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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플러, 밤나무 그리고 갈참나무 사이로 산길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본다. 부서진 냉장고, 펴진 이불, 수납장, 그리고 잘라낸 붉은 양탄자. 우듬지의 포플러 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엔 해가 쨍쨍, 숲은 정막감이 가득하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앞세우고 시내로 간다. 큰 아이는 삼 개월째 쉬는 날 압구정동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유난히 깔끔을 떠는 아이의 별명은 망치다. 나는 망치의 바램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잊고 산지 삼개월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면서 오늘 염천의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문득 아이의 소원 비슷한 바람을 들어주기로 결정을 한다. 아이는 아직 서울을 모른다. 아이에게 압구정동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는 이전부터 78-1 노래를 부르더니 급기야 4312번으로 번호가 바뀐 뒤에도 송파 차고지까지 가는 그 먼 길을 날잡아 가보고 싶어했다. 학교가는 길 잘라 먹은 그 짧은 여정의 버스길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이는 궁금했던 것이다.
2
이 뜨거운 날에 산행을 다녀오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의 땀에 전 옷에서 땀냄새가 버스 안으로 번져온다.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불고 앞좌석에 앉은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대각선으로 앉은 노인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의 머리는 대머리, 그의 머리카락은 희고 얇은 비단같은 터럭들이 물에 흠뻑 젖어 있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머리의 땀을 닦아낸다. 얼굴에 가득 번져오던 땀방울들을 훔쳐내는 그의 손에도 털이 가득하다. 반바지, 등산화, 그리고 땀을 훔쳐내고 다시 쓰는 등산용 모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서서히 차가 푸른 산길을 따라 도시로 달려갈 때 스쳐가는 푸른 산의 능선을 보고 있다. 비가 온 후 좋아진 시계 너머로 우뚝 솓은 강남의 아파트들이 다가온다.
아이들과 산책을 떠난 것이 오랜만이다. 고작 교회에 다녀오는 정도일 뿐 시간이 맞지 않았다. 통일전망대, 천진과 아야진을 다녀온 것이 고작이다. 아이와 함께 서서히 양재를 지나 강남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모습이 거리에 가득하다. 나는 그 안에서 '대중집합소'란 말을 생각한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들어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또 일하고 떠나는 곳이라니, 그 알 수 없는 블랙홀과 같은 도시의 거리를 바라본다. 행복한 약국, 교보타워, 그리고 반포로 향하는 길. 드라마 하우스에 모인 젊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여 있다. 지나는 차들에서 강렬한 빛이 반사된다. 나는 알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광장 공포증 같은 것들을 느낀다. 안에 갇혀 살던 사람이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일이라니, 그건 히틀러처럼 대중 앞에 선 채 손끝을 꺾으면서 사열을 보는 자신 있는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리라.
3
압구정동에 비상구가 있는지, 바람부는 날이면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 나는 논현과 신사를 지나 다가선 압구정동 한강 가의 아파트를 따라 드러난 압구정도의 길을 따라 내려 아이와 함께 걷는다. 다를 바 없는 과일장사와 좌판들이 늘어선 거리 옆으로 투명한 쇼윈도우와 안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가구와 전시물들이 부동산 경기덕으로 급작스러운 부자가 된 복부인의 호사스러움을 떠올리게 한다. 긴 바지의 키 큰 처녀가 버스를 기다리면서 흘낏 나를 경계한다. 고가도로 푸른 숲 너머로 흰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나고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의 옷을 쳐다본다. 그 옷은 유난히 몸을 강조하고 있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자신의 장기를 한껏 자랑하려는 듯 매끈한 다리가 가위질을 하듯 보도를 걸어가고 미와 추의 구분이 천지를 가르는 것인양 예민해진 여자들이 자존심을 건 보폭으로 워킹을 하는 곳, 쇼윈도의 유리창은 인간의 시선들을 가장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꿔놓는 물신의 환영을 열어놓는 듯 투명하다. 절대강자가 없듯 절대미녀도 없는 압구정. 나는 아이에게 묻는다. 압구정의 반댓말이 뭐냐. 아이는 앞구정이 아닌 압구정? 나는 뒷구정 하고 농담을 건넨다 .아이는 피식 웃는다. 여성의 형태미란 어떤 걸까 .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 다들 그 장단점이 눈에 들어온다. 키가 크면 가슴이 적고 몸이 쭉 뻗으면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얼굴이 눈 앞에 다가온다. 신은 공평한 걸까. 절대미인을 허락하지 않는 거다. 얼굴과 몸이 매력적인데도 왠지 아둔해 보이는 마스크라든가, 지적이긴 한데 깡마른 모습이라든가.
도발미를 바란 걸까. 현대갤러리백화점에서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한강을 내려다 보면서 팔십 평이 넘는 이십 억대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수시로 외국을 드나들고 교회는 제일 화려하고 부자인 교회로 나가 축복을 구하는 부류의 사람들, 자식들은 의사이거나 교수, 혹은 사장이거나 재벌들과 연결된 인척관계, 뭐 그런 부유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는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매력이 없는 허름한 과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까. 나는 왜 그곳에서 도발미인을 떠올린 걸까. 그건 압구정동이란 독특한 환경을 의식한 걸까. 그래 압구정동에는 도말미인이 가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디를 봐도 도발미인은 없다. 그저 평범한 거리의 행인들만 가득할 뿐이다. 다만 고급스러운 자본의 물질들을 수없이 쌓아놓고 삐까번쩍 쇼윈도우 안에 눈을 모으게 하는 보석 같은 베일을 둘러 놓았을 뿐이다. 아직 난 그곳을 모른다.
사람이란 인격이지, 도발미인의 얼굴 속에서 그들의 성마른 감성과 감춰진 욕망, 그리고 더 이상 어려운 난제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읽는다. 그건 그 사람의 인격을 분해하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그 호화로운 거리를 지나면서 그 안에서 조각조각 분열된 인격의 조각들을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조각들은 거리 곳곳을 걸어다닌다. 한 팔, 한 다리. 그리고 코의 조각과 머리카락들로 떠다닌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소름이 돋는다. 도시를 걸어가는 것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조각이라니... 그 가운덴 죽은 이들의 영혼 조각들도 있을까. 오늘 텔레비전에서 본 미이라의 위내시경사진처럼 그렇게 죽은 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의 조각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동네 뒷산의 언덕에서 퍼렇게 불을 켜고 도시를 내려다 볼 지도 모른다. 그러다 낮이면 버스도 타고 사람들과 함께 출근도 하고 퍼드득 지하철 전선에 올라탔다 불을 내기도 하고...
4
도대체 어쨌다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저 살덩어리들. 나는 저들을 보고 있고 저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보는 저들은 어떤 사람이고 저들이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전부터 아마 이런 생각을 해 왔을 거야. 보는 나와 바라보이는 나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낯선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렇게 낯선 나를 보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건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로 나였어. 나는 그 가슴 밑바닥으로 흐르는 지하철 소리를 듣는다. 그건 근본적으로 고동소리를 흔들어놓는 소리다. 어쩌면 그 안에서부터 나는 무언가 지상을 동경하듯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끝없이 지하로 배회하다 가끔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대교를 올라타기도 한다. 아 수없는 사람들이 몸을 던진 강물은 어느 산줄기영혼들의 외침을 받아내 흘러온 것인가. 죽은이와 산이가 만나는 강, 그리고 옥수와 압구정이 만나는 그 다리, 나는 그 긴 빛의 터널을 보고 있다.
누구든 절대적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조금 나은 것일 뿐. 다들 우르르 몰려가는 곳,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간다. 빛이다. 그 빛을 향해 사람들이 눈길을 보낸다. 한 사람은 그 빛에 서고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그 빛으로 인해 세상의 많은 부분이 빛을 얻은 걸까. 아니면 빛을 잃은 걸까. 사람들이 거래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서서히 거래되고 있다. 한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은 그 사람의 재가를 받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말을 하지 않는다. 거리는 온통 말을 하지 않는 재갈물린 사람들의 눈치보기로 긴 줄이 이어져 있다.
5
짬뽕 두 개와 짜장 하나를 놓고 천안문에 앉았다. 두 아이를 앉혀놓고 중국음식을 먹어본 적이 오래 되었다. 앞서 간 집은 유치원 단체손님으로 중국집이 만원이다. 바글바글 들어설 곳을 찾지 못하고 들어선 지하 천안문. 두 아이의 어깨는 제법 높아져 있다. 아이들을 바라본다. 비슷한 듯 키가 큰 두 아이들, 무심한 세월이 아이들의 체격과 얼굴에 가득 담겨 있다. 양파를 줄기차게 먹어대는 작은 아이, 그리고 지갑을 챙겨들고 꼼꼼한 표정을 지어내는 큰 아이, 무심했어, 나는 그 듬직하게 커버린 어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어느 새 저렇게 커버린 걸까. 작은 아이가 짬뽕 한 그릇을 비운다. 언제나 그 짬봉 한 그릇을 먹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덜어내던 어린애로 봤던 걸까. 내 짜장면에서 플라스틱 조각이 나왔다 나는 사장을 불러 이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파란 플라스틱 조각이다. [아 요거요. 면을 물에 흔들다 플라스틱이 채반의 플라스틱이 떨어져 나온 것 같으네요.]나는 플라스틱 조각을 입에서 꺼내어 사장의 손에 쥐어준다.
불볕 더위다. 오랜만에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폭염이 떨어진다. 하늘이 구멍난 것 같다. 처음 공무원 생활을 하던 사직공원의 모습이며 경희궁자리, 그리고 청와대 뒷산 인수봉도 눈에 가깝다. 유난히 삼각형으로 힘껏 솟아오른 봉우리 뒤로 북악산의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국보 101호, 그리고 책에서 본 듯한 역사적인 유물들이 이어져 있는 잔디밭을 지나 경회루를 높은 루를 바라보면서 광화문 뒤편으로 접어드니 이전 경복궁에 왔던 때와는 달리 경복궁과 근정문 사이에 새로운 문이 들어서 있다. 조선총독부 자리에 새롭게 복원이 된 흥례문이다. 신혼시절 아내와 함께 찾아왔던 경복궁의 기억이 났다. 그 때 아내는 큰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항상 짜증을 부리던 큰 아이 망치는 오늘 따라 조용하다. 흥례문을 돌아올 때 아이에게 말한다.[이곳에 엄마랑 왔을 때 넌 뱃속에 있었는데 기억나?] [내가 그걸 어떻게 기억해.][아 그렇지.][이전에 여길 왔었단다.]나는 두 아이가 의젓하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십 이년이라 세월을 떠올린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엔 수문장 복장을 한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나는 가까이 다가가면서 깃발만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면서 아이에게 말한다.[야 밀랍인형 아니야.][그러게 정말 인형인가?][그런데 왜 인형이 눈을 깜박 거리지.][그러게. 인형 아닌가봐.]둘 째 아이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어디선가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취타대의 음악인 것 같기도 하고... 뙤약볕에서 모자까지 쓰고 수염까지 붙인 채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숨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곳곳에서 일본 말이 들려오고 단체관람을 온 유난히 키가 작은 일본 여고생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생들 무료 관람이란 글귀가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곧 두 시부터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하겠사오니 관람객 여러분께서는 두시에 많이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방송잉이 이어진다.
흥례문이 들어선 이후 경복궁의 풍채가 좋아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자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이 수없이 강물처럼 몰려간다. 그 안에서 일본관람객들과 미국 관람객들도 섞여 있다. 아이들과 근정전 교태전을 지나 아미산과 향원정을 돌아나온다. 강녕전인가 하는 곳에서 내가 해시계인 앙부일귀를 아이에게 소개 하고 있을 때 단체관람을 온 아이들이 듣는다. [여기가 하지고 여기가 동지인데 하지 땐 해가 길잖아. 그리고 머리 위로 높이 해가 뜨고 그래서 이렇게 그림자가 짧지. 그리고 동지가 되면 해는 짧아지만 한 낮에 그림자는 길어지지.]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돌아서자 한 아이가 말한다.[야 우리가 너무 늦었어, 해설이 다 끝났나봐.]나는 아이에게 설명한 것인데 아이들은 내가 해설위원이나 되는 걸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다시 일월오악병을 설명한다. 저건 빨간 해는 임금을 상징하고 달은 국모를 상징하지. 그리고 오악은... 아이들은 신기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 따라 궁을 소개하는 안내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궁궐 의복체험을 돕는 도우미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궁 안으로 오고간다.
나는 아이가 너무 더운 뙤악볕에 지치는지 빨리 가자고 조르는 통에 교태전을 빠져나오는데 그 교태전 용마루가 없는 모습하며 교태란 말의 어감에 다시금 한자를 올려다 본다. 크게 사귄다는 교태다. 용마루 없는 집에서 큰 사귐을 갖는다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향원정 건물은 언제 봐도 참으로 우아하다. 그곳에 연잎이 녹음을 드리운 채 수면과 맞닿아 둥근 잎을 펼쳐놓고 그 위로 연꽃이 피었는데 한복을 입은 궁녀의 춤사위처럼 아름답다. 그 순간 수면과 물위의 접점에서 깨달음을 나타낸다고 하는 연꽃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야 그림 정말 멋지네.]아이와 함께 다가가 바라본 그림에는 경복궁 뒷산 그리고 향원정과 연못의 연잎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옅게 그려진 그림에 명암을 넣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그림과 연못을 번갈아 본다.
음료수를 마시려는 아이들이 줄을 서 있다. 두 아이들에게도 음료수를 사주기 위해 자판기에 다가가는데 그곳 앞에서 쉰 목소리로 지폐를 받아 음료를 빼는 노인이 보인다. 그의 직업은 자판기에서 음료수통을 빼내는 일이다. 앞에는 마시고 난 음료캔이 쌓여 있다. 하늘을 온통 달구는 듯한 날씨, 그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볕 때문에 아이들은 정신없이 자판기로 몰려든다. 경회루로 나왔을 때 그나마 시원한 느낌이 든다. 나는 만원자리 지폐를 꺼내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여기가 경회루다. 경회루.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모여서 연회를 베풀던 곳이야.]아이들은 지폐 속의 그림과 경회루 그림을 번갈아 본다. 십 이년 전 아이를 낳기 전에 이곳에 왔을 때도 아내와 나는 이곳 경회루를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렇고 보면 그 앞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서 있는다는 것이 감회가 새롭다. 사람이란 그렇게 먼 거리를 여행하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니다. 이곳이야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어딘가에서 바삐 살았을 것이다.
다시 흥례문 앞으로 나올 때 그곳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다. 취타대의 반주에 맞추어 처음에는 큰 북소리가 울리고 뚜우... 소라 껍데기 같은 것이 낮고 굵직은 울음소리를 내면 흥례문 저편에서 교대 수문장들이 열을 맞추어 음악과 함께 광화문 앞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광화문에는 말그림이 그려진 깃발이라든가 각종 깃발이 나부끼고 기존에 문을 지키던 병력이 새로 교대를 하는 병력과 마주하고 서 있다. 그들이 서로 칼을 올리고 자신을 증명하는 패를 보여주면서 서로 엇갈리면서 교대를 이뤄내는 의식이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중국어로 이어지는 아나운서 멘트와 함께 진행되는 행사에 사람들이 천막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무척 더운 날씨라 천막 그림자가 받쳐주지 않는 곳은 살갗이 더 검게 그을릴 정도다. 곳곳에서 몰려온 아이들이 빙 둘러 바라보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면서 우리는 궁궐을 빠져나온다.
6
돌아오는 길 산 고개를 넘으면서 나는 밤송이 하나를 손에 주웠다. 파릇파릇하게 솟아오른 바늘이 유난히 푸르른 밤송이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아도 아프지 않다. 아이들은 피곤한지 뒤쳐져서 종점에서 사준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불고 따라온다. 나는 아이들에게 뒤를 돌아 보며 말한다. [야... 여기 경회루 있다. 경회루 가질 사람... 없어. 바보들이네. 경회루 그려진 돈을 준다니까. 응.]아이들은 그래도 묵묵부답으로 웃고만 있다. [아니 아픈 것 아니야.] 그래도 아이들은 피식피식 웃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손을 내 봐.] 하지만 아이들은 뒤로 돌아 고추밭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어... 하면서 밤송이를 던진다. 아이는 놀래서 고추밭에 쓰러질 뻔 한다. 언덕을 넘어오면서 우리는 그나마 그 경회루 때문에 다시 한 번 웃는다. 그런데 집에 왔을 때 밥상에 보니 아이가 주워온 밤송이 하나가 놓여 있다. 아이는 웃으면서 말한다.[아빠 경회루 주워왔어. 경회루 멋있다 그지.]나는 경회루를 떠올리면서 무더운 여름 한 가운데를 통과해온 듯한 시원함이 다가서는 걸 느낀다. [우리집이 경복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