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西太后: 1835~1908)

서태후(西太后: 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이다. 함풍황제(咸豊皇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황제(同治皇帝: 1856~1875)의 생모로, 함풍황제가 병사한 후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치황제 재위 기간과 광서황제(光緖皇帝) 재위 초기, '백일유신' 진압 이후, 이 세 차례에 걸쳐 그녀는 수렴청정을 하였으니, 동치~광서 시기에는 그녀가 바로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48년간 집권을 하다가 74세 때 이질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보타욕<普陀?>)에 있다.
서태후는 원래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태후(太后)는 황제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대비'와 같은 개념인데,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태후를 칭할 때 그 앞에 성씨를 두어 "여태후(呂太后)"·"등태후(鄧太后)" 또는 "여후(呂后)"·"무후(武后)"라 칭했다.
그렇다면 서태후(西太后)는 혹 그녀의 성이 '서(西)'씨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함풍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구뤼씨(??祿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의귀비(懿貴妃)의 아들 재순(載淳)이 6세의 나이로 황제(동치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에 함풍황제의 황후를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 하고, 어린황제의 생모인 의귀비를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라 불렀다. 그 후에 다시 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명호에 따라 성모황태후를 자안태후(慈安太后)로, 모후황태후를 자희태후(慈禧太后)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자안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동쪽의 종수궁(鍾粹宮)이었고, 자희태후의 거처가 자금성 내 서쪽의 저수궁(儲秀宮)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자안태후를 동태후(東太后), 자희태후를 서태후(西太后)라 부르게 되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서태후는 바로 이 자희태후를 일컫는 말이며, 이 자희태후가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서태후는 만주족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녀의 출신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다. 최근 장치시(長治市) 지방지(地方志) 판공실(辦公室) 부주임이었던 유기(劉奇)는 서태후의 출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 연구논문에서 유기는 서태후를 한족 출신으로 산서성 장치현(長治縣: 지금의 장치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하였는데, 사학계에서는 그의 이러한 연구성과가 중국 역사연구에 있어서 "백년의 공백"을 메워주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근래 백여년간 중국 내외에서 서태후에 관한 저술과 영화 작품은 100여종 이상이나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 그녀의 출생과 유년시절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출생에서 입궁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유명한 청사(淸史) 연구가 유병곤(兪炳坤)은 <<자희가세고중(慈禧家世考中)>>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던 것이다.
"서태후의 가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줄곧 취약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기록된 사실(史實)이 너무 간략하여 공백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만큼 이설도 분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태후의 출생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그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명확한 해답이 없는 것 같다."
1989년 6월 장치시 교외(원래는 장치현) 하진촌(下秦村)에 사는 77세의 농민 조발왕(趙發旺)은 상진촌(上秦村)의 송쌍화(宋雙花), 송육칙(宋六則), 송덕문(宋德文), 송덕무(宋德武) 등과 함께 연명으로 쓴 서신을 가지고 장치시 지방지 판공실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조발왕은 서태후를 상진촌 사람이라 주장하면서, 자신은 서태후의 5대 외조카이고 송쌍화와 송육칙 등은 서태후의 5대 질손(侄孫)이라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유기는 서태후의 유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충분한 증빙자료의 도움으로 유기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1999년 4월 문화부 중국예술연구원에서 주관한 "공화국사회주의 문학예술 50년 세미나(共和國社會主義文學藝術五十年硏討會)"에서 유기가 편찬한 <<베일 벗은 자희의 유년시절(揭開慈禧童年之謎)>>이 일등을 차지하였다. 이 논문에서 유기는 서태후의 출신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유기의 고증에 의하면,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西坡村)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宋四元)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宋齡娥)'로 바꾸었고, 12세 때 다시 노안부(潞安府) 지부(知府) 혜징(惠徵)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으며, 1852년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어 입궁하였다는 것이다.
백여년 동안 장치현 서파촌(西坡村), 상진촌과 그 부근의 촌장들은 한결같이 서태후가 그 지역 사람이라고 말해 왔으며, 서면으로 자료를 작성하여 그러한 뜻을 주장한 사람만도 150여명이나 된다. 장치현에는 서태후의 출생지 유적과 생모의 무덤이 있다. 상진촌 관우 사당 뒤에는 '낭낭원(娘娘院)'이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서태후가 궁궐에 들어가 귀비가 된 후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 집을 '낭낭원'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낭낭(娘娘: 냥냥)'은 중국어로 '황후'나 '귀비'를 뜻하는 말이다. 장치시의 옛 노안부(潞安府) 관청 후원에는 '자희태후 서방원(慈禧太后書房院)'이 보존되어 있다.
서태후의 후손들은 5개의 관련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서파촌 왕배영(王培英) 집안의 족보에는 서태후의 아명과 함께 "왕소겸(王小謙)이 훗날 자희태후가 되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상진촌의 송육칙과 송덕문의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광서(光緖)~선통(宣統) 연간에 청나라 조정에서 제작한 황제와 황후의 종사보(宗祀譜: 조상의 제사를 기록한 책)가 있다. 또 송육칙의 집안에는 서태후가 그녀의 사촌 오빠 송희여(宋禧餘)에게 보낸 서신 조각과 인물 사진이 있다.(아래 사진 참고)
상진촌(上秦村) 송육칙(宋六則)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서태후가 그녀의 사촌 오빠 송희여(宋禧餘)에게 주었다는 인물 사진과 서신 조각
10년 동안 유기는 현지 조사를 하면서 많은 역사 문헌도 참고하였다. 서태후의 생활습관과 언행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그녀가 산서 장치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태후는 장치현 칠리파촌(七里坡村) 한인칙(韓印則)의 둘째 부인을 유모로, 장치현 소상촌(小常村) 진사해(陳四孩)를 황실 주방장으로 삼고, 장치현 사가장촌(史家莊村) 원전오(原殿奧)를 어전시위로 임명하여 그녀를 호위하게 하였다. 원전오는 어전시위를 역임하던 중 위법 행위를 하여 마땅히 처형되어야 했지만, 서태후는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사면하고, 나아가서는 그를 강서(江西)의 관리로 파견하였다. 서태후는 특히 장치현 출신의 관리와 장치현의 지방관 및 산서의 상인들에게 관대하였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하였을 때 8월 29일 서태후는 광서황제와 대동(大同)으로 피신하여 3일간 머물렀는데, 그 전란의 와중에서도 노안지부(潞安知府) 허함도(許涵度)를 접견하였다.
서태후는 장치인들이 즐겨 먹는 무, 경단, 호관초(壺關醋), 양원흑장(襄垣黑醬), 옥수수죽, 심주황소미(沁州黃小米) 등을 좋아하고, 장치인들이 즐겨 피우는 수연(水煙)과 상당방자(上黨邦子: 산서성 동남부 지역에서 유행하는 지방극)를 좋아하였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하였는데 대부분 산서민가(山西民歌)였다. 한 번은 함풍황제가 서태후에게 "어찌하여 산서 등지의 민가는 잘하면서도 만주 노래는 못하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노안부(潞安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의 민가를 잘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만의 역사학자 고양(高陽)은 <<자희전전(慈禧前傳)>>에서 서태후를 일러 "한자만 알고 만주글자는 모른다."고 하였다. 서태후의 어전 상궁 유덕령(裕德齡)은 <<청궁십이년기(淸宮十二年記)>>에서, "나는 농촌생활을 좋아한다. 그것이 궁궐생활보다 훨씬 자유롭다."라고 한 서태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서태후는 자신의 전답과 장원(莊園)을 가지고 있었으며 4~5일에 한번 거기로 찾아갔다고 하였다.
"서태후가 산서의 한족"이라는 관점은 많은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아, <<명청사대태감총서(明淸四大太監叢書)·황비신변의 측근들(皇妃身邊的貼心人) - 안덕해(安德海)>>(북방문예출판사 1997년판)와 <<서풍수마(西風瘦馬) - 공친왕 혁흔전(共親王奕흔傳)>>(작가출판사 1998년판) 등의 저술에 수록되었다.
산서대학(山西大學) 교수 요전중(姚奠中)은 유기의 연구성과가 "일차적으로 서태후 유년기의 역사적 공백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논평하였으며, 중국사학회 부비서장 겸 중국인민대학(中國人民大學) 역사학과 주임을 역임한 왕여풍(王汝豊) 교수와 장혁비(張革非) 교수는 <<자희동년고(慈禧童年考)>>(유기 주편)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 글은 증거가 확실하며 결코 터무니 없는 억측이 아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서태후연구 중 취약했던 부분이 충분히 보충될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술 중에서 일부 지엽적인 부분을 부정하기는 쉽겠지만, 충분한 근거 자료가 없이 그 결론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중국인민대학의 한 근대사 교수는 서태후의 출생지에 대해서 이전에는 5개의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북경설(北京說)과 산서설(山西說)로 압축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