배울 수 있도록 교실 환경을 그렇게 바꾸어 줘야 한다."
그렇게 강조를 했다. 문제가 많은 사람도 가끔씩 쓸만한 말도 한다. 아무튼 교회 안에서 학생들에게 이론을 가르치고 나가서 "여러분 이렇게 하십시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미리 작은 경험이나마 안에서부터 실질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삶의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 QT를 강조할 때 왜 강조하는가? 자신의 삶의 문제기 때문이다. 왜? 적용의 문제를 강조하는가? 나의 삶의 문제를 다루라는 것이다. 적용 문제를 왜 꼬치꼬치 교사가 검사를 해야 하는가? 학생들이 '나는 오늘 형제를 사랑해야 되겠다.'라고 적으면 0점을 줘야 한다. 안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직접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학생들을 유도해야 한다.
어떤 분이 교회에서 재미있는 일을 했었다. 교회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른 교회의 교사를 초청했다. 그런데 이런 부탁을 했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강의를 하실 때, 마치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인 것처럼 행동해 주십시오." 이렇게 교사들끼리 미리 약속하고 강의를 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죠? 설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엉터립니다. 성경이 어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하고 열심히 이야기 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당연히 바뀌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날 때까지 누구 하나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는 강사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아이들의 분위기는 굉장히 이상해졌다. 아이들은 속으로 "이게 아닌데... 분명히 아닌데"하지만 그러나 말은 못했다. 이윽고 이제 그 학생들을 담당하던 교사가 들어왔다. "어땠니?" 하고 물었더니 그 중에 한 학생이 손들고 일어나서 말했다.
"선생님, 내용이 좀 이상해요."
"어, 뭐가 이상하더냐?"
"그 분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니래요."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이죠!!"
"그런데, 왜 그 말을 아까는 안 했니?"
"..."
이렇게 실제적인 문제를 아이들에게 부딪힐 수 있도록 하고는 이제 그 질문을 받고 난 다음 뒤에부터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가르쳤다는 그런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실질적인 부딪힐 수 문제를 그런 식으로 쇼킹하게 아이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있다는 것, 어쨋든 아이들은 삶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는 걸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6.성장을 배워야 한다.
여섯 번째로, 성장을 배워야 한다. 발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Developmentalism'이라는 것을 '피아제'라는 교육학자가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발전을 통해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발달 이론] 또는 [성장 이론]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 이론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4단계의 발달과정을 밟는다고 말한다.그 첫 번째 단계가 감각적인 과정, 이것은 의학에서도, 또는 심리학에서도 통일된다. 어린 아이때, 유아기때 감각적이다. 모든 것을 입으로 넣는다. 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어로 말하면 Pre-operation 단계라고 표현하는데, 행동전 단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세상을 상상의 세계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유아들이 그렇다. 아이들은 인생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모른다. 원인이 무엇이며, 이유가 무엇이며,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런 아이들한테 "우유가 어디서 나오니?"하고 물으면 "냉장고"하며 대답할 그러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거기서 나오는지는 알고 있다. 그 아이들의 그 상태에 맞게 그들의 언어로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이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다. 쉽게 말하면, 동화와 실제의 세계를 혼동하는 시깁니다. 그 차이를 모른다. 공상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열살 미만의 아이들이다.
세 번째 단계는 Operation, 곧 구체적 행동의 단계라고 볼 수 있는데 10∼12살 정도, 초등학교 후반의 아이들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해 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이런 것들로 생각하고 또 아직 추상적이고 복합적인 사고는 하기 힘들지마는 그래도 많은 것들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그러한 단계이다.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나이에 가장 기억력이 좋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구체적인 행동, 뭔 가를 알고 행하는 나이라고 볼 수 있겠다.
네 번째, 13세의 이상으로부터는 '체계화 단계' 라고, 영어로는 'Former-Operation 단계'라고 표현한다. 이론화 시킬 수 있고,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가치관을 심어나갈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어린 아이때는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나, 나중에는 다르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아이들이 이러한 단계별로 자라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가 이러한 아이들을 획일화 시켰을 때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단계에 맞게 교사들은 아이들을 다르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교사들은 강조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가 어른들의 축소판이라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행동이 아이와 같다. 그러므로 교사들도 아이처럼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방법으로, 아이들만의 이해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그러한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주일학교와 학생회에서 그 학생의 연령에 맞는 고유한 독특한 특성을 과연 존중해 주고 있는가? 프로그램 자체가 획일화 되어있지 않는가? 어른들에게 복음 전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전하고, 어른들에게 쓰는 방식대로 그대로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뭐 특별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배운 적도 없다.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가르칠 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발달단계는 이와같이 다르다.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 그 아이들이 그 연령에 가장 좋은 교육을 우리가 못 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회의 주일학교 1시간, 예배드리러 오는 어른들을 위해서 아이들을 맡아 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교육의 장소인 것이다. 인생이 바뀌는 곳이다. 그 아이의 미래가 달라지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독특한 관점에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독특성을 인정해 주는 곳이 없고, 그들의 어떤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기성세대의 틀로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7. 학생들은 인생의 가능성을 배워야 한다.
일곱 번째로 학생들은 인생의 가능성을 배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정말 참된 의미에서 [비젼과 꿈]을 바른 방식으로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훈련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있다. 어떤 분이 오리사냥개를 훈련시키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그 개를 훈련시킬 때, 오리같이 생긴 대체물(모형 오리)을 던진다. 그러면 그것을 잽싸게 뛰어가서 물고 와야 한다. 이것을 수 백번 하는 것이다. 그러면 쓰다듬어 주면서 '잘했다!(Good dog!!)'이렇게 해주는 것이다. 계속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굉장히 재밌는 사실은, 훈련하는 동안 이 개가 물어오는 일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봤더니 그 숲 속에 그 모형 오리 장난감이 수백개나 깔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던졌을 때 그 던진 것은 물고 오지 못할 지라도 그 옆에 것을 물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Good dog!!'해주는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성공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이 되어서 계속 격려를 받고 마침내는 진짜 실패하지 않는, 훈련 받은 개로 성장을 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교육을 빗대어 이런 지적을 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교사들이 학생에게 실패 프로그램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강조하고, 제시해 가지고 마침내는 '난 할 수 없다'는 고백을 받아내게 한다."
그것을 신랄한 지적이다. 우리는 그것이 마치 성경의 전부인양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인가?' 하기 쉽지 않는가? 과연 그럴까? '난 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셔야 된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실려고 하실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주님 안에서 달려나갈 때 무엇인가 우리의 비젼과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우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바른 성장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성공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의외로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이 실패할 때 오히려 더 적극적이다. "왜 그렇게 했어. 야! 그렇게 하면 안되지 않느냐. 좀 더 잘 할 수 없었냐?" 잘 할 땐 칭찬하지 않다가 못 할 땐 그런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교회학교에서 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 사이에서도 비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어떤 경우 열심히 교회 생활하고 있어도 별반 인정이나 칭찬, 또는 격려가 없다가, 행여 일이 있어서 교회를 몇 번 빠지기라도 할라치면 곧장 전화가 몇 군데서 걸려와서는 "열심을 내셔야죠". "주님 생각한다면 그러시면 안됩니다"는 식으로 권면한다. 그것은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마치 내 실패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가?우리 교사들은 성공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조금 잘했을 때, 조금 해내었을 때, 많은 격려와 칭찬을 통해서 더 열심히 하도록 촉구하고,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바로 '목자'이다. 양은 굶주린 채로 먼 길을 갈 수가 없다. 풀을 먹으면서 가야 한다. 풀을 먹고 배부르면 또 일어나서 걷고, 또 다음 초장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학생들에게 성공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 교사들이 애를 쓰고 만들어야 될 것이다.
8.자신의 개성과 재능, 은사를 알아야 한다.
여덟 번째로 학생들은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자 배우는 시간이 다르니까 똑같은 잣대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어떤 사람이 통과했고 어떤 사람은 통과 못했다 해서 그사람이 뒤떨어진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 사람은 학습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려주라,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해 보라. 그러면 그 일을 해 낼 지 모른다. 그래서 차이를 인정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 그가 게으른데도 "그래, 괜찮아"이렇게 격려하라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하는데 그 차이가 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인정해 주라는 것이다.
에디슨은 발명왕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라, 어릴 때 낙제생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16살 때 상대성 이론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4살때까지 말을 못했다. 7살 때까지 글도 못 읽었다. 초등학교땐 낙제생이었다. 또한 그 나이때, 스펄젼은 9살 때 동생들을 마굿간에 모아 놓고 설교를 했다. 그리고 19살 때 스펄젼은 세계에서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이들에게 각각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그 나이에 다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는가! 각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쓰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차이를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라는 것이다. 학생들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하나님 보시기에 우등생이 어떠한 사람일까? 과연 누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은사가 다르고 재능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그 목표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통해서 인정받아야 하고, 격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 남자와 여자의 차이 또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얼마나 억눌려 지냈는가? "여자가 감히!" 이런 무식한 표현을 쓰면서 여성들을 억눌렀는데, 참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남자의 생각이 여자의 생각보다 나은 게 아니다. 많은 경우 나아 보이지만 아니다.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자는 여자나름대로의 독특한 감성과 지혜가 있지 않는가?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난 후 "좋았더라" 하셨는데, 뒤에 그 갈비뼈를 떼어서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어이구 이런~~! 이걸 어쩌지?"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고 그 둘의 완전함을 너무 좋았하셨다. 그러므로 자매들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발 시키라. 또 형제들은 자매의 가치를 깨닫고, 아름답게 경외하며 사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존중해 주도록 해야겠다.
9. 대인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배워야 한다.
아홉번째로 대인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배워야 한다. 사실상 내가 여기에 관해서 책을 내게 된 것도 학생들과 청년들과의 사이에서 이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루다 보니까 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책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서 이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반드시 이해되어져야하고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적인 언어생활을 배워야 한다. 성경적인 대인관계 원칙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내에서나 가정내에서 [예의범절]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격적인 기본기는 너무 중요한데.. 오늘날 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오늘날 아이들이 예의를 모른다. 예의를 배우지 못한다. 왜? 안가르치니까. 수학 공식을 내면 정말 잘 푼다. 수학 공식을 풀면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방해하지 말아요, 머리 아파요. 나, 공부하는데 자꾸 들락날락 하지 마세요."
그 학생이 아무리 수학을 잘 풀더라도 쓸데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자식이라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 실패한 현장이다. 머리는 좀 맹~~ 하더라도 "어머니, 진지 드십시오."할 줄 아는 사람, 어떤가? 어떤 자식을 원하는가? 전자를 원하면 부모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좀 맹하지만, 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면서 섬기면서 살고, 좀 손해보는 듯 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것을 못 배웠을까? 여러분 스스로도 내가 좀 성격은 모나지만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는가? 그저 어떻게 하든지 잘 될려고 하쟎는가? 그게 우리 가치관의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대인관계, 언어생활, 또 예의범절 이 문제는 인격의 기초이다. 인격의 기초는 신앙의 기초라고 믿는다.
많은 경우 교회교육의 커리귤럼을 살펴보면 높이 건물을 쌓아 올리는데 비젼과 꿈이 두고 있다. 나도 사실상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비젼과 주님의 일을 위한 비젼을 계속 심어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심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높이 건물을 쌓아 올리는 그 꿈을 꾸도록 만드는 것과 같다.
"야! 너라는 인생의 그 터 위에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건물을 쌓아 올리자. 그 꿈을 꾸어야 되지 않느냐? 야, 높이 쌓아 올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우리 인생을 건축하자."
이런 말들을 계속해서 어린시절부터 강조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 그 꿈을 듣고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간동안 기초를 쌓은 적이 없는 것이다. 어느 날 건물을 열심히 쌓아 올렸다. 들은 게 많으니까... 보고 듣고 배운 게 많지 않은가? 건물을 그럴 듯 하게 쌓아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보니까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모래 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초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기초를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왜 많은 분들이 좋은 꿈, 비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까? 이것은 나의 결론이다. 신앙의 기초, 인격의 기초, 삶의 기초를 쌓는데 등한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얘기 해 왔다.
' 하나님의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자기 집, 방, 언어도 변화시키지 않는데 무슨 세계를 변화시키겠는가? 영혼들을 사랑해 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집에 있는 동생도 사랑하지 않는데 무얼 하겠는가?'
그러나 교회에선 감동적인 얘기만 계속해서 듣는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했다'하면 와~~! 하며 감동받고선 좋아라고 돌아간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말안듣는다고 동생을 때린다. 그게 무엇인가? 뭔가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르치는 것을 바꾸자. 허드슨 테일러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괜찮다. 10년 뒤에도 된다. 이 아이에게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알려줘 보아라. 왜 내 옆에 사람을 존중해야 되는지. 왜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가치있게 봐 주고, 그 사람 앞에 내가 정말 행동을 조심하고, 언어를 내가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치로 그 사람을 봐줘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되고, 조심하게 되었을 때, 나중에 그렇게 변화된 사람에게 허드슨 테일러 얘기를 해 줘라. 진정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렇구나! 이제 내가 할 일을 알았습니다."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기초를 쌓는 일에 우리의 목표를 두자!
10. 가정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열번째 가정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언젠가 전국 학생캠프에 강사로 가서 [가정]에 대한 특강을 한적이 있다. 그 특강이 끝나고 난 뒤, 한 청년 교사 형제가 나를 찾아 오더니 굉장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형제님, 가정이 그렇게 중요한 지 몰랐습니다. 이제부터 결혼을 위해 기도해야 겠네요."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왜나면 그 형제는 결혼 적령기의 형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럼 이제까지 결혼에 대해서 기도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네!"
"그럼 뭐 했어?"
"그냥 별로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20대 초반에는 조금 관심은 가졌는데. 별로 결혼에 대 해서 그렇게 좋은 것들을 못 봤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졌어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원칙인데, 하나님이 바라시는 건데. 관심이 없어져?' 그것은 마치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로 나에게 들렸다. 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삶의 문제인 것이다.
가정의 아름다움, 소중함, 그 가치를 인정하고 비젼을 품는 것이 안되기 때문에 오늘날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로 성에 대한 원칙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까지도 타락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른 성 지식을 알려주고, 이성관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바른 성경적인 가정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야 된다. 가정이 아름답게 세워져 가면 교회는 당연히 아름답게 세워져 간다. 가정에서부터 행복이 흘러나오면 그것이 생수의 강처럼 교회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교회는 '가정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가 지금 가정들로부터 교회로 나왔지 않았는가?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은 잊어 버리라. 그것이 우리의 과거의 부정적인 모습을 형성했다 하더라도 괜찮다. 잊어 버리라.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주님이 약속하신다.
11. 참된 경건을 배워야 한다.
열한번째로 참된 경건을 배워야 한다.
사실 이것이 교회 교육의 목표다. 예수님을 닮는 것, 지금까지 다뤄온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닮는 그 삶을 위한 것이지 않는가? 좀 세부적인 내용들을 다뤘다고 본다. 그렇지만 참된 경건을 배운다는 것은 교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신앙의 목표를 보여주고, 본을 또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학생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강조를 했었는데 사실 계속 강조할 자신이 없었다. 왜냐면 나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저녁에 기도할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제대로 못배웠는데, 누구를 가르쳐.'
그리고는 내 맘속에 떠오르는 갈망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 며칠만이라도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은 '아~~!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고, 기도 노트는 이렇게 쓰는 것이고, 기도하는 관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고, 정말 기도의 능력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울 수 있게 도와줄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내가 쉽게 배울텐데. 적어도 뭐가 뭔지는 알고 해 볼텐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배운 것이 부족하고, 경험한 것이 없으니 참 어렵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내가 병원에서 실습할 때 경북대학 병원에 옥상에 조그만한 소예배실이 있었다.(거기서 병원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와서 예배드렸음) 실습할 때 점심을 일찍 먹고 계속해서 30분 이상을 거기에 올라가서 매일 기도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그 모습이 아름다웠는지, 그 예배소를 지키는 전도사 아주머니한테 우리 교회의 아는 한 간호사 할머니께 전화가 했었다. 중매를 서고 싶다고...^^;
내 열심히 어떻게 비추어졌는가에 나는 관심없었다. 다만 나는 그때 기도를 배우고 싶었다. 정말 기도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매일 그렇게 올라가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솔직히...지금은 그렇게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지 않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참 안타깝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 열심히 본을 보일 때 학생들은 쉽게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교사의 모습을 통해서, 교사가 학생에게 "와 보라!"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을 때 학생은 변화될 것입니다. 왜? 가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학생들에게 "와 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나의 숙제이고 여러분의 숙제일 것이다. 우리가 참된 경건의 능력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학생들에게 진정한 삶의 본을 보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만 학생들에게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교사가 경건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학생들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평생의 삶을 통해서 쌓아가야 할 보물인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경건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소망한다.
내가 청년 시절에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다. O.J. 깁슨 형제님이라고 유명한 미국의 사역자인데, 당시 한국에 몇 번 오셔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나는 그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말씀을 들으려 강단 앞에 내가 앉아 있었다. 저 쪽에서 문이 열리면서 강사였던, 70세가 넘었던 백발의 그 형제님이 걸어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때, 내 눈에서 갑자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놀랄 정도로 주체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때, 내 마음에서 소리치는 외침이 있었다.
'저기,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해 온 사람,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해 온 하나님의 사람이 이제 내 앞에 선다'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경건]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든 교사들에게 그런 경건, 그 노형제님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경건이 있기를 소망한다.
이 11가지를 학생들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아마 우리들의 교회 교육 커리큘럼에 이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내가 알 수가 없다. 또 이 강좌를 듣는 교회에서 교사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바라는 10가지
1. 배우는 시간이 진정 재미있기를 바란다.
학생들은 재밌는 것을 바란다. 하지만 이 재밌는 것이란 웃고 노는 것이 아니다. 내 맘에 심겨 지는 것,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거운, 그런 교사가 좋지 않은가? 함께 있으면 재밌고 즐거운 사람, 그러한 교사가 되길 바란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 다양한 방법으로 진리를 계시하셨지 않는가? 하나님은 때론 나무를 태워 가지고 전달하기도 하셨고, 나귀를 통해서도 저 발람같이 패역한 사람의 귀에다 계시를 전하셨다. 또 어떨 때는 벽에다 손가락으로 인류 최초의 OHP를 쓰시기도 하셨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재밌게 하셨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행하심은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 지 모르는 것이다.예수님도 그렇다. 도대체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뭘 생각하시는 지. 나는 지금도 예수님이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을 때 땅에다 뭘 쓰셨는지 정말 궁금하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싶어 가지고 계속 고민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지 않은가?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학생들은 그걸 원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교사는 항상 다양한 [교수법]을 계발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단지 [방법론]에만 집중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핵심이 되어야지 요란스러운 것만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한다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금방 들통난다. 알맹이도 분명하고, 전달방식도 재미있는 그런 가르침을 위해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교사가 열정이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로 학생은 교사가 무엇보다도 열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건 중요하다. 가르치는 일에, 동기 부여하는 일에 교사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재능과 은사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차이가 없을 수 있는 게 있다. 열정이다. 열정은 차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재능이 있든, 없든 열정은 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열정에서는 뒤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최악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교사가 열정이 있기를 바란다. 어떤 교사에게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늘 같은 진리를 가르쳐 왔지 않습니까? 지루하지 않으세요?"
그 교사가 말했다.
"내가 만일 가르치는 그 내용 자체가 목표였다면 지루했을거야. 수 십년동안 같이 하니까. 그런데 내 목표는 너희들이야. 너희들은 해마다 바뀌지 않느냐? 또 다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니까, 늘 신선한 사람이 내 앞에 있으니까. 어떻게 내가 지루하겠느냐? 너희들이 바뀌는 모습이 다 다른데, 너희들의 반응이 다 다른데. 너희들에 대한 사람자체의 개성이 다 다른데. 나는 늘 즐거워, 늘 재밌어, 늘 나는 긴장해."
그것이 진짜 교사의 마음일 것이다. 교사의 열정은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즐겁다. 그러면서도 긴장된다.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증거해서 이들이 변화되는 것을 볼까? 거기에 몸이 달아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주님을 생각하고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나를 흥분시키는지 모른다.
또한 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를쓴다. 성경에 보니까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사의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든 진리에 굶주려있고, 무지의 속박에 매여있는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려 애쓰신 것이다. 그것이 교사의 정신이 아닌가! 교회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나, 삶의 작은 모본으로나 학생들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온 영혼이 불타고 있는 교사, 그가 나이기를 바란다.
3.가르치는 내용이 삶의 현실과 연관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이 실제 삶의 현실과 연관되기를 학생은 바라고 있다. 지난 번에 우리가 메슬로우의 '필요의 계단'을 봤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자신들의 문제를 다뤄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학생들이 듣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내 마음을 다 아는지 몰라.' 그리고 그 메시지를 듣고 일어나면서 '그래 하나님이 나한테 말씀해 주셨구나!' 이런 감동을 받고 돌아갈 때 얼마나 기쁜가! 그런데 어느 날 열심히 교사가 뭐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그게 뭐 어땠단 말인가?' 이런 마음이 든다면 실패한 것이다. 자기의 삶과 연관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 중 앞에서 삶의 문제를 조금 얘기했었다. 그러니까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것이 삶의 문제를 직접 다루어 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들은 학생들을 많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필요와 문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마 이 강좌 초기에 그러한 실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학생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에 대해서 했었던 기억이 날 것이다. 그 시간 이후로 여러분이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가?
다시 반성해 보도록 하자.
4. 교사가 잘 준비하고 조직적으로 가르치기를 바란다.
네 번째로 학생들은 교사가 잘 준비하고 조직적으로 가르치기를 바란다.내가 만일 여러분에게 교사대학을 시작해 놓고 매 시간 전마다 '아! 오늘 뭐 하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이 봤다고 상상을 해 보라. 여러분은 과연 이 강좌에 참석하고 싶겠는가?그러므로 교사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 교사의 마음 속에 갑자기 무엇인가를 주실 때가 있다. 특별히 갑자기 주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준비된 것이 있다해도 그것을 거역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바울도 선교 여행을 다닐 때, 대개는 자신의 선교계획의 노선을 따랐지만 특별한 경우, 성령께서 막으시고, 다른 곳으로 이끄실 때는 기꺼이 그 인도를 따랐다. 그런 경우는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성령님은 조직적이신 분이다. 갑자기 예정밖의 일을 늘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원칙적인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도 무계획적으로 인도하신 것도 아니요, "야! 2백만명 가나안 땅으로 뛰어!" 이렇게 하신 분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그렇게(아무 계획없이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대로 따르는 것)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오해이다. 성령의 인도에는 질서가 있다. 하나님은 질서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은 잘 갖춰진 조직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오늘날의 문제는 잘못된 조직이 문제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것 자체가 결코 잘못된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잘 준비해야 한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준비해 와야 한다. 실제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까지 아무런 준비없이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주님은 말씀을 깊이 알고 계셨다. 30년동안 예수님이 그냥 나무만 깎다가 어느날 성령님이 감동하셔 가지고 '아! 이제 공생애를 시작해야겠구나! 대책없지만 나가겠다.'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그런 하나님을 불안해서 어떻게 믿는가? 얼마나 불안한가 말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주님은 우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다. 주님이 그냥 제자들, 12명, 훈련시킬 필요도 없이 그냥 예루살렘에 놀러 왔던 그 이방인의 사람들 중에 12명을 오순절날에 그냥 성령님이 임하셔서 12명을 변화시키셔서 쓸 수 있는데 왜 그들을 택하기 위해서 기도하시고 3년반동안 그렇게 지겹도록 말도 안 듣는 이 친구들을 가르쳐 가지고 그렇게 하셨겠는가? 하나님 방식이 그러시니까. 하나님은 항상 양면성을 그대로 다 행하셨다. 잘 준비된 것과 갑작스런 인도하심. 둘 모두가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한쪽만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잘 준비해야 된다. 조직적으로 잘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5.교사가 주된 요점을 강조하고 반복하기를 바란다.
다섯 번째로 학생들은 교사가 주된 요점을 강조하고 반복하기를 원한다.반복은 배움의 열쇠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또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한다. 내가 몇 년간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친 게 이것이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나의 학생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는 말을. 그리고 또한 가정에 대한 중요성,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계속 반복, 강조하고 다루었던 것은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쨋든 계속 강조하고 반복해서 아이들이 그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관심있게 살핀다면 이 강좌에서도 중요한 내용이 계속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중요한 진리는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라.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능력]은 매일 강조하고 반복하라. 매 가르침 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 해도 괜찮다. 결코 지루해지지 않는 주제이다. 전하는 사람이 지루하게 전해서 문제가 지금까지 있었지 그 십자가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중요한 진리들은 늘 강조하고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6. 학생들은 교사가 개인적인 예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여섯 번째로 학생들은 교사가 개인적인 예를 들어주기를 원한다. 그냥 이론만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교사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적인 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교사가 저렇게 했구나! 그럼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아까 말했을 것이다. 왜 내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이 원칙을 실례로 보여 준 것이다. 학생들은 교사의 성공했는 얘기 뿐만 아니라 실패했는 얘기도 듣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사의 간증을 학생들에게 많이 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좋은 얘기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느낀 것, 생각한 것, 경험한 것 다 얘기 해 줘라. 그것을 통해 학생들이 배우기 때문이다.
7. 학생들은 교사가 자신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원한다
일곱 번째로 학생들은 교사들이 자신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원한다.따로 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체율해 주는 교사를 원한다. 정말 배려해 주는 교사를 원하고 있다. 겨울에 밖에 눈이 오고 있는데, 아이들 붙들어 놓고 계속 듣기를 강요하고 있다면 아이들이 좋아할까? 아이의 마음 속에는 '지금 눈오는데...'하고 있을 것이다. 딴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교사들은 아이들이 막 장난치고 딴정 피우면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데 딴정을 피워?"하고 소리친다. 실제로 나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고 싶다.
"하나님 말씀 가지고 딴청 피우게 만들어?"
얼마나 비극인가? 오죽하면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데 딴청 피우고 있겠는가? 아이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안 듣기 때문이다. 누가 문제일까? 아이들이 문제일까? 의외로 학생들은 정직하다. 안 되는데 '하라'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들리는 얘기]가 있고 [억지로 들어야 하는 얘기]가 있다. 잘 전달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 내용이 들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언변이 있어서 우리 귀에 잘 들린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재미가 있고, 내 귀에 속속 들어오고 감동된다는 말이다. 듣고 나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타고난 메신저인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재능을 주신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재능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데 써야 한다. TV에 나와서 사람들 재미있게 하는데 쓰지 말고...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의 얘기는 한 번 들으려면 한 시간 동안 별 짓(?)을 다해야 된다. 자꾸만 딴 생각이 나고 졸리게 되거나 마침내는 또 딴 짓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슬퍼지게(?) 된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렇게도 집중을 못하는가?" 내가 말씀 드리고 싶다.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 아니다. 그 사람의 얘기는 '억지로 들어야 들리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힘든 것이다. 경청에 고도로 훈련 된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왜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안 들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얘기가 술술 들리도록 만들어라. 내가 지금까지 출판사에 계속 책을 낼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가 대부분 사람들이 해오는 말 때문이라고 느낀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어 왔다.
"형제님 책은 잘 읽혀요."
그것이 잘못 이해하면 책이 깊이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까 그렇지 않다. 쉽게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잘 읽히도록 말이다. 이번에 나온 [대인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이란 책을 집에 놀러온 처형이 보더니 가져 갔다. 그러고는 그 다음날 전화가 왔다. 자신이 책을 별로 잘 읽지 않는 사람인데, 이 책은 너무 재미가 있어서 손을 놓을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나이롱처럼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주님을 위해 제대로 한 번 살아보려고 작정했노라고... 감사한 이야기였다.나는 이번 연휴 기간동안 횃불지 3월호 원고를 위해서 몇번을 다시 작업을 했다. 이 번 만큼 탈고를 위해 수정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보통때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맘 먹고 한 번 해 보았다. 그랬더니 예상외의 성과가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다듬어 놓고 보니까 아주 쉽고 감동적으로읽히는 문장이 되더라는 것이다. 훈련하면 된다. 시간이 좀 더 걸릴뿐이지 하면 느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언어가 또는 행동이 쉽게 전달되고 쉽게 들려지는 것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한 후배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었다. 그 형제가 군에 5년동안 있을 때 내가 계속해서 이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개인적으로 교제를 해 줬었다. 편지로 훈련하고, 알려주고, 그 부분에서 좀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몇 년만에 다시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형님, 그거 다시 훈련 받으면 안되겠어요?" 참 기뻤다. 적어도 그 마음을 배울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배우기 바란다.
8. 필요할 때, 언제든 교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덟 번째로 학생들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만날 수 있기를 원한다. 옆에 있는 교사를 원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말하면 "Useful" "유용하다", "언제든지 쓸 수 있다"는 뜻이겠다.여러분은 집에 있는 그릇중 어떤 것을 가장 많이 쓰는가? 이쁜 그릇?, 금 그릇?, 아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그릇이다. 아무리 좋아도 그걸 못 찾으면 못쓰는 것이다. 교사도 그와 같은 것이다. 학생들이 필요할 때 있어주는 교사라야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금테를 둘러도 저 혼자만의 세계에서 잘나 있으면 못쓰는 것이다. 아무리 재능있는 교사라도 자기가 바쁘면 학생들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그런 교사를 원한다. 그저 한 번씩 말씀이나 전하고 그 외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자기 일에 바쁜 교사를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서 교사들의 가정이 열려 있어야 될 것이고, 삶이 열려 있어야 될 것이다.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투명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데 많은 경우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들의 맡은 학생들을 다루는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이 비극이다. 우리의 시간을 학생들과 많이 나눌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아야 될 것이다.
9. 교사가 자신들의 의견과 생각을 묻고 경청하길 바란다.
아홉 번째 학생들은 교사가 자신들의 의견과 생각을 묻고 경청하길 바란다. 이것은 교사가 피드백(Feed-back)을 하라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고, 내가 학생들과 했던 모든 것을 물어보라는 것이다.
"야! 나 잘했어? 나를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그 의견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학생들도 교사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그러나 생전 교사가 물어 보는 일이 없다.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학생 나는 교사, 너는 듣고 나는 말하고, 너는 배우고 나는 가르치고... 이런 태도의 교사는 존경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자기를 바꿀 수 있는 교사, 그런 열린 정신을 가진 교사를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드백 해야 한다. 물어봐야 된다.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학생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인해야 된다. 그리고는 언제든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갖춰야만 학생들이 존경할 수 있는 교사가 될 것이다.
10. ???...
열 번째 내용이 없다고 놀랐는가? 열번 째로 학생들이 교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당신이 학생의 입장에서(교사대학 강의를 듣는) 교사에게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 답이 바로 10번째 '학생이 교사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채워 넣음으로서
열 가지가 완성이 된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