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2-08 네 눈 속에 있는 들보가 있거든
마태복음 7장 1절-5절
어제 밤에 SBS-TV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탄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지난 해 년 말에 있었던 희한한 내용을 방송하였습니다.
사건은 미국에 살고 있는 홍전도사라는 분이 “하나님께서 12월 14일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불바다가 되니 피신하라.” 하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이 SNS를 타고 전 세계의 한국인들에게 퍼졌고 급기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전쟁을 피해서 미국으로, 남태평양의 피지로, 태국으로 피신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이 동조하여 더 큰 파장이 일었던 것입니다.
홍전도사라는 분은 천국을 수 천 번 오갔다고 하면서 자신은 수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수시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전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고 그렇게 행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 말대로 천국은 우리 마음대로 수 천 번씩 오갈 수 있는 곳일까요? 그리고 만일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더구나 사역자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도 우리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인 조국을 버리고 피신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일까요? 이런 신앙이 바른 신앙인지 비판이 아니라 판단을 해 봐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비판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비판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가리거나 밝힘’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판은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을 말씀합니다. 새 번역 성경을 보면 비판을 ‘심판(judge)'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일을 자기 나름대로 평가해서 심판까지 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해 형제를 서슴지 않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십일조 드리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십일조 드리지 않는 사람을 마구 공격했습니다.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시비걸기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고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신앙인으로써 경건하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결코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비판 받는 것은 모두가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말씀의 뉘앙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비판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지 않습니까?
이미 천국에 계신 저희 아버님께서 2003년도에 북경 찬양의 교회 창립예배에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창립예배를 아주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은혜롭던 기분이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수요예배가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버님께서 저를 나무라신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수요예배가 없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몇 가지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결국 저는 화가 나서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히 옳은 말씀이었지만 “교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너 목사 맞아?”라는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니 분위기가 엉망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지간에 얼굴을 붉히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렇게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온 식구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너를 아직도 아들로만 보고 목사로는 보지 못했구나!”라고 하시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해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마 목사만큼 비판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은 비판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내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비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아주 간단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렇다면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실제로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남을 비판 한 대로 내가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비판 한 것보다 더한 비판으로 내가 비판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비판 받지 않으시려거든 비판하지 마십시오.
사실 비판하는 사람은 엄청난 자기모순에 빠져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겠느냐?”
유대의 랍비들이 사용하는 격언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뜻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사람의 눈 속에는 들보가 있고, 비판 받는 사람의 눈 속에는 티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거대한 들보로 가려진 눈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낼 수 있겠습니까? 들보에 가려서 티끌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눈의 들보부터 빼내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정확하게 빼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런 뜻도 들어있습니다. 자기 눈에 있는 거대한 들보가 들어있는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남에 눈에 있는 티끌을 빼 준다고 난리를 치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비교 불가한 것들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들보가 눈에 있는 사람이 비판하는 사람이요, 눈 속에 티끌이 있는 사람은 비난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둘 중 누가 더 나쁘냐? 는 것은 들보와 티끌의 차이처럼 비난 하는 사람이 비난 받는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하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기모순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보고 “외식하는 자”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가 되기 싫으십니까? 거울을 보십시오. 내 현재의 외적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십시오. 내 영적인 상태를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더럽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잘못 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남의 잘못을 찾아 그를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그 나쁜 습성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잘못 되었다면 마땅히 잘못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잣대로 심판하여 정죄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남을 비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상대방과 나를 동일 시 하시기” 바랍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티끌을 빼리라.”
이 말씀을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사랑스런 금자씨”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적당할 것입니다. 비판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나는 너보다 낫고, 나는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교만입니다. 상대방과 나를 동일 시 하지 않으므로 교만해지고 비판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대도 조세형이 예수를 믿고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여러 교회와 성도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어떤 집에 가서 다시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무나 실망하여 “그러면 그렇지 도둑놈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라고 그에게 마구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전도했던 박효진 장로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고 난 후부터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와 나쁜 습관들을 한 번도 저지르고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 역시 예수 믿기 전에 행했던 나쁜 죄를 다시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면 이번에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려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줄을 서있는 군중들 틈에 들어가셔서 세례 요한 앞에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피조물에 불과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겸손하게 인간과 자신을 동일 시 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남을 정죄하므로 내가 거룩해지거나, 신앙심이 돈독해 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내가 비판 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한 비판만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뿐입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 시 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들도 형제들의 안타까운 모습과 상황을 보게 된다면 비판하기보다 형제의 안타까운 모습과 상황을 내 모습과 상황으로 동일 시 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 칭찬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반드시 사랑을 담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정말 삼중고의 장애를 입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를 가르치려고 왔던 선생들은 짐승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다 고개를 흔들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집에 도착하던 날, 그 외로운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 후 설리번 선생은 온갖 노력을 다 한 끝에 헬렌 켈러에게 수화와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침내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대답했습니다. “사랑은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껴안아 주신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이 꼭 껴안아 주던 그날부터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며 짐승같이 울부짖던 헬렌 켈러의 마음은 사랑으로 녹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상대하기 꺼려했던 짐승같이 울부짖는 헬렌 켈러를 설리번 선생은 어떻게 껴안아 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설리번 선생도 이전에는 정신병자였으며, 심각한 망막 질환으로 실명까지 갈 정도로 큰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었으나 개안 수술을 받고 비로소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런 고통을 겪었기에 불행에 빠져 있는 헬렌 켈러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안아 줄 수 있었습니다. “물”이라는 단어 한마디를 하는데 무려 7년이나 걸린 그녀를 영어는 물론 라틴어, 히랍어, 불어를 통달하도록 가르치고,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를 졸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헬렌 켈러를 살려 낸 것입니다. 그리고 설리번 선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사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승부를 하세요.” 그녀가 남긴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바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마음에 담고 하는 말입니다. 지식이 결코 인간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한 사람의 사랑이라도 그 사랑은 놀라운 능력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사랑의 감동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말인가”를 생각해 보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6절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거룩한 것’을 ‘목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 또한 너희 손가락에 끼고 있는 진주를 빼어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개가 목걸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돼지가 진주 반지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려고 무엇인가를 던지는 줄 생각할 뿐입니다. 오히려 반사적으로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옳고 좋은 말도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에게 목걸이를 던져 주고, 돼지에게 진주 반지를 던져 주는 것처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해서 해 준 말을 가지고 오해하고 달려 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귀한 것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는 개와 돼지처럼 “너나 잘하세요.” 하면서 물어뜯고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신앙인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가 복음 12장 11절부터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 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을 하려거든 먼저 기도하므로 꼭 해야 할 말인가를 생각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내가 해야 할 말인가” 생각해 보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식은 세상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늘 영적으로 분별력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던지 가려서 할 줄 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할 말인지, 구태여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인지를 잘 분별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때와 장소는 물론 상대를 전혀 가리지 않습니다. 교만입니다. 내 주제를 아는 사람은 진정으로 나를 부인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사고를 할 때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Positive mental)를 가진 사람과 비판적인 사고(Negative mental)를 가진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고,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비판 적인 사고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향을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그릇이 마음에 형성되고, 비판 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비판적인 그릇을 마음에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 그 그릇이 결정되면 결코 그 그릇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그릇을 가지고 일평생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가 사고하는 그릇대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정신과 같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용서의 정신으로 사는 자는 용서로 대하시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네가 사용하는 그릇 그대로 나도 너를 대하겠다.”는 말씀이니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비판, 이것은 결코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마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 2만 5천내지 3만 마디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말들이 하고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말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은 칼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 말에 맞아 죽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실지로 총이나 칼보다 말이 더 위력적이고, 그 능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상대방과 나를 동일 시 하십시다. 그러면 그와 내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거든 반드시 사랑의 말을 하십시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말하십시다. 그러면 소금 치듯 고르게 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해야 할 말인가? 깊이 생각하고 말하십시다. 그러면 결코 남을 쉽게 비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