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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GB 자료실┓ 스크랩 담양 명옥헌(鳴玉軒)과 배롱나무
안혜진 추천 0 조회 12 12.08.10 17: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6월 말 담양 누정(樓亭) 답사 갔을 때는  

그 유명한 명옥헌 배롱나무에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사진: 지난 6 28일 찍은 명옥헌 못가 배롱나무

 

물어보니 8월 초가 꽃이 한참 좋을 때라고 한다.

하여 여름 휴가 때 다시 와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라 확신은 못 했는데

다행히 마음먹은 대로 이룰 수 있었다.

 

8월 초 전라도 땅은 온통 선홍색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배롱나무를 어쩌다 몇 그루

병산서원이나 명재 윤증 고택 같은 곳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 전라도 관문 여산 휴게소를 지나니

배롱나무가 아예 가로수가 되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 배롱나무를 가로수로이건 내려서 찍어야 하는데..’ 하였지만

컨베이어 벨트같이 줄줄이 밀려가는 고속도로 중간에 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굳이 거기서 세우지 않더라도 8월 초 전라도 땅은 가는 데 마다

도로 가와 야산, 사찰에 배롱나무가 그 선홍색 꽃을 피어내고 있었다.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꽃이 한 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에 걸쳐 번갈아 피고 져서

오랫동안 펴 있는 것처럼 보여 백일홍이라고 부른다. (백과사전 설명)

 

위 설명과 같이 배롱나무를 목백일홍 이라고도 부르므로

백일홍과 같은 종류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배롱나무는 나무, 백일홍은 이다.

 

 

 

 

사진: 백일홍 (Zinnia elegans) ; 국화과의 한해살이 풀

 

 

 

사진: 배롱나무 (Lagerstroemia indica)  ?명옥헌(鳴玉軒) 원지(圓池)

 

 

 

 

사진: 배롱나무 꽃

 

배롱나무는 원산(原産)이 중국 남부다.

고려 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사대부들이 누정을 꾸밀 때 심어야 할 나무 중 하나로 여겨왔다.

 

 

자미화(紫薇花)

 

배롱나무는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하여 원림(園林)옆 개울에

배롱나무가 있으면 자미탄(紫薇灘)이라고 이름 붙이곤 했다

 

타고난 모습 본디 빼어나니

어찌 양지녘에 심겨지길 기다리리.

붉은 꽃이 안개처럼 피어 오르니

속된 사람 눈에 띌까 두렵소.

 

위는 제봉(齊峰) 고경명의 식영정 20()중 제 16자미탄(紫薇灘)이다.

안개처럼 피어 오른 붉은 꽃은 자미화(紫薇花) 배롱나무고

자미탄(紫薇灘)이란 배롱나무가 많은 여울 이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어쩌다 몇 그루 밖에 없는데, 전라도에서는

군락(群落)을 이루니, 원산인 중국 남부처럼 따뜻한 때문인 듯하다.

 

 

8 3일 아침

 

날은 잔뜩 찌푸렸고 일기예보는 비가 오락가락 할 것이라고 한다.

 

광주 월산동 로터리 별미집에서 뼈다귀 해장국으로 아침을 든 뒤

네비에 식영정을 찍으니 전날 먹고 잤던 무등산 아래로 다시 데리고 간다.

산을 넘는데 길은 죽죽 뻗은 나무가 하늘에서 서로 엉켜 나무터널을 이루고 있다.

광주호반에 이르러 식영정, 환벽당을 보고 나니 아내가 다음은 어디냐고 묻는다.

 

명옥헌(鳴玉軒) !”

거긴 왜 가는 데?”

으음거기 배롱나무가 유명해!”

배롱나무는 이제 질리도록 보았잖아!”

그걸 총정리한 곳이 명옥헌이야 ! “

그리고 가자면 잠자코 가는 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치이..”

 

절이랑 누정(樓亭)이랑 그만큼 봤으면 되었지 뭘 또 돌아다니냐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옥헌 원림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원림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이것이 참 좋은 점이다.

 

소쇄원은 바로 코 앞에 거대한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다 관광객 끌어들이자고 한 거겠지만 어째 금달걀 낳는 닭을

죽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원을 압도하는 주차장에, 매표소 앞에 장사치가 들끓고

안에는 온통 사람으로 와글와글하니 고즈넉한 한국 전통누정의 정취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한 줄기 바위 온통 골짜기에 깔렸는데

한가롭게 길을 나서는 것이 위험치 않구나.

속세의 자취가 길지 못하니

이끼의 색깔이 여전하구나.

 

위는 소쇄원 48영 중 제 5영 석경반위(石逕攀危-돌길을 위태로이 오름).

소쇄원 48영을 마저 다 읽어 보아도 지금 모습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소쇄원 규모나 건축기술로 말하면 솔직히 뭐 볼 것이 있는가?

오는 사람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명옥헌 이야기하다가 엉뚱하게 소쇄원 흉을 보았지만

명옥헌 원림은 주차장에서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내려 마을 길을 이리 저리 구불구불 지난 다음

낮은 언덕을 넘어가야만 한다.

 

 

 

사진: 명옥헌 원림 안내도.

 

이름 나기가 소쇄원에 훨씬 못 미치고, 식영정처럼 길가에 있지도 않아,

찾아 가자면 제법 불편하니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게 감상할 수 있다.

 

교통이 절대적인 것은 식영정에서 다리 건너면 바로 있는 환벽당이

비교적 한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재를 제대로 유지하자면 교통을 좀 불편하게 만들고

소문도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 같다.

 

마을을 돌아서 명옥헌 원지(圓池) 앞에 오니 마침내 빗방울이 떨어진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원칙에 따라

섬은 둥글고 못은 네모나게 만든 못 가에는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있다.

가는 곳 마다 지겹게 봤다던 아내는 뜯는 비에 옷 젖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못 가를 째려(?) 본다.

 

여기 와서 전경(全景)을 찍자고!”

타이탄 치우면 찍을래

꼴상 보니 쉽게 치울 것 같지 않으니 그냥 와

 

전경을 찍을 최적의 위치에 누가 타이탄 트럭을 세워둔 것이었다.

사진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필자는 그 정도 사진 매니아가 아니다)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경치의 정면을 떡 하니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이걸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사진: 지난 6 28일 명옥헌 갔을 때 최적의 위치로 찜한 포인트.

8 3일 아침에는 타이탄 때문에 그 앞으로 올라가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사진: 8 3일 오전에 찍은 원지

 

딴 곳 배롱나무가 야생화같다면 명옥헌 원지 주위는

정교하게 구성한 정물화(靜物畵)를 보는 것 같다.

 

명옥헌 주위에는 든든한 삼각대 위에 대포알 만한 렌즈를 끼운 카메라가 여러 대 서 있다.

 

아따 성님! 빗방울까지 찍어불라고 그러요

 

으음... 전문사진가들의 착안점은 여러 가지인 모양이다.

난 비오면 사진 망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못을 돌아 명옥헌 가는 길은 꽃으로 이어져 있다.

 

 

 

사진: 배롱나무 명옥헌 못가

 

 

못과 꽃길이 끝나면 명옥헌이 보인다.

 

 

 

사진: 명옥헌 원경과 명곡비석

 

비석에 적힌 명곡 오선생(明谷吳先生)이란 광해군, 인조 때

명곡 희도(明谷 吳希道, 15841624)선생을 말함이다.

 

그런데 비석-명곡오선생유적비는 근년에 세운 듯 한데

아무리 보아도 명옥헌 건물과 원림에 비해 비례적으로 너무 크다.

여기 오기 전에 들른 식영정 입구에 송강 정철 가사의터 라고

새겨 놓은 비석이 있었는데 역시 터무니 없이 크게 세웠다.

 

식영정(息影亭)?

이름은 근사한데 건물만 볼라치면 실망하기 딱 좋다.

우리나라 누정의 가치는 건물 자체의 규모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자에서 보는 주변 경치라고 믿는다. 정자 규모는 그야말로 삼간두옥-

그저 얼기설기 엮어서 비바람이나 겨우 피할 정도로 볼 것이 없다.

 

이제 세월이 흘러 선조들이 살던 때와는 시대정신이 달라졌다.

우리는 뭣이던지 우람하게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찝찝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기념하는 표석이 기념물을 압도해서야 곤란하지 않나?

 

담양 일대 누정 중 명옥헌이 그 옛날 그윽한 정취를 가장 잘 보전하고

있는 듯 한데 비석이 옥에 티가 된 듯하여 안타까워 몇 자 붙여 보았다.

 

 

 

사진: 명옥헌 정면 

 

 

명곡 오희도(明谷 吳希道) 선생은 나주 오씨로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외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 와 살면서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작은 서재를 지었다. 인조 반정 후 (1623, 인조 1)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1 년 만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었다.

30 여 년 뒤 1652년 무렵 명곡의 넷째 아들 오명중이 아버지 살던 터에

누정을 짓고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정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사진: 명옥헌 원림 평면도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명옥헌기(鳴玉軒記)

 

'한천(寒泉)에 가득찬 물은 울타리를 따라서 흘러 내리는데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옥이 부서지는 물소리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더러움이 사라지고

청명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다' 고 하였다.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정자 이름이 명옥헌(鳴玉軒)인 것이다.

 

 

 

 

사진: 명옥헌 현판

 

 

정자는 사면이 트여있는데 가운데만 방을 들였다.

 

 

 

사진: 명옥헌 후면

방문을 열어 놓으면 집 뒤에서 집을 관통하여 앞 뜰 꽃나무까지 보인다.

 

 

 

사진: 명옥헌에서 바라 본 원지(圓池)

앞서 말한 대로 한국 누정은 그 자체 보다 거기서 무엇을 보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명옥헌 뒤로 돌아가니 숲은 그윽한데 군데군데 배롱나무가 꽃을 피었다.

 

 

 

 

 

 

각서(刻書)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글씨라고 한다.

 

담양 일대 누정주(樓亭主)- 면앙정 송순(宋純), 식영정 임억령(林憶齡)

송강정 정철 등은 모두 색목이 서인(西人)으로 노론(老論)의 조상이니

우암(尤庵) 글씨가 이 일대 문중에 많이 있을 것이다.

 

 

 

 

사진: 명옥헌 측면

 

 

 

 

사진: 명옥헌 툇마루와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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