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나 : 그레고리의 어머니
논나(Nonna, 290?-374)는 삼위일체 니케아 정통을 변호했던 위대한 ‘신학자 그레고리’의 모친이었다. 그의 부친과 같은 이름이기에 혼돈되기도 한다. 모친 논나는 기독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존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처럼 탁월한 경건을 소유한 모친에게서 그레고리는 양육을 받았다. 논나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the Elder, d. 374)의 아내였다. 290년 캅파도키아(Cappadocia, 지금의 터키)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야말로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기독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여성이다. 그녀는 신실한 기독교 부모에게서 양육을 받아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그녀는 당시 나지안주즈의 지사였던 이교도 남편 그레고리와 결혼했다. 그는 원래 반(半)이교도, 반(半)유대인이었던 힙시스타리안(Hypsistarian)이었다. 교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논나는 그레고리와 결혼하여 남편을 개종시키는데 큰일을 감당했다. 그 후 그레고리는 논나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지안주즈의 사제와 감독이 되었다. 당시에는 감독이라도 결혼이 허용되었던 시기였다. 그가 바로 나지안주즈의 그레고리 1세이고, 그는 100세까지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1. 두 아들
논나와 그레고리는 슬하에 세 명의 자녀들, 그레고리 2세, 고르고니아(Gorgonia, d. 375?) 그리고 카에사리우스(Caesarius, d. 369)를 두었다. 그레고리보다 몇 살 나이가 많은 고르고니아는 모친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논나의 성품을 닮은 여인으로서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았다. 더욱이 그녀는 지역의 가난한 자들과 지역 교회의 궁핍한 자들을 위해 특별히 수고하고 봉사했다. 동생 카에사리우스는 유명한 의사로서 콘스탄티노플 궁정에서 신임을 받으며 덕망을 끼치는 자였다. 로마제국의 황제 배교자 율리안은 카에사리우스를 존중하였기에 그가 이교도가 되면 모든 것을 다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카에사리우스는 그 제안을 사양할 뿐만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던 공직마저도 반환하고 사직하였다. 율리안을 이어 기독교인 섭정 황제가 된 발렌스는 그를 개인 재정장관으로 세웠다. 368년 지진이 있자 카에사리우스는 세속적인 모든 삶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베풀었다.
부친은 아들 그레고리가 자신을 따라 사제가 되기를 심히 원했다. 그는 아들을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거나 무력해가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자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자신이 부담스러워하는 짐을 아들이 담당했으면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모친은 두 아들의 미래를 위해 카이사리아에 있는 유명한 스승 카르테리우스(Carterius) 아래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곳에서 그레고리는 위대한 정통신학자인 바실과 사귀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형제는 팔레스타인 카이사리아로 옮겼다. 아마 그 곳에서 성묘교회를 방문한 듯하다. 다시 그곳에서 동생 카이사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갔지만 그레고리는 팔레스타인에 계속하여 남아 있으면서 팔레스타인 학파의 수사학을 배웠다. 그 후, 그레고리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동생을 만났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모친 논나는 하나님께 서원했다고 그레고리 2세는 회상한다. 그것에 따라 그레고리 2세는 수도사, 사제, 감독이 되었다. 그 후, 교회사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나지안주즈의 그레고리가 되었다. 네 명의 동방교회 박사들 중에 한 사람인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반삼위일체론자인 이단자 아리우스(Arius, 250-336)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한 자로서 특별히 교회사에서 잘 알려져 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우리들과 동일한 사람일 뿐 하나님이 아니며, 어떤 계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었다고 이단 교리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는 니케아 정통신앙의 영웅이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처럼 정통 삼위일체론을 콘스탄틴노플에서 개최된 2차 범종교회의(381)에서 변호하여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2. 성품
369년에 논나의 둘째 아들 카에사리우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374년 논나의 남편 그레고리 1세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딸 고르고니아도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장례식에서 아들 그레고리는 모친과 부친에 대하여 추모했다. 그는 부모를 아브라함과 사라로 비교했다. 아니 사라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라고 추모했다.
모친에 대한 그의 글에서 모친은 사라처럼 어려움 속에서 부친과 함께 했으며 남편을 존경하고 따랐다고 했다. 모친의 기도와 헌신으로 인해 부친은 선한 지도자가 되었고 모친을 통해 선한 목자로서의 자질들을 얻었다고 했다. 부친은 모친을 통해 우상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었고, 어두움의 권세들과 싸울 수 있었다. 심지어 모친은 힙시스타리안이라는 이단적 종파에 처했던 부친을 구했고, 경건, 열정, 금식, 그리고 기도에 전혀 힘쓰는 기독교의 진실한 신앙을 고수토록 했다. 부친은 한 영예로, 한 마음으로, 한 영혼으로 덕행을 행했으며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친분을 가졌다. 부를 버리고 귀한 것을 찾아 부유해지려고 노력했다. 세상의 것을 거부하고 오는 세상의 것들을 추구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부족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보다 풍성하고 영원한 것을 위해 수고했다. 이러한 삶에 대하여 그레고리는 한 마디로 말하기를, 부모들은 서로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부친은 남편과 가장으로서의 삶을, 모친은 부인과 내조하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덕행도 아울러 행했다고 한다.
그레고리가 모친에 대해 더욱 놀란 것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미래에 무엇이 도래할 것인지 전혀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렸다는 것과 태어나자마자 그 소원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매일의 삶속에서 직면하는 여러 갈등들 속에서 모친은 이미 생애 초기부터 아름다운 덕행을 행했고, 다른 사람들이 모친의 삶을 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했다. 모친은 태어날 때부터 거룩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자라나면서 그녀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경건한 삶을 살며, 신앙심을 돈독히 키워나갔다. 심지어 아들 카이사리우스와 딸 고르고니아를 먼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일만 아니라 과부들, 고아들, 그리고 불행한 자들을 돌보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37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몇 개월 후, 논나는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교회에서 고요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논나의 가족들은 교회로부터 성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하나같이 헌신했으며 모두 성자의 칭호를 받고 있다. 정말 남편, 자녀들을 모두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으로 만든 논나는 그야말로 “영웅적 여인”(valiant woman)이 아닐 수 없다(잠언 31장). 그야말로 현모양처라 아니할 수 없다. 논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던 존귀한 여인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녀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다. 그녀는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자녀를 낳아 양육했다. 우리와 같이 매우 평범한 여인이었다. 매일과 같이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리고 가르쳤다. 마침내 남편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녀들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을 보였고,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가정을 꾸미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논나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노력했다. 그녀는 사무엘의 모친 한나처럼, 또 일반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모친들처럼 자녀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녀는 자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지 우리의 것도 아니고 우리를 위한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1.3. 고르고니아
1.3.1. 경건
논나의 딸 고르고니아의 남편은 알리피우스(Alypius)였다. 그는 이코니움(Iconium)출신으로 고르고니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두 아들은 모두 감독이 되었다. 또 그녀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알리피아나(Alypiana), 유제니아(Eugenia), 그리고 논나였다. 그녀는 부모의 성품과 인격을 이어받았다. 부모는 경건의 씨앗을 그녀에게 심어주었고, 그녀의 삶의 근원이 되었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행복의 첫 출발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방의 그 어떤 여성보다 탁월했고 존귀했다.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성품에 의존했으며 가문에 따라 자긍심을 가지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여겼으며, 세상 관습을 의도적으로 어기려고 하지 않았다. 육체의 법이 영의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 법을 준수했지만 언제든 하나님을 우위에 두었다. 자신의 견해가 남편의 견해가 되도록 노력했으며, 남편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남편을 내세우며, 남편의 신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자녀들에 관해서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양육했다. 자녀들의 모본이 되도록 늘 행동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자녀들에게 내세우지 않고 고요하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고르고니아는 금이나 보석으로 자신의 몸을 꾸미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내리고 자랑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며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천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꾸미고 다녔다. 자신의 경건성으로 품위를 유지했다. 사람들은 외모에서도 그녀를 존중했지만 그 보다도 그녀의 성품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녀의 신중성과 경건성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결코 뒤지지 않았다. 가족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늘 조언자가 되었고 상담자가 되었다. 가장 여성적이었고 언제나 봉사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만큼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성이 행해야하는 일에 언제나 충실히 임했다. 사제들에게는 언제나 신실한 군사로서, 성도들에게는 경건을 모본으로 보였다. 그들에게는 신실한 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갈 수 있도록 힘써 노력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언제든 반가이 대접했다. 항상 친절하게 대하며 욥의 말씀대로 행했다: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욥 31:32]. 그녀의 문은 언제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었고, 나그네라도 거리에서 마냥 거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먼 자들에게 눈이 되었고, 저는 자들에게 발이 되었고, 그리고 고아들에게 어머니가 되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9]. 모든 자들에게는 자선을 베풀며 관대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다. 자신의 사치를 위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자신의 취미를 위해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매우 인색했다.
자신의 경건을 위해 항상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분의 뜻을 파악하고 따르는데 전력을 다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려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7:5]. 자신을 돌보지 않고 누추한 옷을 입으면서도 아름다운 꽃과 같은 여인! 밤새도록 기도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로 향하려고 마음을 쏟았다. 가난한 영혼이 되어 비가 오고, 서리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고, 또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밤새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심각한 병에 걸리기도 했다. 열병으로 고생했고, 고혈압으로 고통을 받았고, 그리고 수족에 중풍이 들기도 했다. 의술로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1.3.2. 임종
이제 고르고니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기보다는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주위에는 나이 많은 모친이 허리를 숙여 딸의 떠남을 지켜보았고, 사랑하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많은 슬픔과 애정으로 가득 찼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누워있고, 숨도 쉬지 않고, 움직임도 없고, 말도 없고, 마치 모든 것이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목회자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이며 듣기 힘들었지만 시편을 암송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이제 그녀는 하나님 품 안에 있으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있다. 이후부터 고르고니아와 그녀의 모친 논나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성녀로 시성화 되었다. 진실로 여기에 소개된 모녀에게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욥1 나지안주스는 후에 나지안줌(Nazianzum)이라고 불렸다. 로마인들은 그곳을 디오카이사리아(Diocaesarea)라고 불렀다. 캅파도키아 세쿤다(Cappadocia Secunda)라 불리는 지역에서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황제 발렌스는 약 371년 경제적 목적으로 분할했다.
2 힙시스타리안이란 말은 힙시스토스(Hypsistos), 즉 “가장 지극한 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200B.C부터 A.D400년까지 소아시아, 특히 캅파도키아 비티니아(Bithynia), 폰투스(Pontus) 지역과 유식네 해(Euxine Sea)의 남부 러시안 해변에 주로 유행했던 유대파 이교도 종파였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 다신론도 부인했다. 가장 높은 분, 전능자, 그리고 불과 빛의 표상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지극하신 신만을 예배했다. 희생제와 다른 외형적 예배들을 거부했다. 오직 내적이고 영적인 것만을 추구했다. 유대 안식일 제도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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