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영남의 의병장으로 나서 실제로 백성들을 보위한 것이 그의 커다란 업적이다. 그리고 광해군 당시 청나라의 침략을 불러들이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 것도 정인홍의 보민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경직화한 주자학의 논리에 물들지 않았던 정인홍은 광해군의 정치적 고문으로 역할을 하며, 전쟁이 가지는 폐해를 누구보다 절감했기에 청나라와 한판 전쟁을 불러들일 민감한 외교적 사안에는 양다리 전략을 취한다.
문제는 인조반정.
반정이후 90을 바라보던 정인홍은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고 참형을 당한다. 싸움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력도 없으면서 청나라에 목소리만 높이던 자들은 결국 전쟁을 불러들이고, 결국 송파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한다. 이후 북벌론이니 하는 탁상공론은 당쟁의 도구였을 뿐.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자격미달.
그 전쟁이 아무리 정의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부르짖는 권력자는 민주주의와는 멀어질수 밖에 없다.
#이황 은 당세 유학의 종주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한 경이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장령 #정인홍 이 부모를뵈려 시골로 돌아갔다. 정인홍은 사헌부에 있으면서 위풍으로 남을 제재하여 백료가 진작 숙정되었고 거리의 장 사치들까지도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다 내놓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