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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 이주희
S#1. 동궁전 내실 (낮)
문고리를 꼭 쥔 작은 손. 놀란 얼굴로 앞을 응시하는 어린 지겸(9)이다. 그 위로
세자경종(E) : 어머니를 살려주오!
한 대신의 옷자락에 매달려 우는 세자경종(13).
자막. 숙종 27년 가을
대신 :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잡은 옷깃을 뿌리치며 나가는 대신. 문고리 잡고 있는 지겸과 마주치고 머뭇, 손을 타악 제치고 나가버린다.
세자 : 이럴 수가….
가쁜 숨 몰아쉬더니 바닥에 머리 쿵쿵 박는 세자.
지겸 : 마마! (달려가 일으키며) 마마!
세자 : (무서운 눈) 언제 죽을지 몰라 떨고 사느니…!
질끈 감고, 혀 콱 물어버리는 세자. 순간 지겸, 제 손을 끼워넣어 막고.
뚜욱 떨어지는 피. 세자 놀라서 본다.
지겸 : (아픔으로 떨리는 손을 감싸고) 마마 옆에…제가 있잖아요.
지겸 손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에서.
S#2. 세답방 작업실 (스크롤씬)
파문에 일렁이는 핏빛 꽃물로. 그 속에 가만히 하얀 천 담그는 여인(필정)의 손.
연이어 갖가지 색깔 천연염색 하는 모습 펼쳐진다.
타이틀『통정 通貞』오르고,
자막. 통정(通貞)은 ‘평생의 순결’이란 뜻으로, 소년기에 거세된 환관을 말한다.
S#3. 내반원 마당 (20년후/낮)
동그랗게 둘러싼 내관들 가운데 서로 대치하고 선 두 내관.
자막. 20년후. 경종 1년
스르르 칼(소도) 뽑는 손. 상처자국 선명한 지겸이다.
역시 칼 빼든 최 홍. 기합과 함께 지겸에게 매서운 공격을 퍼붓는다.
최선을 다해 막아내는 지겸. 역으로 최 홍 쪽을 파고들어 가는데.
지겸에게 밀릴 듯하자 악물던 최 홍, 지겸의 상처를 노려 내리친다.
지겸 : 앗!
한쪽무릎 털썩 꿇는 지겸. 베인 손 부르르 떨리더니 칼 놓치고.
심판 : 최 홍, 통! 이지겸, 불통~
지겸 올려다보면, 최 홍 이쪽으로 칼날 뻗친 채.
최 홍 :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것도 병법의 하나. (칼집에 꽂으며) 전하를 지키는 것이 내관의 제일 첫 소임 아니던가?
대열에 앉았던 유도 지겸에게 달려온다.
S#4. 내반원 일각 (낮)
대청에 걸터앉아 지겸의 손에 붕대 감아주는 유도.
유도 : (씩씩거리는) 분명히 일부러 아픈 데를 노린 거야.
지겸 : …….
유도 : 명색이 대련인데 손만 노려 찌르는 게 어딨어. 그런데도 상선영감 암말 없이 통 주는 거 좀 봐요.
정말 누가 대대로 물린 내시집안 아니랄까봐.
지겸 : 진 건 진 거지. 지고 나서 말하면 변명이야.
유도 : 참! 형님은 암튼.
고개 외로 꼬다 지나가는 궁녀들 보고 헤벌어지는 유도.
유도 : 하유… (지겸 툭툭 건들며) 형님, 응? 팔랑팔랑 생머리 조거 한 번만 품어보면 내가 소원이 없겠수.
지겸 : (어이없어 웃는) 이런 무엄한 놈. 너 오늘 저녁번 아니냐?
유도 : 에?
지겸 :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늦겠다.
유도 : 으잇, 또 늦으면 경을 친댔는데! (후닥닥 넘어졌다가) 형님 나, 가요.
내달리는 유도 보며 웃다가 통증에 찌푸리는 지겸.
S#5. 내반원 지겸 방 (오후)
손가락 아직도 떨리고 있다. 지겸 옷깃을 덮어 가려버리는데, 옷에 핏자국이 묻어 있다.
‘어’ 하는데 벌컥 열고 들어오는 유도.
유도 : 형님! 대전에 좀 들어갑시다.
지겸 : 무슨…
유도 : (손을 잡아끌며) 아, 어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지겸.
S#6. 편전 앞 (오후)
지겸 : 뭐? 수라를?
유도 : 아무리 드셔야한데도 막무가내라지 뭐예요.
지겸 :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니.
유도 : 그게 그러니까, 왕세제께서 저녁문안을…
하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연잉군.
유도 찔끔해서 인사하고 지겸도 정중히 숙이는데 연잉군 지겸에게 눈길 잠깐 주고 지나간다.
유도 : 휴우- 살았다.
지겸 : …….
S#7. 편전 내실 문밖 (오후)
지겸을 보고 반색하는 상궁 내관들. 지겸 입 열려면
경종(E) : 먹기 싫다지 않니!
최 홍(E) : 마마, 탕제 드셔야 하온데 수라를 거르시면 아니되옵니다.
경종(E) : 필요 없다니까!
지겸 : 전하. 지겸입니다.
순간 정적.
S#8. 편전 내실 (오후)
지겸 들어서보면, 경종은 방 가운데 서있고 그 밑에 엎드렸던 최 홍 입술을 깨물며 일어난다.
지겸 : 전하. 옥체 불편한 데라도 계시옵니까.
경종 : 흥. (그러나 한결 누그러진)
지겸 : 아니면 (웃으며 팔 내밀고) 성심을 흩트린 일이라도 있었사온지.
경종 : 혼자 걸을 수 있다!
경종 보료 향해 걷는데 약하게 절뚝거린다.
지겸 : (밖에다) 수라상 들이시게.
수라상 3개 들어와 경종 앞에 놓이면.
경종 : (작은상을 가리키며) 그걸로.
수라상궁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허둥대자 지겸 얼른 소원반의 국으로 바꿔놓는데‥ 다친 손이 떨린다.
경종 : 응? 너 손이 왜 그러냐?
지겸 : 아,아닙니다.
경종, 소맷자락에 묻은 핏자국 발견하고.
경종 : (놀라) 피를 흘렸구나.
지겸 : 아.
최 홍 : 낮에 내시사 시험에서 소신과 소검 대련을 하였사온데 그만. (지겸에게) 이내관! 예가 어디라고 그런 모습을 해서!
지겸 : 송구합니다.
경종 : 으흠, 으흠.
최 홍 : 나가서 제대로 추스르시오.
지겸 : 예….
S#9. 세답방 앞+안 (저녁)
조용한 작업실 밖. 지겸이 기웃거린다. 안에서 뭔가 끓는 듯 김이 모락모락하고.
지겸 : 저어, 누구 없습니까?
그때 후다닥 나와 솥뚜껑을 열어 재끼는 필정.
필정 : 이를 어째. (막대로 꺼내며) 빨래 얹어놓고 다 어디 갔어?
지겸 : 저, 항아님.
필정 : 어머 놀래라.
지겸 : 죄송합니다. 저는 대전 설리인데.
필정 : 대전내관께서 세답방에 어쩐 일입니까?
지겸 : 관복을 더럽혀서…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필정 : 세답방이 어디 내관나리 의대까지 손질하는 뎁디까?
지겸 : 그게 아니고 (옷자락을 보이며) 피가,
필정(OL) : 내관이면 제 집 식솔더러 씻으라 하세요.
막대 탁 내려놓고 들어가버리는 필정. 지겸 옷자락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S#10. 세답방 마당 (저녁)
넓은 마당에 나무로 세운 건조대며 우물.
필정 빨래통 들고 우물가로 나오는데 지겸이 관복을 벗어 빨고 있다. 다친 손이 불편해 진땀 흘리는 모습.
필정 아차 싶고.
필정 : (무뚝뚝하게) 줘봐요.
지겸 : (얼핏 반가운 웃음) 아.
필정 : (빼앗듯 함지박에 넣고 흔들더니) 이거 핏물이잖아요?
지겸 : 아, 예.
필정 : 언제 이랬죠?
지겸 : 몇 식경 됐습니다.
발딱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가버리는 필정. 지겸 어리둥절하고.
다박다박 다시 나온 필정, 손에 쥔 소금을 착 뿌린다. 핏물 빠지는.
지겸 : (아, 감복한다)
필정 : 얼룩은 빠지는데, 워낙 색이 바랬네요. 부인이 의복수발을 않으시나요?
S#11. 편전 내실 (저녁)
사발을 내려놓던 경종 갑자기 울컥! 토한다. 내관, 상궁들 놀라 보고.
웨‥에엑― 사력을 다해 토하는 경종.
S#12.세답방 마당(저녁)
지겸 : 예?
필정 : 이참에 (옷 들고 일어나며) 아예 물을 들여요. 마침 쪽물 뽑아놓은 게 있으니까.
지겸 : 아, 아니요. (당기며) 이리 주십시오.
필정 : (뺏기지 않고) 지금 담그면 금방 되요.
지겸 : 됐습니다.
필정 : 그냥 주세요‥ (빨래와 함께 왈칵 껴안긴다) 어멋!
지겸 엉겁결에 받아 안았는데‥느닷없이 얼굴에 떠오르는 홍조.
지겸 : (멎어서) …!!…
필정 머리칼이며 얼굴 온통 물에 젖어 올려다보더니 오해하고 부르르… 지겸의 뺨을 때린다.
놀라 보는 지겸.
S#13. 내반원 마당 (밤)
지겸 터덜터덜 걸어오다가 뺨을 만진다.
지겸 : 허허, 참. (실소하다 다른 내관에게 들이받힌다) 엇!
돌아보다말고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내관.
지겸 : (툭툭 털며) 원 사람.
또다시 허겁지겁 달려가는 내관들. 거기 최 홍도 보인다.
지겸 : 이 시간에 번교대할 리도 없고? 보십시오, 최내관님.
최 홍 : (돌아보는)
지겸 : 무슨 일 있습니까. 왜들 이리 급하게?
최 홍 : 알 것 없소이다. (홱 가버리고)
지겸 : ….
그때 지겸의 옷자락 잡아당기는 손. 지겸 돌아보고 놀라는.
S#14. 내반원 지겸 방 (밤)
지겸 : 유도 너 숙직번 아니었니.
유도 : (눈 찡긋하며) 쉿!
지겸 : ?
유도 : 형님 나가고 나서 대전에 일이 있었어요.
지겸 : 무슨!
유도 : 상감마마께서 곽란을 일으키셔서.
지겸 : 뭐어?
유도 : 에이, 걱정할 건 아니라나봐요. 잔병치레 워낙 많이 하시는 분인데 뭐.
지겸 : 그렇‥지만.
× × × (시간경과)
불 꺼진 방에 누운 지겸, 걱정과 조바심으로 가득한.
S#15. 침전 (새벽)
하얀 침의 걸친 경종, 창을 내다보고 서있다.
지겸 : 벌써 일어나셨사옵니까, 전하.
경종 : …….
지겸 : 간밤에 옥체 미령하셨다 들었사온데.
경종 : …….
지겸 : …용포 대령하겠사옵니다. (돌아서는데)
경종 : 겸아.
지겸 : 예, 전하.
힘들게 돌아서는 경종.
경종 :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자진하려는 나를 말리다가 너 그 손을 다쳤지.
지겸 : (다친 손을 본다) ….
경종 : 그때 네가 날 말리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지겸 : 전하!
경종 : 겸아. (두려운) 아무래도 누가 날 죽이려는 게야.
지겸 : 전―하!
경종 : (털썩 무너진다) 난 무섭다, 아직 아무것도 못했는데…겸아‥난 무서워.
지겸 경종을 끌어안고‥너무나 안타까워 표정 일그러지는.
문득 발밑에 눈길 멈춘다. 토사물 흉측하게 얼룩진 곤룡포.
지겸 : 이건….
예사롭지 않은 얼룩에 굳는 지겸.
S#16. 몽타주 (낮)
# 곤룡포 보따리를 안은 지겸. 심각한 표정으로 재게 걷는다.
# 서고에서 책으로 된 발기(문서) 뒤지는 지겸.
# 수라간. 상궁에게 발기를 보이며 물어보는 지겸. 상궁 절래절래 내젓고.
# 퇴선간. 내인이 꺼내주는 은수저를 살펴보는 지겸. 깨끗하다. 고개 갸웃하는.
S#17. 연못가 (낮)
맥 빠진 얼굴로 돌멩이 던져 넣는 지겸. 옆에 놓인 곤룡포를 흘깃 보는데 붉은 옷감 오물이 묻은 부위로 선명하게도 퍼진 쑥빛.
손을 가져가다가 지겸, 문득 생각에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S#18. 세답방 마당 (낮)
필정 빨간 댕기 팔락거리며 흰 빨래 너는데 빨래 뒤로 불쑥 나타나는 지겸.
지겸 : 항아님.
필정 : 어맛.
S#19. 연못가 (낮)
마주보고 선 지겸과 필정. 지겸 용포를 들어 보인다.
보다가 흠칫하는 필정. 주변 둘러보더니 지겸 한번 보고 후다닥 가는.
지겸 : (쫓아가며) 항아님….
S#20. 창고 (낮)
안에 누가 없나 두리번거리는 필정. 지겸 조심스레 문 닫고 들어오면.
필정 : (낮게) 비상입니다.
지겸 : 어찌 그리 단언합니까.
필정 : 곤룡포 색깔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야무지게) 용포의 비단은 홍화나 천초를 섞어 물들이는데,
색을 진하게 하려고 백반에 담그었다 옷을 짓습니다. 이런 천에 비상이 닿으면 (변색한 부분 짚으며) 쑥빛이 되지요.
지겸 : 비상이라면 틀림없이….
S#21. 편전 내실 (낮)
경종 : 계획적인 독살.
곤룡포 펼쳐놓고 경종 앞에 꿇어 엎드린 지겸.
지겸 : 황공하옵게도.
경종 :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지겸 : 일단 수라를 맡은 모든 궁인을 문책하시는 게 순서이겠사온데.
경종 : 저,전부 다 말이냐?
지겸 : 허나 퇴선간에 알아보니 사용하신 은시저(수저)에는 아무 잘못된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비상이면 독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경종 : 그럼 대체‥?
지겸 : 분명한 것은 독이 나왔단 사실이 아니옵니까. 지금 내옥에 일러 소소한 것부터 차례로 조사하면
틀림없이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경종 : 그렇지만‥세상은 여직 내 어머니를 죽게 한 노론들 손아귀가 아니냐.
지겸 : 전하. 결단만 내려 주십시오. 만약 잘못되도 소인이 모두,
경종(OL) : 그건 아니되! (한숨) 모든 것이 내가 후사를 보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종사만 안정되면… 이 일은 그만 덮기로 하자.
지겸 : 하오나 전하!
경종 : (외면한다) 오늘밤은 중궁전으로 가겠다.
지겸 : 전하….
경종 : (펼쳐진 용포 보며) 저건 태워버려라.
S#22. 후원 입구 (저녁)
실망한 표정의 지겸 지나는데, 여인(필정)의 비명소리 들린다.
급히 나무를 헤치고 가는 지겸.
지겸 : 거기 누구요!
S#23. 후원 (저녁)
필정의 손목을 꽉 붙든 최 홍. 필정 다른 손에는 꽃잎으로 가득한 바구니 들렸다.
필정 : 놓으시오,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최 홍 : 환관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잘 생각해보라니까.
필정 : 혼인하기 싫어서 궁녀가 된 몸입니다.
최 홍 : 그거야 아무 철없을 때 생각이고. 너 또한 일평생을 구정물에 손 담그며 궁에 갇혀 살고프진 않을 테지.
필정 : (대답 못하고)
최 홍 : 널 내 집 안방마님으로 삼아 준다지 않느냐. 3대째 상선을 물려온 집안에서 너 하나 쥐도새도 모르게 빼내는 것쯤,
어렵지 않단 말이다.
필정 밀치고 가려면 최 홍, 필정의 팔을 비틀고. 비명 지르는 필정. 필정의 바구니 땅에 떨어져 꽃잎 흩어진다.
지겸 : (수풀에서 나오며) 거기 무슨 일 있소?
필정을 사이에 두고 눈 마주치는 두 사람.
지겸 : 항아님….
필정 : 아,아무 일도 아닙니다.
달려가 버리는 필정. 최 홍 지겸을 노려보더니 꽃잎을 짓밟으며 간다.
혼란스레 보던 지겸, 뎅그마니 뒹구는 바구니에 시선 머문다.
S#24. 내반원 지겸 방 (아침)
곤룡포를 쥐었다 놨다 갈등하는 지겸. 결국‥보자기로 잘 싸서 함에 넣고 일어선다.
S#25. 세답방 앞 (아침)
쌍지 : (물동이 들고 나오며) 필정 항아님. 일찍 나오셨습니다요.
필정 : 쌍지 너야말로 입궐이 이르구나.
쌍지 : 남편이란 작자 얼굴 마주치면 쥐어터지기밖에 더하나요.
소매를 걷으며 들어가려던 필정 문 앞에 멈추는. 성한 꽃으로만 반쯤 찬 필정의 바구니 놓였다.
들어보고 놀란 빛 퍼지는 필정의 얼굴.
쌍지 : 그게 뭡니까요?
필정 : 아, 아니다.
소복한 꽃잎 내려다보며 살짝 미소 짓는 필정.
S#26. 연못가 (낮)
나란히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지겸과 필정. 필정의 댕기 바람에 날려 지겸의 팔을 간지럽힌다.
지겸 : 그 댕기도 꽃잎을 모아 물들인 겁니까?
필정 : 이것은‥어머니가 사주신 거예요.
지겸 : 예에….
필정 :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 많이 맞으셨어요.
지겸 : (놀라 보는)
필정 : 저는 어미가 맞고 사는 게 너무 싫었죠. 그래서 궁녀가 되겠다고 고집을 세웠고요.
지겸 : (씁쓸하게 웃는다)
필정 : 꽃잎으로 물들이는 거 말인데. 바로 딴 것이 마른 것보다 예쁜 색이 나와요. (웃음) 사람 많은 대궐에서 늘상은 어렵지만요.
지겸 : 그렇습니까.
필정 : 물을 들여도 여러 번 정성을 들일수록 오래가고 깊은 색이 나온답니다.
필정 보다가 눈빛 가라앉는 지겸.
필정 : 내관님은요?
지겸 : 예?
필정 : 내관님도 얘기해 보세요. 입궐은 어찌했고 또‥.
지겸 : 저는… (하다 가라앉는) 제겐 이 궁궐이 집입니다.
필정 : 근심이 계신 듯 보입니다.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지겸 : …….
필정 :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말씀해 보셔요. 걱정도 나누면 한결 낫답니다.
지겸 : (고마운 미소) 사실은 지난번 전하께서 독을 당하셨을 때 말입니다. 모두 조사했지만 수라에는 독이 들지 않았습니다.
필정 : 비상이면 기미에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지겸 : 독을 탄 음식이 무언지만 알아도….
필정 : …….
쏴아아…불어오는 바람에 필정 몸을 떤다.
S#27. 세답방 마당 (낮)
항아리의 초록색 물을 조심스레 막대로 휘젓는 필정.
쌍지 : 항아님~ 식사도 거르고 무얼 하셔요.
필정 : 으응, 물발이 섰나 보는 거란다.
쌍지 : (코를 싸쥐고) 하이~냄새. 이거, 들에 흔한 쪽잎파리 아닙니까요. 이걸로도 색물을 들입니까요?
필정 : 그래. 쪽을 남(藍)이라 하지 않니. 왜,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지. 쪽물은 잘 빠지지 않는단다.
필정 하얀 옷감을 펴서 살며시 넣는다. 초록으로 물드는 천. 잠시 후 꺼내면 초록빛 천이 점점 청색으로 짙어진다.
기다란 천을 넝쿨처럼 드리워 건조대에 너는 필정. 쌍지도 거든다.
쌍지 : 항아님. 이제 이렇게 말리면 끝납니까요?
필정 : 한번 해선 색이 오래가지 않아. 좋은 색을 내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물들이는 거야.
쌍지 : 그래서 몇 번이나 하시려고.
필정 : (빙긋) 이번엔 한 열 번쯤?
쌍지 : 히익―열번씩이나? 그렇게 정성들여 어디다 쓰시게요?
대답 없이 행복한 듯 널린 천을 눈부시게 올려다보는 필정.
S#28. 내반원 대문 (저녁)
딴생각에 빠진 지겸의 얼굴로.
유도 : 그러니까 고년이, 내 앞에서 찡긋 웃고 가는 거라. 왜, 내관이랑 궁녀가 정을 주고받기도 한다는 말도 있잖우?
(힐끗 보고) 으이그, 형님!
지겸 : 으응?
유도 : 남 말하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 많대요?
지겸 : 유도야. 너 동궁전 왕세제 마마 얘기 뭐 들은 적 없니.
유도 : 글쎄. 왕세제 마마야 맨 글 읽고 조석으로 문안 들고. 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보다 더한 걸 어떻게 견디나 몰라.
암튼 상감마마랑 형제간의 우애가 옅어서 그렇지 뭐, 성품도 나무랄 데가 없다지.
지겸 : 그래 그렇지…. (고개 절래절래 내젓는) 내가 무슨 생각을.
유도 : 왜. 무슨 말이라도 있어요?
지겸 : 아니다.
유도 : 에이, 뭐 있구만. 어?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지겸.
유도 : (안에 대고) 에이~ 뭐야 대체? 형님, 나 퇴궐해야 되는데 진짜 말 안 해줄 거예요?
S#29. 내반원 마당 (저녁)
쌍지 : 저기‥이내관 나리시지요?
돌아보는 지겸. 무수리 패찰을 단 쌍지가 반듯한 보퉁이를 들고 있다.
지겸 : 넌 못 보던 무수리인데?
쌍지 : (지겸에게 내밀며) 필정 항아님이 전해드리라는 댑쇼.
지겸 : 이게…뭐냐?
쌍지 : 일전에 신세진 보답이라 하셨습니다요.
S#30. 내반원 지겸 방 (저녁)
지겸 보자기를 풀러보면, 잘 개켜진 남빛 천 나온다.
지겸 : 이건‥단령 옷감….
들고 보던 얼굴에 놀라운 빛 번지고. 남빛 천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용히 보는 지겸.
S#31. 편전 내실 (낮)
어의가 누워있는 경종의 종아리에 뜸을 뜨는 중이다.
최 홍 곁에서 두루마리를 펼치고 낭독한다.
최 홍 : 영의정 김창집의 상소입니다.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가 없어 종사가 위태롭던 중 연잉군을 후사로 삼아
겨우 종사가 안정되었습니다. 이제 왕세제 연잉군을 정사에 참여하게 하여…
경종(OL) : 왕세제더러 정사를 보게 하라니. 허수아비 같은 이 자리에서도 아예 끌어내리겠다는 수작인 게야.
최 홍 : 마마.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어의 뜸을 거두면 경종 부액 받아 앉으며.
경종 : 후, 덥구나. 시원한 것 좀 가져오너라.
어의 나가기를 기다려 경종에게 바싹 다가가는 최 홍.
최 홍 : (낮추고) 마마. 요사이 상감마마의 총애를 믿고 궁녀와 간통하는 내관이 있다하옵니다.
경종 : (짜증) 뭐?
최 홍 : 게다가 처소에는 망극하게도 곤룡포까지 모셔놓고 있다고….
경종 : (낯색 변해) 지겸이는 어디 갔느냐?!
S#32. 수라간 (낮)
놀라 고개 드는 지겸 얼굴.
지겸 : 식혜를 드셨다고요?
수라상궁 : 예. 전하께서 찾으시는지라 발기에는 없지만 생과방에 말해 들였지요.
지겸 : 맞아. 요즘 화열이 잦으셔서 찬 것을‥ (퍼뜩) 그럼 식혜를 가져온 것은 누구였습니까?!
수라상궁 : 글쎄, 그건 잘‥
그때 유도 달려 들어온다.
유도 : 형님! 헉헉, 대전에서 형님을 급히 찾으세요.
S#33. 편전 내실 (낮)
지겸 : 찾아계셨사옵니까, 전하.
경종 : 다들 잠깐 물렀거라!
모두 나가고 경종 앞에 홀로 엎드리는 지겸.
경종 : 네 처소에 곤룡포를 두었느냐.
지겸 : !
경종 : 분명 태워버리라 명하였거늘. 너를 아끼는 것을 믿고 지금 방자히 구는 게야!
지겸 : 전하, 그런 것이 아니옵고….
경종 : 내 명을 하찮게 여기고 거역하는데 내 어찌 너를 믿고 일을 맡기겠느냐.
어찌 행동했기에 궁녀와 정을 통한단 얘기까지 나와!
지겸 : (고개 저으며) 전하! 소신은 그런‥
경종(OL) : 다시 그런 소리 들린다면 절대 용서치 않겠다.
지겸 : (눈빛 흔들린다) …….
경종 : 보기 싫다. 찾을 때까지 눈에 띄지 말거라.
지겸 :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참고 고개 떨군다)
S#34. 세답방 앞 (낮)
문 앞에 남빛 천 보퉁이 내려놓는 지겸. 돌아서는데
쌍지(E) : 이내관 나리!
지겸 : (멈추고)
쌍지 : 그거‥일전에 이년이 전해드린 물건 아닙니까요?
지겸 : (돌아보며) 그래‥.
쌍지 : (쌍심지) 근데, 이걸 왜 여기다 두고 가십니까?
지겸 : 나는 이런 거 받을 만한 일도 않은데다, 옷 지을 손도 없구나. 받을 수가 없다.
가버리는 지겸. 쌍지 뜨악한 얼굴로 본다.
S#35. 세답방 (낮)
필정 앞에 놓인 남빛 옷감. 쌍지 양푼 놓고 게걸스레 터진 만두 먹고 있다.
쌍지 : 항아님이 뭐 저 좋아서 기껏 수고한 줄 아나? 아무리 나랏님 옆을 드나든대봐야 내시가 내시지, 뭐. 기껏 내시 주제에.
필정 : (나무라는) 쌍지야‥
쌍지 : 안그렇습니까요, 항아님. (필정 흘깃 살피고, 힘주어) 항아님이야 그럴 리 없지마는, 어쩌다 내시랑 정분이 나는 항아님들도
종종 계신갑습디다. (왕- 베물었던 만두 보며)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두가 속이 없으면 무슨 맛이래.
필정 : …….
쌍지 : 어쨌거나 밖에 바람 맞으면서 저렇게 손이 부르트도록 물들였구만. 애쓴 사람 성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이렇게 두고 갈수는 없는 거 아녀요?
필정 : 그래….
쌍지 : 차암, 옷감이 있어도 지어줄 사람이 없다니. 그 냥반 가모도 하나 두지를 못했나봐.
명색이 대전내관이라면서, 그 나이에 가진 것도 없나베.
복잡한 표정으로 옷감을 내려다보는 필정… 문득 결심한 듯 일어서더니 말릴 새도 없이 단호하게 나간다.
S#36. 후원 담장어귀 (저녁)
낮이라도 컴컴하고 후미진 담장 아래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톳불.
지겸 보따리를 풀러 얼룩진 곤룡포를 꺼낸다. 지그시 보더니 불속으로 던져 넣고.
검게 타들어가는 용포를 멍하니 보는 지겸.
S#37. 동궁전 내실 (지겸의 회상/20년전 낮)
혀를 물고 죽으려는 세자경종(13)을 막은 지겸. 아픔으로 떨리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지겸 : (다른 손으로 감싸고) 마마 옆에 제가 있잖아요.
세자경종 : 거짓말! 아바마마는 날 미워하시고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있겠다던 사람들 전부 날 버리고 가버려.
(눈물 주르륵) 나도 어머니처럼 죽게 될 거야….
지겸 : (울먹이는) 마마! 이제부터는 지겸이가 지켜드릴게요.
세자 : (보다가) 믿어도 되겠느냐. 죽을 때까지?
지겸 : 죽을 때까지요.
세자경종 지겸을 와락 껴안으며 운다. 함께 우는 지겸.
S#38. 후원 담장어귀 (저녁)
지겸 눈에서 뚝 떨어지는 눈물.
지겸 : (닦아내며) 허허, 참. 경망스럽기는.
그때 지나치다가 지겸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필정.
지겸 인기척에 돌아보고는 얼른 얼굴 돌려 눈물을 닦는다.
필정 : 어째서 묻지 않는 거죠?
지겸 : 무엇을 말입니까.
필정 : 그날 숲에서 일. 옷감을 돌려보낸 것은 그 때문입니까.
지겸 : 아닙니다. 그저…. (외면한다)
필정 입술 꽉 깨물더니 손 불쑥 내밀며.
필정 : 이 손이 퉁퉁 불도록 빨래나 만지는 천한 계집이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하찮게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지겸 : 하,항아님‥.
필정 : 죽을 때까지 궁궐의 그늘에서만 살 팔자라고 해도 환관의 처첩 따위가 될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다고요!
지겸 : 항아님! (손 내밀다가 멈칫)
필정 : (눈물 어리는) 믿지 않으시는 거죠… 두고 보세요.
필정 달려가 모퉁이로 사라진다. 눈으로 쫓다가 고개 숙이는 지겸.
타다 남은 잿더미에서 연기만 가늘게 피어오른다.
S#39. 세답방 뒤 (저녁)
멀리서 지겸과 필정을 지켜보던 최 홍. 무서운 눈으로 주먹 꽉 쥔다.
S#40. 내반원 지겸 방 (밤)
이부자리에서 잠 못 이루는 지겸.
× × × (인서트 ․ 씬38)
필정 : (손 내밀어 보이며) 이 손이 퉁퉁 불도록 빨래나 만지는 천한 계집이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하찮게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손가락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지겸.
S#41. 세답방 마당 (낮)
노랑 분홍 초록 색색으로 물든 옷감을 너는 필정.
건조대 가득 널린 옷감들 바람에 펄럭이고‥ 필정 멍하니 바라본다.
쌍지 : 오늘 볕이 좋아서 색이 잘나오겠어요.
필정 : …….
쌍지 필정 보는. 대충 짐작하는 듯 안쓰러운 표정이다.
쌍지 : (과장스레) 항아님. 동궁전 비자 이야기 들으셨습니까요. 왜 석례라고, 천한 것이 왕세제 마마께 어찌 꼬리를 쳤는지.
하이구, 망측하기도 하지.
여전히 힘들어 보이는 필정. 쌍지 걱정스레 본다.
S#42. 필정 처소 (저녁)
아파 누운 필정. 쌍지 대야에서 물수건 꼭 짜 이마에 올려준다.
쌍지 : 아유 이걸 어째, 암 것도 못 먹고.
필정 : (기운 없이) 난 괜찮아. 그보다, 쌍지 너 얼른 퇴궐해야지.
쌍지 : (골난) 사람이 이런데 어떻게 비워요, 쯧.
필정 : 누워 쉬면 돼. 어서 가봐.
에휴 한숨쉬던 쌍지. 한 번 돌아보고 나간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필정.
S#43. 내반원 뒷마당 (밤)
소도로 짚단 베어 넘기는 지겸. 촤촤촤 모두 베고도 지칠 때까지 계속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른다.
결국 발이 꼬여 쓰러질 뻔. 칼을 짚고 가까스로 지탱한다.
나무통의 물 촤악 끼얹더니 힘들어 가쁜 호흡만.
S#44. 필정 처소 (밤)
누워있던 필정, 힘들게 몸을 일으킨다. 반짇고리 꺼내면 그 위에 얹힌 남빛 천. 펼치면 관복으로 시침질 돼있다.
바느질하는 필정. 얼굴 많이 축났지만 그래도 행복한 듯….
S#45. 편전 내실 (낮)
경종(E) : 약을 먹을수록 더 나빠지지 않느냐!
와장창 부서지는 약사발.
경종 : 시원한 것을 가져오라니까! 지겸이! 지겸이는 어디갔느냐.
최 홍 : 일전에 근신하라 하명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경종 : 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환관놈들! 재물과 권세를 바래 제 몸에 칼을 대고,
궁에 들어와서는 권신들과 얽히는 줄 내 모를 줄 아느냐?
최 홍 : 고정하시오소서, 상감마마. 성을 내시면 화열이 상승하여 옥체 더욱 상하게 되시옵니다.
경종 : 헉헉, 어의를 다시 들라하라. 진맥해서 이 지긋지긋한 화열을 없애보란 말이다.
내 말 듣지 못했느냐? 당장 나가 어의를 불러‥헉!
경종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최 홍 : 마마! (밖에 대고) 가서 어의를 모셔 와라! 어서!!
경종 : …(입술 달싹이는)
최 홍 : (가까이 대며) 예? 무어라 하셨습니까, 마마?
경종 : 겸‥아….
굳은 표정으로 경종을 내려다보는 최 홍.
S#46. 유도의 집 (밤)
사립문을 들어서는 유도. 작은 초가다.
유도 : 어머니, 유도 왔습니다. (하다 굳는) 누구요!
담 그늘에서 나오는 그림자. 냉소 머금은 최 홍이다.
유도 : 왜, 왜 또 온 거요.
최 홍 : 볼 일이 있으니 왔지. 그런 눈치도 없는 놈은 아닐 텐데.
유도 : 이,이러지 마시요! 지난번 묻는 말에 몽땅 대답했지 않습니까.
지겸이 형님한테 해로운 일은 없다고 하구서, 내 다시는 최내관과 상종하지 않을 거요.
최 홍 : 그래? 그럼 내수사 내탕금에 손댄 사실을 진언해도 상관없단 말이겠지.
유도 : 그,그건‥곧 채워 넣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최 홍 : (차갑게 웃는다)
S#47. 동궁전 앞 (밤)
문 밖으로 보이는 두 남자의 그림자.
연잉군(E) : 부친이신 최상선과는 내 잘 알던 사이었다.
S#48. 동궁전 내실 (밤)
연잉군 앞에 절하고 일어서는 남자, 최 홍이다.
연잉군 : 그래, 나를 섬기고 싶다고? 주인을 두고 내게 온 목적이 무엇이냐.
최 홍 : 군주의 그림자가 되어 일하는 천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 있어 세제 저하를 찾아 왔겠습니까. 그저,
연잉군 : 음?
최 홍 : 사람은 옷을 입어야 하고 부처는 금박을 입혀야 제격이라고 했습니다.
연잉군 : (쾅 내리치며) 지엄한 궁중에서 부처를 찾다니!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
최 홍 : (보는)
연잉군 : 하하하하하!
웃어재끼는 연잉군에게 다가와 안기는 석례. 요염하게 웃는다.
S#49. 세답방 (낮)
필정 앉아서 빨래 개키고 있다. 들어와 물동이 턱 내려놓는 쌍지.
쌍지 : 내 참 별 꼴을 다보겠네.
필정 : (힘없이 웃으며) 왜 골이 났니?
쌍지 : 차암, 언제부터 쥐구멍에 볕들었다고. 엊그제만 해도 나랑 같이 물 긷고 수라상 나르던 지가, 침전수청 몇 번 들었다고
특별상궁이라도 되는 양.
필정 : 무슨 말이냐.
쌍지 : 왜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동궁전 왕세제 마마 수청을 든다는 비자 말이에요. 하긴 요새 좀 이상하긴 했어.
평소엔 제 일 아니면 남이 아무리 바빠도 눈썹하나 까딱 않던 것이 안하던 식혜 심부름을 도맡아하고.
필정 : 식혜‥?
쌍지 : 아무리 그래봐라. 흥, 첩지라는 게 그리 쉽게 내리는 건 줄 아나.
필정 : 쌍지야.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쌍지 : 석례요. 석례.
S#50. 필정 처소 앞 (저녁)
필정 지겸의 옷을 남빛 천에 곱게 싸안고 나온다.
쌍지(E) : 항아님. 그러지 말고 가서 한번 말이라도 속 시원히 해보든가요.
S#51. 연못가 (저녁)
서성거리는 필정에게 다가오는 지겸. 옷보따리 끌어안은 필정의 손 가늘게 떨리고.
지겸 :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필정 : (보따리 내밀며) 이거.
지겸 : (굳는) 뭡니까.
필정 : 지난번 옷감으로 단령을….
지겸 : (안타까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필정 : 다른 마음 아닙니다. 그냥 받아만 주셔요.
망설이던 지겸 돌아서가려는.
필정 : 정말 모르시겠어요?
지겸 : (돌아선 채‥아픈 얼굴) 다시는 절 찾아오지 마십시오. 저는‥ 항아님께 결코 마음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필정 답답하지만 얼른 말이 안 나오고.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버리는 지겸.
필정 : 잠깐만요. 아셔야 할 일이 있어요!
지겸 : (멈추고)
필정 : 그날 대전에 식혜를 가져온 건 석례라고‥동궁전 생과방에 있는 비자랍니다.
지겸 필정 얘기 듣다가 갑자기 고개 돌린다. 파스락 풀숲을 빠져나가는 검은 그림자.
S#52. 궁궐 일각 (저녁)
성나 걷는 최 홍에게 다가서는 유도. 무어라 귀엣말하면 최 홍 놀란다.
황급히 달려가는 최 홍.
S#53. 동궁전 석례 처소 (저녁)
(E)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
잠시 후 지겸 콰당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그러나 은장도에 목을 찔려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석례.
지겸 : 이런 일이. (후다닥 나가려는데)
최 홍(E) : 이내관이 여긴 웬일이요?
최 홍과 내관 여럿 문 앞을 둘러싸고 있다.
최 홍 : 저놈을 당장 포박해라!
내관들 : 예!
우르르 달려오는 내관들.
지겸 날렵하게 때려눕히고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간다.
S#54. 동궁전 앞 (저녁)
등에 숨긴 소도를 뽑아드는 지겸.
최 홍 재빨리 칼을 뽑으며.
최 홍 : (야비한 웃음) 네가 왕세제를 모살코자 하지 않았느냐.
지겸 :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최 홍 : 변명해야 소용없다!
말끝에 최 홍 먼저 치고 들어온다. 지겸 받아치는데 또 손을 노리고 들어오는 최 홍. 그 빈틈을 놓치지 않는 지겸의 역습.
사력을 다한 지겸의 일격에 최 홍의 칼이 날아간다. 그때 지겸의 뒷머리를 겨냥해 내리치는 우락부락한 내관.
지겸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려 피하는데 한꺼번에 지겸에게 달려드는 내관들.
× × × (점프)
흠씬 두드려맞고 쓰러져있는 지겸. 최 홍 허리에 찬 소도를 만지며 왔다갔다 하다가.
최 홍 : 네가 왕세제 마마를 모함하여 주상과의 사이를 갈라놓았겠다.
지겸 : 대체 내가 그리했단 증거가 무엇이요.
최 홍 눈짓하면 내관들 멀리서 지켜보던 유도를 끌고 온다.
유도 : (놀라) 왜이러십니까. 저는 상관없는 일로 해주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지겸 : 유,유도야 네가?
최 홍 : 자, 말해봐라. 저놈이 왕세제를 모살하려 했음이 틀림없으렷다?
유도 : 저는 모릅니다.
최 홍 : 이놈이!
지겸 : 너로구나…. (최 홍 향해, 분노에 차서) 다 네가 꾸민 짓이야! 이 비열한 노~옴. 네가 천벌을 면할 줄 아느냐!
최 홍 : 흥!
지겸에게 다가가 바닥 짚은 손을 콱 밟는 최 홍. 지겸, 고통에 찬 비명…
최홍 : (지겸에게 가까이 대고) 너를 죽이고 나면 필정이란 계집을 노비로 만들어 내 노리개로 삼을 것이다.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번쩍 정신 드는 지겸, 순식간에 최홍의 소도를 뽑아 홱 벤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쓰러지는 최 홍.
지겸 막아서는 내관들을 정신없이 물리치고 동궁을 빠져나간다.
최 홍 :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저놈을‥잡아라….
S#55. 궁궐 일각 (밤)
전각 아래쯤 몸을 숨긴 지겸. 멀지 않은 곳에 대전의 지붕이 보인다. 그 위로 지겸을 찾는 듯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내관들.
S#56. 세답방 (밤)
필정 : 뭐? 이내관께서 석례를?
쌍지 : 글쎄, 일이 심상치가 않네요. 도망친 이내관을 잡겠다고 온 궁 안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요.
필정 고개를 흔들더니 뛰어나간다.
쌍지 : 아유, 아유, 항아님!
S#57. 궁궐 일각 (밤)
이리저리 지겸을 찾아다니는 필정. 축 늘어진 필정 앞에 나타나는 내관의 신발. 반가워 보면 최 홍이다.
필정 : !!
최 홍 : 왜 아무런 답이 없는 게냐.
필정 : 궁녀를 희롱하면 죄를 받는 것도 모릅니까.
최 홍 : 나는 안 되고, 다른 내관은 괜찮다니. 너도 참 재밌는 아이로구나. 이지겸이 너 때문에 대전에서 쫓겨난 것도 모르나?
필정 : 그, 그게 무슨…
최 홍 : (속삭이듯) 이제 곧 하늘이 뒤바뀔게다. 그렇게 되면 이지겸의 처지는 장담할 수가 없어.
그놈은 철저히 주상의 손발이거든.
필정 : (부르르 떤다)
최 홍 : 그러니 순순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텐데.
최 홍이 손대려하면 도망가는 필정.
S#58. 궁궐 일각 골목 (밤)
필정 지나는 것 뒤에서 와락 잡아채는 손. 놀란 필정의 입을 막는 사람 지겸이다.
필정 : 아‥.
지겸 : 항아님. 계속 이러면 항아님까지 위험합니다.
지겸을 와락 끌어안는 필정. 지겸 순간 눈빛 흔들리지만.
지겸 : (떼어내며) 저는 일단 궁에서 몸을 피해야할 것 같습니다.
필정 : 따라갈래요.
지겸 : 안돼, 위험해요.
필정 : 제 말대로 하세요, 무조건.
지겸 : 하지만!
필정 : 쉬잇! 이대로 잡히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요. 전 어디든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타오르는 눈으로 필정을 보는 지겸.
S#59. 세답방 (새벽)
쌍지 : 예?
필정 : 부탁해.
쌍지 : (소리죽여) 아이고~ 그예 큰일을 만드는구먼, 그 화상.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쌍지 가슴께에 찬 패찰을 끌러준다.
S#60. 궐문 (새벽)
병사 하나 하품 찍찍 하고 있다. 작은 보퉁이 든 필정이 먼저 나가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지겸 패찰을 보여주고 가려는데.
병사 : 잠깐 멈춰라.
지겸 : (아찔하다)
필정 : (돌아보고) 왜 그러십니까.
병사 : 무수리가 웬 장옷이냐.
필정 : 추위를 잘 타는 이라서, 제가 빌려준 것입니다.
병사 : (심술궂게) 어디, 얼마나 추위를 타나 한번 벗어봐라.
필정과 지겸 서로 눈 마주치고 어는. 지겸 장옷 여민 손에 슬며시 힘을 넣는데.
최 홍(E) : 수상한 자는 없었느냐.
저쪽에서 내관들 거느리고 나타나는 최 홍.
병사 : 아, 예. (대충 가라고 손짓)
지겸과 필정 애써 태연한 척 빠져나가고.
병사 : 지금 막 내인 하나와 키 큰 무수리 말고는 아무도 오잖은걸입쇼.
최 홍 : 뭐? (얼른 밖을 살핀다)
뒤돌아보던 필정과 눈이 마주치는 최 홍.
최 홍 : 쫓아라!
병사 : 예?
지겸 필정의 손을 채어 달려간다.
최 홍 : 저놈들이다! 잡아라!!
지겸과 필정의 뒤를 쫓아 나오는 내관들.
S#61. 골목 (새벽)
골목 사이로 최 홍의 지시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흩어지는 내관들 보인다.
지겸과 필정 불안한 표정으로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있다.
다시 달리는 두 사람. 발견하고 쫓는 소리.
S#62. 산길 (새벽)
쫓기듯 달려오는 지겸과 필정. 갈림길이 나온다.
지겸 : 이쪽으로.
필정 : (말없이 끄덕이는)
경사 급한 벼랑길로 접어드는 지겸과 필정.
필정 긴치마를 손으로 걷어 올리고 걸음 떼는 모습 힘겹다. 급기야 발을 헛디뎌 구르는 필정.
지겸 손을 뻗쳐 겨우 떨어지는 것 막고. 하지만 지겸이 잡은 나무뿌리도 덜컥 흔들린다.
필정 : (아래 쳐다보더니) 놓세요.
지겸 : 혼자서는 못갑니다.
사력을 다해 필정을 끌어올리는 지겸.
S#63. 산길 (낮)
평탄한 산길. 지겸과 필정 조금 늦추어 걷는다.
필정이 돌부리를 채고 비틀거리자 지겸 손을 내민다. 주저하다 잡는 필정. 미소 어린다.
S#64. 시냇가 (낮)
손 꼭 잡고 지친 걸음 걷다가 시냇물을 발견하고 멈추는 두 사람.
바위 위에 앉는 필정. 신발을 벗고, 버선도 벗는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찡그리는.
지켜보던 지겸, 물로 들어와 필정 앞에 앉는다. 영문몰라 보는 필정의 발을 끌어당겨 물을 끼얹는 지겸. 손이 떨린다.
부끄러워하는 필정의 발을 놓아주지 않고 정성스레 닦는.
필정 이윽고 편안하게 지겸에게 맡겨버리고.
고개 숙인 지겸 눈에서 눈물이 흘러 필정의 발등위에 툭 떨어진다. 어깨를 떨며 우는 지겸.
필정 : (물기어린 목소리) 우리가 궁궐 밖에서 만났더라면.
지겸 : (멈추고 … 본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사람.
S#65. 폐가 (저녁)
지겸 : (어색한) 음, 으흠. 오늘은 여기서 머물기로 할까요.
필정 : (작게 웃고)
지겸 장지문을 살짝 밀면, 먼지 풀-썩 내며 쓰러진다. 콜록거리다가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
× × × (시간경과)
필정, 툇마루에 앉은 지겸에게 보퉁이를 내민다.
지겸 : 이게 무엇입니까.
필정 : 잘 맞을까 모르겠어요. 풀어보셔요.
보면 필정이 지은 옷. 짙푸른 단령(관복)이다…
지겸 : 이건….
필정 : (미소) 맞는지 입어보셔야죠.
지겸 단령을 입는다. 고름을 매려는데 최 홍에게 밟혔던 손이 아파 서툴고.
필정 : (당겨서 보더니) 손은 또 어찌 상했습니까!
지겸 : !
필정 : (아픈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가… 고름을 매어주며) 어쩌다 이리 깊은 상처를 입으셨나요.
지겸 : (슬프게 본다)…….
필정 : 이 옷은 쪽풀로 물들인 거예요. (흐뭇) 쪽물이 여간해서 잘 빠지지 않는 거 아세요? 제가 여러 번 정성들여 물들였으니까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제 마음처럼.
필정을 격정적으로 끌어안는 지겸.
지겸 : 어찌하면 좋습니까. 저는 항아님께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데.
필정 :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한가지. 마음만은 영원히 변치 않겠다 약속해 주세요.
아프게 변하는 지겸 얼굴…
지겸 : 저같이‥ 어린 시절 거세된 내관을 통정이라 부릅니다. 왕에게 바쳐져 평생 순결하다는…
저는 임금을 사모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필정 : (아프다)…….
S#66. 폐가 방안 (밤)
지겸 품에 안겨 포옥 잠든 필정. 필정 뒤에 누워 꼭 끌어안고 있는 지겸… 잠 못 이루고 있다.
S#67. 내옥 고문장 (밤)
어두운 헛간처럼 보이는 어두운 실내.
단근자며, 주뢰, 주장, 인두 등 벽에 걸린 형구 보이는 위로 한참동안 계속되는 비명.
유도(E) : 아아아아아악―
형리로 보이는 남자, 묵묵히 땀 흘리며 고문만 한다.
최 홍 : 멈춰라.
유도 : 헉‥헉…허억….
최 홍 : 내수사 내탕금을 손댄 이유가 뭐지?
유도 : (숨가쁘게) 말했잖아요. 우리 어머니 병환 때문에.
최 홍 : 그게 아니지. (부드럽게) 이지겸이 역모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니냐?
유도 : 나,난 몰라요. 정말 모른다구요!
최 홍 짧게 한숨쉬고 형구가 걸린 벽을 지나간다.
유도(E) : 안돼, 안돼, 안돼! 아아악―
S#68. 침전 (밤)
곤히 잠든 경종.
조용히 문 열리더니 들어오는 발자국. 시퍼런 칼 빼든 최 홍이다.
이불 위로 칼 내리꽂는데 비명 지르며 눈 번쩍 뜨는 경종.
경종(E) : 겸아―!
S#69. 폐가 방안 (새벽)
헉-일어나는 지겸. 꿈이다. 지겸 우두커니 앉아 손의 상처를 내려다보는…
어린지겸(E) : 이제부터는 지겸이가 지켜드릴게요.
지겸 옆에 꼬부리고 누운 필정을 돌아본다.
지겸 : (가만히 읊조리는) 필정아….
와락 치미는 울음. 지겸 서둘러 방을 나간다.
S#70. 폐가 밖 (새벽)
정신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지겸의 모습 위로.
지겸(E) : 필정아. 내가 태어났을 때, 너무 가진 것이 없던 부모는 나를 엎어놓으려 했단다.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양자로 보낸 것이 내 양아버지, 내관의 집이었지. 가난한 것이 죄였을까….
S#71. 시냇가 (아침)
지겸(E) : (점점 울음 섞이는) 네 말처럼 우리가 산골의 평범한 사내와 아낙으로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하지만 지금 내 처지는 너를 원하는 것도 욕심일 뿐이구나…. 다시는… 다시는 지금 같은 사내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S#72. 산길 (낮)
지겸(E) : 내 마음 한 조각도 네게 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마라 필정아….
S#73. 편전 내실 (낮)
자리에 누운 경종. 병세가 악화되어 있다.
그 앞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상소 펼치는 최 홍.
최 홍 : 왕세제 마마를 모해하려는 음모 끝에 궁녀 석례를 죽이고, 또 간통하던 궁녀를 데리고 도망간 이지겸을 의금부에 넘겨
다스려야 한다는 왕세제 마마의 상소이옵니다. 마땅히 그를 잡아 삼족을 멸하시오소서.
경종 : (입을 꾹 다물고 있다) …….
S#74. 궁궐 일각 (밤)
훌쩍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 몸을 낮추고 담벽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이는 지겸이다.
인기척에 얼른 계단 밑으로 몸을 숨기는데.
최 홍(E) : 준비는 다 되었느냐.
수라상궁(E) : 예.
최 홍의 목소리를 알아채는 지겸.
상궁, 팔각쟁반에 대접 받쳐 들고 있다.
최 홍 :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닐 테지.
수라상궁 : 아,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최 홍 : 어디…
최 홍 낭하에 서서 추루룩 식혜를 쏟으면 지겸들의 바로 눈앞 화초에 떨어져 튄다. 지겸 소매 들어 가리고.
화초 위의 벌레가 뽀얀 물을 맞고 툭 뒤집어지는 모습 확인한 최 홍.
최 홍 : 좋다. 침전으로 들여라.
수라상궁 : 예. (인사하고 간다)
최 홍 멀어지는데‥ 지겸 굳어있다. 꺼멓게 변색한 소매.
이를 악무는 지겸.
S#75. 침전 앞 (밤)
지겸 다시 담을 넘어서면, 수라상궁 막 침전으로 들어가는 모습. 계단으로 가려는데 그 앞을 최 홍이 가로막는다.
최 홍 : 이게 누구야.
지겸 : 비켜라, 이 역적!
최 홍 : 그렇게는 안 되지. (소도 싹 뽑아 겨눈다) 잡아라.
우르르 몰리는 내관들. 지겸 뛰쳐나가며.
지겸 : 독입니다, 전하!
S#76. 침전 (밤)
대접 입으로 가져가다가 멈추는 경종.
지겸(E) : 전하! 드시면 안 됩니다, 전하!
경종 : 지겸아?
내려다보고 대접 툭 놓아버리는 경종.
S#77. 침전 앞 (밤)
지겸 : (계단 달려 올라가며) 전―하! 독이…
최 홍 : 이 놈!
뒤에서 칼을 내리긋는 최 홍.
지겸 : 들 었…….
계단 위에 털썩 쓰러지는 지겸. 경종 달려 나오는 모습 부감으로 보이고…
지겸을 안아 올려 흔드는 경종.
경종 : 겸아! 지겸아!
겨우 눈뜨는 지겸.
경종 : 겸아.
지겸 : 전‥하….
경종 : 뭣들 하느냐. 어서 어의를 불어라!
지겸 : 전하.
경종 : 그래…
지겸 : 미천한 이 몸‥전하를 뫼시는 것이 전부였건만…한 사람의 사내로 사랑하는 여인을 품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 운명이란 것이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이다.
경종 : 지겸아….
지겸 : 전하께서 훗날 성정을 펴시는 날에는… (운다) 다시는 저 같은 이 없게 해 주소서…으윽.
경종 : (돌아보고) 어의는!!
지겸 : (경종의 옷 그러쥐고) 필정이…필정이를….
경종 : (끄덕인다) 내 꼭 지켜주마. 걱정 말거라.
지겸 안도의 미소 짓고 눈을 감는다. 화면 암전.
S#78. 편전 내실 (얼마 후/낮)
문 열리고 들어오는 필정. 하얀 댕기가 눈에 띈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으면,
경종‥ 침울하게 보는.
경종 : …….
필정 : …….
경종 : (깊은 한숨) 너를‥ 출궁시켜 주겠다.
잠깐 멈칫하는 필정. 이윽고
필정 : 소인…궁을 나가고 싶지 않사옵니다.
경종 : …….
필정 : 그냥…그분의 체취가 남은 이곳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경종 : (눈을 내리 감는다)
S#79. 세답방 마당 (낮)
빨래 널고 있는 필정. 하얀 빨래, 햇살에 눈이 시리다.
불어오는 바람에 빨래 온통 나부끼자 팔을 들어 눈을 가리는데 빨래 뒤로 불쑥 나타나는 지겸.
지겸 : (활짝 웃으며) 항아님.
필정 : (허억 숨만‥)
믿기지 않는 듯 질끈 감았다가 뜨면 지겸 여전히 웃고 있다.
필정 눈물을 흘리며 손을 내미는데 다시 바람에 화르륵 날리는 빨래… 필정 두리번거리지만 지겸 모습 이제 없다……
떨리는 손으로 빨래에 얼굴을 파묻는 필정 모습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