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사학회 발표문(08.08.23)
과학과 대중 : 1890년대 크로포트킨의 과학평론 분석
이영석(광주대 교수)
1. 머리말
현대사회는 과학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 만큼 오늘날 과학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심은 매우 높다.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나 특정한 문제를 둘러싼 과학계의 논의가 일상대화에서도 주요 화제로 등장한다. 대중이 과학에 친숙해진 것은 초중등교육에서 과학 과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신문과 방송은 물론 과학의 대중화에 초점을 맞춘 문헌과 정기간행물의 폭발적인 증가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 또한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았다. 특히 1851년 만국박람회가 과학 기술에 대한 열광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팩스턴(Joseph Paxton)이 설계한 하이드 파크의 박람회장, 이른바 수정궁(Crystal Palace)이 불과 6개월 만에 준공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으며 새로운 기술문명의 도래를 실감했다.1) 한편 앨버트 공이 주도한 ‘왕립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정부는 박람회를 치르고 남은 엄청난 흑자를 기금으로 사우스 켄징턴(South Kensington)에 부지를 사들여 로열 앨버트 홀, 과학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등 일련의 전시관과 대중교육시설을 세웠는데, 이 또한 과학 기술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2)
이 무렵 평론지(review)들도 다투어 과학 분야의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했다. 더 나아가 과학 분야만을 다루는 대중용 전문잡지도 나타났다.3) 흔히 19세기는 잡지의 시대라고 불린다. 인쇄술의 진보, 출판물 규제 완화, 독자층의 증가에 힘입어 다양한 정기간행물들이 급증했다. 철도 수송 또한 잡지 증가를 촉진했다. 이들 정기간행물은 일반 독자들이 좋아하는 주제들을 찾아 나섰고, 그 자체가 대중교육 수단이었다.
이 시기에 과학지식을 소재로 쉽게 글을 쓰는 문필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늘어났다. 근래 이 아마추어 문필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4) 이들이야말로 19세기 중엽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자연에 지적 호기심을 가진 성년층이 과학지식의 일부를 전유하도록 자극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마추어 문필가의 장점은 과학적 사실을 “흥미로운 이야기, 우화, 교훈 등의 형태로 각색하는 능력”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글 속에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재해석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과학지식을 종합하려고 시도했다.5)
과학 분야에서 대중적 아마추어 문필가들이 각광을 받은 것은, 과학 전문가들 가운데 조리 있으면서도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현업에 종사한 한 잡지편집인은 과학 전문가에게 그 분야를 소개하는 글을 청탁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전문가가 아닌 대중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ABC처럼 친숙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반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들마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6)
그러나 이들 대중적 문필가들의 역할을 새롭게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포함해 좀 더 고급의 독자층에게 새로운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발견의 의미를 전해주는 해설가와 평론가의 역할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을 것이다. 과학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평론활동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95)나 틴들(John Tyndall, 1820-93)7)을 떠올린다. 이들은 다 같이 왕립협회(Royal Society)와 왕립학회(Royal Institute)를 중심으로 대중강연과 공개강의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표적인 평론지 지면을 빌려 과학에 관한 논설을 발표함으로써 고급독자층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당대의 주요 평론지 가운데 특히 과학계의 동향,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19세기(Nineteenth Century)}지였다. 헉슬리도 1880년대 이 평론지에 과학평론을 비롯해 진화론이나 종교 문제에 관한 논설을 자주 기고했다. 1890년대에 이 잡지의 과학평론은 주로 러시아에서 망명한 귀족출신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 1842-1921)이 맡았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운동가이자 지리・지질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신의 관심분야는 물론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 전반에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당대의 과학계 연구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글은 1890년대 크로포트킨의 과학평론을 통해 과학과 독자의 관계를 살피려는 시도다.8)
2. 과학, 종교, 독서층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체계화된 지식을 뜻했다.9)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에 관한 지식체계를 뜻하게 되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은 1833년 영국과학진흥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케임브리지 회의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전문가를 뜻하게 된 것은 1860년대의 일이다. 이 무렵 헉슬리를 비롯한 과학 지식인들이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지질학, 천문학 등의 전문 분야를 탐구하는 인사들의 모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10) 이런 점에서 보면 자연에 관한 연구자들은 종교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에 독자들이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 자체보다도 그 지식체계가 기존의 종교, 기존의 신앙과 배치되며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탓이었다. 특히 다위니즘이 창조론으로 자연을 해석한 전통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윈에 뒤이어 헉슬리나 스펜서(Herbert Spencer) 같은 명망가들의 활동에 힘입어 다위니즘은 빅토리아 시대 과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정통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학은 종교를 대신해 도덕과 사회질서를 지탱할 책무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사실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은 다윈의 독창적인 사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의 사회이론에서 이 개념을 빌려왔으며, 이런 점에서 진화론에 나타나는 자연의 이미지는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중기 자본주의 기업들의 경쟁이라고 하는 사회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11)
19세기에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논란이 된 것은 진화론 외에도 천문학 지평의 확대와 열역학 이론의 수립에 따른 새로운 과학지식이었다. 우선 망원경의 발전과 더불어 일부 지식인들은 지구 이외의 다른 혹성에 지성적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칸트나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허셀(William Herschel, 1738-1822)이 특히 이런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러한 가정은 성서에 나타나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을 인정한 신학자들 가운데는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아담의 자손이 아닌 외계인은 아담과 같은 죄를 지은 존재는 아니지만, 예수의 죽음은 그가 그 세계로 가서 다시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외계 생명체를 위해 대속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예수의 죽음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12)
그러나 외계의 생명과 성서 간의 화해보다는 그 불일치를 강조하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예컨대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프랑스 혁명기에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접하면서 이른바 대속의 계획(redemptive scheme)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13) 다른 혹성에 생명체가 있으리라는 가정과 기독교 신앙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던 과학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複數 세계의 가능성을 비판하기도 했다.14)
다음으로,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개념을 도입한 열역학(thermodynamics) 이론의 정립은 진화론과 함께 19세기 과학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과학사가들은 다위니즘과 마찬가지로 열역학 이론 또한 당대의 사회변화와 새로운 사회이론에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본다.15) 그것은 산업화와 새로운 동력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맞물려 전개된 것이다. 19세기에 완성된 열역학 이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에너지가 기존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전화할 때 소멸한 에너지 양과 새롭게 생성되는 양은 동일하다(제1법칙). 에너지는 온도가 높은 물질에서 낮은 물질로 전달될 경우 그 반대의 흐름은 자연상태에서 불가능하다(제2법칙).16) 모든 운동과 자연의 변화를 에너지의 작용으로 환원하는 이 이론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사람들은 열에너지가 기계적 운동에너지로 전화하는 대표적 사례로 증기기관을 연상하곤 했다.17)
열역학 이론 또한 진화론 못지않게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에 충격을 주었다. 힘과 에너지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에너지는 전화할 뿐 소멸하지 않는다는 에너지보존의 개념은 성서의 메시지, 이를테면 성서에 나타나는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같은 역사의 종말18)이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주에 산재한 에너지의 총합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우주란 “일단 가동되면 영원히 움직이는 완벽한 기계”임을 뜻하는 것이었다.19) 더 나아가 높은 온도를 가진 물질에서 낮은 온도의 물질로만 열이 전도될 수 있다는 제2법칙의 개념, 달리 말하면 열에너지의 비가역성 또한 종말론적 사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20)
19세기 진화론, 천문학, 열역학 분야의 새로운 지식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왜 이 무렵에 여러 종의 과학 전문잡지가 간행되고 기존의 평론지마저 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실 19세기 중엽 과학 잡지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15-95년 사이에 영국에서 상업적 과학잡지 수는 8배 이상 증가하고 있다.21) 19세기 전반 런던에서 간행되는 과학 분야(과학 일반, 자연사, 기계기술)의 창간잡지 수만 하더라도, 1820년대 9종, 1830년대 8종, 1840년대 6종, 1850년대 4종, 1860년대 18종으로 나타난다.22)
19세기 중엽 이후 일련의 사회적・문화적 발전이 과학지식의 대중화를 촉진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교육받은 중간계급의 성장, 독서층의 증가, 그리고 새로운 인쇄기술에 힙입은 출판시장의 확대 등이 이러한 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과학 지식에 열광했는가라는 점이다. 대중 출판의 확대와 전문적인 과학연구가 시기적으로 맞물렸기 때문인가? 과학이 세계와 자연의 진실을 알려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대의 과학적 발견에 관심을 표명한 것인가? 실제로 과학 잡지의 편집자들 가운데 일부 인사는 물질과 자연에 관한 탐구와 지식 습득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 도야에 기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노보다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뮤직홀과 축구 같은 여흥보다는 독서와 지식 추구가 더욱 더 바람직할 것이었다.23) 과학 잡지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힌 페니 메카닉(Penny Mechanic) 편집자는 창간호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의 지적, 도덕적 습관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며 사회적 인간들의 경쟁적인 이기심이나 또는 자기 자신의 열정에 대한 불완전한 조절 때문에 자극을 받기 쉬운 사람들에게 [과학 공부는] 감정을 침착하게 다스리는 훈련을 제공한다.24)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신앙에 비추어 과학지식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열망이나, 아니면 과학과 신앙을 비교함으로써 그 신앙을 다시 성찰하려는 태도가 독서층 사이에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과학은 종교와 신앙,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과 섭리의 문제에 걸맞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 빅토리아 시대에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더 문필가와 독자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였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여러 평론지들이 다투어 과학과 종교를 다룬 글들을 실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세기지 발행인 놀즈(James Knowles)의 편집 방침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1870-77년 사이에 당대평론(Contemporary Review)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잡지를 가장 영향력 있는 간행물로 만들었다. 1877년 19세기지를 창간했을 때 그는 시사적인 주제 외에도 과학, 종교,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다룬 논설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종교와 과학 문제에 새롭게 접근해보려는 자신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25)
한편, 19세기 일반 대중의 과학지식이 전문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입되었는가, 아니면 대중 스스로 선택적으로 전유했는가라는 근래의 논의26) 또한 종교 문제와 관련지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의 견해는 과학 엘리트가 과학지식의 발견을 주도하며 문필가는 단지 이를 수동적으로 단순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할 뿐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반면 뒤의 견해는 엘리트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과정 이외에 대중 스스로 그 유포된 지식의 번역을 통해 주체적으로 변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지식은 그 유포과정에서 “암묵적인 저항”을 포함함과 동시에 “문화접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27)
과학지식의 전파에서 위의 두 가지 과정, 즉 유포와 전유의 과정은 동시에 진행된다. 적어도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이 두 과정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적극 추구한 문필가들은 전유의 추세를 보여준다. 특히 아마추어 문필가들이 그렇다. 반면 과학 전문가이자 동시에 문필가로 활동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둘 사이의 화해보다는 과학 지식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연스럽게 과학 지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헉슬리와 틴들이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크로포트킨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과학지식의 전파가 뒤늦고 이에 비해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서 아직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에는 아마추어 문필가들이 잡지 지면을 통해 과학지식을 선택적으로 첨삭함과 동시에 전통적 도덕률이나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변용하고 전유하는 과정이 두드러졌을 것이다.28) 그러나 탈기독교화 및 과학 연구의 전문화와 더불어 대중의 주체적 변용과 전유의 중요성은 점차 사라졌다. 헉슬리와 틴들과 크로포트킨이 문필가로 활동하던 1880-90년대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두드러졌다.
3. 크로포트킨과 19세기지
러시아 무정부주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생애와 사상은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군 복무, 바이칼 호, 아무르 강 및 레나 강 유역의 지질탐사, 반체제운동과 시베리아 유형 및 수감생활, 탈옥과 망명, 무정부주의 운동가 겸 저술가로서의 활동 등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운동에의 헌신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어느덧 신화가 되었다.29) 1876년 탈옥 직후 크로포트킨은 런던에서 단기간 머물다가 스위스와 프랑스를 오가며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다시 이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여 수형생활을 치렀으며, 1886년 석방 후에는 줄곧 영국에 체류했다.
사실 영국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아나키즘이 대안적 정치사상으로 점차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그 운동가들을 위험스런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더 짙어졌다. 특히 일반 언론은 아나키즘 운동을 진지하게 성찰하기보다는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경향이 강했다. 세기 말의 혼란을 경고하면서 한 신문은 특히 아나키즘 운동을 가리켜 “조직적 범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30)
영국에서 아나키즘 운동은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고, 운동가들도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크로포트킨만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는 영국에 본격적으로 머물기 이전부터 영국 지식인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뿐만 아니라 전문 지리학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영국에 체류하기 전인 1884년 3월 17일 영국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는 중등학교에서 지리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국내외 지리교육 실태를 조사하기로 결정한 다음, 그 작업을 지리학자 케틀리(John S. Kettlie)에게 위임했다. 그 이듬해에 케틀리는 영국과 대륙의 지리교육 실태를 비교하는 내용을 보고서로 출간했는데, 주된 논지는 대륙에 비해 영국의 지리교육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31)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케틀리가 크로포트킨에게 지리교육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담은 논설을 19세기에 기고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점이다.32)
크로포트킨에 대해서는 정파에 관계없이 많은 영국인들이 호의적으로 대접하고 높이 평가했다. 일부 보수적인 인사를 제외하면 자유주의자에서 페이비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크로포트킨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망명객”이자 “전제에 맞서 싸우는 프로메테우스”, “영웅설화의 영역”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33) 크로포트킨이 영국에서 이같이 환대를 받은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형, 투옥, 탈출로 이어지는 그의 극적인 생애와 지리학자로서의 명성 외에 무엇보다도 그가 러시아 명문귀족 출신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실린 그의 기고문을 보면 필자 이름 앞에 항상 ‘프린스’(prince)라는 칭호가 표기되어 있다.
크로포트킨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지식인과 교류하였고, 이들의 도움으로 더 타임스(The Times)를 비롯한 몇몇 신문과 {네이처(Nature)}지에 기고하는 등 문필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에서 그의 주된 발표지면은 {19세기}지였다. 사실 크로포트킨은 1890년대에 이 잡지에 가장 활발하게 기고한 지식인 중의 하나였다. 이 잡지 편집인 놀즈는 원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후일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과 친교를 맺으면서 ‘형이상학협회’(Metaphysical Society)라는 지식인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대평론} 주간을 거쳐 1876년 {19세기}지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당시 지식인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지로 성가를 높였다. 19세기 말 발행부수는 거의 2만 부에 이르렀다.34)
크로포트킨이 어떻게 {19세기}의 편집진, 특히 놀즈와 연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런던으로 망명한 1880년대 후반부터 세기말까지 그는 이 잡지에 가장 많은 글을 기고한 문필가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885-1900년간 그는 영국 체류 이전 발표문 2편과 상호부조론에 관련된 논설 6편,35) 산업화와 프랑스혁명 또는 경제상황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글 12편,36) 과학계의 최근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과학평론 7편37) 등 총 27편의 글을 발표했다. 그의 논설 가운데 특히 상호부조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성찰한 일련의 글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헉슬리의 사회진화론을 넘어선 견해를 발표하라는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베이츠(Henry W. Bates, 1825-92)의 권고를 받아들여 작성한 것이다.38) 어쨌든 과학평론을 제외한 다른 논설들 대부분은 후일 [빵의 정복(The Conquest of Bread)](1892), [경포, 공장, 작업장(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8),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1902), [근대과학과 아나키즘(Modern Science and Anarchism)](1904) 등의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한편, 1890년대에 어떻게 크로포트킨이 과학평론을 기고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실 그는 지리학과 지질학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에 걸쳐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과학평론을 통해 과학계의 최근 동향을 전해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그는 이전에 부정기적으로 과학에 관한 동향을 소개하던 헉슬리와 놀즈를 대신해 새롭게 과학평론을 기고한 것처럼 보인다.
4. 과학지식과 교양의 거리 좁히기
크로포트킨의 과학평론은 당대 과학계에서 주목을 받은 발견이나 이론 또는 현상을 소개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는 평이하면서도 간결한 설명을 통해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취를 소개하고 앞으로의 연구 전망과 그 중요성 등을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7편의 평론에서 다루는 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성운의 본질, 지구 자전축 변화, 전자기파(2회), 세포의 생명활동, 눈의 진화, 이온결합, 빛과 색, 식물의 질소동화작용,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 빙하, 개기일식, 절대온도, 식물의 생리, 물질의 상태, 가스 액화, 태양에너지 사용, 혜성.
총 18가지 주제를 분야별로 분류하면 물리학 7, 화학 1, 천문학 3, 생물학 4, 지질학 및 지리학 2, 기타 1로 나타난다. 이들 주제가 당시 일반인들의 주요 관심사에 부응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자료와 견주어 비교할 수는 있다. 왕립학회는 매년 연례행사로 크리스마스 공개강연(Christmas Lecture)을 가졌다. 청중은 물론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이었다. 1881-99년간 공개강연에서 다룬 주제는 아래와 같다.
태양과 달, 빛과 시력, 연금술과 근대과학의 관계, 전기(3회), 유성 이야기, 빛과 사진술에 관한 화학지식, 천문학(3회), 구름과 경치, 서리와 불, 생명체 운동, 기체와 액체, 소리와 듣기와 말하기, 가시광선과 비가시광선, 전보의 원리, 유체의 운동.39)
모두 해서 19가지 주제를 분야별로 검토하면 물리학 7, 화학 2, 천문학 5, 생물학 2, 지질・지리학 2, 기타 1로 분류된다. 양쪽 모두 물리학 주제가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다음으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공개강연의 주제가 실제 생활에 관련된 문제에 가깝다면 크로포트킨의 주제는 좀 더 학문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크리스마스 강연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형태를 취하는 반면, 과학평론은 그만큼 당대 과학계의 주요 이슈를 다루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다음에서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분야별로 한두 가지 주제들을 골라 크로포트킨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살피려고 한다.
물리학에서 크로포트킨이 독자에게 자세하면서도 알기 쉽게 소개하는 주제는 전자기학(electromagnetics)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분야는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 맥스웰(James C. Maxwell, 1831-79), 헤르츠(Heinrich Hertz, 1857-94) 등의 연구에 힘입어 발전했다. 19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뉴턴역학과 열역학, 그리고 전자기학의 이론을 통해 모든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특히 전자기학은 맥스웰이 전자기장 방정식으로 전자기파의 존재를 확언하고 헤르츠가 이를 실험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전자기학의 설명틀에서, 전자기파는 빛의 속도와 같고 횡파이며 따라서 빛(열) 또한 전자기파의 파동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크로포트킨은 특히 1880년대에 이루어진 헤르츠의 일련의 실험에 주목한다. 그는 헤르츠의 여러 전자기파 실험이 전기와 자기와 빛의 관계, 물질의 구조, 에너지의 전화 등을 이해하려는 중요한 시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자기파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움직이는 물체-말하자면 당구공-가 정지해 있는 다른 물체와 충돌해 그 물체에 운동에너지의 일부가 전도되기 시작했을 때, 떨어지는 돌에 의해 연못의 표면에서 발생한 물결이 좀 더 넓은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마침내 연못 가장자리에 가만히 떠있던 나뭇조각을 요동치게 만들 때, 또는 소리굽쇠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굽쇠에 그 진동을 전할 때, 우리는 그 두 당구공과 연못 표면의 물과 공기의 복잡한 운동 그 모두를 추적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한 당구공에서 다른 당구공으로, 돌멩이에서 나뭇조각으로 한 소리굽쇠에서 다른 굽쇠로 에너지가 이전되는 방식에 관해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다.40)
이어서 그는 진공에서 빛과 열의 전도 등에 관해서 ‘에테르’라는 비가시적 물질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이 매질을 통해 빛과 열, 다시 말하면 에너지가 이동한다는 가설을 소개한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헤르츠의 일련의 실험은 특히 빛과 전자기파의 관계에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준다. “빛은 일부 물질을 통해 이동하며, 다른 물질들에 의해 반사된다. 전자기파도 같은 식으로 반응한다. 아연판은 거울처럼 전자기파에 작용해 이 파를 반사한다. 그렇지만 전자기파는 빛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나무문을 통과한다. 헤르츠는 전자기파를 닫힌 문을 통과시켜 옆방으로 보냈다.”41) 계속해서 그는 빛과 열의 직진, 굴절, 반사 등의 성질에 관한 헤르츠의 여러 실험을 소개한다.
한편, 빛과 열과 전자기파를 모두 에너지의 흐름으로 동일하게 인식할 경우 궁극적으로는 빛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이른다. 수많은 실험으로 전자기파는 어떤 매질이 없이는 전도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파동설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에너지 형태만이 진공의 공간을 흐를 수 있다. 맥스웰이 예견한 대로 전기방전은 주변 에테르를 교란시킨다. 그 에너지는 말하자면 에테르 안에 축적되고 그것이 에테르를 통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달된다. 마치 물분자의 진동이 연못 표면에서 파동 형태로 퍼지는 것처럼.”42)
그러면서도 크로포트킨은 파동설로 쉽게 풀리지 않는 여러 현상을 주목한 후,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의 실험을 소개하면서 에테르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한다. 크룩스는 진공방전관의 음극에서 방전효과를 재현해 음극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서 그것이 미립자의 흐름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이런 의문을 제기한 지 2년 후 물리학의 역사에서 세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마이컬슨(Albert A.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dward W. Morley, 1838-1923)가 빛의 속도 측정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크로포트킨이 1880년대 이후 전자기학에서 제기된 중요한 이슈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중요성을 가장 쉬운 언어로 독자에게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연구 진행방향까지도 예견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천문학 분야는 어떤가. 1894년 4월 16일 개기일식이 있었다. 1868년의 일식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연구자들이 그 현상을 관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그에 따라 태양에 관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지난 30여 년간 이루어진 태양에 관한 연구로부터 얻은 새로운 사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실제로 과거 한 세대 사이에 태양의 구조에 과한 천문학자들의 인식은 대폭 수정되었다. 태양은 열과 빛을 발하는 거대한 가스덩어리가 분명하며, 그 온도도 매우 높아 그 구성 원소 가운데 수소・탄소・헬륨은 물론, 칼슘・칼륨・철・은・구리 같은 광물원자까지도 모두 가스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태양의 내부 온도는 알기 어렵지만 표면온도는 측정할 수 있는데, 대략 섭씨 3,250도로 추정된다.43) 이렇게 개괄한 뒤에 그는 이번 개기일식 관측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태양을 발광체,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뚜렷한 경계를 가진 발광체로 여기는 데 익숙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발광체의 경계를 확대해야 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란 단지 거대한 불덩어리의 작은 일부-즉 좀 더 농축된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부분 주위에 그 반경의 세배 또는 네 배 크기에 이르는 성운 같은 물질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이 물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왔으며, 나중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44)
천문학 연구는 태양계를 넘어 다른 우주로 향하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오늘날과 달리 은하・성운・성단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성운(nubula)으로 표기한다. 그는 천문관측기기의 개량에 힘입어 안드로메다은하에 관해 새롭게 알려진 사실을 소개한다. 그는 로버츠(Isaac Roberts, 1829-1904)가 촬영한 정교한 사진에 의거하고 있는데, 태양계 우주와 같은 공간의 외연이 무한대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단을 둘러싸고 어두운 고리와 밝은 고리로 나뉜 발광물질의 소용돌이를 보노라면, 거기에서 거대한 태양계 우주의 형성방식을 인지할 수 있고, 이 또한 규모는 작지만 우리 태양계와 비슷한 기원을 가졌으리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다.”45) 더 나아가 크로포트킨은 황소자리의 플레아데스 성단 사진을 통해 “성간물질이 새로운 항성들을 만들기 위해 밀집되고 농축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46) 이 모든 사실들은 기독교 창조설에 나타나는 정태적 우주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인 셈이다.
생물학 분야에서 크로포트킨은 당대에 밝혀진 식물의 질소동화작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동안 식물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과정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식물의 질소동화작용은 19세기 중엽 이후 식물학자, 농학자, 화학자 등이 이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그 전 과정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자문한다.
씨앗을 땅속에 심으면 그것은 처음에는 모식물이 씨 자체에 축적한 양분을 흡수해 성장한다. 이제 그 어린 묘목이 뿌리를 내려 땅속의 양분을 찾게 된 후에는, 잎들이 공중에 나부끼며 햇빛을 쪼이고 대기 중에서 또 다른 필수 영양소를 흡수한다. 식물에 필요한 미네랄 성분은 토양에서 용해된 상태로 있는 것을 찾거나 또는 쉽게 공급 받을 수도 있다. 반면에 산소・수소・탄소 등은 대기 또는 땅속에서 뽑아 올린 공기와 물에서 얻어내는데, 이들은 탄산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물의 삶 못지않게 식물의 삶에서도 기요한 질소의 경우 곤란한 점들이 있다. 그 대부분은 대기와 토양에 있지만, 식물의 잎으로는 대기에서 흡수할 수 없고, 거름 뿌린 땅속에 포함된 질소에서 오직 소량만이 뿌리를 통해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질소를 어디서 얻는가?47)
식물은 원래 잎을 통해 대기 중의 질소를 흡수할 수 없다. 토양 속의 질소도 식물의 뿌리가 직접 흡수할 수 없다. 바람직한 것이라면 질소가 질산(NHO2) 또는 질산염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나, 질산이 흙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질소는 산소가 이온상태가 아닌 한 그것과 직접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흙속에서 질소를 어떻게 흡수하는가?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오랜 연구를 통해 생물학자들은 흙속의 암모니아를 질산으로 전화하는 과정이 특수한 박테리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특히 콩과식물에서 이러한 작용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기름진 토양 속에서 자라는 콩과식물의 뿌리에는 많은 혹이 달려 있는데, 이는 박테리아 덩어리에서 형성된 것이다. 박테리아균은 식물로부터 탄화수소를 얻고 그 대신에 흙속의 공기로부터 동화작용을 통해 만들어낸 질소를 제공한다. 이 박테리아균들이 식물에 질소를 공급하는 구세주인 셈이다. 크로포트킨은 이 메커니즘을 규명하게 됨으로써 향후 작물 생산을 증대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결론짓는다.48)
한편, 크로포트킨은 식물생리학자들이 일련의 실험을 통해 다윈이 이미 한 세대 전에 천명한 바 있는 진화의 운동을 재현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대체로 식물이 빛이나 중력 또는 습기에 민감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식물은 빛을 쪼여주는 방향으로 굽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중력의 영향을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크로포트킨은 근래 이루어진 한 가지 실험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그것은 고도변화가 식물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해발 3,440피트인 알프스 샤모니(Chamounix), 해발 6,660피트인 피레네와 카르파티아 산록지대에 동일한 모식물에서 나온 묘목을 심어 2년간 관찰했다. 그 결과 높은 위도에서 자란 식물개체는 더 심하게 변형되었다는 확인할 수 있었다. “크기가 작고 줄기의 마디와 마디 사이의 간격도 더 짧은 반면, 아랫부분은 더 굵었다. 잎새도 크기가 더 작았지만, 작아진 것에 비교하면 더 굵은 편이었다.”49)
마지막으로, 자원 위기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성찰을 살펴보자. 인간은 풍력, 수력, 태양열에서도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근대문명은 석탄 소비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석탄 채굴과 소비가 급증한다면, 탄전은 한 세기 이내에 고갈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매년 수천 여 기업에 증기기관이 설치되어 에너지를 소비한다. 크로포트킨은 석탄 이외에 태양열, 조수, 수력 등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50) 이 대안적 방법은 지난 한 세기에 걸쳐 물리학이 이룩한 성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운동에너지가 열에너지, 빛에너지, 전기에너지로 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여러 에너지 형태 가운데 근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전기에너지로의 전화이다. 크로포트킨은 수력과 풍력을 전기에너지로 바꿔 인류생활에 이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독자에게 제시한다.51)
과학평론에서 크로포트킨이 다루는 내용은 대부분 전문적인 연구와 관련된 것이며 가장 최근 과학계에서 이슈가 된 주제들이다. 크로포트킨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 과학의 전 분야에 걸쳐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와 함께 영미권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루어진 최신 연구들을 현지 보고서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로포트킨이 보여주는 미덕은 그가 과학 분야의 새로운 발견과 전문 지식을 다루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발견되는 주변의 현상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는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사실들을 전할 때에도 해당 학문 분야 역사에서 그것들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이전 연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반드시 짚어준다. 결론적으로 크로포트킨이 의도한 것은 전문 과학지식과 교양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통합에서 전문화로
이미 신화가 된 크로포트킨의 생애에서 진실된 면모를 찾기란 쉽지 않다. 과학 지식인으로서 크로포트킨의 면모 또한 신비에 싸여 있다. 방대한 지식, 치밀한 논리와 일관된 전망은 그가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 글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단순히 그의 신비로운 생애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어는 그에게 외국어였지만, 그는 항상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으며, 글의 내용 또한 매우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들어 글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의 과학평론 또한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능한 한 과학계의 최신 이슈를 다루면서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선정했다. 특정한 과학적 이슈를 연구사적 맥락에서 살핌으로써 독자들이 그 주제를 좀 더 넓은 사회적・학문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크로포트킨은 과학 기술에 대해 분명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상호부조론 또한 인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화론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 같은 언어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도한 자연 자체도 다윈이나 헉슬리와는 달리, 무조건 잔인하고 잔혹한 투쟁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 자체가 경쟁보다는 상호협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전망 아래 인간사회의 미래를 투사했다. 크로포트킨은 19세기 과학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물질과 에너지의 통일이고, 다른 하나는 별에서 개별 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진화와, 그리고 탄생과 소멸의 주기를 보여준다는 인식이다.52) 자연을 통합된 전체로 보는 전통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신비주의적 면모를 보여준다. 지리학에 대한 그의 희망도 전체로서의 세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전체에 대한 강조는 과학 분야의 경우 통합과 종합으로 나타난다. 그는 개별 분과학문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위한 지식체계로서 과학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그의 과학평론은 개별 학문분야를 넘어 항상 과학적 방법과 탐구의 결과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전체와 통합으로서의 과학 담론은 자취를 감추었다. 전문화와 세분화, 이 끊임없는 분화의 과정을 거쳐 사실상 ‘근대과학’이라는 실체는 사라졌다. 지구 환경의 위기와 근대과학의 한계가 한꺼번에 드러난 오늘날 과학 지식인으로서 크로포트킨의 면모는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完)
첫댓글 한가위 읽을거리로 옮겨갑니다 ^^ 명절 잘 쇠시고요. 자주 들러 안부 여쭈겠습니다.^^ 건강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