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JFK 공항에 도착해서 맨해튼으로 들어갈 때는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크라이슬러 빌딩 등 맨해튼의 고층 빌딩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야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갑자기 내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뉴욕행을 실감했다. 사실,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다시 이 도시에 오게 될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서울에 돌아가서 정신없이 일하며 ‘연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면서 딸 채원이를 키우는 동안, 시간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이번에도 파리에 잠깐 머물 때 불어 통역을 해줬던 동양화가 미순 언니가 뉴욕에 정착해,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혼자서 뉴욕에 올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소호의 브룸(Broome) 스트리트에 있는 언니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는 언니의 호의를 호기롭게 사양하고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했지만 공항과 맨해튼 간의 35달러 일정요금제(여기에 터널 통과료와 팁을 보태면 40달러 정도 주면 된다)를 몰랐던 나는 그만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언니와 포옹하는 순간, 불쾌함은 벌써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첫날 밤은 언니와 와인 한잔으로 해후의 축배를 들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채원이 이야기, 서울 이야기, 언니의 든든한 동반자가 된 아저씨 이야기까지…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거실 가득히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셨다.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뽑아서 발코니로 나갔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울긋불긋한 한자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이나 타운이다. 숍들이 문을 아직 열지 않은 소호 거리는 한산하다. 밤늦게까지 흥청거렸던 금요일 밤의 열기를 식히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을 출발학기 전부터 어디어디를 다닐까 리스트를 만들었는데(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스케줄과 동선을 체크했다), 그 리스트의 맨 위에 있었던 곳은 맨해튼의 서쪽, 9th와 10th 애비뉴 사이의 14번가. 요즘 속속 패션 디자이너들의 매장이 들어서고 있는 미트패킹 디스트릭(Meatpacking Distric)이다. 예전에 육류 가공 공장들이 있었던 이곳은(지금도 몇몇 공장은 남아 있지만) 편집 매장인 제프리와 스텔라 매카트니, 알렉산더 맥퀸,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등 톱 디자이너들의 매장과 가구점들, 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멋쟁이 다운타운 뉴요커들이 몰려드는 패셔너블한 지역으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정오가 좀 못 되어서 도착한 이곳은 역시 소문대로 거리 곳곳에서, 레스토랑과 매장들에서 패셔너블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스텔라 매카트니의 매장은 그녀의 페미닌한 감성과 로큰롤적인 취향이 감각적으로 믹스되어 있었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가구점들은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각종 다양한 가구 디자이너들과 브랜드들의 제품들이 컬렉션을 이루며 진열장을 채우고 있어 눈을 높이기에 안성맞춤인 곳들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한낮의 햇볕은 좀 뜨거웠다. 마침 노천 카페가 있기에 그곳에 앉아서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한가롭게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했다. 만 2년 만에 다시 찾은 뉴욕. 10월초의 뉴욕 공기는 사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여전히 나를 새 건전지를 넣은 시계처럼 분주한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게 만들지만, 잠시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뉴요커들과 관광객들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오늘은 토요일! 첼시의 벼룩시장이 서는 날이기도 한다. 7th 애비뉴의 27번가 주변의 큰 주차장 터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은 파리의 벼룩시장만큼 크거나 고색창연한 물건들이 많지는 않지만 영화 <파 프롬 헤븐>의 여주인공들이 입었음직한 50년대풍의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프롬 드레스나 80년대풍의 컬러풀한 액세서리와 구두들이 많이 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건 단아한 크림 베이지 컬러의 테이블보. 현란한 레이스 장식 대신에 소박한 레이스가 맘에 들었다.
벼룩시장의 매력은 흥정! 오후 4~5시쯤, 파할 무렵의 벼룩시장은 흥정하기가 더 쉽다. 막 가판을 접으려 하는 할머니에게 그 테이블보가 너무 예쁘다고 애교를 부렸다. 사진가가 옆에 있었던 덕에 모델 겸 배우라는 말이 자연히 나왔고,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가격이라면서 그냥 선물로 가지고 가라고 하신다. 잘 세탁하고 다림질해서 부엌 식탁에 깔아놓으면 새것처럼 얄밉게 반들거리지 않을, 엄마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옆 집에서 화사한 접시 몇 개를 더 샀다.
일요일의 소호는 진짜 관광지 같다. 느긋하게 소호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아침 겸 점심의 브런치를 즐기러 나오는 뉴요커들과 아침부터 소호 쇼핑에 나서는 관광객들이 만들어내는 북적거림은 날 들뜨게 만든다. 오늘은 나도 소호의 관광객이 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샤넬 매장. 이번 가을, 겨울 컬렉션 의상 중에서 제일 입고 싶었던, 붉은색 꽃 프린트의 니트 미니 원피스였다.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는 스타일이라 이번 뉴욕 여행 때 꼭 사리라 벼르고 별렸던 원피스. 매장 직원이 내 사이즈를 찾아서 왔을 때, ‘모녀 상봉’처럼 반가웠다. 하얀색 앵클 부츠도 함께 샀다. 피팅 룸에 들어가서 옷을 입어보고 두 말할 것 없이 그냥 옷을 입고 매장을 나섰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
다양한 데님 브랜드들을 만날 수 있는 바니스 Co-op, 디자이너 질 스튜어트, 헬무트 랭 등 매장을 거쳐서 H&M으로 갔다. 한창 유행하는 트렌디한 제품들을 ‘갭’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이 브랜드는 지금, 비슷한 컨셉트의 스페인 브랜드 ‘자라(Zara)’ 와 함께 뉴욕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재나 마무리가 좀 허술해서 오래 두고 입을 수 없지만 트렌디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아이템들이 많아서 한 시즌 입을 만한 제품들을 사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에서는 핑크색 앵무새가 그려져 있는 니트 스웨터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서는 조그만 디자이너 숍들과 가방, 구두 가게들이 몰려 있는 놀리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호만큼 복작거리지 않는 이곳은 조그만 거리에 가로수들이 심어져 있고, 지금은 나뭇잎 색깔이 변할 때라 더 운치가 있었다. 격자로 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리들, 일방통행이며 보행자 위주의 운전사들 덕분에 차들에 치이지 않으면서 한가롭게 쇼핑할 수 있는 이곳은 특히 예쁜 구두와 가방을 살 수 있는 매장이 많이 있다.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쇼핑을 했고, 이제 남은 3일 동안은 첼시의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전시회도 보고, 미순 언니에게 동양화와 다도도 배울 예정. 딸, 채원이가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쉽게 찾아오지 않을 휴가를 느긋하게 만끽할 작정이다. 아무튼, 2년 만에 찾은 이곳은 여전히 뉴욕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널려 있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내 에너지를 모두 발산할 수 있는 곳. 그러면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전 세계의 그 많은 젊은이들이(아니 굳이 젊은이일 필요는 없다)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HER SHOPPING PLACES
소호 주변 Steven alan (60 Wooster St. 212-334-6354)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에 들어와 있는 편집 매장, 스티븐 알란의 뉴욕 매장.
Anna Sui (113 Green St. bet. Prince & Spring St.) 안나 수이의 옷장 속으로 들어간 듯 좁은 공간에 그녀의 의상, 액세서리, 뷰티 제품들이 가득하다.
Selma Optique (59 Wooster St. at Broome St.) 다양한 브랜드의 안경과 선글라스, 모자 등을 파는 편집 매장.
Barney’s Co-op (116 Wooster St. bet. Prince & Spring St.) 젊고 힙한 다운타운 취향의 브랜드들을 중심으로 셀렉션된 바니스 뉴욕 백화점의 소호 매장.
Burberry (131 Spring St. bet. Wooster & Greene St.)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은 버버리 프로섬 라인이 있는 버버리 매장.
Chanel (139 Spring St. corner of Spring & Wooster St.) 매디슨 애비뉴 매장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매장.
Jill Stuart (100 Greene St. bet. Prince & Spring St.) 블랙과 화이트, 핑크 컬러의 깜찍한 의상들이 많이 있는 질 스튜어트의 매장. 아래층에는 그녀가 셀렉션한 빈티지 매장도 있다.
Marc Jacobs (163 Mercer St. bet. Prince & Houston St.) 마크 제이콥스의 남성과 여성 라인, 구두와 가방 라인이 있는 뉴욕 최대의 마크 제이콥스 매장.
Marni (161 Mercer St. bet. Prince & Houston St.) 숍 인테리어 자체만으로도 들어가볼 충분한 이유가 되는 마르니 매장.
Language (238 Mulberry St. 212-431-5566) 클로에, 스텔라 매카트니, 페이퍼 데님 등 브랜드가 있는 세련된 다운타운 걸 취향의 편집 매장.
Mayle (242 Elizabeth St. bet. Prince & Houston St.) 모던한 감각으로 재해석된 빅토리아 풍의 여성스런 의상을 만날 수 있다.
Amy chan (247 Mulberry St. bet. Prince & Spring St.) 펑키한 감각의 의상과 가방들이 많은 디자이너 에이미 찬의 매장.
첼시 주변 Balenciaga (542W. 22nd St. bet. 10th & 11th Ave.)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미감을 확인할 수 있는 첼시 매장. 그의 베스트 셀링 아이템이 된 가방도 많이 있다.
Comme des Garcons (520W. 22nd St. bet. 10th & 11th Ave.) 갤러리 같은 패션 매장의 선두 격인 콤 데 가르송의 첼시 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