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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통증이 심해서 한동안 좀 쉴까 했더니 설날 연휴에 준,희 선배님께 설날 안부 인사를 드리니
"와룡지맥 언제 갈거냐"며 한마디 던지신다.
-아!~~ 빨리 해야죠
이렇게해서 시작하게된 와룡 지맥길이다.
이른 새벽에 대구에서 경남 고성까지 자가용으로 가서 고성 버스 터미널에서 한시간 가량 차에서 자다가 일어나
택시로 대곡산 아래 감티재까지 간다.
몇해전 통영지맥 할때 와룡지맥길 감티재에서 올랐던 낙남정맥 무량산(대곡산)
다시 올라야 하나 띵가 먹을까!이생각 저생각 하다가 낙남정맥길 분기봉에 안가면 손해 볼것같아 꾸역꾸역 오르막길을 오른다.
무량산(대곡산)
준희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올라왔던 감티재로 진행
낙남 두번. 통영지맥.와룡지맥 4번째 올라온 산
이제 그만오고 싶은데 올해 가을쯤 감홍시가 익을 무렵에 낙남정맥을 다시 할 생각이니 5번째 오르는 산으로...
와룡지맥:낙남정맥 무량산(대곡산)에서 분기되어 무이산-수태산-향로봉-봉암산-와룡산-각산-영복원으로 가는
도상거리 30,1키로 실거리 33키로의 산길이다.
무이산-향로봉-와룡산 조망이 아주 좋은곳
날짜 16년 2월 9일
산행시간:12시간 10분 뺑이침
감티재의 수원백공남찬효행기실비
자세한 내용은 시간도 없고 훗날 다시오면 한번 읽어 보기로 하고
감티재 우측 멀리 가야할 무이산
무단 횡단해서 오르면 시멘트 계단이 반긴다.
고성 예비군 훈련장 등로가 아주 넓직하니 좋구만
어딜가나 그렇듯 초반 등로가 좋으면 갈수록 개끗발인데...
222봉
이곳에서 우측 하얀 노끈 방향으로 진행
폐건물
인사 드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죽천 선배님 시그널이 바람에 날리고
죽천 선배님께서도 몇해전에 지맥 157개 다 마치시고 분맥길 진행 중이시다.
지나온 무량산(대곡산)
뽀족한 부분은 하늘로 오르는 거북이의 꿈이 담긴 거류산
가운데 멀리 희미한곳은 통영 지맥길의 벽방산
산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경남 고성의 수양산-구절산-거류산-벽방산 코스로 한번 가보신다면 후회는 없을듯한 코스이다.
자란만과 멀리 사량도
사량도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섬이며 누구나 한번쯤 가본 산일것이라 생각한다.
(사량도 옥녀봉) 지난사진
아득한 옛날 사량도에는 옥녀와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옥녀의 빼어난 미색에 아버지 스스로가 욕심을 품게 되었고 어느날 이성을 잃은 아버지가 딸에게 덤벼들자
옥녀는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소울음 소리를 내며 네발로 "저기 산봉우리로 기어 오르면
짐승으로 생각하고 몸을 허락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 봉우리로 먼저 올라갔다.
아버지는 그말을 듣고 소울음소리를 내며 먼저간 옥녀 따라서 산봉우리로 올랐고 그 모습을 내려다본 옥녀는
바다로 몸을 날려 죽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가운데 뽀족이는 좌이산
암릉과 조망이 아주 좋은곳이며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 8대 명산중 하나로 좌이산을 꼽아 불태웠다는 전설이 있는 기품과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다.
안가보신분들은 봄산행으로 가보시기 바라고
우측은 가야할 무이산과 수태산
가운데 멀리 향로봉
이화 공원묘지 임도길을 잠시 지나는데 까마귀 녀석들이 야단이다.
달막동산 정자있는곳에서 오르면 좋은길이 이어지고
405봉 (누군가 달구산이라 써놓았는데 맞는지 ...)
약사전에서 본 무이산과 문수암
약사전에 들어가 잠시 합장을 하고 물한병 받아 나온다.
약사전과 약사여래불께서 지붕 넘어로 고개를 내밀어
미소를 지어 주시고
일주문 앞에서 인증 담고
문수식당
오늘도 바빠서 식당쪽은 쳐다만 보고 진행
수태산과 무이산 갈림길에서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가 무이산으로 오른다.
무이산은 마루금에서 벗어나있어 왕복 1km 다녀와야 한다.
멀리 뽀족한 부분은 고성의 거류산이고
거류산 좌측은 구절산
거류산 우측은 통영지맥길의 벽방산이 나열된다.
무이산 정상의 산불 감시초소
날씨도 좋은데 6각통 안에 아저씨는 쳐다만 볼뿐
산객들에게는 관심이 없는듯 하다
자란만과 사량도 ..뽁족한 부분은 좌이산
청량산(무이산)
이곳은 신라 화랑들이 무예 수련을 했다는 곳이며
꽃다운 10대 청년 화랑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궁금하게 만드는데
화랑들은 어떻한 전시 상황속에서나 목숨을 내 놓았는지...
갑자기 영화 '황산벌"이 생각나서 화랑에 대한 부분만 적어 본다.
백제의 금강하구 기벌포로 쌀배달 가던 김유신 장군의 5만 군사와
황산벌에서 최후를 맞이하겠노라 처자식 모두 베고 나온 계백 장군과 5천결사대
신라군은 쌀배달 은 고사하고 4전 4패로 깨지니 그로인해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처자식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은 그의 부하들에게 죽더라도 열놈 죽이고 죽으라 하니 그마음이야 오죽할까
반면에 신라군은 이렇다할 사기 오를만한것도 없는터에
김흠순 장군이 어느 잔디밭에서 아들인 반굴을 앉혀놓고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죽을라 케도 약발이 안받는다 아이가..."
아버지 김흠순의 꼬득임 당해서 반굴은 얼굴에는 [겁대가리 상실표] 밀가루를 잔득 바르고,머리는 길게 풀어 헤치며
말을 몰아 계백진영 앞에 가서 큰소리로 소리 지른다.
"난 신라의 상대등겸 대장군이신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이며 김흠순 장군의 아들인 신라의 화랑 반굴 이데이~~
당장 계백이 나오라 케라"
백제군 거시기 하는말"아가 울지말고...
"궁금한점"...
"조카면 조카고 사위면 사위제 조카이자 사위는 어느나라 개족보 얘기여"
그리고는 창에 맞아 떨어진다.
반굴이 죽고 다음에 몇몇 화랑이 모두 비슷하게 밀가루 바르고 와서 한판 붙어 보자고 왔다가 모두 죽는다.
관창의 아버지 김품일 장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관창을 꼬득인다.
'니는 뜬데이 화랑하면 관창, 관창 하면 화랑"
관창은 계백의 진영으로 가서 설레발이 치다가 잡혀서 살아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 품일장군께 한소리 듣고" 내 가서 확 디지뿌만 되는 기제" 하고 창들고 나가서 죽는다.
실제로 황산벌 전투에서 반굴과 관창을 비롯한 꽃다운 화랑들이 100명 전사
영화속 황산벌 이야기는 재미있게 그려 졌지만 꽃다운 화랑들의 죽음은 강요에 의해서 아니면 임전무퇴 정신인지
요즘으로 치면 학도병쯤 되는 나이다.
참 가관이로고
청량산(무이산) 문수암
문수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걸인모습을 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게 이끌려 무이산을 오르다가
무이산의 절경에 감탄하여 이곳에 암자를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법당 뒤편의 작은 굴속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데
까막눈이라 아무리 봐도 어둡 컴컴한 굴속에 문수보살을 찾는다는건 해운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아
보살이고 지혜고 포기하고 돌아 나온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에 부처님 왼편에 계시며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문수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에 의하여 당나라로 부터 전래되어졌고
당에서 유학하던 자장 율사는 중국의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된다.
보살로부터 신라의 오대산(토함.팔공,계룡.지리.태백)에 1만의 문수보살이 거주하고 있다는 계시를 받고
귀국하게 되는 것이다.문수보살은 석가가 열반한 후 인도에서 태어나,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하는 반야(般若)의 도리를 널리 알렸다고 하며,
항상 반야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다.
반야경(般若經)을 결집·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으므로 때에 따라서는 경전(經典)을 손에 쥔 모습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문수암에서
법당뒤편 작은 동굴속에 문수보살이 계시다고 해서 눈이 빠져라 쳐다봤지만
동태눈 때문에 아무것도 못보고...
문수보살 이야기가 나왔으니
울산의 관문격이며 진산인 문수산의 문수보살에 관한 짧은 전설하나 올립니다.
문수산 아래 무거동 전설
신라의 김부대왕이 나라의 제사를 지내면서 꼭 문수보살을 청해서 제사를 주관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어 문수보살을 찾아 모셔오게 했는데 신하들이 흩어져 각지의 절을 다 뒤졌으나
절에 스님이 있는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울산지역을 뒤지던 신하들이 통도사를 거쳐 문수산 자락에 올라오다 보니 산중에 불빛이 비치는 곳이 있어
찾아갔더니 암자가 하나 있고 거기에 스님 한분이 계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스님은 문둥병자였다. 신하들이 모두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바로 돌아 나왔다.
신하들은 임금님께로 가서 스님이 계시는 절은 한곳도 없고, 오직 한분 찾은 스님은 문둥병자였다는 사실을 전했다.
김부대왕은 스님없이 나라의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신하들에게 다시 한번 찾아보고
정 몸이 성한 스님이 없으면 그 문둥병인 스님이라도 모셔오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다시 찾아보았으나 다른 스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절로 가서 문둥병자인 스님에게 서라벌로 갈 것을 청했
다. 스님은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서라벌로 가서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스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제물들을 일일이 만지니 임금님과 신하들은 두려움이 앞섰다.
제사를 마친 스님은 임금님과 신하들에게 그 음식을 음복할 것을 권했다. 임금님과 신하들은 더럽게 생각해서 그 음식
을 먹지 못하고 스님에게 모두 싸 가지고 가라고 했다.
스님이 떠나 갈 때에 임금님은 문둥병자 스님이 나라의 제사를 맡아 지냈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게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문둥병 스님을 불러
“스님께서 이번 나라의 제사에 참여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문밖을 나서던 스님이 문득 돌아서서 임금님을 향해 말하기를
“이번에 문수보살을 모셔다 나라의 제사를 재냈다는 말은 입밖에 내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했
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그 스님이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는 스님을 붙들기 위해서 바삐 뒤를 쫓았다. 그러나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스님은 끝내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울산까지 따라온 임금님이 삼호에 이르러 바라보니 앞서 가던 스님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문수보살
이 간곳이 없어졌다는 뜻에서 없을무((無)), 걸거(去)자 무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께서도 이곳에 오는동안 걸인 행세를 한 문수보살을 친견 하시고
울산의 문수산 아래 문수사에서는 문둥병 환자로 나타나시니
어딜가나 걸인을 보면 마음으로 대해야 복받을듯
사량도와 좌이산
무이산과 문수암 구경하고 다시 돌아나와 수태산으로 진행한다.
돌무더기가 있는걸 보니
무슨 용도인지...모르겠다.
수태산 정상
자란만과 멀리 통영 방향
뽀족한 부분은 가야할 향로봉
우측은 누운용이 있다는 와룡지맥의 맹주격인 와룡산
수태산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수태재 임도 30미터 정도 진행후 다음 산길로 오른다.
수태재
향로봉 방향
415봉
학동치
들머리를 못찾아 임도길로 200미터 정도 진행후 우측 산길로 오른다.
좌이산과 임도길
임도에서 오르면 만나는 이정표 향로봉 방향
눈오고 비가와서 나무 가지마다 얼음이 잔뜩붙어 얼음무게로 인해서 부러져 등로에 쌓여이다.
기어 가는게 절반이니 이래서야 오늘 해빠지기전에 마칠 수 있을지
날씨가 따뜻하니 평소보다 식수도 부족하고
양말 두짝에 얼음을 잔득 넣어서 녹으면 마시려고 담아간다.
향로봉 정자
향로봉 정자에서본 자란만과 아름다운 삼백리 한려수도
통영의 한산도에서 여수까지를 삼백리 한려수도 라고 부르는데 모두가 빼어난 조망을 자랑하는곳이다.
멀리 길게 펼쳐진곳은 사량도 우측의 작은 섬은 수우도
앞은 좌이산
멀리 보물섬이라 부르는 남해의 금산과 대기봉 가운데 망운산 우측 멀리 노량의 금오산
앞은 사천의 화력 발전소 바로 건너 창선도의 대봉산
남해섬 종주길
멀리 뽀족한 부분은 장군봉 바위가 보이는곳은 새섬봉 모두가 와룡산임
향로봉 인증 담고
양말속에 넣어둔 얼음이 많이 녹은듯
발목 통증이 심해서 나무 지팡이 하나들고 양말속에 얼음은 쉴때 발목 냉찜질도 하고
조금씩 마시기도 하고...
각얼음
눈과 비가 와서 나무마다 얼어붙은 얼음 무게로 가지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곳이라 진행이 힘들어 진다.
조망없는 534봉
조망없기는 여기도 마찮가지
맨발 선배님도 만나고
"띵가먹지 말자"
기어 가거나 타 넘거나
화성재 별로 볼것도 없고
등로에 잔나무 가지가 말썽이다.
여기도 볼것 없고
잡목 구간은 거의 끝나고
800 고지 와룡산을 올라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비운치
나중에 알았지만 도로 반대편 왼쪽으로 400미터 지점에 편의점이 있다는데 먹을복 없는놈 어딜가나 쫄쫄 굶기 딱 좋다.
알았다고 해도 왕복 800미터는 못갈듯...차라리 손가락 빨지
계양마을 도로 건너서 잠시 잡목속으로 진행한다.
비운치 도로건너 잠시 잡목 구간을 돌아다니다가 성산 배공 무덤부터는 등로가 좋아진다.
성산배씨 사당
당고개
당고개부터 와룡산 오름은 1시간 가량 이어지고
우측 멀리 지나온 향로봉
좌측 멀리 지나온 낙남정맥길의 대곡산
좌측 멀리 사량도 가운데 조그만 섬 수우도
멀리 욕지도와 두미도가 보인다.
수우도는 해벽할때 가본 섬이고
욕지도는 종주 코스 찾아서 두번 다녀온곳
질퍽이는 등로
자연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혹독한 겨울은 힘겨운듯
와룡산 정상으로 멋진 소나무가 많았는데 거의가 부러져 있다.
언제나 살겨운 바람만 이고지고 살다가
비오고 눈오고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음까지 이고지고 ...
그러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다.
너무 애처로워 얼음을 털어 내보려 했지만 이것도 자연을 이기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린다.
민재봉
양말 속에 넣어둔 얼음이 모두 녹아간다.
얼음이 녹아서 조금씩 빨아 먹어 보니 갈증해소에는 크게 도움 안되고 조금 텁텁함
얼음물 색갈 보고는 못먹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양말에서 피존향이 가득하니 물맛도 피존 행금물 향이난다.
가운데 멀리 지리산 천왕봉
우측으로 조금 높은 부분은 웅석봉이다.
가야할 능선과 우측으로 노량의 금오산이 보이고
새섬봉 넘어로 남해의 망운산이 고개를 내민다.
멀리 남해의 금산과 호구산 그리고 망운산 능선이 길게 자리하고
와룡산 장군봉에서 산줄기가 연결되어 보이는 부분 넘어로 창선도의 대방산 능선이 펼쳐진다.
가운데 저수지는 와룡 저수지 이며 저수지 넘어로 보이는작은 산은 용두산
누운용이 용두산에서 부터 시작해서 한바퀴 돌아가는 형상
사량도와 욕지도 두미도 수우도가 나열되고
앞은 와룡산 용의 등줄기에 기차바위
멀리 좌측부터 금산-호구산-망운산
아래 보이는 저수지는 와룡 저수지
저수지 아래 용두봉
지나온 민재봉
새섬봉
새섬봉
태고적에 와룡산이 물에 잠겨 있을때 꼭 새한마리가 앉을 수 있을 많큼 바위가 드러난 곳이 있었는데 그바위가 바로
새섬바위다.
인증 담고
멀리 남해섬의 산줄기가 멋지게 조망된다.
남해종주 63km 안해 보신분들 꼭 한번 가보시고
아름다운 섬 창선도 종주 아주 좋음
창선도 종주길
전국 최고의 고사리 주산지인 창선도
좌측 멀리 남해 섬의 망운산이고 바다 가운데는 노량
그리고 우측 노량의 금오산이 지척이다.
노량은 아순신 장군께서 임란- 정유재란 지겨운 7년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곳
임란은 섬나라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 하겠노라 다부진 생각으로 바다건너 조선에 와서
"야!~먹을것도 없는 너그 나라에는 관심없고 명나라 치러 가는데 길 좀 비켜도"라고 하자
조선에서는 "택도 없는 소리말라"! 임진왜란 전쟁이 일어난다.
일본이 명으로 가는길에 무엇보다 중요한건 군사를 먹일 쌀인데 막상 조선에 상륙하고 보니
조선이란 나라는 찟어지도록 가난하다. 쌀한톨 약탈할 수 없을 지경인데다 선조 임금을 잡아야 뭐 어찌 해 볼텐데
충주의 탄금대를 넘어서자 선조 임금은 "일단은 도망 가고 보자" 하면서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백성들은 임금이 하는 꼬라지가 드럽어 구중궁궐을 불태워 버린다.
선조 임금을 잡으로 올라 가려고 보니 임금은 메뚜가 날아다니듯 도망질이고 뒤에서는 남해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끊어 한양에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하게 되는데
"우리 집으로 갈테니 길 좀 비키도...애걸하니
" 뭐든지 니 맘대로 해라"노량에서 이순신 장군께 23전 전패의 종지부 찍듯 아작나고 만다.
멀리 노량 바다가 보이니 잠시나마 그날의 함성을 상상해 보고
누운 용(臥龍)의 등줄기를 닮은 암릉길
그림속에 보이는 저수지는 와룡 저수지이며 저수지 바로 앞의 작은 산이 용두봉(253m)이다.
용두봉이 용머리인 셈이고
누운용이 언젠가 꼬리를 치며 하늘로 승천을 하겠지만
지금은 용이 승천 하는것 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다.
16년 소망을 담아 모두에게 보내 드리고
도암재
지나온 와룡산 새섬봉 구간
도암재
상사바위
상사바위 천왕봉
상사바위는 부모님의 반대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 남녀가 함께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한곳이다.
오래전 전국의 바위를 모두 기어 오르겠노라 하며 찾은 곳이 이곳 와룡산 상사바위
와룡산 천왕봉
새섬바위-민재봉
용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산능선이다.
천왕봉에서 굵은 자일한번 잡고 대성초등학교 방향으로 내려오는길은 잡목이 심한편이다.
송전탑에서 우측으로 진행
해가 빠질 무렵이고 갈길은 멀고
대성 초등학교
앞은 가야할 각산
도로 건너기전 작은 슈퍼에 들어가 다음산길 등산로를 엿주어 보니 "등로고 뭐고 길도 없는데 밤중에 어딜가냐"며 집으로 가란다.
웃으며 "길이 없어도 가야한다"고
콜라. 아이스크림 두개, 라면 하나 사서 배낭에 넣고 나오니 벌써 어둡다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도로 건너서 없는 등로 찾아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잡목속으로 무작정 오르니 사천의 야경이 반긴다.
생라면 하나 뿌셔 뿌셔 스프넣고 흔들어 작은 바위 전망대에 올라 야경 구경하며 잠시 휴식
시간관계상 각산 왕복은 생략하고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등로가 좋아진다.
임도 건너 산길로
지맥길에 언제나 임도파 지만 모르는곳은 산길로 가는게 정신건강에 좋음
활공장을 지나고
여기서 잠시 누워 잤으면 좋겠구만
날머리 부분 지나온 봉화대 5,7km
이제 마지막이다. 시멘트 임도길로 잠시 내려오면 영복원 마을 가는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고
도로 건너 철조망 대문 안으로 진행한다.
마지막 이동 통신탑
이곳은 몇해전에 돼지 구제역으로 살아있는 수백마리의 돼지를 땅에 파묻은 곳이다.
땅속에서 올라온 파이프 두개와 구제역때 돼지 묻은 곳이라 써놓은 안내판이 섬짓하게 하지만
배낭에 든거라고는 콜라 반병 이거라도 돼지가 묻힌땅에 뿌리며"다음 세상에 태어 나거든 잔인한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말고
아름다운 꽃으로 태어나라"고 마음으로 빌어 주고 돌아 나온다.
영복원 간이 버스 정류장에서 사천 택시를 불러 놓고 기다린다.
오늘 하루동안 준희 선배님께서 카톡으로 와룡 지맥길 안내를 실시간으로 해주셨기에
고마운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전해 드리며 골빙 산행 다음산길은 금남정맥길의 백제 이야기를 담아 볼생각이다
와룡지맥길도 바다구경하며 걷는 길이라
조망은 좋을듯 합니다 설 연휴 발목도 안좋은데
거친산길 바쁜걸음 하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와룡지맥길을 가고자 한다면 인근의 산세 이름은 알고 가시면 좋습니다.
산정에서면 너무 답답하거든요
5월 대간 잘 부탁드립니다.
좌통영 우와룡
명품 조망길 인증합니다.
우리고장 낯익은 산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네요.
군데군데 다이야몬드 칼날같은 얼음길에 부러진 나무들이
귀찮게 굴었나보죠. 고생하셨습니다.
통영지맥 와룡지맥 연결하면 최상의 산행이 되겠죠
정맥길 안전 산행으로 이어 가시기 바라구요
따뜻한 목소리 언제나 좋습니다.
반굴이 어쩌구~~관창이 저쩌구~~
하다가....
아래로 다음 사진을 보니 머리 풀어 헤친 이 양반은 누구래유~~
산행기를 보면서 드럽다는 생각이 들긴 첨이유...
ㅎㅎㅎ 물 찾기 힘들죠
그래도 산은 언제나 두렵고 겁납니다.
피죤향이 나는 물은 다 드셨는지..
참 대단하신 분..
아픈 발목이끌고 강행하시고..
여름에 가면 좋을 듯 합니다.
수고 많으셧습니다.
피존향나는 물은 다 빨아서 먹고
다음부터는 성능 좋은 녀석 하나 구입해서 가지고 갈까 생각합니다.
산에서 살아남기 아마도 괜찮은 문제인것 같네요
다이나믹한 B.G.M과 함께 와룡지맥 완전정복 참고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발목 치료 잘 하셔서 멋진 산행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발목치료 잘해서 더 좋은 산행한번 하고 올께요
4월에 기분좋게 뵙겠습니다.
아프시면좀참을줄도알아야할듯합니다
그래야 오랫동안산행하시죠
양말속의얼음이찜질도되시고 식수도되시네요
이번에 해은사안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주 금남에서 잠시볼 수 있겠죠
부지런히 따라 가볼게요
발목이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워낙 고수이시니 잘 대처하시리라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산행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기적이죠!
늘 안전한 산행을 부탁드리며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발목 복숭아뼈가 부셔져 골빙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산행은 언제나 지천에 널려 있으니 가야겠죠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