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 드려야 지요 / 김영교
대학동창 Reunion 행사는 다음 주다.
그 사이에 버클리에서 온 경연교수와 유봉희시인과의 해후를 위해 인사동 만남이 가능할것 같은 스케줄도 넣었다.
서울 방문이 가능 한 것은 큰 오라버니 상태가 심창치 않아서 더욱 서둘렀다.
양로병원에 97세의 시어머니를 두고 외며느리가 길 떠나는 게 그리 마음 편한 여행일수 만은 없었다. 남편 사무실 점심 해다 나르는 일도 거르게 되니 그렇고... 떠나기 전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빨래며 밥, 반찬 등 집 청소, 뒤뜰 정원 화초까지 신경 쓰고 준비하느라 탈진상태였다. ‘비행기 안에서 쉬리라’를 수없이 되 뇌이며.... 공항까지는 친구 내외가 나를 픽업해주었고 일하는 남편 시간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15일 출발, 16일 도착, 공중에 하루를 저당 잡혔다. 5월 대학 졸업 50주년 School Reunion 이 있다. 용자 나리는 먼저 출발, 민자와 나는 후진이었다. 이 나이에 설렘이 인다.
온 경년교수와 봉희시인과 합류 윤동주 문학 전야제에서 만날 기대가 크다. 서울은 살아서 숨 쉬는 아가미 같다. 젊음과 스마트 폰이 넘실대는 사람 바다이다.
호탤은 쾌적, 친구와 첫 밤을 지낸 식당에서 아침식사도 즐길 만 했다. 세 가지 죽이 입맛을 돋 구어 주었다. 다양한 과일도 좋았다.
첫날은 친구동생 승자 내외의 호의로 보바스 병원행이 가능했다. 서울역에서 하차. 인터넷으로 찾아낸 보바스 병원 가는 시외 버스는 5500번이었다. 지체함 없이 한시라도 빨리 오빠 곁에 가고 싶었다. 어머니를 병원에 두고 아, 나는 그가 숨쉬고 있는 서울에 왔다, 지체함 없이 단숨에 ...감격스럽다.
느긋한 시간에 나를 맡기고 기다림에 방치, 아무의 방해나 누구의 도움 없이 오빠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를 들뜨게 했다. 가족 모두 지쳐있는 복잡한 서울 한 복판에서 조용하게 흐르고 싶었다. 교통시설과 시외 경치는 좋았다. 하지만 1시간 반 걸리는 거리, 몇 번씩 갈아타는 길, 겨울이면 땅은 미끄럽고 추워 오죽이나 힘들면 올케는 보바스병원 같은 지붕 아래 헤리티지 콘도로 이사를 했을까 싶다.
산 중턱 언덕에 넓게 자리 잡은 병원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길, 산책삼아 운동 삼아 길 옆 옥수수 밭, 깻잎, 홍상추, 고추, 파 등등 채소밭이 잘 가꾸어져 있는 친환경 시골 풍광을 감상하며 무척 오랜만에 헐렁한 시간을 유영했다. 평화스러워보였다. 응시하는 나도 긴장이 느슨해지는 듯 기분이 느긋해 졌다. 도시의 일상에서는 감히 꿈도 못꾸는 여유를 병원 방문 거름냄새나는 시골길에서 즐겼다. 햇살도 좋다. 등지고 두 다리로 언덕을 오르니 호흡운동으로는 제격이었다, 그것도 잠간, 오빠생각이 마음 밑바닥을 시꺼먼 진흙탕으로 뒤덮고 있었다.
입구에서 손을 소독하고 면회 시간보다 일렀지만 먼 미국 누이 동생의 방문을 고려, 출입가능케 해 주었다. 체온이 있는 오빠는 분명 살아 있다. 나의 도착을 기다리고 계셨다. 나의 서울 입성은 축복이 었다. 야윈 오라버니는 사람의 몰꼴이 아니었지만 감사했다. 듀브의 내용물을 바꿔 끼는 동안 둘러본다. 고통의 긴 터널을 용케 건너고 있다. 사방이 유리,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창밖 숲이 아름답다. 숲속의 저 나무처럼 내 눈앞에 누워있는 울 오빠도 저토록 싱싱한 나무였는데 ....
손을 부비며 머리를 쓰담고 ‘오빠, 영교가 왔어요, 오빠, 제가 왔다니깐요, 눈 좀 떠 보세요’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속삭이다가 큰소리로 외치다가 붓기가 완연한 손등과 발을 주물르고 쓸어드렸다. 방문 온 동생도 못 알아보는 중환자실로 지남밤에 옮겨진 아버지 같은 큰 오라버니, 그 좋던 총기 어디다 두셨나요? 지금 고향의 강변을 연날리기 하며 달리세요? 초등학교 넓은 운동장을 오가며 잠자리 잡고 계실까, 아니면 남산 활터에서 과녁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계세요? 궁의를 입고 궁대를 두르신 노련한 궁사이신 오라버니 모습은 온데 간데 없구나!
가슴이 콱 메인다. 연결된 모든 줄과 줄, 바퀴를 거두고 한강이 180도로 보이는 서빙고동 처소로 다시 갈 수 있을까. 앞뒤 극상의 좋은 조망을 즐기며 늙어 송장이 나갈 때 까지 그 보금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 누누이 말씀했는데.. .아름다운 불빛, 그 한강의 달밤을 떠난지 3년, 콤파스 태풍은 이토록 큰 지각변동의 상흔을 남기고 있다. 처음은 강남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1년, 2년 넘게 이곳 보바스 병원 일반병실과 중환자실 오가며.... 지난 해 10월 국제 Pen 대회 참석차 서울에 왔을 때 우리는 즐겁게 필답으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 육필의 글들이 유언처럼 남아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는 오빠의 정이며 마지막 사랑의 흔적이 되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동생이다'를 여러번 반복해 강조하셨다. 조용히 말없이 이어폰으로 음악과 뉴스를 들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일, 감동의 좋은 추억들 이렇게 가슴을 끝없이 적신다.
후덕하고 화목하게 아래사람들을 챙기고 부어주던 너그러운 사랑, 어찌 잊으란 말입니까? 주위의 존경을 자연스레 받으신 분, 이제 서울에 와도 오빠 안계신 서울은 텅 빈 듯 허리부터 시립니다. 사람들과 차들로 홍수를 이루고 TV에서는 재미있는 연속극이 뜨는데... 공허, 텅 비었네요.
아무도 없는 듯 휑합니다. 칸쿤의 옥빛 바다 물빛이 일렁입니다. 함께 한 여행, 참으로 아름답고 좋았던 귀한 추억이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것으로 체워주신 오라버니, 가슴에 이는 황량한 바람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문학의 꿈을 심어준 큰 오라버니
본인 스스로가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늘 버팀목 처럼 막내 동생을 끔찍히도 사랑해주신 오라버니가 의식없이 고통중인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생사는 주님의 영역
고통도 슬픔도 없는 생명 다음의 영원한 세계
알면서도 왜 받아드리기 이렇게 힘이 드는지요?
수도 없는 줄과 튜브와 페치에 휘감겨 있는 지금, 사랑과 업적을 많이 남기신 훌륭한 한 인격이 저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인생이 생로병사 아닌가, 그런데 체감이 안됩니다.
빈 가슴에 슬픈 바람이 불어와 저를 현기증나게 합니다.
이 중환자 실에만 이달 20일이면 3개월, 대학 선배 올케는 마음을 정리,
집을 정리, 오빠를 보낼 준비가 되있는듯 보였어요. 그 외 아들은 원장은 라이프서포트를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네요. 환자진료 사이사이 빈번한 병문안, 그래도 사람을 살리고 더 고통을 줄이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족들의 헌신과 정성, 아들의 효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감동이고 감동이었습니다. 눈 뜨고 직면 하려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숨만 쉬고 있지, 체온만 있지, 부드러운 손의 촉감은 여전한데 오라버니는 지금 어디쯤 계시는 것일까요?
지상의 연을 더 이상 붙들지 않도록 하나님 품에 '보내드리기로' 마음을 준비하지요.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제가 이럴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발칙한 생각 아닙니까? 이러는 제 가슴, 천근만근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올케와 아들 내외, 손주 재호도 호정이도 오라버니 가족, 미국의 딸 윤경이 가족 모두가
다함없는 사랑으로 제 몫도 고이 넣어 기도로 보내드립니다.
안심하소서!
올케도 저도 남은자 대열에 끼여 잘 버텨보겠습니다. 시간에 넘기겠습니다.
‘때가 이르매...’ 그때를 받아드리겠습니다. 오빠, 많이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해요!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정하 시인이 이 순간의 저를 위해 쓴 시 같아
미어지는 가슴에 절절하게 담습니다.
-2013년 추석을 보내고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