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
동남아시아 사찰 순례기- 태국 편
두번째 태국 사찰 방문기 (3)

태국 중부의 600년 도시
핏사눌록의 왓 낭파야와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 사원 방문 (3)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핏사눌록으로 떠나다
수코타이 관광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는 핏사눌룩이다. 그동안 방콕, 아유타이, 수코타이 등 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오랜 된 사찰들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곳을 가려면 수코타이에서 많은 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3시 무렵에 수코타이를 떠나 피사눌록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키 작은 소수민족인들이 나와서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과일도 사서 먹고 주변을 관광하면서 갔다. 이 곳은 라오스와 가까운 지역인지 라오스 국경에 관한 이정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오후 5시 무렵에 핏사눌록에 도착하였다. 미리 예약한 숙소를 가려고 했지만 시내 도로가 복잡하고, 공사도 하고 해서 찾아 갖기가 매우 어려웠다. 덕분에 도시 이곳 저곳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차에서 본 도시의 모습은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 한국 지방 도시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태국 지도
핏사눌록(태국어: พิษณุโลก 피사눌록[*], Phitsanulok)은 아마도 16세기 후반에 타이를 미야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한 나레수안왕의 출생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도시는 태국 북부의 중요하고 역사적인 도시이자 핏사눌록 주의주도이다. 핏사눌록은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600년 전에 세워졌다. 이 도시는 라오스 국경까지 연결되었다.
동남아시는 태국, 미얀마, 크메르 문화로 유명한 캄보디아가 수 세기에 걸쳐 여러번 전쟁으로 인해 복잡하게 얽혀있다. 핏사눌록은 태국 북부와 중부 사이의 교차점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치적,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과거 몇 세기 동안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 지금의 서울이 백제, 신라, 고구려의 쟁탈지였던 것과 같이 핏사눌록은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가 이 핏사눌록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핏사눌록은 아유타야 왕국의 보롬마뜨라일로까낫 왕의 치세때 25년간 태국의 수도였다. 난 강의 기슭에 위치한 이 도시는 11세기에 쾌노이 강의 유로가 바뀌기 전에는 송쾌라고 불리던 크메르인의 작은 전초 기지였다. 핏사눌록은 또한 앙코르 시대 때 크메르 제국의 지방 중심지였다. 핏사눌록에는 나레수안 대학교와 삐불송끄람라자브핫 대학교 및 왕립 태국 육군의 기지가 있다. 이곳은 방콕에서 멀기 때문에 골프치러 이곳에 오는 한국인들은 없는 것 같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인터넷 검색으로 < 아시아아프리카 희망기구> 라는 복지단체에 한국인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핏사눌록은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377km이고, 내가 출발하는 수코타이에서는 62km 떨어져 있다. 핏사눌록은 주로 평평하고 평지이지만 약간의 언덕이 있다. 시의 동부에는 나무가 우거진 지역이 있다. 도시는 차오프라야 강 수계의 일부인 난 분지에 위치한다. 현재는 난 강 만이 핏사눌록을 흐른다. 핏사눌록은 더운 열대기후이고 상당한 비가 내린다. 건기와 우기가 있다. 우기는 봄에 시작해 더울 때 끝나고 건조한 여름이 9월부터 시작해 11월까지 계속 된다. 12월과 1월은 쾌적하고 시원하다고 한다. 나의 방문은 4월이었다.
수코타이 왕조 때 핏사눌록은 왕국 동부의 중요한 도시였다.
왓 아라닉 사원과 왓 체디요드통 사원이 이 때 건설되었다. 아유타야 왕조 때인 1357년에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 사원이 세워졌다. 보롬마뜨라일로까낫 왕은 왕국의 북쪽 변경을 강화하기 위해 1463년에 수도를 핏사눌록으로 옮겼다. 보롬마뜨라일로까낫 왕의 후계자인 보롬마랏차티랏 3세는 아유타야 왕국의 수도를 다시 아유타야로 옮겼다. 1555년에 나레수안 왕이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핏사눌록은 아유타야와 버마와의 전쟁 때 중요한 신병 모집 장소였다. 19세기에 몽꿋 왕은 왓 랏차부라나의 복원을 명령했다. 1955년에 핏사눌록에 화재가 발생해 옛 건물이 많이 파괴되었다. 1976년부터 1985년에 걸쳐 핏사눌록 관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난 강에 나레수안 댐이 건설되었다. 이 댐은 도시의 홍수를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왓 낭파야 사원에서 불상에 금가루를 붙이는 필자

핏사눌룩 시내 강변가의 노점상들

핏사눌룩 시내를 흐르는 강

핏사눌룩 가는 길

핏사눌룩 시내 모습

왓 낭파야 사원
피사눌룩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낮선 곳에서 하루 밤을 지낸 후 가이더의 안내에 따라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Wat Phra Sri Rattana Mahathat)와 왓낭파야 Wat Nang Phaya를 방문하였다. 먼저 왓 낭파야를 방문하였다. 약 600년 정도 된 사찰이라고 한다. 이 사찰을 건립한 사람은 바로 근처에 있는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 사원을 건립한 니타이 ’Lithai’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세운 사찰과 아들이 세운 사찰이 지척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사찰에 가서 태국인들이 사찰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자세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법당에 앉았있는 스님과 잠깐 인사를 하였다. 이 사찰의 창문이 금으로 그려진 불화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언제 제작되었는지 궁금하였다. 왕 가족을 조각으로 만들어 모시는 사당도 이 사찰에 있었다.
태국 사람들의 사찰에서 하는 일반적인 신앙행위
같은 불교인이지만 태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사찰에 가서 하는 신앙의 태도는 많이 달랐다. 한국인들은 법회가 있는 날이나 백중, 동지 등 특별한 기도기간에 주로 사찰을 찾는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법회를 하는 날 뿐만 아니라 자주 수시로 절을 찾는다. 거의 매일 같이 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절에 가서 하는 불공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왓 낭파야 사원에 모신 왕가 사당
초에 불을 붙여서 촛불을 켜는 곳에다 등 공양을 한다.
법당에 들어가서는 금 조각을 불상에 붙이는 공양을 한다.
꽃을 공양을 한다.
가사와 물건을 사서 스님께 보시한다. 보시를 받는 스님은
물을 뿌리면서 축원을 한다.
대체적으로 사찰에 가서 이렇게 하면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한다.
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사찰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형성된다. 갖가지 생활용품을 팔고, 복권도 판다. 사찰을 중심으로 태국인들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사찰은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다. 태국 사람들은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이 아주 체질화 되어 있다는 느낌이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스님들이 과연 이들을 선도할 수 있는 교육과 철학을 구비하고 있는지, 사회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지가 궁금하였다.

왓 낭파야 사원의 스님과 불화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 사원
왓낭파야를 나와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왓프라시랏따나마하탓’로 갔다. 이 두 사찰 사이에는 한국의 재래시장 같온 모습의 시장이 있었다. 즉 어머니가 건립한 사원을 나와 재래시장 같은 노점상들이 쭉 있는 곳을 따라 걸어서 5분 정도 가니 아들이 세운‘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가 나왔다. 이 사찰은 어머니가 건립한 ‘왓 낭파야’에 비해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Wat Phra Si Rattana Mahathat는 "Wat Yai"로 현지인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으며, 수코타이왕 Lithai [1]에 의해 1357 년에 설립되었다. 사원은 난’ Nan’ 강변의 나렌수안 다리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사원은 Phra Phuttha Chinnarat이라고 불리는 황금 불상과 위란 ’wihan’이라고 불리는 건물이 유명하다고 한다.
Phra Phuttha Chinnarat는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처상이라고 일부 태국인이 생각한다고 하는데 피사눌룩 주의 공식 상징이라고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 앞에서 헌금을 하고 절을 하였다. 사원의 큰 wihan에는 1756 년에 보로 마코토 왕이 기증 한 진주 모서리가 들어있는 커다란 입구
가 있다. 그 너머에는 크메르 스타일의 탑’ prang’이 있는데 그 안쪽에는 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는 부처의 유적을 모신다고 전해진다.

위란 모습
이 사원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젊은이 들도 또한 많았다. 경내는 마치 시장처럼 많은 노점상들이 좌판을 깔고 생활용품들을 팔고 샀다. 마치 시장 중간에 사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원에 들어서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특별한 복장을 한 사람이 몇 사람과 함께 들어온다. 가이더의 권유에 따라 이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사람은 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태국에서는 출가하면 그 사람 부모의 경제 사정에 따라 부모가 돈을 내서 큰 잔치를 하기도 하지만 돈이 없는 경우는 조용하게 잔치를 한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데 집안에 돈이 없는지 잔치는 못하고 이 사찰에 와서 불공을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어디를 가나 돈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출가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태국의 출가에 대해 조금 더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출가를 하려면 스님들로 구성된 위원회으로 승낙을 얻어야 한다. 그 후에는 한국불교식으로는 은사 스님, 태국어로는 나가(NaGa)라고 부르는 스님이 삭발을 해 준다. 이 의식을 Ordination Ceremony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는 행자 혹은 사미 수계식 정도 되는 것 같다.
법당안으로 들어가니까 유명한 불상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오랜동안 머무를 수가 없었다. 정면 불상 옆에는 스님이 앉아서 신도들을 위한 축원을 하고 있었다. 불상을 찾는 사람들은 불상에 헌금이나, 꽃 공양을 한다. 끝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옆의 스님에게 헌금을 하고 축원을 받기도 한다.

출가를 하는 사람과 기념촬영

왓 프라시랏따나마하탓 경내 모습

황금불상에서 불공을 하는 신도들

사원에서 초공양 하는 신도들
사원의 박물관’Chinnarat National Museum’은 사원 부지에 수코타이 (Sukhothai) 시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도자기 들도 있었고, 전문 학예사도 없었고, 박물관으로는 시설이 매우 소박했고, 소장품 규모가 매우 적었다.
인도,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불교사를 보면 왕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도에는 아소카 대왕과 더불어 카니슈카왕이 유명하다. 인도 쿠샨 왕조의 제3대 왕이다. 불교사에서는 그를 아소카 왕과 함께 불교의 대보호자로 불러왔다. 그의 재위 시에 제4회의 불전 결집이 행하여졌으며, 또 불교 시인 아슈 바고샤(馬鳴)나 나가르주나(龍樹)가 활약했다고 한다.
태국에도 여러 왕들이 불교 부흥과 사찰 건립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태국 왕실에서는 지금도 불교 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고, 태국 사찰에 가면 대부분 왕의 큰 사진을 사찰 맨앞에 걸어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