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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5일은
10월 5일은 ‘세계 한인의 날’로 재외 동포를 위한 기념일이다. 내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에 도착한 것은 2005년 8월 14일이고 해외 동포를 위한 날을 제정한다는 기사를 접한 것은 그 이듬해였다. 그 당시에 우스갯소리로 “내가 한국을 떠나니까 내 조국 대한민국이 나를 위해 그런 기념일을 만들려고 하는구나.”라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세계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 이유가 ‘재외동포의 거주국 내 권익 신장과 역량을 강화하고 한민족으로서 정체성 및 자긍심을 고양하며, 동포 간 화합 및 모국과 동포 사회 간 호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다’라고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거창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재외 동포의 민족적 의의를 되새기는 행사를 외교부 주관으로 2007년부터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 각지에 사는 재외 교포들에게 10월 5일은 특별한 날이 되었는데도 정작 10월 5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어 ‘세계 한인의 날’이라는 것을 이곳에 사는 교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찌 되었든 10월 5일은 내겐 각별한 숫자이기도 하지만 특히 2019년 10월 5일은 더욱더 뚜렷하게 각인된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잊지 못할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날은 심장조차 맑고 투명한 액체를 뿜어내며 온몸을 전율이 동반한 샘솟는 눈물로 채워진 날이기도 했다. 동양 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들으며 사춘기의 밤을 지새웠던 1차 베이비부머인 내가 소위 MZ세대에게나 있을 법한 일을 겪은 날이다.
나는 1960년생으로 1970년대 내 또래의 청춘들은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꽃을 안기는 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을뿐더러 버스 정거장에서 “빵 먹으러 갈래요?”가 빡빡머리 중 고생이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게 말을 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미팅’이라는 합법화된 이름으로 과별 단체 미팅도 있고 주선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몇몇이 모여 미팅하기도 하지만, 대학생들도 교복 입은 중고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빵 대신 커피로 메뉴만 바뀌었을 뿐.
어설픈 풋사랑을 겪으며 성장한 탓인지 요즘 TV 드라마를 보다 보면 상황에 적응이 안 되어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드라마를 보는 묘미는 내가 여주인공으로 감정이입이 되어야 극적 상황에 몰두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먼발치에서 방관자가 되어 바라보기만 한다. 빵이나 커피 마시러 가자고 꼬시는 남학생을 향해 콧방귀를 끼며 건방을 은근히 내비치던 내 시절과 달리 요즘은 여성들도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술 한잔하자 하거나 밤늦은 시각에 바래다주는 남성을 향해 자기 집에서 라면 먹고 가라고 권유하니…. 겪어보지 못한 경험 부족은 대사마저 낯설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맛본 평범한 라면이 2022년을 사는 청춘 남녀들에겐 사랑을 대변하는 최고의 아이콘이 되어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내가 느낀 바로는 가볍게 “너를 좋아해”라는 말 대신이고, 좀 더 나아가면 ‘자고 가라’는 끈끈한 유혹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진보적인 사랑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엄청나게 달라진 풍조에 세대 차이뿐만 아니라 격세지감 역시 청춘 남녀의 사랑에서도 느낄 수밖에 없다.
“엄마, 나가자…응?”
입맛이 없다며 점심을 간단하게 먹은 아들은 오후 들어가며 내 방을 들락날락하더니 급기야 나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뭘 나가. 귀찮게. 그냥 집에서 만둣국이나 간단하게 끓여 먹자.” 아들에게 무언의 긍정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엄마, 나가자. 제발! 답답해서 바람도 쐬고 싶고,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들어오자. 응? 그러면 안 돼?” “토요일인데 우리 다운타운이라도 가자 응?”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랩을 하듯 속사포로 자기 말만 뱉어내던 아들은 내 눈길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진짜 나가기 싫은데… 입맛이 없다고 하니 모르는 체하기도 그렇고….’ 사람들은 내 외모를 보면 잘 돌아다닐 것 같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부터 나가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귀찮아하던 사람이라 늘 우리 집은 찾아온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꿀단지를 집에 숨겨 두었냐는 이야기를 노상 듣던 내가 하물며 저녁노을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 시각이 가까워지는데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차피 곧 어두워질 테니 대충 집에서 입던 옷에 후드 점퍼 하나 걸치고 아들 방으로 들어섰다. 그새 멀끔하게 수트까지 차려입고 머리도 손질하고 있는 아들내미는 “어? 엄마, 그렇게 입고 갈 거야?” 놀라서 묻는 아들의 음성을 자연스럽게 뒤통수가 받아준다. 멋지게 몸단장한 아들의 근사한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자동으로 돌아선 거다. 녀석의 복장을 보고 귀찮아도 점퍼 대신 나 또한 고급스러운 재질의 검정 수트로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까지 하고 집을 나섰다.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나가자는 아들의 성화에 집으로 돌아올 때 시월의 밤공기가 제법 찰 텐데… 하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긴 했지만, 이왕 나서게 된 이상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가며 아들의 리듬에 맞추기로 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무엇을 먼저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일단 무엇이 되었든 멍석이 깔리면 피하지 않고 성실하고 열심히 책임을 다하려는 성향을 지녔다. 그러니 엄마와의 외출을 적극 추진한 아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팔짱을 끼고 이야기 나누며 아들이 이끄는 대로 다운 타운의 그랜빌 역(Granville Station)에서 내렸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 입구에 도달하자 육중한 문을 열어 주는 아들 녀석. 주변을 살필 새 없이 따라간 터라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외관에 그저 평범한 서양 레스토랑인가 보다 하고 들어섰는데 안은 그렇지 않았다. ‘어?’ 엄청나게 높은 천장에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과 어우러져 고급스럽고 모던한 실내에 압도당했다. 무엇보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안내석에 있던 금발의 아가씨가 어찌나 예쁘고 상냥하든지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아들과 몇 마디 나눈 아가씨는 처음 마주할 때보다 더 환하고 밝은 미소를 내보이며 내 앞에서 걸어가다가 공손하게 좌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가다가 친절한 손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빨간 장미 다발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라운지가 내다보이는 커다란 유리 창가에 VIP라는 푯말이 적힌 테이블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Madam, Happy birthday to you!” 곁에 섰던 아가씨가 생일 축하 한다며 나를 안아 주고 뒤에 섰던 아들 녀석이 “엄마, 생일 축하해요!” 그러자 홀에 있던 손님들도 박수와 환호를 보내 주었다. 검정 보타이에 하얀 턱시도를 갖춰 입은 우리 테이블 전담 웨이터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도 처음과 똑같이 정리된 식탁과 좌석. 그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되레 민망하고 쑥스러웠는데 마치 할리우드의 잘나가는 연예인을 대하듯 공손한 말투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와 아들을 극진하게 대했다.
“엄마 생일 축하해. 사랑해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장미 다발을 내 품 안에 안겨주며 속삭이는 아들의 목소리가 짙은 장미 향에 섞이면서 더 이상 붉어지는 눈시울을 숨길 수가 없었다. 미소를 머금은 아들의 맑은 눈과 마주치자 아들은 팔을 뻗어 내 손을 꼭 쥐는 것이었다. 잡아끄는 아들의 두 손이 따뜻하고 매우 부드러웠다. “제임스 고마워.” 입 모양으로 전하는 고마움을 아들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를 준비하던 이야기를 아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한 음성으로 들려주었다. 고담 스테이크하우스(Gotham Steakhouse & Cocktail. Bar)와 아들의 회사가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이틀 전에 레스토랑에 전화해서 생일 꽃을 미리 맡기면 보관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꽃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다고 해서 아들은 회사 바로 아래 있는 꽃집에 열두 송이 붉은 장미를 주문했단다. 그런데 다음 날 점심시간에 꽃을 찾으러 가니 생각보다 적은 듯 해서 열두 송이를 더 추가해서 스물넷 송이 장미 다발을 들고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꽃을 맡기고 다시 전력 질주해서 회사로 갔지만, 시간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했다고…. “에궁 저런…” 추임새를 넣으며 귀를 기울이는 데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멋쩍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틀 동안 첩보 작전처럼 준비해 두고 엄마 생일을 잊은 것처럼 아침부터 입맛이 없다고 투정하고 연기하며 오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은 엄마였다고…. 아예 나갈 생각도 안 하고 계속 이것 먹을래 저것 먹을래 하니 초조했다고 한다. 애가 탔던 순간이 떠올라서인지 아들 녀석은 잠시 말을 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눈가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들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내밀었다. 답답하고 애가 탔을 그 마음이 촉촉해진 아들의 따뜻한 손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착한 아들이라며 회사 동료들의 칭찬과 응원을 받으며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던 과정을 실감 나게 듣다 보니 주문한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고소한 풍미의 스프와 우리나라 신선로가 연상되는 작은 용기 안에서 데워지는 새우가 부드럽고 향긋한 소스와 어우러져 맛이 정말 좋았다. 아들이 주문한 에피타이저는 독특한 그릇에 담겨 나왔는데 그 역시 무척 고급스럽고 맛 또한 일품이었다. 그런데 재료를 마트로 사러 갔나? 할 만큼 애피타이저가 더디게 나와서 샐러드는 가급적 천천히 먹었다. 메인 음식 또한 한참 뒤에나 맛볼 것 같기에….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드디어 아들에게 말로만 듣던 ‘행복한 송아지’ 스테이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아들은 예전에 영화 작업이 끝나고 동료들과 이곳에서 파티했는데 그때 먹은 스테이크가 얼마나 부드럽고 맛이 좋았던지 “행복하게 죽은 송아지”라고 맛을 전한 적이 있다. 아들의 이야기대로 스테이크 한 덩어리가 다른 곳의 세 배 크기에 내 손가락보다 더 두꺼웠다. 나는 아들과 달리 작은 크기의 스테이크와 랍스터를 주문했는데 행복한 송아지가 입 안에 머물기도 전해 정말 부드럽게 녹듯이 넘어갔다. 사실 나는 양념 갈비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스테이크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여태껏 먹던 스테이크 맛이 아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도 훌륭하고 굽기 또한 내가 원하는 대로였다.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비싼 값을 하는 맛이라고 아들에게 평하며 먹는 내내 “진짜 맛있다”를 쉬지 않고 이야기한 것 같다. 그때마다 아들은 “그렇지?”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에서 나오는 환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고기 한 덩어리에 아들의 사랑과 시간의 헌신이 고스란히 스며들었으니 어찌 맛이 없으랴!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고운 빛깔의 달콤한 칵테일 또한 부드럽게 넘어가는 고기 한 점과 입 안에서 어우러져 그야말로 맛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아들의 마음에 취했다. 긴 시간 동안 식사하며 아들의 영화 작업 이야기와 회사 동료들의 이야기 그리고 평소보다 우리들의 마음이 더 많이 담긴 이야기로 새로운 추억을 뜨개질하듯 엮어 나갔다. 엄마와 아들에서 동급생 친구로, 인생 선배로서 회사 동료가 되어 다각적인 시선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나누면 나눌수록 감사에 취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아들의 깜짝 이벤트는 내가 감사에 취하고 있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준비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여러 방면의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고 어두워지더니 “Happy Birthday”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호화스러운 데커레이션 디저트 접시에는 버스 데이 맘이라고 쓰여있었다.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주문과 함께 구웠다는 작은 케이크는 겉은 차갑고 속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계속 나오는 디저트 접시마다 생일 축하 데코레이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먹는 것이 아까울 만큼 예술적인 장식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정성 역시 느낄 수가 있었다. 연인도 아내도 아닌 엄마의 생일을 준비하는 아들의 마음을 주방에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그 시간 그 안에 있던 모든 분이 감동한 듯했다. 나의 의지에 제구실하지 못하던 눈물샘이 마침내 사그라뜨리지 못한 영글던 구슬을 밀어내었다. 요즘 젊은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생일 이벤트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해할 엄마를 생각하며 준비한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 안에서 흐르던 눈물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이었다. 이미 배는 포화 상태였지만 이 시간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을 아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즐거움으로 배를 채워 나갔다.
만 62년 전인 1960년 10월 5일은 음력으로 8월 15일이었고 대한민국의 명절인 추석이었다. 결혼하면 딸이 명절 때문에 생일 케이크도 먹지 못할까 싶어 일찌감치 양력 생일을 지내 주신 부모님 덕분에 추석과 상관없이 내 생일은 10월 5일이다. 쉰여덟 번의 생일을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보냈을 텐데도 뚜렷이 기억나는 생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함께했던 사람들조차 기억에서 사라졌을 만큼 추억으로 남은 생일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쉰아홉 번째의 생일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학과실험시험 때문에 밴쿠버에 올 수 없다는 형의 몫까지 행복한 마음으로 엄마의 생일을 준비했다는 작은 아들 덕분에 십계명을 되새겨 보는 계기도 되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이 나오는데 다섯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아들의 모습처럼 일찍 그것을 깨달았다면 부모님께 좀 더 큰 기쁨을 주는 좋은 딸이 되었을 텐데…. 다행히 내가 잘한 일은 예수님께 두 분을 인도하고 지금은 천국에 계시니 그것만큼 큰 효도가 어디 있으랴!
사람들은 가끔 함께 보낸 공간의 시간을 서로 다른 느낌 다른 감정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좋은 기억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더욱이 그것이 가까운 친지나 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복이 아닐까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기억 안에 담긴 마음이 서로 달랐다는 것에 뒤늦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두 아들들과 공유한 행복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많다. 아들이 꺼내든 행복한 기억 속엔 언제나 엄마가 있었고 그때마다 같은 마음으로 설렘 속에 행복했던 추억을 나눌 수 있으니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바람 하나가 비집고 들어온다.
2019년 10월 5일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아름다운 날 중의 하나로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부모님께서 주신 10월 5일 생일도 감사하지만, 2007년 5월 6일에 세례받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 그날이 이제는 진짜 생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 5월 6일이 되면서 열다섯 살이 되었고, 나의 또 다른 새로운 청춘이 이제 신나게 시작되고 있다.
-2022년 12월 27일 연말연시의 즐거움 속에 꺼내 든 진정한 생일을 기억하며…
*베이비부머 :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태어난 세대(1차)를 말한다.
*MZ세대: 2020년대 기준으로 30대에서 40대에 해당하는 밀레니엄세대(M세대)와 10대와 20대에 해당하는 Z세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대한민국의 신조어이다.
첫댓글 수필집에는 사진은 들어 가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