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고집이 센 성(姓)씨 하면 대부분 안(安), 강(姜), 최(崔)를 언급하곤 한다.
거기에 황소고집 황(黃)씨도 있지요.
그들은 얼마나 고집이 셌는지? 오늘은 그 고집의 유래를 알아봅니다.
1.첫째,
안(安)씨가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는 조선 태종 때 단종을 끝까지 추종하다 학살되고 최고의 명문가에서 천민으로 전락되었던 순흥 안(安)씨 집안의 멸문지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낙인이 찍혀 크게 활약한 인물이 없었지만, 안중근의사를 포함해 독립운동을 하신 훌륭한 분 중에 안씨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잘못된 것을 잡으려는 안씨의 고집에 독립운동에서도 발현된 것이리라.
2.둘째,
강(姜)씨가 고집이 세다는 유래는 고려 말 충신 강회중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여러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물리치고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에서 그의 마음과 기개가 사람들에게 강씨 고집 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3.셋째,
최(崔)씨 고집은 고려말 충신 최영 장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영 장군은 조선건국에 끝까지 반대하다 죽어가면서
"내가 역적이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무성 하겠지만, 내가 옳다면 나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아 후일 지독한 사람을 빗대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회자되었던 것 같다.
이들 ‘안(安), 강(姜), 최(崔)’와 고집에서 밀리지 않는 성이 또 있다.
4. 바로 황소 고집이라고 알려진 황(黃)씨 고집이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 불리는지 황(黃)씨 고집의 내력을 살펴보자.
조선영조 때 집암 황순승(執庵 黃順承1652 -1718)선생으로 인해 황고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첫번째 이야기
어느날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세웠는데 다리 위를 덮은 흙에 하얀 석회가루가 섞어져 있어 인부를 불러
어디 흙이냐고 물었더니
“오래된 무덤 부근에서 흙을 가져왔다”고 하자
남의 무덤의 흙을 밟고 다니는 것은 예(禮)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평생 그 다리위로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두번째 이야기
어느날 그가 한양에 다니러 갔다가 일을보고 평양으로 되돌아 가려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나 다른 친구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데, 지금 의관(衣冠) 그대로 바로 조문을 하는 것은 ‘죽은 벗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1주일이나 걸리는 평양으로 다시 가서 의복을 정제한 후 다시 조문을 갔다고 한다.
세번째 이야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좋은 논을 조상 제사에 쓸 쌀을 생산하는 용도로만 정해 놓고 그 논에는 절대 퇴비를 쓰지 않고 쌀 뜨물로만 거름을 주며 정결하게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보니 하인이 그 논에서 방귀를 뀌는 것을 보고 그 논에 물을 빼고 새물을 대기를 3년을 하고서야
새로 농사를 지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네번째 이야기
어느 날은 당숙과 함께
성묘를 갔는데 그가 묘가 있는 산까지 얼추 20리(8k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걸어 가길래
당숙이
“왜 그러느냐?”라고 묻자
“조상의 묘가 있는 산이 보이는데 어찌 말을 타고 가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황씨 고집이라고
불릴만 하지요.
고집이란 억지를 부리는
‘무데뽀’가 아니라.
남들이 다 가더라도 바르지 않은 길을 가지 않으며,
예에 어긋나지 않은게 진정한 고집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정말이지 이게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개판인 듯 싶은데, 오늘은 그냥 웃자고 고집에 대해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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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사이의 만남!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메아리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에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 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싯귀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만난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들꽃과 마주 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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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사랑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마음 씀이
바로 사랑입니다.
낯선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
사랑입니다.
낯선 이웃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것
이것도 사랑입니다.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를 쓰는 것
이것도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일상적인
실천들이 모두 친절이고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친절이고 사랑입니다.
마음만 열려 있으면
우리는 늘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그런 씨앗을 내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이렇게 단절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보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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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시들고 쭈그러듭니다. 내 글만 읽고 나를 직접 보러 온 사람들이 가끔 깜짝 놀랍니다.
법정 스님하면 잘생기고 싱싱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별 볼 것 없고 바짝 마르고 쭈글쭈글하니 실망의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때마다
속으로 나는 미안해한다.
모든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들고 쭈그러든다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늘 새차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다보면 고장도나고
쥐어박아서 찌그러지기도 한다.
육신을 오십 년, 육십 년 끌고 다니다 보면 폐차 직전에 도달한다.
거죽은 언제가는 허물어진다.
생로병사하고 생주이멸(生住異蔑)한다.
그러나 보라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 나이가 있는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이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맑고 작은 것으로 살아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다보니
무뎌져서 작고 적은 것에
고마워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된다.
모자랄까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 법정.
🥦
건강해야 꿈도 있고, 사랑도 있고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도 있습니다.
🧿 하루하루가 온통 감사입니다.
🤍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사랑합니다.
❤️ 건강하세요.
💜 행복하세요.
🖤 덕분입니다.
💜삶은 소풍(逍風)이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
장자 사상의 중요한 특징(特徵)은
人生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의 그 자체로서 중(重)히 여기고 감사(感謝)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目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手段)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消耗的)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우리에게 人生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한 사람이다.
우리는 '일' 하러 世上에 온 것도 아니고, 成功하려고 世上에 온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副次的)이고 수단적(手段的)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生)에 무엇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하늘로 부터
'삶'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우주에는 아직 삶을 선물 받지 못한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대기조'들이 우주의 커다란 다락방에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膳物) 받아 이렇게 지구에 와 있지 않은가!
삶을 '수단(手段)'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
이 '삶'이라는 여행(旅行)은 무슨 목적지(目的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이 여행(旅行) 자체를 즐겨라.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遼遊)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 말 씀 ☆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시편 16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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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영문주소를 터치해서 영상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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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댓글 아싸 난 고집없음. 열린 사고^^
좋겠어~난 있는데~~ㅋ
ㅋ 울집 그녀 안강최 황씨도 아닌데
내가 본 최고의 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