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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천도(江華遷都)
고려말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긴 일.
1232년(고종 19)의 일로, 이로써 강화도는 1207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피란 임시수도가 되었다.
고려는 31년 몽골의 제1차 침입에 굴복하여 강화(講和)를 하였으나 항몽(抗蒙)의 뜻을 버린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몽골의 과중한 공물(貢物) 요구에 대한 불만이 컸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회의를 열고 그 방어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최고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몽골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32년에 장기적인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이는 강화도가 개경에서 가까운 해도(海島)이며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단행된 것이다. 당시 개경의 인구는 약 10만이었는데, 이러한 천도 결정에 따라 성중(城中)에 포고를 하고, 이거(移去)를 반대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8도에 영을 내려 백성들에게 산성(山城) 또는 해도(海島)로 피란할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강화천도는 몽골에 대한 확고한 항쟁의식을 표시한 것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에 대한 생활보호책은 없었고, 단지 왕실과 귀족의 안전이 우선인 정책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최씨 일가의 강화 생활은 호화로웠다. 최우는 사제(私第)를 짓기 위하여 도방(都房)과 군대를 사역하여 멀리 개성으로부터 목재를 실어나르게 하였고, 또 백성을 징발하여 서산(西山)에 빙고(氷庫)를 만들어 여름철에 먹을 어류를 저장하게 할 정도로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외면한 당시 지배귀족들의 이같은 강도생활(江都生活)은 고려 지배층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화천도는 몽골과의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들과 대항하려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였고, 또다시 몽골을 자극해 제2차 침입을 당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전국이 몽골군에 유린당하였으며, 신라시대 이래의 국보급 문화재의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작된 금속활자·팔만대장경·상감청자 등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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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천도 [江華遷都]
1232년(고려 고종 19년) 대몽장기항전을 위하여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을 강화천도라고 한다.
1206년 몽골이 건국한 후 금(金)나라가 쇠약한 틈을 타서 만주지역에서는 1216년에 대요수국(大遼收國), 1217년에 동진국(東眞國)이 건국되어 4국이 난립하였다.
이때 몽골의 침입에 쫓긴 대요수국(거란족)이 2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1218년 강동성에서 여몽(麗蒙)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일방적으로 형제관계의 협약을 맺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함으로써 고려 군신의 분노를 샀다.
1225년 공물을 받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몽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미리 계획된 몽골의 아시아 정복정책의 일환이었다. 31년 살리타이〔撤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침입해오자 고려 조정은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 후 원(元)나라는 서경 및 서북면 지방에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등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권신 최우는 단호히 항몽투쟁을 결의하고, 1232년 6월 장기적인 항전을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후 몽골군은 1258년까지 6차례나 침입하였다.
고려궁 터
고려는 최우ㆍ최항ㆍ최의의 집권기와 뒤이은 김인준ㆍ임연ㆍ임유무의 집권기인 70년까지 강화에서 장기항전을 하였다.
당시 천도론에 대한 의견을 보면 최이가 강화천도론을 제창하였고, 천도 후보지를 강화도로 택한 것은 몽고의 제 1차 침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31년 12월에 승천부 부사 윤린과 녹사 박문의 등의 권고에 따른 것인데, 강화도는 개경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수전에 약한 몽골군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요새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뒤 고려 조정이 천도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몽고군 철수 직후인 1232년 2월이다, 그리고 천도 방침이 확정된 것이 6월 16일, 국왕이 강화로 옮긴 것이 7월 7일의 일이었으므로 논의에서 확정 및 시행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강화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최우의 몇몇 측근 세력의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들은 반대했다. 참지정사 유승단은 몽고에 사대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천도에 반대하며 화친론을 들고 나왔으며, 김세충은 힘써 싸워 적과 대결하자고 주장하며 역시 천도론에 반대했다. 이에 최우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7월에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 당시의 개경 인구는 약 10만이었는데, 성중(城中)에 포고를 내려 각 기관을 강화로 옮기고 시민들도 이거를 강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거를 늦추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할 것을 밝히고, 각 도에도 영을 내려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해도(海島)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천도의 결행은 일반 민중에 대한 보호책이 강구되지 않아 이통의 난이 일어나는 등 분규가 있었다. 이는 대몽장기항전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이때부터 39년간 강화에서 몽고와의 장기 항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항전을 고수하던 최씨 정권이 붕괴되자 고종 45년(1258) 에 몽고와의 화의가 이루어졌다. 강화를 원하던 국왕과 문신들에 의해 무신정권이 몰락함으로써 원종 11년(1270)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고 왕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몽골과 화의한 원종이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집권 때 설치한 삼별초군은 자주성을 잃은 정부에 대항하여 강화도 출륙을 반대하고 원과 투쟁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1270)이다. 강도시대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가혹한 수취를 취하여 왕족이나 귀족들은 피난생활에도 불구하고 궁궐ㆍ저택ㆍ사원을 짓고 팔관회ㆍ연등회ㆍ격구ㆍ명절 등 화려한 사치생활을 하였다. 다만 금속활자ㆍ팔만대장경ㆍ상감청자의 제작 등에서는 발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1876년 강화 고려궁지 원경
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국보 133호) : 강화 최항의 무덤서 출토된 것으로,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작품으로 추정된다.
몽 고 침 입
고려시대 때에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커다란 특징은 중국 한족의 주변에 복속되어 있던 북방민족들이 연이어 흥기하였다는 것이다. 10세기 초 당의 멸망이후 흥한 거란족이 중원의 송을 압박하고, 12세기 초에는 다시 여진족이 흥기하여 요, 송을 아우르는 금을 건국하여, 동아시아의 정세를 바꾸었다. 이 같은 중국대륙의 정세 변동은 때로 직접적인 군사적 침입을 수반하여 고려의 내정에 변화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몽고와 고려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고종 6년(1219)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공격하면서부터이다. 몽고에 쫓겨 고려에 들어와 있던 거란족은 강동성에 갇혀 있다가 고려와 몽고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몽고는 고려에 크나큰 은혜나 베푼 듯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그 태도 또한 불손하여 고려인에게 분노를 샀다. 양국 사이는 점점 소원해져 갔으며, 이런 고려와 몽고의 심리적 마찰은 전쟁을 예고하는 태풍전야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고종 12년(1225) 사신 저고여가 몽고로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되자, 이를 계기로 몽고는 고려를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고종 18년 이후 46년 동안에 이르는 사이의 여ㆍ몽 전쟁기간 중 몽고군의 고려 침략은 도합 11회로 파악된다. 그러나 침입의 시간적인 간격을 고려하면 4차 혹은 6차로 나눌 수 있다.
몽고의 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시작되었다. 장군 살리타이가 거느린 몽고군은 고려의 국경 군사구역인 북계 여러 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살리타이가 수도 개경에 임박하게 되자, 고려는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몽고군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였다. 강화 이후 몽고는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 관리의 횡포도 심해지자, 당시 집권자인 최씨 정권은 몽고와의 항전을 결의하고 장기간의 항쟁을 위하여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하게 된다. 개경을 거쳐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몽고군은 장군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여ㆍ몽 간의 3차 전쟁은 고종 22년부터 26년에 이르는 5년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이 기간 동안의 전투는 경상, 전라도까지 확대되었고, 고종 25년 겨울에는 경주 황룡사가 소실되었다.
제 4차 전쟁은 몽고의 선발대가 고종 33년(1246) 고려에 입국하여 이듬해부터 침입을 본격화함으로써 개시되었는데 고종 35년(1248) 초까지 군사행동이 전개되었다. 이 4차 침입군은 그 전후의 경우보다 병력 규모가 작았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방면으로 나누어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40년(1253)의 제 5차 여·몽 전쟁은 비록 충주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더욱 잔혹하고 강력해진 침략군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고종 41년(1254)부터 전개된 6차 침입은 다른 어느 때 보다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기간이었으며 피해 횟수 또한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몽고는 주력부대를 경상도 남단과 전라도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오르내림으로써 강화도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해도를 직접 공략함으로써 마치 강화도를 공격할 것처럼 무력시위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대략 11회에 걸친 몽고군의 침략 양상을 종합하면, 나름대로의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험이 있는 자를 계속 파견하여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침입시기가 거의 7, 8월로 일치되는 것으로 보아 이는 8월의 추수기를 의식한 군량의 현지 조달과 관련을 있을 것이라 본다. 한편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침입이 있을 때마다 거의 모든 국토가 유린당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항전을 고수하였다. 최씨 정권은 반몽정책을 강력히 유지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몽고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제1차 침입(고종 18년 8월~고종 19년 1월)
몽장 철례탑 몽군철수후 강화환도
제2차 침입(고종 19년 8월)
몽군 철례탑 전사
제3차 침입(고종 22년)
몽장 당올태 전주 경주 침입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 소실
제4차 침입(고종 34년~35년)
몽장 아모간 정종몰후 철수
제5차 침입(고종 39년)
몽장 야고(야굴)
제6차 침입(고종 42년~46년)
몽장 찰날아대(차라대) 몽고 침입이래 이 전화가 가장 격심함.
이 6차에 걸친 29년간의 전투에서 고종 22년의 3차 침입 때와 고종 24년에 있은 6차 칩입때 제일 전화가 심했다.
삼별초 항쟁
최씨 정권이 강화천도를 한 의도는?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항몽전을 전개하려는 감투정신의 발휘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처사였다고 하는 것과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비판적인 견해를 보면, 강화 천도는 반대하는 일반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집정자 최우의 독단적 결정에 의해 추진되고 아울러 집권자와 사적으로 밀착된 측근들에 의해 논의가 전개됨으로써 최씨 정권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비정당성을 지닌 집권력의 취약성을 반전시키면서 권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천도에 의해 마련되었던 것이다. 즉 대외 문제만이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권력의 향배 문제와도 직결된 것이었다. 강화천도는 이러한 부정적인 요인과 긍정적인 두 가지 요인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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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계 초 강대국 몽골에 맞선 끈질긴 자주정신도 좋지만,
우리 민족과 강토가 그 얼마나 유린 당했을까...를 연상 해 봅니다.가슴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