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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여행. 맛집 스크랩 계백 장군 유적지
양재경 추천 0 조회 31 13.02.11 13:5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계백 장군 유적지 < 2013. 2. 04. >




계백장군 유적 전승지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을 계백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잘렷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 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뒷편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덤지역의 동남족이 백제와 신라의 마직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있다. 원래 무덤 일원은 돌덧널(석관)이 노출된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충장사

이곳은 백제말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충절의 표상이신 백제 충신 계백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황산루


황산벌 전투

계백은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 싸움에 나갔다. 출전하기 전에 자기의 처자들이 패전 뒤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미리 자기 손으로 죽였으며, 자신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병사들에게도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했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그러나 결국 나이 어린 화랑 반굴(盤屈)·관창(官昌)의 전사로 전의를 불태우며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마지막 희망마저 잃고,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켰으며 고구려의 멸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라를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한 계백의 생애는 후대인들에게 높이 칭송되었고,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은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라고 칭송했다. 부여 의열사(義烈祠)·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계백(階伯, 612년 ~ 660년 음력 7월 9일 의자왕 21년)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흥수성충과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계백장군의 정기를 듬? 받으며 한컷 ㅋㅋ

계백장군 동상에서 바라보는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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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17 11:28

    첫댓글 아들 입영 시키고 두분만~~~

  • 작성자 13.02.18 21:25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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