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면(珍山面) 석막리(石幕里)
진산면의 남쪽 산골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경계를 나누며 북쪽으로는 묵산리, 읍내리, 부암리와 그리고 동쪽으로는 삼가리와, 남쪽으로는 오항리와 경계를 나누는 자리에 석막리는 위치한다.
깊은 산악지대에 비해서 의외로 넓은 들이 석막리 위쪽으로 조성되고 그 들을 조성하듯 버드내를 비롯한 여러 냇물이 들을 적시며 동쪽으로 흘러간다. 석막리로 들어서는 길로는 금산에서 진산으로 가는 지방도 따라 진산 가까이와서는 부암리 서남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버드내 변을 한참 가다가 삼가동, 청징을 지나서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산악지대와 들이 보이는데 여기가 석막리다.
원래 돌이 많아서 돌매기, 돌막 또는 석막이라 불렀던 이 지역에 인류의 정착은 고려시대 초기로 본다.
백제때 진동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처음에 황산군에 딸린 영현에 속했다가 뒤에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도 진례군의 영현 고을을 지속해 오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2년(1390)에는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직하는 진동고을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태조 2년(1393)에는 태조의 태를 만인산에 봉안함에 따라 지진주사(智珍州事)의 고을로 옥계부(玉溪府)에 속했으며 그 후 조선시대 제3대의 왕인 태종 12년(1412)부터는 진산군에 속했었다.
석막리에서는 다시 남쪽으로 길이 있으며 그 길을 딸 가다 보면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서 서쪽으로 굽이쳐 흐르면서 대둔산 뒤 산북리에서 전주로 통하는 국도와 연결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진산군 이남면(二南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시마골, 말거리, 명막골, 잔디울, 장막골을 병합하여 석막리라 하고 금산군 진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30㎢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많이 세거하는 지역이다. 1968년 3월 1일에 설립된 석막초등학교가 있다.
지명유래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돌맥이 마을 주변에는 유난히 많은 바위산과 돌이 산재해 있다. 가령 화산바위, 명막바위, 용막바위, 용난바위, 아들바위, 주방바위, 장수바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진등날 끝에 있는 화산바위는 화기(火氣)가 비치기 대문에 그렇게 불렸다 하는데, 이로 인해 과거 이 마을에서는 잦은 화재의 발생으로 마을이 잿더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길을 지나던 스님이 이르기를 ‘진등날에서 화산이 비쳐서 그런 것이니 화산바위 밑에 소금을 묻고 그 주위에 나무를 심어 화산바위가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고 일러주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더이상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돌매기의 화산바위는 마을의 자연조건을 반영이라도 하듯 화성(火星)의 산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돌매기의 풍수적 대응은 오성에 따른 형세구분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말거리, 달박골, 명막골, 잔디울, 장막골, 석막>
말거리
석막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말거리라고 부른다. 옛날에 말을 먹이던 마을이라 말거리라고 부른다.
명막골
석막 서쪽에 있는 마을을 명막골이라고 부른다. 깊은 산중이어서 명매기가 바위에 구멍을 파고 사는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명막골이라고 부른다.
잔디울
석막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잔디울이라고 부른다. 마을과 들에 잔디가 많은 마을이라 잔디울이라고 부른다.
장막골
석막 남쪽에 있는 마을을 장막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둘레를 장막을 두른 듯 돌산으로 둘러싸여 그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장말골이라고 부른다.
달박골
말거리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달박골 또는 월명동(月明洞)이라고 부른다. 산과 냇물이 아름답고 밤이면 달이 밝아 보인다 해서 월명동, 달박골이라고 부른다. 달박골 서북쪽에는 암석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고 그 골자기 위로 압석골재라고 부르는 고개가 있다. 석막리에서 진산읍내로 가는 지금길이 있는 고개다.
석막
말거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석막 또는 돌매기, 돌막이라고 부른다. 마을 남서쪽으로는 옛날에 그릇가마가 있었던 가막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으며 동쪽에는 외밋들이라고 부르는 들도 있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아들바위라고 부르는 전설에 서린 바위도 있다. 아들바위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임신을 한 여자들이 막대기를 어림잡아 잘라 가지고 와서 그 막대기를 그 구멍에 넣어서 막대기 길이와 이 구멍의 길이가 똑같으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옛날부터 많은 임신부가 찾아 왔던 바위다. 돌이 많이 있었으므로 돌매기, 돌막, 석막이라고 부른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옛날부터 많이 세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