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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 샬롬! 가톨릭!]
[월요일 - 말씀 쏙쏙]
이번 주 휴가간 지디를 대신하여
한 주 동안 신디와 함께 한
행복을 여는 아침 !
잠시 후에도 토요일의 남자 봉부장님의
좋은 글귀와 소식들이 펼쳐지고요!
지디가 떠나도 우리 말씀 명의 김덕재신부님의
장침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었죠!!!!
물론 우리 가족들의 사진들도 함께 즐기셔야죠 !
본문과 사진은 페북에서, 사진만은 인스타에서!
[토요일 - 샬롬!가톨릭!]
반갑습니다. 김지현 아나운서 휴가로 제가 부장님과 처음으로 방송을 함께하게 되었는데요. ‘샬롬, 가톨릭’이 오늘로 38회째라고 하니, 열 달이 다 되었네요. 이제 부장님도 토요일의 남자로 자리매김하신 듯합니다.
▶ 네. 5년 전인 2013년 봄 ‘열린 세상 오늘’에서 ‘가톨릭 비추미’라는 코너로 첫 방송을 하던 날이 생생합니다. 그러고는 2013년 가을부터 2015년 가을까지 2년 동안 ‘행복을 여는 아침’에서 ‘똑똑 가톨릭’이란 월요일 코너로 청취자들과 만났는데, 지난 연말부터 ‘샬롬, 가톨릭’으로 토요일의 남자가 되어버렸네요. 평생 살 듯하면서도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한다는 신부님들처럼, 대림 개편 때가 되면 늘 떠날 준비를 합니다. 지디가 8시의 남자라면 신디는 11시의 남자인데, 저는 11시가 근무 시간이라 영화 음악을 듣지는 못합니다.
‘11시가 좋다’도 애청자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데, 부장님도 가을바람처럼 기분 좋은 방송으로 오래도록 사랑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고맙습니다. 저는 늘 아침을 안 먹고 출근하는데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11시가 참 좋습니다. 사장님 몰래 ‘11시가 좋다’를 챙겨 듣는다는 애청자도 있던데, 저도 살짝 한번 들어보면서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아! 제 방송을 미리 들어보셨군요. 어떤 추억들이 떠오르셨나요?
▶ 신의석 아나운서는 보조개가 인상적이던데요. 제가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전남대 간호대 여학생들과 함께 무등산의 결핵요양소로 봉사활동을 다녔습니다. 그때 만난 남도 사투리가 정겹고 보조개가 귀엽던 마리스텔라라는 동기 여학생이 떠올랐습니다.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라는 이용악 시인의 ‘전라도 가시내’라는 시구가 떠오르는 그런 친구였죠. 졸업하고 보건소로 발령을 받았다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합니다.
40여 년 전일 텐데, 그 당시에도 신학교에 외부 여학생들과 함께하는 서클이 있었군요. 학창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집니다.
▶ 11시, 11이란 숫자처럼 무등산 정상에 우뚝 솟은 주상절리, 입석대와 서석대도 그립습니다. 음악은 문외한이지만, 영화 ‘건축한 개론’의 OST인 ‘기억의 습작’이란 음악도 듣고 싶고 제주도도 가보고 싶네요. 국토의 최남단에서 언제나 맨 먼저 거센 바람을 맞는 섬, 제주도가 올해로 4.3 70주년을 맞았고, 그 섬에서 친구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는데요. 생각난 김에 서귀포에 있는 친구한테 태풍 피해는 없는지 전화라도 해보아야겠습니다.
여름내 더위를 몰아갈 태풍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뒤늦게 온 태풍 솔릭이 걱정한 만큼 큰 피해 없이 한반도를 지나갔는데요. 애써 키운 농작물 피해를 입으신 분들도 계실 텐데 낙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고 로마인들은 편지 첫머리에 썼다고 하죠. 친지들의 안부는 물론, 이웃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디는 외국 영화음악을 소개해서인지 영어 발음이 유창하던데요. 지리산 시인 이원규 씨가 쓴 ‘겁나게와 잉 사이’라는 사투리 시를 제가 유창하게는 아니라도 잠깐 읽어드리며 이재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겁나게와 잉 사이’라, 정겨운 남도 사투리군요. 시를 읽어 주시죠.
▶ 저는 경상도 사람이라 서투르지만 몇 줄만 골라서 읽어보겠습니다.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 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만 살짝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내 인생을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시인의 말한 대로 “내 인생 겁나게 좋았지라잉!” 하고 감사하며 생을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희망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도 될까요?
▶ 네. 교회의 영적 부패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달을 가리키는 때 묻은 손가락 말고 달을 보라고 하는 이들이 있던데요. 지난주 미국 펜실베니아주 사법 당국이 가톨릭교회의 성범죄자 보고서를 발표하여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도 회환과 슬픔, 그리고 부끄러움에 휩싸였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고개를 숙이시고 보속의 기도를 청했다는 소식이 이번 주 가톨릭평화신문 1면에도 실렸던데요. 외국의 경우를 보도하는 만큼 한국 교회가 자성할 궂은일도 용기 있게 보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 7월 보름이라 절집에서는 하안거가 끝나는 날인데요. 설정 스님이 물러나고 그야 말로 재설정을 해야 하는 불교의 곤혹스러운 사태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8월 26일자 이번 가톨릭교회 신문들이, 손삼석 주교님의 부산교구장 서리 임명을 머리기사로 뽑았던데요.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님께서 건강상 이유로 75세가 정년인 주교 은퇴 연령을 10년 앞당겨 사임을 하셨지요.
▶ 네. 11년간 교구장직을 맡아 애쓰신 황 주교님께서 잘 쉬시면서 몸과 맘의 활기찬 건강을 회복하시면 좋겠습니다. 황 주교님도 손 주교님도 광주 대건신학대학에서 잠시 함께했던 인연이 있어 감회가 남다른데요. 황철수 주교님이 안식년에 택시기사를 한 체험 기사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 경향잡지 인터뷰를 두어 번 한 적도 있어 더욱 뜻깊은데요. 우리는 정년퇴직이 만 60세인데 저도 2년이 남았습니다. 지난주던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도보순례를 하는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에게 “은퇴한 이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씀도 새겨보게 됩니다.
일자리를 아직 못 구했거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분들도 많은데요.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힘들어도 일하던 시절이 그립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 네. 신디나 저나 신의 직장이라 부르는 교회기관에서 일하지만 힘들게 느껴지는 때도 많죠. 함민복 시인의 ‘금란시장’이란 시에 보면, 오늘도 벗어나지 못하고 삶의 좌판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샐러리맨들의 처지를 이렇게 그리고 있더군요.
“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
꽁지를 천천히 들어봐//
꿈의 칠 할이 직장 꿈이라는/
샐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
부장님이 방송 때마다 관심을 해고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보이시던데요. 샐러리맨들은 누구나 11시가 아니라 “퇴근 시간이 좋아요.”라고 할 텐데, “꿈의 칠 할이 직장 꿈”이라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라 여기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보자고 권고하고 싶군요.
▶ 네. 혼자는 외롭고 함께하면 괴로워하는 게 요즘 사람들이라는데, 괴로워도 함께 부대끼며 꿈도 좀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영화음악으로 더 잘 알려진 영화 ‘미션’에서 주인공이 무거운 짐을 지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하안거 동안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을 하며 석 달을 용맹정진한 시골의 우리 옆집 비구니 수유 스님은 얼굴이 참 맑더군요. 종교인들이 힘들어도 먼저 앞장서 평협의 구호처럼 ‘답게 살면서’ 우리 사회를 밝고 맑게 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불교 경전 말씀이 있던데, 이번 주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나 태풍 솔릭이 뿌린 비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 네. 신디는 슬픈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윤보영 시인은 ‘슬픈 영화’란 시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는/ 그대를 만나다 깨는 꿈”이라고 한마디로 축약하던데요.
짧은 만남 끝에 긴 이별을 해야 하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한반도의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이 5만 7천 명이라고 하는데, 일 년에 한 번 100명씩 만난다 해도 570년이 걸리잖습니까. 가족이 서로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앞서 이루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주최로 국제학술회의인 ‘한반도 평화포럼’이 열리는데요. ‘인간의 존엄과 평화 한반도의 길’이란 아시아의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모인다고 하죠.
▶ 네. 오는 9월 1일 오전 9시에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회의에는 인도 뭄바이 대교구장 그리시아스 추기경과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장 타글레 추기경, 미얀마 교회 사상 첫 추기경에 임명된 양곤 대교구장 마웅 보 추기경 등 세 분이 발표를 한다고 하죠.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하는 좋은 자리가 될 듯합니다.
그저께가 더위가 한 풀 꺾인다는 처서였는데, 사색의 계절 가을에 좀 무거운 듯한 주제들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환절기라 그런지 여름내 연줄처럼 팽팽하게 더위를 견디던 분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데,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가을을 맞이하시면 좋겠습니다.
▶ 네. 100년 만의 더위를 견디시느라 다들 애쓰셨습니다. 신현림 시인은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라는 시에서 “세월은 구름처럼 단조롭고 졸립지요.”라며 이렇게 노래하던데요.
“어떤 친구는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백년이 지났단다/
기계의 나사가 빠지면 재빨리 갈아끼우듯/
세대교체는 간편했다.”
누군가는 세대차가 난다며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제 직장 동료는 16년 동안 키우던 반려견을 잃고, 수의를 지어 입히고 관에 넣어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어느 본당 신부님은 참 특이한 세례명도 있다며 위령 미사를 드렸는데, 누가 자기 애견 이름으로 위령 미사를 넣은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미사 예물을 돌려주었다고 하더군요. 세대교체, 달라진 세월을 실감합니다. 이 가을에는 말씀하신 대로 좀 무거운 주제도 외면하지 말고 깊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월요일 - 말씀 쏙쏙]
연중 제 20주간 매일 미사 말씀, 복음의 주제 및 흐름
이번주는 연중 제 20주간입니다. 우리는 연중 17주일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요한 복음 6장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번주와 다음주 주일로 이 요한 복음 6장의 말씀은 마무리 됩니다. 특히 이번주와 다음주 복음안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이에 따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로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이번주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중심이라면서 다음주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고백이 중심입니다. 저는 이번주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평일 복음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주일 복음을 보면 당신이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임을 명확하게 드러내십니다. 그전까지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명확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역할을 하실 것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이란 우리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유다인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기본적으로 지혜의 길을 걷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임을 인식하고 있고, 그 지혜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이 바로 참 생명안에 있는 것이고, 참 생명의 길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나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안에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 지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이 지상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천상의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어떤 장소적 개념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살기에 사랑과 기쁨이 넘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울하고 절망속에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지옥 같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평화, 기쁨이 넘치는 곳이 바로 천국이겠지요. 그러나 이 천국은 단순히 지상복락을 통해 오는 천국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썩어 없어질 것들로 진정한 행복을 주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행복을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과 소멸은 어떻게든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은 커다란 두려움속에서 자기 자신을 절망, 외로움, 고통의 호수에 던져 버리고 허무라고 하는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지상복락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상에서 큰 재물과 권력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 사라짐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허무와 공허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허무와 공허함을 가져다주기 보다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시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음미해 봐야 하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안에 머무른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계심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그분의 살과 피, 성체를 받아 모신다면 그분께서 우리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은 소유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우리와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신다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양육하시고 행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우리가 신뢰와 믿음안에서 단단한 신념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 신념의 삶이 바로 어떤 어려움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 우리 자신을 더욱더 성장시키는 가운데,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물리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신념의 삶의 첫 번째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이는 월요일 복음에서 나타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잘 되새겨봐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영원한 생명은 관계지 획득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재산을 팔아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당신을 따라와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이 부자 청년은 아직도 ‘나’라고 하는 껍질을 벗어던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고 싶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고, 나라는 존재에 아직도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라고 하는 껍질을 벗어나 이웃을 바라보게 만드시고, 나를 창조한 주님을 보게 만드십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첫 번째는 바로 ‘나’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공동체는 참으로 힘듭니다. 공동체 안에 여러 사람들은 나와 다르기에 그 사람들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연습을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 연습은 바로 수요일 복음에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처럼 판단이 아니라 자비를 연습해야 합니다. 포도밭 주인이 맨 나중에 온 사람과 온종일 고생한 이들을 판단해서 다르게 품삯을 주는게 아니라 모두 똑같이 품삯을 주고 있듯이 다른 이를 볼 때 판단이 먼저가 아니라 그에게 베풀 자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자비는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요일 복음에서 왕이 종을 시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자비의 잔치에 초대 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에 초대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듯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는 자비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비와 용서의 삶을 실천하다보면 내 옆에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 주는 이웃들과의 관계는 돈독해 질 것이고, 이웃과 함께 이룬 공동체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웃과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 이 지상에서의 여러 두려움을 없애줄 것이며 서로의 사랑과 용기속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안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번 한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음에 감사드리는 가운데, 자비와 사랑의 삶을 통해 이웃과 주님과 더욱 일치된 관계안에서 영적 생명력을 키우시는 한주가 되셨으면 합니다.
건강하고 기쁜 한주를 위해 내가 뽑은 이주의 한 줄 말씀은?
이번주 토요일 복음인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12)라는 말씀을 뽑고 싶습니다.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이 말이 오늘 한줄 말씀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누구나가 다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잘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입신양명이라는 고유의 문화안에서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쳐야 하는 성공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인정을 받지만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가 있지 않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지만, 잘난 체 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합니다.
이번주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다른 이들이 보지 않고 자신의 높이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이는 눈높이가 낮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입니다.
이번 한주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을 낮추는 삶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겸손의 덕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시는 한주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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