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님은 강능의 관찰사(정2품)의 친손녀이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107 세 이시다
요즘 들어 말 하자면 도지사 쯤 되는 모양이다.
관찰사집의 어머니 의 사촌 잘생긴 꽃미남 오라버니(우리에겐 외삼촌) 세분이 모두 한양의 경기 고등학교 와
서울 고등학교를 나오셨다.
그 시절 강능 에서 서울 까지를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방학 이면 오라버니 세분이 내려 오셨는데 친정에 모이면 바늘 이나 옷핀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댄다.
그 세분다 여고를 졸업 한 부인을 맞아 들였다.
큰아주머니는 함흥여고출신(100세,)
둘째 아주머니는 전북 도지사 딸이고 전주 여고 출신,
셋째 아주머니는 광주 여고 출신 3.1절 행사 때면 참석하신다.
일제시대 큰 외삼촌이 중앙청 에 있는 조선 총독부 건축기사로 있을때 우리 가족을 모두 서울 적선동에 끌어 올리셨다.
후일에 초대건축협회 회장이신 김순화씨이다.
아버지께서 삼척군 이도동 (지금의 무릉계곡근처) 에서 기와 공장을 하셨었는데 삼촌께서 서울 에 오면 기와가 불티나게 팔리니 서울로 오라 해서 우리가족은 그때 부터 서울로 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소학교를 나오시고 서원에서 (향교)한문공부를 장가든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셨다.
삼척의 기와공장은 사촌 작은아버지를 줘 버리고 서울의 기와 공장의 자금은 함흥여고 나오신 아주머님의 배려로 삼세번이나 자금을 밀어 주셨기에 지금도 그 아주머님은 우리집안의 은인이시다.
2008년 3월100세의 나이로 돌아 가셨고 사망시에는 일체의 조의금을 받지않은 멋쟁이 집안이다.
기와공장을 하던 아버지에게 외삼촌께서 건축공사를 슬슬 맡기기 시작 하셨다.
아버지 께서는 소형 주판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는데 아마도 수리력이 대단 하신 모양이었다.
수천 수억 공사를 맡아서 다 견적을 뽑았으니까...
기와 를 만들어 팔때에 항상 계산을 하셨을테니까..
한신공영 회장 김 형종 씨가 그때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삭강 장이 라고 어머님은 말씀 하신다.
한신 보일러를 개발하여 후일 에 한보그룹재벌이 되어서도 늘 아버지를 찾아오곤 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내 얼굴을 보면 아버지가 보일정도로 닮았고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스타일이고 배가 많이 나오셨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학교를 가장 많이 지으셨는데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 이다.
내가 기억나는 것만 해도 숙명여고, 선린상고, 중앙 고등학교, 충청도에 모교육대학 에다, 삼척 방송국을 짓고
예산의 무한천 하류 개발공 . 등등 ...
그리고 서울 운동장 축구장 공사를 하실때엔 남동생과 공짜로 서울 운동장 수영장에 가서 놀고
운동장 앞에서 아버지께서 얼음을 대패로 썩썩 갈아 달콤한 물감을 색색으로 뿌려서 막대기를 꽂아주는
얼음 과자도 사주셨다. 뒤늦게는 오리엔탈 양재학원 을 공사했다.
아버지는 강능 삼척 일대의 학문이 높고 부를 이룬 자들의 모임인 금란계의 회원이 되셨다.
백과사전과 인터넷에도 금란계가 소개된다. 모여서 한시를 읊어 대는 그런 수준 높은 계이다.
물론 돈도 많아서 그 회비로 무릉계곡 입구에는 금란정 이라는 정자 까지도 회원 80명이 모금 하여 지은것이다.
금란정 뒷마당 돌에는 80명의 회원 명단이 새겨져 있고 한가운데에 아버지의 함자 김형부(金炯富) 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문서예 행서 공부했던 란정서도 중국에서 영하 9년에 모인 회원들이 읊은 시조 의 멋들어진 글씨아닌가?
외갓집은 도렴동 우리는 적선동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그집 은 딸 다섯에 아들이 둘 딸들은 모두 경기나 이화에 다니고 있었고 피아노 까지 가르쳤다.
내가 이화여중에 들어갔을때 아버지의 기쁨은 외갓집에 당신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날이 었을 것이다.
언니 두명이 나란히 진명에 합격 했었지만 외갓집엔 이화 경기 빼고는 쨉이 안되니까...
비둘기 까지 날리는 이화여중 입학식에 노천극장에 아버지 혼자 오셨다. 아버지 회사가 시청앞이니까..
아버지께서는 빵과우유 그리고, 그것 가지고는 안돼겠다 싶었든지 중국집 만두가게에가서 통만두를 사주셨다.
그리고 외갓집 딸들은 모두다 이대 가정과를 졸업 시키시고 사윗감도 모두 아주머님의 결재에 의해 혼인을 시키신다.
세째딸 의 사윗감은 불어박사 오현우 (보봐리이부인의 번역자)이다.
딸이 그남자 싫다고 하는것은 세번이나 아주머니가 목을 졸라서 시집을 보냈단다.
그 이유는 오현우 박사는 6.25때 월남 한 사람 이어서 시댁 떨거지가 한명도 없다는 것 이 아주 머니의 마음 에 들어서
가장 예쁜 셋재 딸을 그 사람 에게 강제로 시집 보낸것이다.
그 시절 시댁 스트레스로 부터 딸 한명을 해방 시켜 보려는 아주 머니의 뜻이었다.
그 영향 으로 나도 조실부모 한 우리 영감 을 선택 한 이유도 된다 .
그리고 그 아주머님의 영향으로 나도 사윗감을 내가 결정한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그 여고 나오신 올케세분과 엄청 친밀히 지내었고 그분들이 사촌시누이인 우리어머님에게 때때로 자녀 교육에 대하여 충고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강원도 산골에 학교가 없었고 서당엔 여자는 못다녔다.
서울에 와서 야학에 다녀 음문을 깨치고 나서 편지도 쓰시고 가계부도 쓰셨는데, 우리는 어머니의 가계부를 읽을 때면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소리 나는 대로 쓰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쌀갑시 만환 송내복 이 2만환 엿질그미 이백환 이런식이다.
살아계시면 어머니도 올해가 107세이다.
아버지는 한살아래인 106세
딸도 곱게 키워라 그래야 귀한 신분이 된다.
자기가 잘하는것을 밀어줘라 예능 일지라도 욕하지 말고 칭찬만 해라.
이런것들이 다 그 여고 나오신 세 아주머님 들의 충고 였다.
덕분에 우리들은 욕한마디 안먹고 제멋대로 자랐다.
나는 칭찬만 받았으므로 나 자신이 무지 독똑 하고 완벽한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엉망진창질서없는 것이 바로나이다.
내일 말고는 다 대충 하려하고 꼼꼼하고 철저히 하는게 없다.
나에게 아무일도 시키지 않았고 잘했니 잘못했니 야단을 맞은적도 없다.
어머니게서 너 시집가면 몸아끼지 말고 일 해라 가 아니라 넌 시집가서 큰일 닥치면 구정물에 손 넣지 말고 부침개질이나 과방을 맡아 그래야만 큰일이 있을적 마다 그일을 또 하게 된단다. 이렇게 귀띰을 하셨다.
아마도 외갓집에 갔을때 여고 나온 올캐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은근히 부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넷째언니가 중앙대학 연극영화과에 가는것 조차도 아무도 반대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큰돈을 버셨고 쓰는것도 많이 쓰셨다.
이따금이면 손님들을 불러 안방에서 마작을 하셨는데 큰돈이 오고 갔다.
언제나 돈을 딴다고 어머님은 알고 계셨지만 그것은 거짖말이 뻔하다.
잃었을때는 누가 마누라에게 말하겠는가.
공화당시절 원내 총무 하시던 김진만씨 가 국회의원시절에 잘 놀러오셨었는데,우리 아버지가 없어서 헛걸음을 하고 가실때에는
"야 !국회의원이 왔다가 갔다구 그래라 ㅎㅎㅎ" 하셨다.
우리집은 계동이고 진만씨는 인사동 살면서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내셨다.
매일 아침 목욕을 함께 하시기도 했다. 그집 아들 김준기가 지금의 동부 그룹 회장이다.
준기 오빠와우리는 육촌간이다.
준기 오빠는 경기중고등학교를 8년만에 졸업한 낙제생인데
우리집에 놀러오면 진명여고 다니는 우리 셋째언니 넷째언니와 재미있게 놀다가 갔다.
넷째 언니에겐 나에게 시집오라는 말 까지 했다고 한다.
동해바다 해수욕장 텐트에서 준기오빠가 담배를 피워 보라 해서 혜자언니와 내가 담배를 처음 캑캑대면서 피워 보았다.
내가 예고 다닐때였다.
준기오빠는 그림 한점 안산다. 공짜는 받는다.
택기가 아마 준기 동생일거다. 뉴스에 많이 나오는 김택기 국회의원 후보다.
김진만씨의 형이 김진구시이고 계동살때 바로 윗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한가할때면 김진구씨와 바둑을 두셨다.
식사때면 내가 그집에 가서 방문 밖에서 "아버지 저녁 드시래요" 하고 심부름을 다녔었다.
김진구 씨가 강원도에 본처를두고 이대 나온 첩하고 사는 통에 그집 딸 정자 언니가우리 집에와서 살았다 정자 언니는 숙대 나왔고 재무부 직원이었는데 너무나도 따스한 언니이다. 시집도 안가고 평생 올드 미쓰로 살았다
아버지는 소고기 고명올린 칼국수를 좋아 하셨고 어머니는 큰 안반에 큰 홍두깨로 손칼국수를 만드셨다.
칼국수를 큰솥으로 끓이는 동안 아버지께서 친구를 초대 하는통에 어머님은 국물도 못먹은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도 지금 엄청 손칼국수를 좋아한다.
우리 딸도 입덧할때 손칼국수를 찾았다.
60년대 아버지 께서는 시청앞 소화의원 옆에 삼육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차리셨고 사장이었다.출퇴근은 거의 택시로 하셨다.
시간대가 맞을때는 나를 태워다 주셨고 우리 학교가 시청앞이므로..
비오는날이면 우리 모두를 시발 택시를 불러 태워서 한명 한명 학교 앞에 내려 주셨다.
그래도 그시절 아버지들은 애정 표현이 없어 가지고 우리는 아버지를 아주 못 마땅해 했다.
사랑의 표현을 공평치 못하게 시리 남동생에게만 하기 때문이다.
철이들어 오십이 넘어서야 아버지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려보았다.
아이들이 돈을 많이 못벌면 아빠를 싫어 하는줄 알았는데
방화동 친구 남편은 월 오백을 넘게 벌어 들이고 딸의 용돈을 아비가 꼭꼭 삼십만원씩이나 주는데도
딸이 고마워 하는게 아니라 아비를 아주 미워 한댄다.
이유는 딸 이 미술 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대 아버지가 콧방구 를 끼었다는 것이다.
그 딸은 지금 힘겨웁게 국어 교사가 되었다.
남자들의 표현방법이 서툴러서 그런것이니 아비를 불쌍히 보면 미워 하지 않을수도 있을것이다.
옛날에 우리집은 유별나게도 음식을 고단백 식품으로 늘 고기나 생선 과일 이 떨어지지 않게 먹었었는데,
오빠나 내가 어머님께 우리 반찬값을 좀 줄입시다. 친구네 가보면 우리보다 부잣집인데 음식이 영 소박해요 라고 제안을 하면
어머님 말씀이 집음식이 나쁘면 아버지가 밖에서 사잡숫는 이유도 있고,
큰고모는 한편생 쌀에다 누가 퍼갈가봐 표시까지 그으면서 아껴도 한평생이 가난 하고,
외갓집 아주머니는 흔하게 살고 아들이 사업에 실패를 했어도 또다시 강원도 감찰집 땅이 팔려서
삼억이란 돈이 들어 왔잖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은 많은식구 때문에 밑바진 독 처럼 사셨고 멋대로 키운 우리 오빠는 중동 중고등학교시절
쌈박질 하고 문제아 였었는데 서울대 졸업한 먼친척 김순조 오빠를 가정교사로 들여서 멕이고 재우고 월급주며 데리고 있어서
겨우 한양대학에 들어갔고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정몽구와 동기동창)한후에 사업을 벌려서 주유소 국수공장 가발공장 삼세번
이나 사업을 벌였었지 만 모두 실패 하였다.
마지막에는 용해 중기 라는 난지도에서 모래자갈 퍼올리는 사업을 하였다.
작년인가 계동집 쪽으로 일부러 돌아 보니 우리집자리에는 3층건물 한채(지금은 농산물 직판장이 되어있다)
와 단독주택 한채가 우리 땅을 나누어서 지어져 있었다.
그 만큼 대지가 컸었나보다.
아버지가 내이름에 연꽃(蓮) 자를 넣었으니
진흙을 뚫고 나온 연꼿처럼 피어나보리라고 마음 먹는다.
아버지! 어머니!
그 좋은 시절 다시 돌아올수 있게 제가 노력할께요.
그리고 보답 할께요.
어머님 께서는 하시던 말씀 왕대골에 왕대난다
그 좋은 환경에서 제가 태어났잖아요?
화가 로서 크게 이름 을 날리고 또 많은 알찬 작품 남기고 아버지 어머님을 세상에 알릴게요.
지금은 구원받고 천국에 가 계시니까 제가 눈물의 기도로써 효도 하겠읍니다.
이글에 나오는 우리 가정의 측근은 거의 재벌이네요.
김순화씨 건축협회회장(어머니의사촌 오라버니이며 우리를 서울로 끌어온분)
김진만씨(박정희 시절 원내 총무어머니의 외사촌)
김준기오빠(동부그룹 회장 우리들과 6촌)
김형종씨 한신(한보)그룹회장 아버지의 배하(부하)였다가 후일 보일러로 재벌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