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올바른 이해
1.
중원 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비(碑)의 높이는 2.03 m, 폭은 55 cm, 두께는 33 cm이고, 현재 지명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소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얼마전 작고한 신경림 시인(1936-2024)이 살던 당시에는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선돌배기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2019년 중원 고구려비가 장수왕(長壽王, 재위413-491)시기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재위391-412)이 건립했다는 가설이 나왔는데 새로 판독한 문자에 의하면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써있으며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고 붕어(崩御)하기 까지의 연호(年號)라는 사실에 근거한 반론이었다.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되어 고구려 시기의 석비(石碑)로 판명되며 그 설치시기에 대해 여러의견들이 개진되다가 2019년 새롭게 판독된 글자에 의해 장수왕 건립설이 광개토대왕 건립설로 무게중심이 넘어가게 되었다.
충주(忠州)는 고구려 때에는 국원성(國原城)이었으며, 신라(新羅)가 이곳을 차지한 뒤 중원경(中原京)으로 바뀌었으며 대륙조선의 반도 이주 후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1956-1994)에 발견되어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라 불리게 되었다.
비석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기에 생략하며 본 글에서는 고구려 즉 무끄리, 가올리 라는 조선상고역사의 실체가 존재했던 광개토대왕 당시의 강역을 살펴보고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당시 충주(忠州)로 비정되는 대륙 장강(長江)위쪽의 수주시(隨州市)에 고구려비를 세우게 되었는지 그 이면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재위 당시 백제의 임금은 아신왕(阿莘王, 370-405)과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이었으며, 아신왕은 고구려와 몇 번에 걸친 전쟁을 일으키고 있음을 기록은 알려주고 있다.
아신왕의 몇 번에 걸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은 광개토대왕으로 하여금 이를 평정할 전략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396년 대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에 대한 전격전을 구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백제 수도 위례성(慰禮城)을 비롯한 수십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게 된다. 이때가 영락(永樂)6년의 일이니 그 다음해 영락(永樂)7년인 397년에 광개토대왕은 당시 충주였던 대륙 장강 위쪽의 현 수주시(隨州市)에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로 알려진 대왕의 기념비를 세웠음을 알아낼 수 있다.
대륙조선의 충주였던 현 호북성 수주시(隨州市)는 장강(長江)을 통해 북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요충지로 현 반도의 가짜 충주하고는 전략적 가치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고구려 남방 경략의 최남단 요충지로 대륙의 충주(忠州)는 충분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그의 기념비를 세워 후세를 경계하고 그 업적을 만세에 전하고자 했음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일본제국주의는 대륙 충주의 모든 유적과 유물을 - 1917년의 1차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실시된 세계강역의 재편 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편승해 – 반도로 옮겨 역사를 조작하여 이후 반도에 살게된 세대에 대해 절대적 굴욕감을 채워주는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2.
고구려가 백제(百濟)의 항복을 받고 충주(忠州)에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를 세워 그 웅대한 기상을 대륙의 한복판 장강(長江) 위쪽까지 떨쳤던 그 시기 고구려의 중심은 국내성(國內城)으로 바로 조선역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의 좌측 압록강(鴨綠江) 부근이 되겠으며 지금의 지명으로는 자이산호(Zaisan湖) 부근으로 비정될 수 있다.
현재 남겨진 우리의 고대사는 모조리 교열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이면의 역사에 숨겨진 웅대한 선조들의 활화산 같은 역사는 서양사에 등장하는 조선민족의 서양정벌사와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발해까지 이어지는 상고사의 강역을 정확히 재단해 냄으로써 그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된다.
생거터전의 기본은 먹거리 즉 생산물의 풍부함을 기본으로 한다. 한발(旱魃)의 위험이 없는 천산이북 남만주(南滿洲)의 비옥함은 유사이래(有史以來)로 제 민족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고, 북방초원로의 존재는 바로 알타이산 부근에서 생산되던 막대한 양의 모피와 민물진주의 무역로(貿易路)로 상고사(上古史) 동서교역루트의 시발점에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가 역사의 강역을 차지하며 북부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또한 풍부한 물산의 이동과 수많은 사람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고구려와 발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고구려의 후예인 몽고(蒙古) 테무친(成吉思汗)이 강대한 조선민족 상고사의 기백을 다시 되살려 바로 그 고구려의 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1582년 우랄산을 넘어 동진(東進)을 시작했다는 러시아의 발흥과 맞물려 강희제(姜熙齊,1654-1722)는 고구려(高句麗), 몽고(蒙古), 갈단(Galdan) 으로 이어진 역사의 강역을 정벌하고 신강(新疆)이라는 지역을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이후 청(淸)의 멸망과 더불어 1917년부터 조선이 반도로 이주하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영토침략으로 신강(新疆)은 역사의 남북만주로 지명이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여(扶餘)의 멸망과 고구려의 발흥은 일부세력의 서쪽지역으로의 이주를 촉발해 부여인(扶餘人) 즉 훈족 아틸라(Attila, 406-453)가 서유럽을 뒤흔들고 결국 오도아케르(Odoacer, 435-493)에 의해 서로마제국(395-476)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아틸라의 게르만족 공격은 당시 게르만지역에 살고 있던 앵글족과 색슨족의 민족이동을 불러일으켜 지금의 영국(英國)인 당시 브리튼섬에 앵글로색슨(Anglo-Saxon)족의 새로운 둥지를 틀게 만들기도 하였다.
훈족이 사용한 활과 화살촉 그리고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의 장례풍습 그리고 경주 계림로14호분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이 로마기법으로 제작된 동유럽 트리키아 지역의 산물이고 시기는 5세기로 분석된다는 사실은 훈족과 신라와의 굉장한 친연성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4-6세기에 이르는 시기동안 중앙아시아의 북부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강역을 확보한 고구려(高句麗)는 풍부한 물산과 현재의 천산(天山) 서쪽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넘어가는 길목에 존재한 은광(銀鑛)의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동남으로 대륙 한복판과 중앙아시아 서쪽의 카스피해를 넘어 서유럽을 공략하여 당시 유럽의 대규모 민족이동을 촉발했던 것이다.
카스피해(Caspian Sea)가 9세기 당시에는 주르잔해였다는 사실은 아랍의 지리서 <여러 도로와 왕국에 관한 기록>을 통해 고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상고(上古)조선사 백두산(알타이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구이(九夷)에 대한 수많은 명칭으로 주르진, 주리진, 주젠, 주신,가울리 등으로 불리었고, 이를 한자 독음으로 변화하면서 숙신, 조선, 구리(고구려)등의 명칭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북부 알타이산 근방에 둥지를 틀고 번성했던 가올리(고구려)의 경제는 당연히 생산과 중개무역을 석권한 데서 그 경제적 풍요로움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일이백만의 강군(强軍)을 육성해 유럽을 경략(經略)했고, 이는 단국대학교 총장이자 독립투사였던 장도빈(張道斌, 1888~1963)박사의 책 <한국의 혼>에서 말한 을지문덕(乙支文德, 6-7세기 전반추정)당시 백제 인구가 620만이었다는 부여(扶餘) 비문의 기록을 토대로 추산하여 신라 600만, 고구려는 2400만으로 분석한 사실과 수(隨)나라의 고구려 정벌군이 3백만에 육박했다는 기록 또한 당시 고구려 군사력이 2-3백만에 이르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군사력을 육성할 정도의 막강한 경제력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동쪽으로는 현 중국대륙의 장강이북을 완벽히 석권하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난립해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비문에 나온 왜(倭)의 근거지였던 현 사천성(四川省) 양자강(揚子江)변의 무도한 세력들과 아울러 현 기련산(祁連山)이 위치한 감숙성(甘肅省)지역까지 통치강역으로 편입했음을 분석해 낼 수 있다.
이러한 강역사(疆域史)를 재정립하게 되면 바로 당시 비단을 비롯한 각종 산물의 중계무역지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현 우루무치(烏魯木齊)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생존과 직결된 곳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돈황(燉煌)은 북위(北魏)로 변조된 가올리 즉 고구려(高句麗)의 역사적 유물임을 간파해 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삼국시대 4-5세기의 강역판도는 중앙아시아 동북지역과 아울러 현 대륙의 기름진 옥토(沃土)지역은 모조리 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新羅)의 강성과 고구려의 몰락으로 인해 비로소 당(唐)이라는 역사의 실체가 서서히 역사의 전면부로 부상하면서 현 대륙의 감숙성,사천성,귀주성,운남성, 그리고 베트남 하이퐁 위쪽지역을 역사강역으로 규정짓는 이른바 한족(漢族)의 부흥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훈적비(勳籍碑)에 대해 교열된 반도역사에서는 길림성(吉林省)과 충주(忠州) 두 곳만을 소개하고 있으나, 상식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이 어찌 달랑 두 개의 비문만 남겼겠는가? 동서남북중 이라는 오방(五方)을 중심으로 대왕의 명예를 드높였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고구려(高句麗)라는 조선사오천년 역사적 실체의 강역(疆域)을 복원해 냄으로써 우리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으며, 그 설치위치에 대해 현 대륙 수주시(隨州市)로 이 지역이 조선역사의 충주(忠州)지역이었음을 고찰해 본다.
3.
2024.06.09.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송계님 말씀대로 서안이 백제수도 한성이 맞는 것 같습니다. 돈황지방에 나주곰탕이 현 한반도 나주곰탕하고 똑같다고 최불암씨의 음식탐방에서 방송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서안에서 가까운 돈황이 백제영토 였다가 나중에 고구려 남방정책으로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평양이 비옥한 땅이라는 뜻인데 남만주 일대의 비옥한 땅이 평양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돈황의 나주곰탕 이야기는 정말 당시에 쇼킹했던 것으로 기억나고 이제 왜 그랬는지는 대륙조선사를 통해 충분히 설명이 되는듯 합니다
송계님 글솜씨는 역시 탁월하십니다. 언제 봐도 술술 읽히네요.
나중에 이런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셔도 좋을거 같습니다.
고대사는 정말 관심있던 분야인데 영화를 한편 본것같네요.
잘 봤습니다.
응원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유투브 소호금천씨 방송도 참고할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EMY-pOVf58
https://www.youtube.com/watch?v=USJfjNeWC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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