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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베리아 횡단열차 “기차로 하루 종일 달렸는데도 산 하나 보이지 않더라.” 일제시대 때 중·고교를 다닌 외할아버지가 그 시절 만주로 수학여행 다녀 온 얘기 할 때 그러셨다. 어릴 적부터 뇌리에 박혀 있었다. 기차든 자동차든 몇 시간만 달리면 종착지에 가 닿는 땅, 게다가 북쪽 절반이 막혀 섬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광대무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쿠츠크의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4300여 킬로미터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사흘 밤낮 내리 달려가면서 비로소 그걸 체감했다. 지난 8~15일의 한겨레 테마여행 ‘겨울의 심장, 바이칼을 가다’. 그 여행은 바로 그 체험 만으로도 경이였다. 겨울 시베리아. 뉴욕에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날아가는 비행기 창으로 얼음과 눈에 덮인 광대한 북미 대륙을 내려다 봤고, 인천에서 런던 가는 항로 상공에서도 눈덮인 시베리아의 광막한 대지를 오랫동안 내려다 본 적 있다. 하지만, 고공에서 내려다 보는 그 몇 시간의 원거리 조망과 사흘 밤낮 객차 철제문 손잡이가 손에 쩍쩍 들러붙는 영하 수십도의 혹한속 대평원 풍경을 지근거리에서 보며 달리는 설국열차의 체험은 차원이 달랐다. 저녁 7시 넘어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북행하던 기차가 날을 넘겨 하바롭스크를 지나 서북행으로 방향을 바꾼 이틀째,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1천명 가까운 조선독립군들이 희생당한 스보보드니를 지나 더 북쪽의 스코보로디노를 향해 달려갈 무렵일 텐데, 그때 바깥 온도는 섭씨 영하 41도라고 했다. 그야말로 광대무변. 우랄산맥 동쪽의 시베리아지역 면적은 약 1278만 평방킬로미터. 세계 육지면적의 10분의 1, 러시아 국토의 4분의 3이란다. 거기에 사는 인구는 2941만 정도로 인구밀도는 1평방킬로미터당 2.3명. 우리가 꼬박 하루 넘게 달려간 극동연방관구는 약 617만 평방킬로미터에 인구 646만명으로 밀도는 1.0명. 게다가 그들 인구도 대부분 도시지역에 몰려 있다. 그러니까 시베리아 땅 대부분은 사실상 텅텅 비어 있다. 나라를 찾겠다던 선조들은 왜 그 낯설고 먼 추운 땅까지 흘러가 피를 흘려야 했을까. 말로만 듣던 자작나무 숲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야트막한 산들이 함께 달렸지만 그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웠다. 자작나무가 뒤덮고 있는 그런 구릉들조차 없이 탁 트인 바다같은 대지들이 아득히 멀리 지평선까지 눈을 덮어쓴 채 수시로 나타났다. 한반도를 찾는 철새들이 겨울에 시베리아를 떠나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끝간 데 없이 땅을 덮고 있는 저 눈과 얼음 때문이리라. 강과 평원과 호소들이 모두 하얗게 얼어붙은 대지에선 먹이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시속 80킬로미터 또는 그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전철화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4인이 함께 들어가는 침대칸 ‘쿠페’. 그 창가에 반쯤 드러누워 올려다 본 시베리아 새벽 하늘의 그 총총했던 별들. 짧게는 몇 분, 길게는 30분 정도 정차하는 역들에 기차가 도착하면, 차장들은 모두 쇠막대기와 긴 자루가 박힌 도끼를 들고 내렸다. 4인용 쿠페가 10개쯤 들어찬 객차마다 차장 2명이 배속돼 교대로 근무했다. 차장들은 거의 예외없이 여성이었다. 30, 40대로 보이는 그들은 기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그 무거운 도구로 기차 바퀴 주변에 잔뜩 달라붙은 얼음들을 탕탕 두들겨 떨어냈다. 각 역에는 그보다 훨씬 작은 망치 같은 도구들을 든 남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땅땅 객차 하체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기기 안전점검을 했다. 함께 간 한국철도공사 기관사 이성계씨는 얼음들을 직접 만져보더니 브레이크용 압축공기가 방출될 때 그 주변에 얼음이 형성된다며, 그냥두면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여성 차장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두들기는 얼음뭉치들 중에는 더 두텁게 달라붙은 누르스럼한 것들이 있었다. 화장실쪽 변기 아래. 한 번 달리면 보통 몇 시간씩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의 화장실에서 철길로 바로 방사되는 오물들 일부가 시베리아 강추위에 바로 얼어붙어 겹겹이 들러붙어 있었다. 차장들은 기차가 역에 정차하기 전과 역을 출발한 뒤 수십분간 화장실 문을 잠가버렸다. 묘하게도 정차 때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타이밍을 조절하 지 못해 안절부절 못한 채 때로는 하바롭스크 역처럼 큰 역사의 유료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다. 2~3평쯤 되는 좁다란 쿠페 양쪽 벽엔 아래 위 2층으로 반접이식 침대가 붙어 있었다. 쿠페의 승객 배정에 남녀 구분은 없었다. 초대면의 남녀가 좁다란 쿠페 공간을 공유하며 달려가는 것, 그게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또 다른 묘미라고 했다. 섭씨 20도 안팎을 유지하는 쿠페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덮고 누우면 제법 아늑했다. 그렇게 눕거나 기대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약간 흔들리며 달리는 기차 차창으로 바라보는 시베리아 풍경. 하루 이틀 지나면 변함없는 풍경에 질리고 긴장도 풀려 슬슬 딴 생각 나기 시작한다고들 했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건지, 이대로 그냥 모스크바까지 가버리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샤워시설이 없고, 세면대 물도 한 손으로 수도꼭지 아래의 돌출장치를 계속 누르고 있어야 나오는 구조여서 씻기가 불편한 게 흠이었지만, 따뜻한 물은 차장 방 앞에 설치된 전기로에서 24시간 마음대로 받아 쓸 수 있었다. 러시아 철도 노동자들은 긍지가 있었다. 그들에게 초코파이를 몇 개 안기면 엄청난 뇌물효과를 발휘한다는 안내책자 조언은 적어도 내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간단한 쿠페 바닥 청소를 끝낸 40대로 보이는 거구의 차장에게 사들고 간 초파코이 몇 개를 슬쩍 주려했으나 받지 않았다. 무안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쿠츠크로 가는 철길의 약 3분의 2쯤 되는 곳에 체르니셰프스크 역이 있고, 거기에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1828~1889) 동상이 서 있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바로 러시아문학의 고전이 된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따 붙인 것이다. 체르니셰프스크는 그의 유형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체가 혁명가들의 피눈물이 배인 유형지들을 축으로 건설됐다. 이르쿠츠크 건설도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당) 반란과 그 주역들의 그 지역 유형을 빼 놓고 얘기될 수 없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볼콘스키가 그때 이르쿠츠크로 유형간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았고, 그들을 후원한 문호 푸슈킨,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솔제니친 등이 모두 시베리아 유형자였다.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과 상하이 공산당의 알력이 얽혀 있는 스보보드니의 조선독립군 참사도 볼셰비키 혁명 뒤의 적군-백군 내전, 이를 빌미로 한 서방과 일본의 반동적인 러시아내전 개입,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패배 뒤 일본군이 자행한 대대적인 조선항일세력 살륙전의 귀결인 간도 참변의 여파라 할 수 있다. 조선항일혁명가들을 그 먼 동토로 내몬 비극적인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서울 또는 목포, 부산에서 탄 열차 그대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버려두고 비행기로 먼 길을 돌아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역을 출발한 기차가 북쪽 하바롭스크를 향해 갈 때 스마트폰 화면에 뜬 로밍지역 시각과 한국시각은 2시간 차이가 났다. 그 차이는 거기서 서진하면서 1시간으로 줄더니 한반도보다 훨씬 서쪽인 몽골 북쪽의 바이칼에 접근하면서 한반도와 동일 표준시각이 됐다. 이르쿠츠크에 접근하면서 철도 연변의 숲도 바뀌었다. 자작나무 대신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기 시작했다. 숭례문 복원 부실문제와 관련해 관심사가 됐던 바로 그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잔뜩 실은 기나긴 화물기차들과 여러차례 마주쳤다. 동쪽으로 가는 그 목재의 상당수는 한국으로 향할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시베리아 목재들이 유럽으로 간다고 했다. 철로변의 중소 도시들 주택 거의 모두가 나무로 지어졌고, 나무 때는 난로 굴뚝에선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벤 자리엔 다시 나무를 심는다지만 시베리아 철도가 마지막 남은 지구 허파들 중의 하나인 광대한 시베리아 삼림을 야금야금 파먹어가는 악마의 전초기지가 아니기를. 사흘 째, 72시간 넘게 달려야 하는 이르쿠츠크 도착 네댓 시간쯤 전부터 나무 하나 없는 탁 트인 눈덮인 대평원이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였다.
2. 바이칼 바이칼 위에 서다! 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지 나흘만인 2월12일, 말 그대로 우리는 바이칼 호수 위에 섰다.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저곳에 가 봐야지 되뇌던 소원은 이뤄졌다. 선착장에는 여름에 사람들을 태우고 갔을 배가 얼음에 갇혀 드러누워 있었다. 탁 트인 그 배 뒤쪽은 물이 아니라 얼음세계였다. 36명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처음엔 시퍼런 물 위에 떠 있는 얼음들이 믿을 만한지 조심조심 이리저리 재 보더니 금방 더 깊은 쪽으로 주춤주춤 영역을 넓혀갔다. 그래도 불안했다. 2500만년 전에 형성돼 지금도 지진이 잦은 바이칼은 여전히 생성 중인, 남북길이 636킬로미터, 긴 폭은 약 80, 좁은 곳이 약 25킬로미터인 세계 최대급 크기에다 가장 깊은 담수호다. 최대 수심 약1700미터, 평균수심 576~854미터. 게다가 바이칼은 세계 최고의 청정도를 자랑하는 호수이기도 해서 얼음 밑은 현기증이 일 만큼 푸르고 투명했다. 아무리 자동차가 다닌다지만 오금이 저릴밖에. 저만치 교통표지판이 보였다. ‘차간 거리 200m’, ‘시속 30킬로미터 속도제한’, ‘상하행 한 길 사용 금지’. 얼음이 언 뒤에 구멍을 파고 심어 놓은 것들이다. 표지판을 따라 자동차 바퀴들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50대의 슬라브족 주코바 아저씨가 리드하는 독특한 형태의 러시아형 4륜구동 승합차 ‘우아즈(UAZ)’ 4대가 나름의 얼음 안전도 점검을 끝낸 일행을 분승시켜 달리기 시작했다. 평균 시속 40~60킬로의 과속(!). 아래는 매끈한 얼음 아래 시퍼런 물이 삼킬듯 노려보고 있었다. 1킬로 쯤 달려갔을까. 아직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광활한, 얼음이 꺼지면 어디 도와달라 외쳐볼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 주코바 아저씨가 차를 세우자 모든 차들이 그 주변에 섰다. 어,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 있어도 되는거야? 꺼지면 어떡할려구? 그 순간은 사람들이 추위 따위는 잊어버렸다. 얼음은 그냥 매끈한 게 아니라 여기저기 금이 쩍쩍 가서 다시 얼고 그 금간 자리 아래 쪽을 더 얼어내려간 자국이 그대로 보였다. 정말 1미터는 넘겠다. 자동차 서너대가 한 자리에 모이고 30명이 넘는 인간들이 내려 이리저리 발을 굴려보고 사진을 찍는다 부산을 떨어도 얼음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포는 사라졌다! 그날 오후는 20여개나 되는 바이칼호 섬들 중에 길이 72킬로(크기는 제주도의 절반 정도)로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알혼 섬의 후지리 마을 니키타 민박촌에 여장을 푸는 것으로 여정을 마쳤다. 도중에 젊은 운전수 바실리 등이 이리 와 보라며, 자신있게 보여준 붉은 이끼의 바위섬 뒤쪽은 거대한 고드름들이 엉겨붙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알혼 섬으로 올라간 자동차들은 나무가 없어 황량해 뵈는 섬 비포장길을 30여분 달렸다. 여름엔 저 황량함이 아늑한 풀밭과 꽃밭으로 변하겠지. 여장을 풀자마자 후지리 마을 언덕 너머에 있는 세계 샤머니즘의 성지 ‘부르한 바위’로 갔다. 그 지역 브랴트인들 외모가 우리와 닮았고, 우리의 옛 성황당 비슷한 분위기와 유사한 천손신화, ‘불함문화’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르한이란 명칭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시원지라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근거가 있는 얘길까? 단정할 순 없지만,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한반도인들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까지 광범한 지역을 삶터로 삼아온 몽골족 전체가 돼야 하는 게 아닐까. 브랴트인들의 것과 닮았다는 일부 우리 습속이 그땅에 살던 선조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갖고 온 것인지, 13~14세기에 그곳과 인근 몽골 초원을 발원지로 해서 유라시아를 제패한 칭기즈칸의 원 제국이 남긴 습속인지, 아니면 인종 차이와는 무관한 샤먼니즘 보편문화인지 알 수 있을까? 어쨌든 어딘지 신비와 영성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니키타 민박촌 시설은 예상보다 편안했고 음식도 괜찮았다. 다음날은 여름엔 육로로 달려야 하는 알혼 섬 북쪽 끝 하보이 곶까지 수십킬로의 여정을 줄곧 얼음 위로 달려갔다. 후지리와 부르한 바위가 있는 곳은 알혼 섬 왼쪽 중간지점으로, 섬 오른쪽 너머의 대안이 보이지 않는 바이칼쪽보다는 상대적으로 좁지만 그래도 바다처럼 넓었다. 밤 사이 살포시 내린 눈으로 전날처럼 매끈한 얼음판을 볼 순 없었으나 대신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장대한 규모의 얼음세계를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삼형제봉의 기암과 붉은 이끼, 하보이 곶 절벽의 얼어붙어 기암들이 멀리 흰 눈을 인 산들에 에워싸인 바이칼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우주선을 타고 간 에스에프(SF) 속 어느 먼 행성의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보이 곶 일대는 집채만한 얼음조각들이 말 그대로 벌떡 일어서서 호수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 이끼가 인상적이었던 기암절벽들 아래에 엉겨붙어 장관을 이룬 거대한 고드름 모양의 빙벽들도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이었다. 저녁에 러시아식 사우나 ‘바냐’ 체험도 했다. 그 한겨울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푸른 잎이 달린 자작나무 다발도 있었다. 멋모르고 달아오른 돌들 위에 무모하게도 많은 물을 끼얹어 확 퍼지는 뜨거운 열기에 혼비백산하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고 자작나무가지 두들기며 잘 놀았다. 다음날 같은 길을 되돌아 나올 때, 요즘 온난화 때문에 얼음이 잘 얼지 않는다며 언제까지 바이칼 위를 자동차로 달릴 수 있을지 현지주민들이 걱정한다는 얘길 들었다. 시베리아 한복판 바이칼조차 무사하지 못할까? 3. 추위 은박지에 싼 삶은 감자와 바이칼에서만 나는 청어를 닮은 생선 ‘오물’, 흑빵과 치즈, 그리고 갈색 차 한 잔이 그날 점심이었다. 흑빵은 얼어서 그런 건지 오래돼서 그런 건지 이빨이 아플 정도로 딱딱했고, 얼음 위에 잠시 내려 놓은 스테인리스 찻잔 속의 차는 금방 식어버렸다. 덜덜 떨면서 먹기가 뭣했던지 자동차 지저분해진다며 차 문 열어주기를 꺼리는 운전수를 겁박(?)해 모두들 근처에 대어 놓은 자동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때 함께 간 사진 동호회원 서너명과 끝까지 바깥에서 버티는 기개를 과시하며 이 대표가 내뱉은 호언장담이 바로 “시베리아 추위 별 것 아니네”였다. 시간이 갈수록 시베리아 추위는 점점 별 것 아닌 게 아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사이를 몇시간씩 이동할 때 탄 현대자동차 관광버스에선 바깥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창문이 허옇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창문을 덮은 얼음막을 긁기도 하고 녹여 보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버스 안의 36명이 내쉬는 숨은 달리면서 바깥 표면온도가 더 떨어진 창 안쪽면에 빨려가듯 들러붙어 그대로 얼어버렸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손바닥을 잠시 대었다가 떼면 손바닥 모양으로 녹은 부분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손바닥모양은 자국만 남긴 채 금방 다시 얼어버렸다. 시베리아에선 눈도 육각형 결정체들이 뭉치지 않고 가루처럼 그대로 내렸다. 싸한 추위가 결정체들이 함박눈 송이로 뭉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브랴트 자치공화국의 개방된 공중 화장실들은 반들거리는 누런 얼음산 속에 조그만 분화구가 뚫린 형상들을 하고 있었다. 배설물이 몸 바깥을 나가는 순간 얼어붙기 시작하기 때문인데, 그 덕에 악취도 얼어붙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객차들을 잇는 통로의 바깥 문 손잡이들은 맨손을 쥐면 쩍쩍 들러붙었다. 기차가 정차할 때 잠시 내려 카메라 셔터를 맨 손으로 누를 때 손가락이 느끼는 건 추위가 아니라 통증이었다. 체르니셰프스키 동상을 찍을 때도 기온은 영하 30도 훨씬 아래로 내려간 듯 견디기 어려워 서둘러 기차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객차 차장과 식당차 직원들은 드나들 때 문 열어 두지 말고 단속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나마 시베리아 내륙은 바람이 없고 습도도 낮았다. 바닷가 블라디보스톡의 항구를 내려다 보는 ‘독수리 전망대’는 같은 온도라도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더 낮았다.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어딜가나 별로 다를 게 없는 단조로운 러시아, 아니 시베리아 패션은 러시아 사람들 패션감각이 무뎌서가 아니라 자연조건 탓이라는 게 자명했다. “겨울 시베리아에서 모자 없으면 죽음”이라고 한, 이르쿠츠크 거주 박대일 비케이투어 대표의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좀 비싸 보이는 모피제품들(자연산인지 인조모피인지는 모르겠다)이긴 했지만 나들이 하는 이르쿠츠크 여인들이 하나같이 걸치고 있던 멋들어진 외투와 모자와 긴 부츠 차림도 사진으로 보던 러시아 패션 전형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1812년 모스크바로 진격한 나폴레옹 60만 대군과 1941년 히틀러의 나치스 대군을 물리친 것도, 정말 가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통증을 동반하는 그 싸한 시베리아 추위 아니었던가.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패배한 나폴레옹 군대를 따라 유럽에 갔던 러시아 청년귀족들이 받은 문화충격과 그로 인한 차르체제 비판에서 촉발된 것이었으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역사 자체가 러시아 겨울 추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겠다. 기차와 자동차를 잽싸게 오르내리며 잠시 동안 외기를 쐬는 정도로 사나흘 쯤 갈 때까지는 “시베리아 추위 별 것 아니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뭉글뭉글 치밀어올라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데서 살아가지? 시베리아 인구밀도가 왜 그렇게 낮겠는가. 우리 조상들이 ‘따뜻한 남쪽’을 향해 이동해 간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그 지독한 추위야말로 시베리아 최대의 관광자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베리아 아니고 어디서 그런 추위를 경험해 본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