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 | 고진하
시집 속 대표시
대문 외 4편
백 년이 훨씬 넘었다는 폐가에 가까운 한옥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직 젊디젊어서
삐그덕― 고성高聲을 지르며 열릴 때마다
내 귀를 파릇파릇하게 하네
대문이 대문이 아니고
저 깊고 푸른 숲의 아름드리나무였을 적,
햇살과 바람, 비와 눈, 낮과 밤,
하여간 저 사계의 족적이
여직 또렷하게 대문大紋으로 새겨진 대문의
저런 아름다운 무늬를 나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문장을 짓는 사람,
없는 빗장을 열고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저 파릇파릇한 말씀을 받아 적을 수 있을까
서까래만 한 큰 붓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대문장을 휘갈길 수 있을까
자, 나 오늘 저 집으로 들어가련다
이리 오너라, 소리쳐도
열어줄 문지기도 빗장도 없지만
백 년이 훨씬 넘었어도
그 소리만은 짱짱한 우주 명창인 대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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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수업
때로 내 마음은 근심의 직물을 짜는 공장이기도 하지만
그 공장 옆으로 바람이 불고 심호흡하는 꽃들을 보며
하늘하늘 너풀너풀 내 근심은 간데없이 날아가기도 하지
꽃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봄, 저 나른한 봄의 학교에서
개화도 낙화도 생을 단련하는 수업이지만
나비나 벌들이 잠깐 향기 은은한 꽃술에 앉아
평정을 누리는 향기 수업의 자리를 곁눈질하다
봄날이 다 갔네
행인 같은 봄이 끌고 사라진 꽃수레의 체온이
마른 잎맥처럼 가슴 언저리께 남아 잔물결을 일으키지만
숱한 이별과 친해져야 할 누덕누덕한 날들 위로
성큼 다가올 여름이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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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수도원 3
혹한의 추위를 견디는 것도 기도요,
백야白夜를 하얗게 밝히는 것도 묵상이지만
무엇보다 큰 즐거움은
눈 조각을 하며 묵상에 잠기는 것이지요.
붓다도
예수도 거닐어 보지 못한
이 남극 빙설 위에서,
뭉쳐진 눈덩이로
붓다의 미소를 빚고
뭉쳐진 눈덩이로
형틀에 매달린 예수의 고뇌를 빚고 나서
햇살에
천천히
천천히
녹아내리는 광경을 즐기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녹는데
십 년 백 년이 걸릴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불멸의 미소는 없다는 듯
불멸의 고뇌도 없다는 듯
빙설 위의 눈 조각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
얼어붙은 침묵의 눈길로 바라보는 일
이보다 좋은 묵상은 더 없지요.
어느 날
눈 폭풍이 휘몰아쳐 눈 조각을 뒤덮으면,
미소도
고뇌도
사라지고
모습을 알 수 없는 모습
형상을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부풀어
우뚝우뚝 자라나는데,
그 유현幽玄한 형상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이 크나큰 의문도 묵상도
끝내
빙설로 붐비는 극極의 시간에 파묻히고 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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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성소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 놓으면
눈 밝은 해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님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설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 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聖所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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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충동
베끼고 싶은 시인의 시들은
이미 낡았구나
베끼고 싶은 가인(歌人)의 노래는
이승의 리듬이 아니구나
베끼고 싶은 성자의 삶은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표절 충동은
창조자인 나를
언제나 슬프게 하지만)
꽃의 꿀을 따먹으면서도
꽃에 이로움을 주는
나비나 꿀벌의 삶은 베끼고 싶거니
이런 생물들의 꽃자리가 되어주는
대지의 사랑은 베끼고 싶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