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자료 모음
匍越이란 말이 있다. 이는 초월의 상대적 개념으로 초월이 뛰어넘음 혹은 빨리 감을 뜻한다면 포월은 엉금엉금 기어감 또는 좀더 느리게 감을 의미한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포월이라는 낱말이 생소한 언어일 것이다. 우리들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사실 우리들은 시간 경험을 순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적 소리에 의해서 파지하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가는 사람과 그 반대로 더 느리게 가는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시간 경험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인과적 고리의 두께는 분명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如來. 應供. 正偏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大夫. 天人師. 佛. 世尊---진여 또는 진리의 세계에서 오신 어른, 공양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높은 도를 이룬 이, 회고의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 지혜와 체험이 원만하게 어우러져서 구족한이, 피안의 열반세계에 잘간이, 세상사를 잘 아는 이, 중생들을 잘 조련해서 성불의 길로 이끄는 이, 가장 높은 이, 모든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스승이 되는 이, 도를 깨달은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세존 등이다.
월요일엔 원래 웃고 화요일에는 화사 하게 웃고, 수요일에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엔 목숨 걸고 웃고, 금요일엔 금방 웃고 토요일에 또 웃고 일요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웃는다.
<보조스님은?---한국선을 확립한 고려불교의 거봉 지눌스님은 고려 의종 12년부터 희종 6년까지 4대에 걸쳐 53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속성은 鄭이며 국학의 학정인 광우의 아들이다. 국사의 휘는 지눌이며 자호는 목우자이다. 스님의 사상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론 간화선등으로 대표된다. 일찍이 한국선을 확립한 스님은 현재 한국보교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수심결과 진심직설을 남겼으며, 이밖에 한국불교 승려교육에 필수로 쓰이는 법집별행록절요와 계초심학인문을 남겼다. 그의 말년작인 간화결의론에서는 화두선을 제시하기도 했다.>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업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더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애달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 모르고 있다.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찾지 말라. 마음의 바탕은 물들지 않아 본래부터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만 떠나면 곧 당당한 부처다. 불성을 보지 못한다 함은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또 이 육신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된 것이므로 그 바탕이 둔해서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닫고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불성이다. 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그 문이 많으니 요약하면 돈오와 점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가장 으뜸 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 차츰 익혀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일시에 단박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도 이것도 언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가 참 부처인 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긑업이 익혀온 버릇은 갑자기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하면 성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 있음을 어른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아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선악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억제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미혹이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성문들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둑이다"라고 하였다.다만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이 성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피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어서 그 자기가 곧 고요함이니 어찌 다시 끊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깨달음이 더딜까를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갖게 된다. 이 뜻은, 힘씀과 작용이 떨어지지 않고 원래 저절로 무위여서 따로 특별한 때가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할 때도 항상 마치 빈 배가 물결을 타고 높았다 낮았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기슭을 돌 때 굽었다 곧았다 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마다 분별이 없다. 오늘도 유유자적 내일도 유유자적하면서 온갖 인연을 따라도 아무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으며, 순진하고 거짓이 없어 보고 들음이 예사로워 한 티끌도 맞서는 것이 없다.
혼침과 산란을 다스려라---번뇌를 떨어 버리려는 노력도 필요 없고, 한 생각도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힘을 빌릴 것도 없다. 그러나 업장은 두텁고 익힌 버릇은 무거우며, 관행은 약하고 마음은 들뜨며, 무명의 힘은 세고, 지혜의 힘은 약해서, 선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이는 얽힌 인연을 닞고 번뇌를 떨어 버리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먼저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번뇌가 심히 진하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워 대상과 마주칠 때마다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대상을 만든다. 혼침과 산란에 부추김을 당해 고요함과 앎이 한결같지 않은 어두운 이는,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어 대치하기를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에 의해 잠시 익힌 버릇을 억제하더라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점문의 낮은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은 비록 공부를 잊지 않아 생각을 익히고 닦더라도 곳곳에 의문을 일으켜 거리끼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 같아서 불안한 자취가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대치하는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의혹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깨닫기 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없다. 깨친 사람의 경지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업어 더럽히거나 물들지 낳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한 묘성이 계합하여 걸림 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되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
경계에 자유로울 줄 알아야---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다시 또 어떻게 하겠는가. 부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알아 낱낱이 자신에게 돌리어 근본에 계합하면, 스승없는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진한 이치가 어둡지 않고 분명해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것에 의해 깨친 것이 아닐 것이다.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는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씨를 뿌린 대승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면서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번 귀를 스쳐 잠시 인연을 맺어 놓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유심결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될 종자의 인연을 밎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우며 이루어서 지키고 잊어 버리지 않는 이의 공덕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방종하여 그전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잃지 않게 하였는고. 실로 눈먼 거불이 나무를 만남이고,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물러 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이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을 때, 한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막상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대 수도인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은 신속해서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살아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억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세상의 유위의 선을 가지고도 삼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여러 가지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심오한 법문이겠는가. 잠시 믿기만 해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다가 어찌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한 것인가.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그 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려라.
서산스님은 1520(중종 15)~1604(선조 37). 조선 중기의 고승. 승군장. 완산최씨. 이름은 여신. 아명은 운학. 자는 현응. 호는 청허. 별호는 백화도인 또는 서산대사. 풍악산인, 두류산인, 묘향산인, 조계퇴은 병로. 법명은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에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 목사 이사증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 칠불동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염송,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유마경, 반야경, 법화경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에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를 스승으로 보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 일선, 중계사 석희, 육공 각원, 전법사 영관을 모시고 계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에 급제하였고, 대성을 거쳐 선교양종판사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승군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면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과 같다. 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근기가 있는 바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이름하건대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법체가 그러하니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나게 된다.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三處傳心은 선지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 버리면 꽃을 듦에 미소로써 답한 염화미소도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교외별전의 선지가 될 것이다.
내가 한마디 하니, 생각을 끊고 반연을 쉬어 하는 일 없이 망연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다. 교문에는 오직 한 마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직 견성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여러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공한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조사들의 가르침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 드러났다.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 줄 같이 말씀하셨나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일미에 돌아감 인데, 이 한 맛의 흔적마저 떨어 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活句를 참구 할 것이요, 死句를 참구 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공간을 참구함에 있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짓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주린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 목마른 이가 물 생각하듯, 어린 애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어 사무칠 때가 있을 것이다. 참선에는 반드시 세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며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내 몸을 이 생에 못건지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릴 것인가?"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며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없애는 것뿐이지, 성인의 알음알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보아, 한 생각이 인연 따라 일어나지만 실상은 생겨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살생. 도둑, 음행, 거짓말 등이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있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리요. 환상인줄 알면 곧 여읜 것이다.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성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다. 또한 점점 닦아갈 것도 없다.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지키지 않는다.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만을 깔보아 따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는다. 만일 계를 지키지 않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 버려야 한다.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不生)'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無念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올바른 진리가 아니다. 심법의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다(상자적멸상)'라고 하신 것이다.
예배란 공경이요, 조복받음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데 아무 도움도 안된다.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친 인연도 있게 되고, 따라 기뻐한 복도 있게 된다. 물거품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운 행은 헛되지 않는다. 경을 보되 자기 마음 속을 돌이켜 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보태는 격이다.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를 걸친 야만인만도 못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고 있느냐고 하셨다. 불자들이여. 그대의 한 벌 못과 한 그릇 밥이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찌 소화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말하길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주는 것을 함부로 받아 먹은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이 무슨 심사인고? 도대체 눈 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줄을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 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며, 차라리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먹지 말고, 차라리 끓는 가마솥에 뛰어들망정 신심있는 이가 주는 집에 거처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때문에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과 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하라고 했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옛말에 또 이르기를 '삼악도의 고통이 괴로움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진짜 괴로움이다'고 하였다.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 나오고 백 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놓았구나. 또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덩어리라. 냄새 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 나거나 아까울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기른다 해도 숨 한번에 은혜를 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망이가 다 나고 죽음이 없는 진리에 사무쳐 들어가 도리를 철저하게 증득하여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었다. 큰 기틀과 큰 작용이 자유자재하여 어디나 전신으로 출몰하여 전신으로 짐을 져, 물러나 문수와 보현의 대인 경계를 지킨다 하더라도 실 상대로 말한다면 이 두 분도 또한 도깨비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보리를 마치 원수와 같이 하여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요, 만약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조사에게 얽매이는 것이 된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이 있다면 다 고통이 되므로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여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아함경>
'수구반동' '졸렬한 작태' '후안무치' 등등의 말은 오히려 점잖게 들리는 편이다. 무엇을 자극하자는 속셈인지 모르나 '개' '창녀'가 수사로 등장되고 있고 심지어 임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욕설)가 활자를 더럽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얼굴과 이름을 감추고 고감도의 언어 폭력을 얼마든지 자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특정 사이트는 인신공격과 욕설이 범람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반목과 갈등을 지식인 사회가 해결하고자 해야 하나 그들이 아예 한 술 더 뜬다. 어름다운 수사를 앞세워 진실을 대변하는 듯 하나 거기엔 이지적 교활함이 숨어있어 자신 편에 선 언어폭력을 용사들을 더욱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가 그 과보를 모르는 데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말이 비수가 되어 자기 가슴을 찌르게 됨을 알아야 한다. 옛날 중국의 백장선사는 말 한 번 잘못한 허물로 5백년 동안 여우의 몸을 받은 일이 있다. 그가 전생에 백장으로 살고 있을 때 한 제자가 물었다. "스님들에게도 인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백장이 말하기를 '不落因果'라 했다. 이 말 한마디로 백장은 5백년 동안 여우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 과보를 받았다.
의상대사는 원효, 자장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분이다. 우리들에게는 화엄일승법계도와 화엄십찰의 창건주로, 해동 화엄의 초조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는 624년 한신의 아들로 태어났고 속성은 김씨이다 스물아홉에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였고, 중국 당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에게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에는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옥천사 등의 화엄십찰을 창건하였다. 668년 법계도를 저술했고, 702년 입적했다. 삼국유사에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의상은 부처님의 화신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에 전해진 내용으로, 선묘 낭자와의 인연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당에 유학할 당시 대사를 사모한 낭자가 귀국 길에 용이 되어 대사를 도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대사는 영주 부석사에서 낭자의 도음으로 최초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대사를 부석대사라고도 부른다. 또한 원효 성사와의 유학 길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대사는 또한 당시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이 성을 과도하게 지어 백성의 고초가 크자, 정책을 바꾸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문무왕은 성짓는 것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대사는 해동 10성의 한 분으로 추앙받았다. 원효, 자장과 함께 해동 불교의 전성기를 열어간 분이 의상대사였다.
법성은 원융하여 二相이 없으며(법성은 분별하지 않음을 상으로 삼는 까닭에 차별하는 상이 없으며)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아 본래 고요하도다. (중생인 나의 몸음 있는 그대로 진리의 몸인 법신인 까닭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모든 것이 끊어진 경계로서(일체의 언설을 뛰어넘고 차별하여 아는 상 또한 끊어진 경계로서) 깨달아 아는 것이요, 미혹함이 남음이 없는 경계요 (연기로 이루어지는 중생의 세계나 본래의 자리 또한 부처님의 세계인 것이다) 진성은 매우 깊고 미묘해 (본래 중생의 참다운 성품인 불성은 매우 깊고 미묘해) 자성을 고집하기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스스로의 성품에 집착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본래 공한 그 참된 성품을 깨달아 아는구나)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가운데 또한 하나가 있으며, 티끌 하나 속에 온 우주를 다 포함하고 모든 티끌 또한 다 각각이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은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이다. 구세와 십세가 상극하면서도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 등 아홉 가지와 그 모든 것이 이루는 한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따로 이룬다. (각각의 본성이 어지러이 섞이지 않고 각각이 다르다) 처음 마음을 내는 때가 곧 바른 깨달음의 경계이며, (처음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내는 때 성불하나, 본래 그대로 옛부터 부처였던 경계이며)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 하도다. 진리의 경계와 세속의 경계가 차별을 뛰어넘어 분별이 없으니, 십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이다. (저 화엄경에 나오는 집착함이 없는 부처님, 원력의 부처님, 업보의 부처님 등 열 분의 부처님과 보현보살 대인의 자리인 것이다) 능히 해인 삼매 속에 들어가 (열 분 부처님의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것을 나툼이 본래 성품에 어긋남이 없으니 불가사의 하도다.(모든 중생이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를 내어도 그 번뇌가 다 그대로 깨달음의 바다에 어긋남이 없으니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보배비가 중생을 이롭게 하여 허공을 가득 채우니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에 한량없는 자비의 보배로운 비를 뿌리어 가득 채우나니)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각 이로움을 얻는다. (모든 중생은 낱낱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의 경계에 돌아가 (그러므로 불도를 닦는 모든 중생은 각각의 지닌 진여의 자리를 깨달아) 일체의 망상을 여의지 않을 수 없고 본래 그러한 훌륭한 방편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성품을 포착하여 (부처님의 모든 교화 방편으로 말미암아 중생은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본래 불성을 깨달아) 찬된 자리로 돌아감에 근기에 맞게 공덕을 이룬다. 다라니의 한량없는 보배로써 법계의 참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 마침내 본래부터 참다운 자리인 중도에 앉으니 옛부터 그러함을 일컬어 부처라 한다. (번뇌를 다 끊고 복된 지혜를 이룬 부처라 이름한다.)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하는 데서 생기느니라. 눈을 조심하여 남의 그릇됨을 보지 말고 맑고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입을 조심하여 실없는 말을 하지 말고 착한 말 부드럽고 고운 말을 언제나 할 것이며, 몸을 조심하여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고 어질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하라. 어른을 공경하고 덕 있는 이를 받들며 지혜로운 이를 따르고 모르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라. 오는 것을 거절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며, 내 몸 대우없음에 바라지 말고 일이 지나갔음에 원망하지 말라. 남을 해하면 마침내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세력을 의지하면 도리어 재화가 따르느니라.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 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 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 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 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삼보전에 원력 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옵서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 언덕 가사이다 이세상에 명과 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마다 좋은 국토 밝은 스승 만나오며 바른 신심 굳게 세고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 일에 물 안들고 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생명 사랑하여 이내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인연 구족하며 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 마음 견고하여 제불정법 잘 배워서 대승진리 깨달은 뒤 육바라밀 행을 닦아 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설법으로 천겁만겁 의심 끊고 마군중을 항복받고 삼보를 뵙사올제 시방제불 섬기는 일 잠간인들 쉬오리까 온갖 법문 다 배워서 모다 통달 하옵거든 복과 지혜 함께 늘어 무량중생 제도하며 여섯가지 신통 얻고 무생법인 이룬 뒤에 관음보살 대자비로 시방법계 다니면서 보현보살 행원으로 많은 중생 건지올제 여러 갈래 몸을 나퉈 미묘법문 연설하고 지옥아귀 나쁜 곳엔 광명 놓고 신통 보여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 화탕지옥 끓는 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검수도산 날 센 칼날 연꽃으로 화하여서 고통받던 저 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빚진 이들 갖은 고통 벗어나서 좋은 복락 누려지다 모진 질병 돌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 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오리까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 끊고 삼계고해 뛰어나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모다 성불 하사이다 허공 끝이 있아온들 이내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천수경
정구업진언--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세 번>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돌 지미 사바하<세 번> 개경게--가장 높고 미묘한 법 백천만겁 만날손가 제가 이제 모시오니 님의 참뜻 알아지다. 개법장진언--옴 아라남 아라다<세 번>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모십니다. 관음보살 대비주에 머리 숙여 절합니다. 님의 원력 위대하사 상호 또한 거룩하고 고해 중에 모든 중생 일천팔로 거두시며 일천 눈의 광명으로 시방세계 살피시네 참된 말씀 그 가운데 은밀한 뜻 보이시고 하염없는 그 맘속에 자비심이 넘칩니다. 중생들의 온갖 소원 하루속히 이뤄지고 중생들의 모든 죄업 길이길이 없어지다 천상천하 모든 성중 한가지로 보살피고 백 천 가지 온갖 삼매 한꺼번에 닦고 익혀 받아 지닌 저의 몸은 광명당의 깃발되고 받아 지닌 저의 마음 온갖 신통 곳간되니 모든 번뇌 씌어 내고 생사고해 어서 건너 보리법을 깨달아서 방편문이 열려지다 제가 이제 맹세하여 귀의하고 외우오니 뜻하는 일 소원대로 두루두루 이뤄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법을 하루 속히 알아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부처님의 지혜 눈을 하루 빨리 얻어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한량없은 모든 중생 하루속히 건져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팔만사천 묘한 방편 하루 빨리 얻어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반야용선 지혜 배를 하루 속히 타여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생노병사 괴롬 바다 하루 빨리 건너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계와 정혜 구족 한 길 하루 속히 얻어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자취없는 열반 산에 하루 빨리 올라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하염없는 법의 회상 하루 속히 만나지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고 비옵니다. 이 몸으로 법성신과 하루 빨리 같아지다. 칼산지옥 내가가면 칼산절로 무너지고 화탕지옥 내가가면 화탕절로 말라지고 모든지옥 내가가면 지록 절로 사라지고 아귀세계 내가가면 아귀절로 배부르고 수라세계 내가가면 악한 마음 절로 쉬면 짐승세계 내가가면 밝은 지혜 절로 나리
사방찬
동방 씻어 청정하고 남방 씻어 시원하고 서방 씻어 정토되고 북방 씻어 안강하다.
참회게
내가 지은 모든 악업 탐진치로 생겼으니 몸과 입과 뜻이 한 일 모두 참회 하나이다.
십악참회
살생한 죄 오늘 참회 투도한 죄 오늘 참회 사음한 죄 오늘 참회 망어한 죄 오늘 참회 기어한 죄 오늘 참회 이간한 죄 오늘 참회 악담한 죄 오늘 참회 탐애한 죄 오늘 참회 진애한 죄 오늘 참회 우치한 죄 오늘 참회 오랜 세월 쌓인 죄들 한 생각에 스러지니 마른 풀을 불태우듯 흔적조차 없어지네 죄의 본성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 마음 한 번 쉬고 보면 죄업 역시 사라지네 죄성 없고 마음 쉬면 이것 일러 진참회라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준제주의 크신 공덕 일념으로 외우오면 모든 세상 어려운 일 침노하지 못하리니 천상에나 인간세나 부처처럼 복받으며 이 여의주 얻은 이는 가장 큰 법 이루리다
대준제를 외우옵고 크고 넓은 원 세우니 정혜 두루 밝아지고 모든 공덕 이뤄지며 거룩한 복 두루하고 중생성불 하여지다.
여래십대발원문
나는 이제 삼악도를 길이길이 뛰어나리 나는 이제 탐진치를 하루속히 끊으오리 나는 이제 불법승을 어느때나 듣사오리 나는 이제 계정혜를 부지런히 닦으오리 나는 이제 부처님을 항상모셔 배우오리 나는 이제 보리심을 어느때나 지키오리 나는 이제 극락세계 틀림없이 태어나리 나는 이제 아미타불 하루속히 만나뵈리 나는 이제 나툼몸이 시방세계 두루하리 나는 이제 모든중생 남김없이 건지오리
발사홍서원
가이없는 중생을 맹세코 건지리다. 다함없는 번뇌를 맹세코 끊으리다. 한량없는 법문을 맹세코 배우리다. 위 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리다. 내 마음의 이는 중생 맹세코 건지리다. 내 마음의 끊는번뇌 맹세코 끊으리다. 내 마음의 무량법문 맹세코 배우리다. 내 마음의 무상불도 맹세코 이루리다.
발원이귀명례삼보
시방삼세 항상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시방삼세 항상 하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시방삼세 항상 계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모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삼계대사 부처님이 정령히 이르사대 마음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달하고 불생불멸 저국토에 상낙아정 무위도를 사람마다 다할줄로 팔만장교 유전이라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상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 긱반 대인접화 일체처 일체시에 소소영영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둥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하고 천진면목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 번 깜짝할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 분명한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 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 하여가되 일념만년 되게하여 폐침망찬 할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적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 영광 개천 개지 이러하고 열반 진락 가이없다. 지옥천당 본공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히 인가마저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수연방광 지내가되 빈 배 같이 떠놀면서 유연중생 제도하면 보불은덕 이 아닌가 일체계행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 불학 생각하고 동체대비 마음 먹어 빈병 걸인 괄시말고 오온색신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 몽중으로 관찰하여 해태심을 내지 말고 허령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 일체경계 부동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허튼 소리 우스개로 이 날 저 날 헛 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볼까 죽을제 고통 중에 후회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낸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 참혹 내노릇이 이럴줄을 누가 알까 저지옥과 저축생의 나의 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 차타하여 다시 인신 망연하다 참선잘한 저 도인은 서서죽고 앉아죽고 앓도 않고 선세하며 오래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하며 항하사수 신통묘용 임의쾌락 소요하니 아무쪼록 이세상에 눈코를 쥐어 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포주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로세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깐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제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제 하루해가 가게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고 무명업식 독한 술에 혼혼불작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듣고 꾸짖어도 조심않고 심상히 지내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심진심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 날마다 분요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죽을줄 모르도다 내마음을 못닦으면 여간계행 소분복덕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보아 하루도 열두때며 밤으로도 조금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위에 펴놓고 시시때때 경책하소 할말을 다하려면 해묵서이 부진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한 말 있아오니 돌장승이 아기나면 그 대에 말할테요.(끝)
인생의 최고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 잘 살고 싶다'고 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하여 애쓴다. 그러나 막상 행복이 뭐냐, 잘 사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거기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원하는 바지만 사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렇게 잘 모르는 것을 바라고 구한다. 문제가 분명해야 해결이 쉽고 목표가 확실해야 성취 또한 쉽다. 분명한 걸 구해도 될까말까 한데 확실치 않은 것은 더구나 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을 구한다면 우선 원하는 바 그 행복의 정체가 확실해야 한다. 어느 절에 젊은 스님이 있었다. 출가 후 한 삼년을 밤낮없이 수행에 열중했다. 그러나 전혀 수행에 진전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동경했던 절 사정도 알고보니 짜증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참선이다 예불이다 운력이다 도무지 귀찮고 성가스러웠다. 봇짐을 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노스승이 붙잡고 달래보았으나 마음을 돌이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못내 서운해 노자까지 주며, "세상나가 살더라도 부처님 잊지 말고 잘 공경하거래이" 라고 하셨다. 절밖으로 나온 젊은 스님은 그날로 자고 싶은 잠 실컷 자고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따위 속세의 온갖 것을 찾아다니며 즐겼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가고 일년이 지나자 그도 저도 다 싫고 진력이 났다. "맘대로 살고 싶다. 맘대로 해보겠다고 해서 다 맘대로 해봤는데 뭐가 불만인가?" 이윽고 그는 도대체 맘대로가 뭔가?라는 생각에 이르러 그 마음을 살피려 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스승을 떠올렸다. "다시 스승을 찾아가자. 염치는 없지만 내 마음을 얻을 때까지 스승의 밝은 눈에 의지하자." 절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다가 지칠대로 지쳐 잠시 쉬려는데 노스승이 자기를 떠나 보냈던 그곳에서 기다리는 듯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놀랍고 반가우면서도 부끄러움의 뒤엉켜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이고, 스님!"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가서 그대로 땅바닥에 몸을 던져 엉엉 울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려 스승께 삼재를 하고 눈물과 흙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스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삼보를 배반하고 부모를 배은하며 스승님을 배신했으니...제발 자비를 베풀어 다시 거두어 주옵소서." "그래, 잘왔다. 어디 하고 싶은 일은 마음대로 해보았느냐?" "네, 이 일 저일 실컷 해보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지겹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마음대로' 하는 그 '마음'이 뭔지를 몰라 다시 스승님을 ㅊ찾아왔습니다." "넌 그동안 그렇게 공부한 것이다. 그렇게 깨친 것이다. 마음대로란 마음을 안 연후에야 되어도 될 일이요, 마음이란 알려고 해서는 알지 못해. 이후에는 그저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마음이 있거든 거기대고 오로지 '나무아미타불"하여 모든 마음을 부처님께 바치도록 해라. 모든 것은 원인지어 결과되느니라." 이 말에 젊은 스님은 크게 안심을 얻고 공부해 수행에 큰 진척을 보게 되었다. 확실히 원하고 성취하려거든 그 원하는 것의 내용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만들어 스스로 확인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상당부분을 성취해가면서도 불만 또한 누적된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정작 돈이 생기면 행복은 저만치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것을 바라고 추진시키고 그 정도를 심사평가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마음이다.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어떤 것을 모두 얻는다 해도 행복은 요원하다. 따라서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절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첩경이다.(한라불교25451109)
불상생계는 죽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타율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벗어난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즉 스스로의 의지로 죽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자율적인 측면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불상생계는 불교 독자의 규범은 아니다. 인도 종교문화사상에서 본다면 자이나교 역시 불상생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기타의 종교에서도 불살생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정신을 인도에서는 아힘사라 말한다. 아힘사란 다은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해(不害)라 번역하며, 이런 정신이 근대에까지 계승되어 간디의 무저항 정신을 탄생시킨다. 간디의 무저항정신의 근원은 불상생계이며, 이것은 간디에 한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 중에서 부루나 존자는 수로나국에 전도를 떠나기 전에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 부처님께서는 무저항 정신인 아힘사를 강조한다. 부루나 존자는 형생 수로나국에서 전도하며 무저항 정신을 실천하였다. 유명한 <백론>의 저자인 리야데바스님은 이교도의 칼에 찔려 죽게 되었을 때 추적하려는 제자들은 만류하면서 오온이 공한 것인데 나의 수고를 덜어주었거늘 그들을 잡아서 어찌하겠다는 것이냐고 경책하면서 입적하였다. 모두 불상생계가 단순히 죽이지 않는 차원에서 무저항 전신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생계를 실천할 때 살생의 대상은 인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죽여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불살생계는 생명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위주의 사고에서 탈피해 있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가치를 동일한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범자연적 내지 범우주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위주의 사고가 무한경쟁과 인권유린, 그리고 무질서, 파괴, 공해 등을 유발했으며, 사회의 범주를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 내지 우주계까지 확대해석해야 한다는 사회학자들의 지적은 오히려 불교적 세계관에 근접히오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기초는 바로 불살생 정신인 것이다.
중국을 통해 불법이 한반도에 전해지기 훨씬 전인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마자 그이 여섯 번째 제자인 발타라 존자가 해상을 통해 전도를 위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법초전성지 탐라에는 조선 후기 2백여년간 모진 단절의 역사가 있었다. 조선 중기만 해도 절 오백, 당 오백이라 일컬을 정도로 불법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탐라불교가 조선 선조 1년(1568) 곽 흘 목사로부터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까지 이어진 무자비한 훼불로 모든 가람들은 잿더미로 변한 채 구한말까지 200여년간 소위 '無僧 無尼 無寺의 三無시대'로 칭해지는 암흑기를 맞기도 했음은 제주민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탐라국이 고려 초기에 들어와 탐라현으로 중앙정부의 지방행정조직인 주현제도에 처음 편입되었듯이, 탐라불교 역시 고려시대에 들어와 그 정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탐라불교의 대표적인 두가지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법화사와 수정사 등 제주의 대표적인 비보사찰을 비롯한 여러 사찰의 번성과 대형불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들 사찰들은 국운융성과 왕실번영을 기원하는 원찰로서 국가적 차원의 각종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고, 그 덕분에 많은 사찰이 창건되기도 하는 등 탐라불교는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특색으로는 고려왕실이 국가적으로 봉행했던 불교행사인 팔관회 등에 탐라의 호족들이 공물을 바치고 직접 참여하는 등 육지와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육지의 불교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불교교세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충혜왕 때 왕사를 역임했던 승려 흑선이, 충목왕 때 승려 종범이 탐라로 유배되고, 충렬왕 때에 승려 혜일이 탐라에서 활동하다 중국으로 유학하는 등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덧붙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려왕실이 전국 명산대천에서 국가제사를 지내는 것의 일환으로 한라산신에게도 광양당에서 불교, 도교, 유교에 무속적 의례까지 혼합된 국가제사가 거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제주불교의 신행행태에서 볼 수 있는 민간토속신앙과의 습합(習合)현상이 고려 당시부터 상당히 성행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의례로까지 공인 받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억불숭유를 국시로 내걸었던 조선왕조에 들어와 탐라불교는 모진 시련을 겪게 되고, 급기야 전대미문의 훼불에 의한 2백여년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조선시재 각종 사료와 유생들의 문집에서는 격한 어조로 불교와 제주토속신앙의 폐해를 거론하고 있으며, 중종때 허응당 보우대사의 불교중흥시도 실패와 제주 유배 직후 당한 처절한 암살은 결국 극단적 유교숭상에 빠진 제주목사들에 의해 모든 사찰들이 불타고 불교신앙 자체가 철폐되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암흑기가 오늘날 탐라 불교사를 연구함에 있어 가장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사 연구에 있어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의 하나인 전통가람이 하나도 없고, 관련 유물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더불어 탐라불교만을 다룬 고문헌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고,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의 제주기사와 일부 유학자들의 사문집들을 통해서나마 단편적인 탐라불교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사료의 조각들을 모아 왕조별로 보인 탐라불교의 특생과 주요 사건, 도내 불교유적 및 문화재, 신앙행태의 특징과 문화사적 분석, 제주가 배출한 고승들과 제주와 인연을 맺었던 도래승들, 제주불교가 갖는 종파적 특성, 해방 이전까지 한국 근대사 속에서의 제주불교의 부흥과 항일운도 등을 조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면서도 소중한 작업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기쁨에 앞서 무한한 두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한반도와 달리 독자적 해상경로로 전파되어 5교9산과 선교양종 등 한국볼교사를 대변하는 어느 종파와도 다른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 탐라불교, 어느 지역보다 훨씬 깊숙이 민중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 얼핏 겉으로 보기에는 불교 본래의 모습마저 잃어 버린 것 같은 토속융합불교, 끝없이 부침을 거듭했던 육지의 왕조사에서 비롯된 환란들을 온 몸으로 감내해내면서도 제주만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왔던 탐라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던 민중불교의 모습들을 독자들과 함께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발우에 담긴 뜻 한라불교 2545.1130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는 왕이 전답과 사노를 받아들이길 원했으나 "일의일발(一衣一鉢)이면 족하거늘 어찌 전답과 사노가 필요하겠는가?"라며 정중히 거절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소유와 재물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상의 고귀한 뜻을 말해주는 일화다. 실제로 출가사문은 일의일발로 평생을 의지하며 산다. 스님들이 입는 가사란 '기워입은 헝겊 옷'이란 뜻이며 '발우'는 수행을 하는데 필요한 육체적 활동을 돕는 음식을 제공받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스님들의 발우에 담겨지는 음식은 최소한에 그친다. 그래서 발우공양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공양을 마치게 되면 설거지까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므로 음식을 남길래야 남길 수 없다. 깊은 산중에 많은 스님들이 살았어도 이러한 발우공야 덕분에 계곡물을 더럽히지 않으며 청정한 자연환경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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