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밋곡이라 불렀다
어릴적 놀때는 항상 그렇게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그곳이 안민고개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아마 중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그렇게 불렀던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아마 그곳에서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은 흑백이었지만 우리반 아이들의 모습을 볼수있다
맨 앞줄에는 이지원 김보영 이정란 황묘임 ... 모두 나보다 키가 크고 늘씬하다 아마 지원이가 옷을 색다르게 입으면 다른 아이들도 옷을 따라 입곤했었다 나는 김갑출 권용극 김석천 이상도 등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과도 같이 놀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안난다 유독 여학생들은 키가 크고 남자보다 덩치가 큰 아이들이 많았고 으례히 여자랑 이야기 하는 것은 남이 볼까봐 부끄러워 했던것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도 못하고 그렇게 지냈던 것이 무었때문이 었을까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뿐이다
우리는 5학년과 6학년을 같은반을 했기때문에 유독 이름과 추억이 선명한 것 같다
지금은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한번 연락해보고 만나서 차라도 한번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만나면 서로가 실망할까봐 그냥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것은 내가 좋아한 여학생의 이미지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남긴 흔적이 실망을 줄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보다 내가 그때 느끼고 좋아했던 감정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만난다면 그 빛깔이 바래질까 두려워서이다 나도 자신이없고 상대방도 그런 마음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해 버린다
그냥 어릴적 그대로 그 마음으로 간직하고 프다
대학을 들어가고 몇번을 만났었다 1-2번을 만나고 내가적은 글을 보여주곤 했었다 제목은 아마 '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이라는 안톤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과 견주어 비슷하게 반대의 글을 쓰고서 그녀에게 보여준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대학3학년때인가 한번 전화를 했는데 그쪽에서 '나 결혼한다' 는 말이 수화기 넘어로 들려왔다
나는 그때 축하한다는 건성으로 말을 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시작도 안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그녀는 결혼을 한다고 통보를 한것이다 참 결혼도 빨리한다 그냥 나는 커피나 한잔 할래 ? 하고 데이트를 신청을 하려는 참이었는데 ! 아쉬움과 시작도 못한 회환이 가슴을 쓸고갔다
한번도 마주앉아 진지하게 말을 한적이 없었다 그래도 꿈에 자주 나타나서 얼굴을 자주 보았던 초등학교때의 여자동기 !
그 흔한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시작도 못하고 그녀는 나의 곁을 떠나 행복을 찿아 멀리 날아가는 아름다운 팔색조였다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그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 난 니가 참 좋다 니도 내가 좋나 ?' 내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서 재미있게 놀이도 같이하고 산이랑 바다로 같이 놀러가고 싶다
아마 그렇게 하라고 해도 부끄러워서 그리 못했을 확률이 99% 일것이 뻔하다 그 당시에는 무조건 남자 여자가 말을 하면 놀리고 ' 얼라 깔라리 ! ' 하면서 조롱하고 놀리는게 다반사 였으니까 !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 집을 풍호동 사비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겨울방학때 천자봉으로 올라가서 안민고개로 넘어온적이 있었다 용감하게 준비도 하지않고 그 5시간 이상 걸리는 데를 무작정 같던것을 기억한다 안민고개로 넘어올때는 탈진된 상태로 경화초등학교로 내려왔다 아마 학교옆에 우동하시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돈은 한푼도 없고 해서 무작정 부탁을 했다 ' 아주머니 지금 돈이 한푼도 없는데 우동 한그릇 주시면 감사하게 먹고 나중에 집에가서 돈을 가져오겠습니다 ' 아주머니는 그 부탁을 들어주셨다 난 물부터 먹고 그 맛있는 우동을 단번에 먹었던 고마운 기억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초등친구들과 등반대회를 안민고개에서 천자봉 시리봉으로 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한 16명 정도가 갔다 고은하 배철한 노환수 등... 그리고 불알친구랑 안민고개에서 덕주봉으로 가서 1가를 내려다 본적이 있었다 그때는 4월인데 진달래가 많이 피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것 처럼 장복산은 높은 자태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내려오면 바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요새지역으로서는 최적지라고 어릴적 부터 들었던 그말처럼...
안민고개가 도시화되고 차들이 많이 왕래를 했다 창원으로 가는 도로 그리고 진해로 넘어오는 차로 많이 길이 막히곤 했었다
엄마가 뇌종양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던 2000년도에 난 엄마를 모시고 답답하던 집메만 계시던 곳에서 차를 몰아 여좌동에서 안민고개쪽으로 달렸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병이 나시기전 미리 예측을 하셨음인지 산으로 나물을 캐러 다니시며 장천바닷가 속천으로 조개를 캐러 다니셨다 항상 집에만 있으시던 엄마가 그렇게 산으로 강으로 다니시던 중에 한번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 막 산으로 바다로 훨훨 다니고 싶다' 당신은 그렇게 집에만 있으시고 여름이면 바다에 한번도 안가보신 분이라 그런가 보다 나는 그렇게 만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은 미래를 예측하고 그렇게 2년동안을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신것이리라
엄마가 돌아가시고 5년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전에도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 안민고개 나무로 만든 전망대에 올라 우리가 살던 경화동1가를 보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5년간을 홀로 밥을 헤 드시며 외롭고 힘들게 고독과 싸우게 계시던 때였다 진주에서 내가 한달에 한번 와이프와 아아들을 데리고 오지만 그것으로는 아버지의 외로움을 덜기가 역부족이었다
지금처럼 요양병원이 있었던 것도 아닌 2000도 부터 2005년까지... 혼자서 밥해 드시기가 힘들어 입원하고 싶은 마음도 당신은 드셨다고 후에 말을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 둘째 형님의 걱정으로 심기가 불편하셨다 그리고 무슨말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내가 말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아버지 남은 시간동안 자식걱정 없이 건강하게 걱정없이 오래 사셔요' 전망대에서 나눈 대화는 잘 생각나질 않지만 한번씩 안민고개 전망대에 가면 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그시간 나누었던 모습이...
안민고개는 어릴적 부터 올려다 보면 불빛이 반짝이던 곳 근처다
특히 공동묘지라서 사람의 인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도깨비 불이라고 말을 많이 들었다
서쪽으로 덕주봉은 어릴적 군인들이 사격 훈련하던 총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고 동쪽으로는 미사일 기지라고 불렸던 송신소와 시리봉과 천자봉이 위치해있다 그렇게 둥글게 길게 산맥을 달리면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서 온화한 기후를 만들고 있는 아늑한 도시다
성주사 곰절에 가기위해 이곳 안민고개를 아버지랑 그때 집에 기르던 새퍼트 랑 산을 넘어간 적이 있었다 길고 험한 길이었다 아마 초등6학년때 일이다 밤도 중간에 가다가 주워 먹고 곰절에 가기까지 참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릴적에는 경화동 안민고개에서 불이 엄청나게 무섭게 겨울에 치달아 올라 미사일 기지까지 붉게 물들었다 추운 밤에 보는 불길은 무섭도록 붉었다 그 다음날 보는 산은 시커멓게 탄 재처럼 한동안 산은 형체가 보기가 사나웠다 이제는 그곳에 가면 밑으로 경화굴이 달리고 있고 엄마따라 상남에 쌀을 사기위해 따라갔던 그 철길이 생각난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그래서 자주 찿지못하는 곳이지만 한번씩 고향이 그리워 찿으라 치면 이제는 옛날보다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고향의 랜드마크 중에 하나다 탑산 시리봉 천자봉 안민고개 .... 이제는 타향에 살다보니 고향에 갈 일이 잘 없다 다만 부모님과함께 살던 시절이 많이 그리워 질때 한번씩 가지만 요즘들어서는 진주에서 진해가는 것도 힘들게만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까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같이 나누었던 추억은 항상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다
내가 좋아했던 그 여학생이랑 경화동에서 살았던 부모형제와의 추억이랑 그리고 같은 학교 친구들과 함께 했던 어릴적 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