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의 한인회를 개척한 고 송두영 화백
샌디에이고의 한인회를 개척한 불자, 고 송두영 화백> 샌디에이고 중심부에 있는 발보아 애비뉴와 남북으로 뻗어있는 콘보이 스트릿. 약 30여 년 전부터 한인들이 하나 둘 모여 가게를 열기 시작한 곳이다. 운전을 하다가 콘보이 스트릿과 다겟 코너에 서서 보면 예쁜 청기와지붕이 보인다. 1985년에 세워진‘코리아 하우스’식당이다. 코리아하우스는 1992년 10월 7일에 작고한 샌디에이고의 초대 한인회 송두영(호는 하정)화백의 예술작품이다. 코리아 하우스식당은 장녀(송묘령)와 사위(김종원)가 운영하고 있다. 또 코리아 하우스보다 먼저 세운 일 식당(1979년)‘사무라이’는 지금 차남인 촬리 송씨가 운영하고 있다. 북쪽의 부촌동네 란초 산타페에 자리한‘사무라이’는 실내 장식이 무척 환상적인 전통 일본식당이다. 20여명의 일본인들이 만드는 음식 맛도 정말 일품이었다. 미국에 살며 부모님이 하던 가업을 후손들이 이어받아 운영하는 걸 볼 때면 필자는 참 흐뭇해진다.
송두영 화백은 부모(송군칠과 김정혜)로, 1927년 7월24일 함경남도의 삼수군 중평장리에서 태어났다. 대원군 당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 서재필과 함께 조부가 소련(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가는 바람에 경상도 합천에 살던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함경도는 송회장의 부모가 고국으로 돌아 와 다시 터를 잡은 곳이다. 송회장의 탁월한 봉사심과 리더쉽은 이렇게 오랜 조상으로부터 뿌리를 두고 있었다. 미국의 로스앤젤러스로 2년 먼저 건너 온 동생 송문영(전 달마사 신도회장)거사도‘남가주약사협회’회장으로 봉사하며 한국약사들의 자격을 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미국정부에 건의해서 최초로 기반을 만든 분이다.
일제 치하에 청년 송두영은 징병을 피해 한때 스님이 되어 봉선사에서 수계(불명은 혜명)도 받았다. 어느 날 부처님이 붓을 건네주는 꿈을 꾼 인연으로 수유리의 화계사에서 당시 한국전통 불화로 유명한 한동운스님(1930년대)을 스승으로 모시며 불화의 대가로 기초를 닦았다. 해방이 되자 동국대학 예과에 들어가 행원 숭산선사(속명 이덕인)와 동창이 되어 큰 인연이 된다. 다음은 동생 송문영 거사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친한 친구로 지내던 행원스님은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청년시절 송화백의 집을 드나들며 송화백의 어머니로부터 불교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행원선사가 사라져버렸는데, 몇 년 후에 도인 스님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후 청년 송두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동양화를 전공한다. 묘향산 보현사의 단청불사,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담화‘돼지이야기’로 유명한 함경남도 서광사의 불화를 그렸다. 수덕사, 범어사, 조계사의 불화들과 법주사의 미륵불이 그의 작품들이다. 전 문화재 관리위원으로 문화재와 예술품을 감정하고 보호를 하는 일도 했다. 청화대 문화담당비서로 재직 시에는 우리문화재의 해외유출을 막는데도 애를 썼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가평의 현등사에 살 때 해방이 되자 동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청년화가는 장남인지라 집에 돌아와 결혼했다. 당시 경기도 시흥군 서면 대지주의 딸로 자란 성의숙(불명 보광명)보살은 경기여고를 나온 미인이었다. 시댁에 들어가 보니 시어머님은 집에 부처님을 모시고 매일 예불하며 스님처럼 생활을 하시더라고 보광명보살은 기억한다. 시어머님은 일종 식 하는 날에는 한 끼만 드시고 일상에서도 참선과 기도로 정성을 바치시는 분이었다. 또 남편은 부모뿐 아니라 시동생들에게도 늘 자상해서 가끔 짜증도 났었지만, 돌아보니“그분은 사람으로 도리를 다하신 분이었어요.”시어머님은 “여자가 키가 크면 팔자가 세다.”라며 며느리를 종종 구박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입이 뿌루뚱 화가 난 부인을 볼 때마다 송화백은 “부인, 아직도 화를 안 푸셨오?” 라며 눈치를 살피며 농담을 건내곤 했단다. 매사에 화를 낼 줄 모르던 원만한 분이었다며 보광명보살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했다.
시어머님(김정혜-불명 정혜월))은 매사에 엄격하고 깔끔하셔서 며느리는 하는 일마다 꾸중을 맞았단다. 철이 없던 며느리는 시어머님께 은근히 반항심도 생겨 젊을 적에는 불교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이 지금은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 불자로 살다 간 시어머님의 존경스러운 모습을 며느리는 잊지 못한다. 가실 날을 미리 아시는 듯 목욕을 하고 소파에서 앉아서 기도를 하시다가 쓰러지셨고, 가벼운 몸살을 이틀 동안 앓듯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85세). 보광면보살은 불교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하루는 바다에서 큰 거북이 등을 타고 가는 꿈을 꾸었다. 금으로 만든 관세음 보살님이 나타나서“조금만 참고 견디라.”며 보광명보살의 등을 만져주시더라는 것이다. 너무나 신기해서 그날부터 진실한 불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광명보살이 인내로 덕과 복을 쌓은 지난날의 시간들이어서인지 그분의 자식들도 효자 효녀들이다.
보광명이라는 불명은 범어사주지스님인 동산스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민 초창기에 또 다시 신기한 꿈을 꾸었다. 남편이 이것저것 사업을 해도 잘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큰 잉어가 가득히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단다. 지혜로운 송화백이“아아, 일본 식당을 해보라는 꿈이야.”라고 해석을 했다. 맞다.‘사무라이 식당’의 선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생전에 사무라이 식당이 불로 재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성업 중 이다. 부부는 불교 일이라면 언제나 솔선수범을 했다. 샌디에이고 최초의 사찰 불광사와 현재의 연화사에 시주를 내놓았지만 아직도 좋은 스님과 인연이 되지 않고 불자들도 단합을 하지 못하니 매우 안타까워한다.
동국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권상로 스님과 팔만대장경을 역경하고 편찬했던 안진호스님이 집으로 자주 찾아 오셨다고 송문영거사는 회상했다. 큰 스님들이 집에 찾아올 때마다 송화백의 모친은 정성껏 소찬으로 식사를 대접하며 잘 모셨다고 한다. 필자도 샌디에이고에 사는 동안 여러 스님들로부터 송화백부부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전해 듣곤 했었다. 또 많은 한국의 예술인들도 코리아 하우스를 다녀갔다. 대학시절부터 송화백은 유난히도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더니 미8군에 화실을 두면서 미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필연적인 운명처럼 그의 활동무대가 미국으로 건너 온 사연도 갑작스럽다. 가까이 알고 지내던 임병직(전 초대 유엔과 주미대사)씨가 유신체제에 반대를 하는 바람에 송화백도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홀로 지내다가 4년이 지나고서야 송화백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왔다. 송화백도 이민초기에는 무척 고생이 많았다. 서양화에도 뛰어난 그는 한 때 케네디와 레이건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리며 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1970년대 초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쌍둥이 빌딩 재단 회장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었다는데 자세한 내용을 더 듣지 못해 필자는 아쉽다. 송두영화백이 샌디에이고에 정착하게 된 것은 해군기지에 그의 화실을 열게 된 연유였다. 레이건 대통령과 피트윌슨 주지사의 도움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피트윌슨 지사는 당시 샌디에이고의 시장이었다. 베벌리 힐스에서 잠시 화실을 여는 동안 송화백은 케리 그란트와 록 허드슨 등 유명배우들의 초상화를 그려 소문이 나며 미국사교계에도 그의 이름이 퍼져나갔다. 문인 이계향(뉴욕거주)보살로부터 송두영 화백의 청년시절 소식을 우연히 전화로 들었다. 지난 날 숭산스님을 모시고 화계사에서 정부의 고위직, 장군, 대학교수 등 지성인들이 모여 불교 토론을 마치 싸우듯이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불자들의 공부모임에서 하정(송두영)거사를 만났다고 했다. 하정거사는 달마도를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곤 했다. 그 때 받은 달마도를 액자에 넣어 가지고 있다는 이계향 보살은“참 성격이 좋은 분이셨어요.”라고 기억했다.
연중 온화한 기후, 30년 전 초창기 한인들은 가족처럼 모여 살았다. 1974년 12월, 다운타운의 YWCA회관에서‘샌디에이고 한인회’모임을 최초로 열고 송두영 화백은 샌디에이고의 초대 한인회장으로 선출된다. 1975년 처음으로 열렸던 3·1절 기념식은 송회장과 그 당시 교포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삼일절 행사는 한인회사무실에서 이어가고 있다. 송회장의 삶의 철학은 불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살아 왔다. 송두영화백의 집은 사랑방처럼 늘 많은 한인들이 들락거렸다고 이곳의 터줏대감들은 기억했다. 사람과 예술, 또 술을 사랑했던 애국심에 불타는 정열이 넘치던 분이었다. 80년대 후반에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도 한인들의 모임을 위해서는 언제나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필자도 그 때 송회장 부부를 만났다. 그가 생전에 쌓은 덕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던 탓인지 송회장의 장례식날도 많은 교포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아쉬워하며 추모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좋은 땅에 한인회가 언제부터 권리와 명예를 추정하는 자들이 한인회의 회장으로 입성하며 공금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부조리가 하나씩 들추어졌다. 평통, 교포지에서 나오는 광고비, 회장 선거 공탁금 과 기여금등의 부조리와 어중이 떠중이가 모여들어 만드는 감투싸움으로 점잖은 한인회는 동포들에게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부터 한인회와 단체에 봉사를 해오던 한 여성후보가 부정선거라며 미국법정의 도움을 청하고 말았다. 드디어 곪아서 불어 터지는 꼴이 되었다. 지난해 원로들이 나서며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필자가 월간 교포지의 주필이 되어 한인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자주 접하다보니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는 초대한인회장 송두영화백의 순수했던 봉사정신을 다시 더듬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분에 대한 일부사람들의 부정적인 말도 조금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을 위한 희생과 순순한 봉사정신의 지도자로 입을 모았다. 또한 샌디에이고에 살아오며 송회장 가족들과 특별한 인연인 김병목 의학박사(7대 한인회장)가 있다. 40여 년 샌디에이고의 터줏대감이며 한인사회의 봉사자로 산 증인이기도 한 김병목박사는 송화백 곁에서 밤낮으로 가족 주치의가 되어 지켜준 생명의 은인이다. 송두영화백의 어머님 시신도 미국법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김박사가 유창한 영어로 모든 절차를 도와주었다. 김박사의 아내인 의학박사 한화심 씨도 보광명보살과 여고 동창이며 여태껏 가깝게 지낸다.
샌디에이고의 원로 한인 배영화사장(전 관음사 신도회장)은“불자들을 모아 식사를 자주 대접하며 모임을 열었고, 늘 인자하셨지요. 한인회를 위해서는 눈 앞 만의 일만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먼 훗날을 보며 일을 추진하던 뛰어난 지도자였지요.”라고 회상했다. 칼스베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강무영 관장은 송회장을 두어 번 뵈었고 함께 일할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당시는 이민 초창기라서 귀하고 반가운 한인을 만나려고 3-4시간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던 인정미가 흐르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샌디에이고의 40여년 터줏대감, 김창송(아트워크) 사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예술가의 길과는 전혀 다른 식당사업을 하며 자식들도 훌륭하게 키워 잘 살게 해놓고 한인사회에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한인회가 시끄러우니 요즈음 더욱 그 어른이 생각난다고 말했다.“유달리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겸손하시고, 유머와 설득력으로 원만한 인화관계를 유지했기에 송두영화백님이 한인회장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또 먼저 온 한인으로서 많은 도움을 누구에게나 주셨지요. 일찍 돌아가신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한인들이 모일 때면 우스개 농담과 곱추춤으로 교포들의 웃음을 자아냈다고 김사장은 회상했다. 송두영회장 때 부회장을 역임한 박원규 원로는 한인회장으로서 지난날 송두영회장의 노고를 높이 치하했다. 박원규(해병대 장교출신) 원로는“송회장님은 한인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한인들의 단합을 호소했지요. 한인회에 무관심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호통도 치며 뭉치는 한인회를 만들려고 애를 쓰셨답니다. 한인들을 위해 늘 솔선수범하신 분이었습니다.”다운타운에서 삼십년 넘게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이청환(9대 한인회장)사장은 송두영회장이 사무라이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탁월하고 남다른 경영능력을 보았다고 전했다. 당시의 사무라이의 모든 직원들은 일본사람들이었는데 업주인 한국인 송두영 사장을 존경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일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이들에게도 친구처럼 따스한 성품을 지녔던 분이라고 전했다.
코리아하우스 식당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필자는 송두영 화백의 유별난 그의 한국적 문화사랑의 숨결들을 느끼곤 했다. 식당 안벽에는 송두영 화백의 미술작품들도 걸려있다. 어디서엔가 송화백님의 호령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도대체 한인회의 여러분들, 뭐하는 짓들이요? 교민들이 모여 화합하고 서로 도우며 힘을 모아야 합니다.”라며 근래의 요지경 샌디에이고의 한인사회를 호되게 꾸짖을 것만 같다.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움, 사랑으로 희생하며 한인회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주었던 분, 또 샌디에이고에 살았던 초창기 이민자 불자들도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영원히 기억 할 것이다.
최미자 / 본지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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