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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에 간 부여 기마족, 그리고 백제
오늘부터 존 코벨의 '한국문화 탐구'를 주 1회 연재한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인 코벨은 당초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이후 일본문화의 원류인 한국문화에 주목, 약 8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문화에 관한 수많은 글을 썼다.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 업적은 일제시대 한국문화를 일본에 알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비견될 수 있으나 불행히도 그의 영문저작은 국내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침 코벨 박사의 한국 체류 당시 그와 교분이 있었던 언론인 김유경씨가 코벨 사후 그의 유고들을 한데 모아 편역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프레시안은 김유경씨의 번역으로 코벨 박사의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편집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와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5세기 일본 禪畵家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진주암에서 오랜동안 불교 선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주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다.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근원으로 인식하게 된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 1978-1986년 한국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여 한일 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대한 1천여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조선호텔 70년사’ ‘한국문화의 뿌리’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다.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해서도 16권의 저작이 있으며 ‘대덕사의 선(禪)’, ‘일본 선정원 연구’ ‘잇뀨(一休)선사 연구’ 등이 꼽힌다.
편역자의 말- 김유경(언론인. 전 경향신문 문화부장)
지난 수년간 존 코벨 박사와 그의 아들 알란 코벨 박사가 1978-1986년에 걸쳐 쓴 1천 수백편의 글중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해당하는 모든 원고를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영문 오리지널 원고의 일부는 1982년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문판 책으로 나왔으나 일본의 역사왜곡 등은 미처 책으로 엮어지지 않았고 부여족 이야기 전반, 법륭사부분도 책에 쓰여진 것보다 더 자세한 글이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이를 우리말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고미술에 관한 존 코벨 박사의 심미안이 발휘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은 1999년 우리말 책으로 편역해 냈다. 그는 실로 탁월한 한국문화의 해설자였으며 두 사람의 고미술연구는 한국과 일본간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존과 알란 두 코벨 박사는 일본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거짓말하여 소위 임나일본부설 등 진실을 속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두 사람은 1980년대부터 이를 학문적으로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을 말하며 ‘누군가 해야할 일’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제3국 학자의 이같은 성찰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위해, 그리고 학문적 진실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의 전체구성은 한림출판사 발행 책과는 별도의 것으로 부여족의 야마도 정벌, 부여기마족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제시함으로서 코벨의 부여족연구를 전체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문화부문에 가서는 무속신앙과 불교, 韓문화의 일본유입, 일본에 남은 백제를 대표하는 건축 법륭사 중에서 건축기법, 백제관음, 옥충주자(玉蟲廚子; 다마무시노 즈시), 금당, 몽전구세관음 등에 관한 것을 소개하겠다.
덧붙여 존과 알란 두 코벨 박사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1982년도의 글도 소개할까 한다. 이들은 그동안 영어와 일어로는 소개되면서도 막상 우리말로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다. 이 글을 통해 한국뿐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서론
부여 기마족의 자취
어느 나라나 그 역사초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지역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이민자들이 처음 미국땅에 발디딘 플리머스록, 제임스타운, 센트 오거스틴같은 곳이다. 일본의 경우도 역사의 시작 단계때 결정적인 곳인 이즈모신사, 이세신사, 그리고 이소노가미신사를 든다. 이곳은 관광용 장소가 아니라 일본 신또(神道)신앙으로 닦여진 일종의 성소같은 곳이다.
수백만 일본인들은 해마다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이세신사를 방문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 이상 메카를 성지순례차 오는 것과 같다. 이슬람교도들은 메카에 와서는 아라비아가 그옛날 받들던 카바신전의 검은 돌 주위를 여러번 맴돈다. 이세신궁에 온 일본인들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거울이 있는 목조건물을 가려논 두꺼운 장막앞에 대고 절한다. 아마데라스는 일본 고대역사서(712년과 720년편찬된)에 지금 천황가계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신이다.
이즈모신사는 이보다 방문객이 덜하다. 이즈모는 2000여년전 한국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식민구역으로 만들어 정착했던 곳이다. 이곳 신사에 모신 바람의 신 스사노오노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라는 신이다.
세 번째는 이소노가미(石上)신사, 또는 ‘부여 바위신’의 신사이다. 이 곳은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아래 이룬 문화구역 아스카의 심장부 기차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언덕숲에 있다. 부여왕족혈통의 여걸 왕녀 神功이 이끈 일단의 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이곳 일본으로 건너와 선진문명과 기술을 전파한 것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이세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애국적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 보관돼 있다는 아마데라스의 거울은 오직 아마데라스의 후예, 왕위(천황)에 오른 지배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즈모신사가 이세신사보다 더 역사 깊은 곳으로, 석기시대에 이곳으로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이주해온 사람들은 주로 한국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소노가미는 일본 고대사에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세신사에 비하면 방문객은 많지 않다. 여기 보관돼 있는 칼은 스사노오노가 용의 머리를 베었다는 그 칼도 아니고 해의 여신이(아마데라스 오미가미) 진무에게 ‘일본땅을 정벌하라’며 내려주었다는 그 칼도 아니다. 그 것은 무속적인 형태의 칠지도라는 칼이다. 이 칠지도는 바로 실제적인 ‘일본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로서 여기에는 서기 369년에 해당하는 년대와 한문 금글자가 새겨져 있다.
369년에 왜(일본)에서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자는 없었으며 백제에서도 오직 최고의 지식인만이 그당시 극동의 유일한 기록문자이던 한문을 읽고 썼다. 칠지도는 神功(진고왕후)이라는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부여왕녀가 이끌었던 기마족 일단이 369년 한국에서 건너와 일본을 정벌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다.
이때의 외래 기마족들에 의한 왜 정벌을 감추어보려는 시도가 후일 8세기의 일본 역사에서 행해져 이들은 진고가 한국을 정벌한 여걸이라고 묘사했다. 너무나도 극적이고도 대담한 이 시도는 진고를 한국의 왕녀가 아닌 순수 일본인으로 설정하고 한국에서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180도 반전시켜 진고가 한국을 침입했다고 만들었다.
오늘날 일본인 중에는 이소노가미 신사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기묘한 형태의 칼 칠지도의 본질을 바로 알거나 부여족의 이야기를 들어 알거나 이 칼이 부여지배자들의 성물중의 성물로 성스러운 바위를 받드는 신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이세신사의 ‘고대 거울’이 실은 오래 전에 망실되었음을 들어본 적도 거의 없고 여기서 밝혀지는 사실은 상상조차도 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본인이 이 책 ‘한국이 일본문화에 준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1984, 한림출판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30년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할 때였다. 이후 일본 교토, 하와이, 그리고 최근 서울체재까지 40여 년 동안 자료가 모이고 사실이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1500년 이상 한국과 한국인이 일본과 그 문화에 끼친 엄청난 영향의 중요성을 밝힌 내용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우선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 및 북아시아에서 기마유목민족은 수없이 여러번 역사의 변환을 불러온 막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여러 부족이 함께 어울려 대집단을 형성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따라 좀더 살기 좋은 평원지대로 이주하고 때로는 중국과 인도의 부패왕조를 전복시키고 북극아래 시베리아지방부터 남으로 만주까지를 휩쓸었다. 요새를 불태우고 남녀포로와 약탈한 전리품들을 챙겨 떠났다. 인도의 힌두쿠시산맥도 중국의 만리장성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기마유목국가들은 역사상으로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후세까지 서구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카니슈카, 훈족의 아틸라, 징기스칸, 타머레인, 호랑이 바부르 등의 존재와 스키티아, 훈, 타타르, 투르크(돌궐), 몽골과 만주족들이 정복자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시아초원지대의 잔혹한 기마민족들은 중국과 인도, 유럽의 거주민들을 짓밟아 정복했다.
서력기원이 열릴 무렵 지금 한국(북위 38도선에 이르는 지정학 구역)이라 불리우는 나라의 남반부에는 농사와 수렵 어업 등으로 살아가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느슨한 연대를 맺고 있었고 이중에는 대마도해협을 건너 왜와의 해상교역에 나선 부족도 있었다. 이때까지도 강력한 왕국은 형성되지 않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지고 척박한 지역은 한반도에서 후일 삼국이라고 지칭하게된 부족들의 영역밖에 밀려나 있었다.
오늘날 한반도를 양분하는 선 이북에는 역시 알타이 계통어를 쓰는 기마종족들이 살면서 영토와 지배권을 두고 내부 분란과 함께 사나운 이웃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때 대동강유역에 낙랑이라 불리는 소규모 관리구역을 설정했다 한다(역자주; 이당시 코벨은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설을 접하지 못하고 대동강유역이라는 과거의 통설을 차용했다). 그들 사나운 기마족들은 두 번 휜 활을 무기로 다루며 기마전술에 능하고 용맹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기질로 미개한 문명을 모두 정복했다.
4세기에 고구려가 한의 낙랑을 정복함으로서 중국이 심었던 식민지는 사라졌다. 이때의 고구려는 역사가 기록하는대로 북부여족의 일파였다. 고구려는 한반도내 여러 기마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남진을 차단함으로서 지금은 동부여란 이름으로 알려진 일파를 동해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동부여는 한반도 남쪽으로 계속 남하하여 원주부족들과 합류하고 이후 가야와 신라로 태어날 기반을 형성했다.
부여왕국은 옥황상제의 자손이 세운 국가라고 건국설화가 전한다. 부여의 통치자는 부족 전체의 행 불행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무속적 신앙의 지배자였다. 송화강과 압록강 사이 비옥한 만주벌판 초원지대에 자리잡은 북부여는 여러 차례 기마유목민족의 외침과 내부의 반란을 겪었다. 4세기 초에는 만주의 산림 속에서 쏟아져 들어온 선비족의 침입을 받았다. 중국 한나라도 어지러운 내정으로 인해 그들이 ‘선진화된 동이’로 인정하던 부여를 도울 힘이 없었다.
이로써 북부여가 망하자 주요인물을 포함한 난민들은 한반도로 남하해 들어왔다. 이들 방랑부여족(Volkerwanderungen) 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그로부터 4백년 후에나 쓰여진다; 이미 그들의 기마족 조상으로부터 멀어진 일본이라는 땅에 둥지를 튼 자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축적된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여기마족들은 그 시대에 신무기 철로 제작한 칼과 갑옷을 장착하고, 전쟁에 임하여는 무당의 긴 사설을 듣곤 했을 것이다. 그들 이야기는 ‘바바리안 코난’ 과 잘 들어맞는다. 보다 나은 땅을 찾던 군사강국의 부여족은 한반도에 삼국시대를 열고 이어서 일본 야마도 평원을 정복한 ‘바위의 후손들’(Children of the Rock)이었다
2.일본문화의 근원 부여, 가야 그리고 백제
1장 부여족과 말
1. 일본문화의 근원 부여, 가야 그리고 백제
오늘날 많은 나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상용업무가 아님에도 상당한 일정으로 한국 남부지역을 방문, 부산으로 입항해 경주를 방문하고 부여와 공주를 찾는다. 사실상 백제권의 박물관은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둘러보는 장소다. 이곳은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일본역사와 문화, 특히 6세기에서 7세기 문화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반도에 융성했던 국가들 중에 백제는 오늘날 상하이 부근의 불교국가 중국 양(梁)나라와 가까운 국교를 누렸는데 ‘가장 예술적이고 비전투적인’ 성향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백제와 양나라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불교를 숭상했다. 이 당시의 불교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문자와 의학지식(의료사업은 불교전도의 한부분이었다) 외에도 여러 가지 예술을 전파하는 도구역할을 했다. 조각과 회화, 기타 세세한 예술도 불교를 장엄하는 목적으로 발전되었고 불교 건축 또한 성행했다. 불교의 대 파트론들이 바로 귀족층이었으므로 궁궐은 절 건축을 본 딴 것이 되었다. 지배계층 귀족들은 호국불교로서 이 종교를 받아들였다.
일본 규슈 다케하라(竹原) 고분 벽화.
5세기경 항해해온 배에서 말을 부리는 사람이 있고 공중에는 또하나의 커다란 말(天馬)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에 들어온 부여족과 말을 그린 것이다. 동시에 天馬의 개념도 따라왔다. ⓒ프레시안
그러나 일본은 6세기 중엽까지도 불교를 접하지 못했다. 369년부터 505년에 이르기까지 왜일본은 한국혈통의 무속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철기사용과 군사 전략면에서 일본 원주민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었던 한반도 부여기마족들은 369년에서 370년에 걸쳐 왜국을 손쉽게 정벌하고 일본에 최초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 ‘신성한 왕권’을 누리게 되었다. 부여족들은 한반도의 가야와 외교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지켰는데 근본적으로 부여족이 일본내에 전파한 문화는 불교 이전의 무속문화권으로 말을 숭배하고 강력한 통솔력과 대형 봉분 매장제도를 지닌 것이었다.
1973년 나는 일본 나라(奈良)의 가장 오래된 마을을 찾아갔다.‘후루’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었다.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 한국어교수에 따르면 ‘후루’란 말은 ‘부루’ 또는 ‘부여’를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레저드교수는 부여족이 상당수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정확하게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 역시 오사까-나라일대에 산재한 떼 입힌 대형 고분들이야말로 일본의 정복자 부여족의 무덤이라고 믿는다. 이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고분은 닌또꾸천황(仁德王)능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한 겹의 해자만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지만 원래는 세 겹의 해자가 둘러쳐져 있었고 총길이는 무려 1천미터가량이다. 이 규모는 이집트 피라밋의 절반에 달한다.
일본왕의 한국 부여족 혈통을 보다 일본적인 화족 혈통으로 변조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720년 쓰여진 일본의 공식 역사서 일본서기에도 닌또꾸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기록자들은 그같은 변조를 뒷받침하기위해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하여 생긴 왕권교체기에 어떤 일본왕들은 몇백년씩을 살았다고 조작해놓고 있는 것이다. 8세기 일본사가들은 오진(應神)왕을 ‘神功황후가 한국을 정복한 뒤 12개월만에 출산한 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공이 한국을 정복했다’는 이 기록은 물론 완전히 뒤집혀져 날조된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로 부여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가 우선 규슈를 정복하고 연이어 서부 혼슈를 점령하여 지금의 오사까-나라일대 대평원에 수도를 건설했다. 부여족은 기마족으로서 매우 월등한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에 신속히 정벌을 이뤄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미개한 일본 원주민들은 쉽게 굴복했다. 부여 기마족은 505년에 이르러 내부분열로 부여족 왕권이 끊길 때까지 일본을 보다 조직적으로 통합되고 개선된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이끌었다. 부여족들은 무속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불교는 그때까지 전래되지 않았다.
이들 부여족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고구려에 인접한 한반도 북방계 부족으로 낙랑이 망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선비족에게 정복되었다. 부여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강까지 접했으며 부족 일부는 백제와 합쳐치고 일부는 가야를 거쳐 부산으로 이주, 정착했다.
일본이 ‘만세일계’ 혈통의 첫 왕으로 떠받드는 유명한 신무왕(神武王), 즉 진무덴노에게는 규슈에서 나라로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따른다. 이 사실은 바로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8세기 들어 기록에 나선 일본사가들에게 일본에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 시기의 역사란 매우 까마득한 것이었다. 이들은 신무왕의 거사를 서기전 660년의 일로 돌려놓았다. 어느 나라나 초기의 역사기록은 개국이 오랜 옛날 이루어졌음을 역설하고 있으며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규슈에는 한반도에서 해협을 건너 일본에 상륙한 부여족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전한다. 규슈는 그런대로 발굴이 가능했지만 일본 나라의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다. 만일 닌또꾸왕릉이 발굴됐을 때 가야양식의 금관이나 귀걸이가 나오든지 가야나 백제토기와 같은 유물이 나오면 일본왕실로서는 난처한 일이 될 것이다. 일본은 보다 자유로와져서 20세기 식민정책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중들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나와야 한다.
5세기 일본의 부여족들은 가야출신의 귀족가문과 혼사를 맺었다. 부여족 후손들은 신라가 가야를 합병한 562년까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지녔다. 7세기말 일본이 처음으로 실시한 호구조사에서 귀족층의 30%가 외국인 성을 지닌 사람이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 특히 660년 백제가 신라에 함락되자 유민이 되어 조국을 떠나온 부여족 후예들이었다. 백제 인구의 상당부분이, 그것도 지적으로 뛰어나고 유능한 전문가그룹이 조국을 떠나 동맹국 일본으로 피신해온 것이다. 한국으로부터의 이러한 다량의 두뇌유입은 7세기들어 불교국가를 표방한 일본이 불교예술과 건축기술 등 차후 자국문화를 일궈나가는 데 크나큰 힘이 되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 불교예술의 번영과 중앙집권제같은 정부구조법 등은 지속적으로 한반도로부터의 유입에 크게 의지한 것이었다. 한반도로부터의 이러한 유입은 서기전 330년 석기시대의 일본사회에 논농사법을 전파한 이래 시대가 지나면서 수많은 영향의 전래로 이어졌다. 이런 영향 가운데 가장 중대한 두 가지는 4세기 부여기마족에 의한 상당수의 지배층 유입과 대형 고분장제의 도입, 그리고 7세기 후반 수많은 백제 유민들의 일본사회 편입에 따른 영향이다.
규슈국립대학 다무라교수는 최근(1982년) 출판된 저서에서 8세기 이후 중국이 일본문화의 종주국으로 나서기 전까지 한국은 수백년 동안 일본문화의 모체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다무라교수는 이 책을 출판한 직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에서는 그런 사실이 듣기 싫은 것이었을 수 있다.
3.부여기마족과 고고학
2. 부여기마족과 고고학
고고학은 군국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위험천만한 학문이 아닐수 없다.
일본의 군부세력은 ‘신성한 천황’ 개념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토착 신또(神道)신앙’에 누구랄 것 없이 고개 숙여 절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위의 두 가지 사실 모두가 한국에서 유래된 것이란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서기전 660년 이래 ‘만세일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일왕혈통이 사실은 수차례 끊겼을 뿐 아니라 ‘신성한 천황’들이 무려 1백년 이상 완전한 한국인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갔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일본의 신또가 한국의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드물다. 한국무속은 일본에 가서 미화되고 천황숭배사상과 결합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유교적 지배계층과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비천한 것으로 격하돼 버렸다.
고분발굴과 연구가 자유롭게 허용된다면 고고학은 일본의 과거 천황의 존재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1920년대 초 일본 고고학자들은 경주 일대의 고분발굴에 나서서 여러 점의 아름다운 금관, 귀걸이, 허리띠 및 수많은 부장품들을 발굴했다. 이들은 또 규슈지방의 한 고분에서 말과 배 그림이 온통 뒤덮여 있는 벽화를 찾아냈다. 유물로는 금동관만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고학에서 밝혀진 것은 5-6세기 한국은 일본보다 월등하게 앞서있던 나라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고고학 발굴을 금기시 하게 되었다. 나라(奈良)평원 일본왕들 고분은 따라서 발굴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발굴결과 나오는 부장품들이 그러한 사실을 더욱 입증하는 것이 될까봐 취한 조치이다.
아직도 일왕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지만 정복자 부여기마족 1세인 오진(應神)왕이나 2세 닌또꾸(仁德) 왕능이 발굴된다면 가야타입의 금관이 나올 소지가 크다. 고고학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역사는 종종 지배자에게 야합하는 거짓말 기록을 남긴다. 반면에 고고학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유물만을 남기고 여기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일본 후기 고분시대(4세기 중엽부터 6세기까지)의 무장한 전사와 말 모습을 보여주는 하니와 흙인형. 부여족 2세인 닌도쿠(仁德)왕릉주변에는 이런 토용이 2만개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존코벨
그 실례를 들면 일본의 고대 역사서 고사기(古事記)는 서기 712년에,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됐다. 일본궁중의 사관들은 일찍이 부여기마족이 와서 통치한 1백30여년의 흔적을 묻어버리고 당시의 화족 지배자에게 혈통의 정당성을 꾸며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컬럼비아대학의 레저드(Ledyard) 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이며 이는 15대 오진왕(일명 호무다왕)대부터 26대 게이타이 왕대에 이르는 것이다.
부여족 출신 오진왕 이전의 일본은 느슨한 부족국가 사회로 그중 강력한 우두머리가 비옥한 논농사 터전인 야마도 혹은 나라평원 일대를 다스렸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된 개념의 ‘국가’는 미처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에 의해서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가? 이들 부여족은 말을 배에 싣고 해협을 건너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부여족들은 쉽사리 원주민들을 제압하며 규슈에서 나라평원으로 전진해 나갔다. 오진왕대의 부여족이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은 아니며 서기전 300년 경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일단에 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8세기초 일본의 어용사가들은 역사기록에 너무나 기묘한 수단을 꾸며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 사서는 반쯤은 신빙성이 없는 자료로 남았다. 사가들은 그들 자신이 ‘규슈로부터 나라평원으로 나아온 정벌자’ 로 호칭하는 진무천황의 역정을 서기전 600년에 일어났던 것으로 각색해 버렸다. 그 당시의 일본이라면 석기시대를 벗어나지도 못하다가 서기전 300년대에나 와서야 한국인들의 도래로 말미암아 논농사와 청동기 금속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국은 일본에 전파하기 4세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8세기의 일본사가들이 꾸며낸 또하나의 방편은 천황의 수명을 길게 조작한 나머지 완전한 허구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사가들로서 최대한 짚어낼 수 있었던 역사는 4세기 이후에 불과했다. 오진천황이 적어도 일본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서는 일본사가들도 한국왕녀임을 인정하는 그의 모친인 진구왕후가 일본의 천황남편 사후 유복자를 잉태한 것으로 했다. 역사서는 그녀가 오진의 출생을 늦추기 위해 무속적 방식으로 돌을 사용했음을 적고 있다. 한국인에 의한 일본정벌을 국속화시키기 위한 책략으로는 정벌의 본말을 통채로 뒤집어 마치 일본이 한국(가야 및 신라와 백제도 어느 만큼 포함시켜)을 정벌한 것처럼 역사에 기록해 버렸다. 그렇게 해놓음으로서 후일의 일본인들이 만족히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근세들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시절 일본으로서는 한국인의 피가 그들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일본문명이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해 발아되었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240년 처음으로 중국 사신이 왜국에 왔다. 이들은 처음에 규슈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일본 여타 지역에 관한 보고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중국역사 기록은 소규모의 부족장들이 가장 강력한 존재인 무당 히미꼬(비미호) 여왕과 더불어 나라지역의 비옥한 땅을 통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 당시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 규슈 및 서부 혼슈지방은 혈통으로나 언어간에 서로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이 또한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다).
서기 3세기의 일본사회는 석기시대를 막 벗어난 야요이(미생)시대로 불리는데 한반도로부터 철기와 청동기및 도자기의 물레사용법을 배워 익혔다. 육로 교통은 보잘 것 없었고 이들은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한반도의 김해는 이때 철광이 있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본으로 철을 선적해 보내는 요지였다.
이 당시 일본전역에 무속신앙이 팽배해서 수많은 신령들이 있었다. 무속무당인 지배자는 예언을 하여 부족을 통치했다. 강신을 받은 무당들은 종종 여자였다. 크고 작은 수로를 파다가 잘 안되면 산사람을 제물로 바쳤다.이 때 부여족 전사들이 어떻게 규슈로 향해 바다를 건너갔는가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안전한 항해를 기원해 바다의 용왕에게 바치는 상징적 예물이 뱃머리에 분명히 실려있었을 것이다. 나뭇잎을 여러장 꿰어서 평평하게 한 뒤 고사떡을 담아 띄워보냈다. 더 자상하게는 용왕님이 드실 젓가락도 함께 놓아 보냈을 것이다.
야요이 시대 일본에 온 한국인들은 ‘문화적 침입자’로 부를 수 있겠지만 369년 일본에 온 부여족들은 달랐다. 이들은 군대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구해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갈 필요가 있었다(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 배 한 척에 최대한 말 15마리와 기병-마부 15명, 수병 3명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식량과 마실 물을 선적할 공간이 따로 마련돼야 했다. 배는 20미터 이상 크지 않았으리라고 보이며 말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꽁꽁 묶인 채로 실렸다. 항해 중간기착지로 대마도에 들려 쉬었다가 다시 추스려 떠났을 것이다.
역사서에는 이때 바다에 폭풍이 일었는데 까마귀가 나타나 선두의 배를 본토로 인도해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있다. 진무천황의 두 형제는 이때 폭풍으로 죽었다. 규슈의 고분벽화에는 배 키에 새가 앉아있는 그림이 있다. 일본으로 간 부여족의 항해를 입증하는 기록이다.
4.부여족의 항해와 말 1; 기병 대 보병의 전투력비교
오늘날(1982년 현재) 한국은 일본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 세계 제일의 조선국으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서기 369년경에 있었던 한반도 최대의 선박건조에 대해서도 알아두자. 그때 한국에서 건조된 배는 대마도에 중간 기착했다가 규슈로 기항했다. 당시의 대담한 모험가들이었던 부여-가야인들은 이 배를 타고 가 후진국이던 왜일본 서부의 절반 이상을 정복하고 이후 1백년 넘어 일본왕의 자리를 대이어 갔다.
이 장정에 대해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은 모두 왜곡된 상태로 남아있지만 말에 대한 지식 및 사람과 동물의 체력조건 등을 감안해 따져볼 때 이들의 항해가 어떤 것이었을지 재구성해 볼 수 있다.
4세기 부여-가야족의 현해탄을 넘는 항해는 그보다 5백여년 후 바이킹들이 해낸 유명한 항해보다 훨씬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이킹들은 대담하고 강인한 뱃사람들이었지만 10세기 그들의 활동시기에도 말을 대동한 항해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부여족, 또는 모호한 명칭이긴 하나 이들을 지칭하는 바 ‘기마족’들은 서양에서 로마제국이 ‘야만인’들에 짓밟혀있을 무렵 약동의 아시아에서 그 기록적인 항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이 시절은 ‘힘이 정의’이던 때여서 잘 무장된 부여족 전사들은 쉽사리 일본 땅을 정복했다.
고대 전투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던가에 대해 충분한 고찰이 되어있지 못하다. 부여 기마민족의 장거 이후 1천년이 지나 스페인의 모험가 피사로가 2백여기가 채못되는 기병대를 이끌고 남미 페루의 전설적인 부를 탈취했다. 그 당시 남미에나 북미대륙엔 말이 없었기 때문에 페루나라가 황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간에 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또다른 스페인 모험가 코르테즈도 말 탄 기병대를 이용해 멕시코 전역을 정복했다. 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4세기 일본에는 약간의 말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 말은 몸집이 작고 닭과 같은 식용이었지 기마용은 아니었으며 기병대를 구성하는 전투용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배에다 무기로서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간 부여족의 모험은 ‘수륙양용의 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보다 1천6백년 앞서 감행된, 그것도 과학적 현대장비 없이 이뤄진 작전임을 생각하면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이제 부여기마족들이 어떻게 그 많은 말과 군사, 그 위에 무거운 쇠갑옷까지 배에 싣고 한일 사이의 해협을 건너갔는지 학구적인 추론을 해보자...
일본역사 기록엔 가을에 태풍이 인다고 했다. 그렇다. 병참상의 문제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말은 누구보다 고생이 심했다(1천년후 몽고족이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해 보라).
이 당시 부여족들의 말은 아마도 소아시아의 몸집 큰 말(페르가나에서 유래한 아랍종 같은)과 몽골말의 혼합종이었을 것이다. 몽골말은 만주의 눈 내린 산간지대나 고비사막, 툰드라의 계속된 영하의 날씨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 달려야 할 때는 그 속도가 떨어진다. 몽골말은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지만 모양이 볼품없고 질주하는 데 있어서는 여타 품종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반면 아라비아산 말(그 비슷한 말까지도)은 다리가 길고 민첩하며 영특하다. 단점은 몽골말에 비해 살가죽이 얇아 추운 날씨에 몽골말처럼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부여인들이 탔던 말은 혼합종(몽골말에 보다 가까웠을 것임)으로 현대적 기준에서 볼 때 비교적 큰 말에 속한 것임직하고 이 당시 군사들의 평균키는 164센티 정도였다.
기마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거리 및 장거리에서 얼마나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거기 더해 달리고 휘돌고 뛰어오르는 것을 지속적으로 버텨내야 하고 박차가 가해지는 상황에서는 전광석화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적군을 짓밟는 데도 말은 유용하게 쓰였다.
발 등자는 여기서 아주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것이다. 낙랑시대 그림이나 고고학적 유물에서 보는 것처럼 등자는 기병에게 보병을 압도할 엄청난 이점을 주는 것이었다. 말탄 기병이 창이나 단검으로 보병인 적을 향해 일격을 가할 때 등자는 지렛대 역할을 하여 힘을 가해주는 중요한 마구였다. 등자에 발을 버티고 섬으로써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의 몸무게가 창칼을 휘두르거나 찌르는 데 그대로 보태어지기 때문에 그의 타력은 맨땅에서 대항하는 보병이나 안장 등자없이 말 탄 경우보다 3배 이상 증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말은 무장한 기병에게 귀중한 기동성을 부여했다. 그렇다해도 4세기의 기병은 36kg은 나가는 쇠갑옷을 걸쳤던 듯하고 이 때문에 민첩성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말이나 기병 모두 그렇게까지 재빨리 움직이지는 못했고 또 쉽게 지쳤다. 병사들은 또 갑옷아래 맨살이 쓸리지 않도록 두껍게 누빈 속옷을 받쳐입었을 것이다(이 시대에 군인노릇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고학 유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의 기마병은 코 주변 얼굴을 보호하는 투구에다 중세유럽의 쇠사슬갑옷 비슷한 주름잡힌 갑옷을 입었을 것이다. 이들의 갑옷은 사슬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쇠편을 이어 붙인 것이었다. 말 갑옷 또한 안장 아래로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도록 장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서 말몸뚱이 어느 한 부분에 무게가 집중돼 살이 까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말다리 부분만큼은 헐렁하게 감싼 편이었다. 말이 급회전을 하거나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대방 적에 대해 보다 유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4세기 말갑옷은 무게가 45kg 가까이 나가는 것이었고 기병이 입는 갑옷 또한 적어도 그 절반은 나가는 것이었다. 기병의 갑옷은 특히 팔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나머지 부분은 코트처럼 허리아래까지 내려오도록 걸침으로써 화살이나 창칼, 기타 무기로부터 보호하였다. 다리 부분은 등자 위에 쉽게 버티고 일어설 수 있도록 헐겁게 감쌌다. 말에 올라탐으로써 기병이 취하게된 높이는 적의 머리와 어깨부분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해서 기병은 그가 본래 지닌 타력에 중력을 실어 힘을 배가시켰다.
반면에 보병은 기병을 위로 올려다보며 창을 겨누는 자세에서 그의 목과 팔 부위를 훤히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장한 기병은 상대적으로 몸을 드러내놓은 부위가 적었으며 압도적인 힘과 속력으로 인해 소수로도 대단위 보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여-가야족의 일본 정벌은 말이 해상에서 병날 위험을 감안하고라도 바다건너 일본으로 필요한 만큼의 말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오는 데 일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말을 실어왔던가?
5.부여족의 항해와 말 2; 어떻게 말을 실어갔나
고분 발굴 유물 중에는 4세기에서 6세기의 배 모양을 한 토기, 석기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모두 무속신앙 법에 따라 왕이 사후에도 생전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부장되었던 것들이다.
최근(1982년) 용인에 개관한 호암 박물관에는 배 모양의 가야토기가 있는데 크기는 30cm 가량으로 작은 편에 속한다. 한국 고분에서 나온 다른 몇 개도 역시 크기가 작다. 그러나 일본 미야자끼현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배는 그 길이가 101cm나 된다(현재 이바라기박물관 소장).
이 토기 배를 만든 사람은 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배가 말을 싣고 험한 파도를 넘어 수천리 바다를 건너온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으니 부여족의 항해는 이 배 모양 토기를 염두에 두고 상상을 발전시켜 나갈 방도밖에 없다.
일본 사서에는 4세기 정복자의 배가 폭풍을 만나 정복자의 두 동생이 물에 빠져 실종됐다고 기록돼 있다. 8세기에 와서 쓴 이야기에 이만큼 자세한 설명이 돼있는 것으로 보아 항해는 무척 험난했던 것 같다. 부여-가야족이 말을 대동해 대담한 일본상륙을 하기 이전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4세기에 이르기까지 6백여년에 걸쳐 한국에서 왜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음을 인정하자. 소수 집단을 이뤄 초기에 이주해온 한국인들은 일본땅에 마을이나 자치구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본 원주민들보다 앞선 양잠술이나 도자기 제조, 논농사로 생활을 일구어갔다. 그와 함께 자신들의 종교이던 무속 신들을 받들어 그들을 모신 사당도 지었다. 이즈모(出雲)신사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신사는 일본민족주의자들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 사당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세 갈래의 맥락으로 나타나 있는 당시 대규모의 ‘외적침입’에 대한 것이다. 세 갈래의 맥락이란 제1대 일본왕으로 알려진 진무(神武)왕, 해의 여신 아마데라쓰 오미가미(天照大神)의 용맹한 남동생 스사노우, 그리고 일본에서 신라 가야로 항해해 왔다고 일본내에 알려져있는 진구(神功)황후를 말한다. 진구황후의 항해 방향은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가야에서 일본땅으로 향했던 것이며 이 담대한 한국여성은 일본에서 왕의 가계를 장악해 일본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부여족 천황 오진(應神)왕과 닌또꾸(仁德)왕을 배출했다.
그렇다면 고대 한국인들은 어떤 구체적 방법을 동원해 배에다 말을 실어 일본땅까지 수송하고 그 지역을 정복, 일본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갑작스럽게 변화시켰던 것일까? 일본 고고학사에서는 부여족의 정벌 이후 일본에서 진행된 강력한 중앙집권의 한국왕조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거대한 봉분의 매장제도가 등장하고 말은 이들 고분의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4세기 부여족의 항해선단은 전투용 배와 식량과 물 등 보급품을 실은 병참 배 두 종류로 구분돼 있었을 것이다. 항해중의 말에게는 한 마리당 기병마부 한 사람이 배치돼 이 성질 사나운 짐승을 돌봤을 것이다. 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하게 묶어서 날뛰지 못하게 했다. 말 두어필 당 시중꾼 하나가 말오줌 똥을 치우는 것 같은 잡역을 떠맡았을 것이다. 배의 항해를 책임지고 때로 노를 젓는 일에는 배 한척 당 최소한 4사람의 인력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상륙시 기병들이 말을 부릴 때 이들을 엄호하기 위한 사수나 보병 4,5명이 더 있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101센티의 배는 부장품 용으로 축소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전투선은 적어도 20-25미터 길이에 폭 4미터 가량 했으리라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모든 부락마다 30미터쯤 길이의 배를 만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서기가 쓰여진 8세기 당시 상황에 맞춰진 것이지 4세기 때에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배가 그처럼 컸다면 한척 당 최대한 14마리에서 16마리의 말에다 교대로 잠자고 말을 살피고 뱃일도 이것저것 해야하는 기병마부까지 합해 승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급품으로는 배 한 척마다 승선한 사람 수에 맞춰 하루항해에 필요한 양으로 쌀 등의 곡식 2홉, 채소 5백그램, 물 5백그램 정도를 실어야 했을 것이다.은 하루에 2리터의 물을 마셔야 했다. 배에 타고 있는 동안 말의 먹이는 하루 1킬로그램 남짓한 곡물과 사람이 먹다 남긴 채소나 먹고 움직일 만큼의 무우따위가 필요했다. 말은 풀을 먹지 않으면 물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곡물만 먹게 되면 섬유질 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비상시 얼마동안은 말에게 곡물만 먹임으로써 배설물의 양을 줄일 수도 있다.
정복군에 앞서 척후대가 먼저 현지로 갔을 것이다. 또한 이미 왜 땅에 정착해 있던 한국인 마을이 교두보로 이용됐을 것이다. 서기 220-265년간의 중국사서 위지(魏志)와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일본에는 이때 1백여개의 부족국가들이 있었다. 즉 한반도에서 온 부여- 가야 기마족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지도자가 없이 소규모 부족사회가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온 기병 전사들이 진실로 우수한 집단이었다면 그들은 뱃머리를 상륙용으로 경사지게 설계했을 것이다. 과연 토기배에는 이런 흔적이 보인다.
배가 일단 해안에 닿으면 말들은 별 수없이 무장 안 된 상태로 물 속을 헤엄쳐 나와야 했을 것이다. 대마도는 중간 기착지로서 선단은 이곳에 들려 말을 운동시키고 쭈그리고 지내던 사람들도 몸을 풀 여유를 가졌다. 물론 물도 갈아넣고 식량도 보충했다.
상륙지에서 먼저 적의 저항이 없었다면 기병들은 맨 먼저 말을 끌어낸 뒤 말갑옷을 꺼내 말을 무장시킨 다음에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나서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해안에서 적의 저항을 받는 경우에는 말을 내려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인 말을 무장시킬 동안 배에 남은 군사들이 불을 먹인 화살을 쏘아 이들을 엄호했다.
해안에 발 디딘 기마병사들은 긴 줄을 이뤄 돌격하면서 변변찮은 무기를 들고 모여서서 대항하는 보병 원주민들을 대량 살상할 수 있었다. 말이 발목을 다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에 뱃전을 뛰어넘지 못하고 대신 뱃머리를 비탈지게 하여 내리거나 아니면 배 안에서부터 완전무장을 갖춘 채 기병이 타고 내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듦으로써 적을 심리적으로도 제압하는 효과를 냈다. 배의 앞머리가 경사진 상륙대 램프로 이루어진 배라면 기병은 이미 무장한 첫 말을 날쌔게 몰아나갔었다는 얘기가 된다. 앞말이 나가면 뒤에 내릴 말들도 속속 상륙준비를 갖추며 차례를 따랐다.
부여기마족들이 무장을 하고 말을 달려 질주해오는 광경은 일찍이 일본내에서 보도 듣도 못하던 일이었음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고대사에 있었던 전차부대 정도의 위력같다고나 할까...
말은 파도를 싫어하기 때문에 배안에서 파도에 시달리며 7-10일간 꼼짝못하고 쳐박혀있다 보면 뭍에 닿기를 고대하기 마련하다. ‘정복자’ 혹은 ‘신성한 천황’이 두 형제를 잃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수의 배와 말이 함께 망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얼마만한 규모의 기병들이 일본 본토공략을 담당했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노비들을 제외하고 한 1천여명 가량 될지 모른다. 노비는 부여족이 전장에서 사로잡은 사람들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원주민들은 이때 아직 청동기 초기와 철기시대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식 무기인 창 정도를 든 보병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말탄 부여족들은 이들 한가운데로 돌진해 적의 눈을 후벼내거나 목을 쳐서 정복을 실수 없이 이룩했다. 전쟁포로들은 보급품을 나르고 다음 전투준비에 동원됐다. 부여족은 전쟁포로를 ‘인간 이하의 노비’라는 뜻의 ‘하호(下戶)’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2차 세계대전중 그들의 전쟁포로를 역시 하호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6. 부여족과 말
인류역사상 인간의 말 지배는 불의 발명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는다. 특히 아시아 역사는 많은 부분이 말과 연관되어 있다. 4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복한 것도 일본에는 말이 없던 차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말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근대품종의 말을 수송해 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근대 들어서는 15세기에 와 스페인이 시도, 남미대륙을 휩쓰는 엄청난 파워를 과시했다.
피자로가 페루를 정복한 데는 불과 50마리의 말과 기병으로 족하였다. 코르테즈는 200명의 기병과 말로 멕시코를 제압했다. 이때 스페인 군사들이 미국대륙 원주민들이 써보지 못한 화약을 사용했던 것도 정복을 용이하게 한 요인이었음은 물론이다. 기마병의 존재는 화력을 쓰든 안 쓰든 간에 보병을 제압하는 위치에 있었다.
서기 369년 배를 타고 일본 규슈에 처음 상륙한 부여-가야 기마족들은 전투용 말을 어디서 획득했던 것일까? 규슈를 비롯해 일본 본토의 서부지역 절반(혼슈)에 해당하는 땅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양의 말을 어떻게 배에 싣고 건너올 수 있었을까? 지금 ‘한국 코리아’로 일컬어지는, 그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 기마족 한국인들은 도대체 누구였더란 말인가? ‘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훨씬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든가 ‘해뜨는 나라’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이들 땅에서 살던 이들은 누구였던가...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의 말.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부여-고구려족의 대담함이 느껴진다.
당시 기마족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옷들을 입었고 정복을 목표로 만들어 타고 간 배의 모양새와 사용한 무기 등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유물 다수를 통해볼 때 일본의 고고학은 여지없이 한국땅을 근원지로 가리키고 있고 ‘삼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한반도 거주자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69년 한반도 부산근처 김해에서 떠나온 사람들은 한국인 샤먼 신공왕후가 이끄는 무속의 특권적 소명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 여성에 대한 8세기 일본 역사서의 기록은 신과 소통할 능력이 있었으며 신들로부터 한국에서 ‘바다 건너 땅(일본을 말함)을 정복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부여족은 한반도 남단의 농부나 어부 원주민들에 비해 훨씬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이들 부여기마족들은 지상에서의 거주를 공들여 꾸미는 일보다는 말과 더불은 생활을 중히 여겼다. 말 위에 앉은 채로 먹고 마시는 생활이 가능했으며 말목에 엎디어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말 잔등에 올라 앉아서 쏘는 화살은 ‘싸우라, 이기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전투에서 위력을 발하는 무기였다.
신공왕후가 이끈 기마군사들이 도일에 사용한 배는 말이 쉽사리 상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일본고분 출토 도기에서 보이는 배 가운데 큰 것들은 2차세계대전때 상륙작전용으로 개발된 주정의 램프처럼 앞부분이 낮추어진 것들이다. 기병들은 여기에 실려온 말에 올라탄 채 유사시 파도 속으로도 뛰어내릴수 있었다. 말 탄 기마전사가 보병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여러 지역에서 지켜진 철칙이었다. 대륙에 보편화된 철기에 힘입어 369년 말과 함께 일본땅을 침입한 기마족들은 말을 탱크처럼 무장시킴으로써 일본땅의 비무장 보병들이 막아내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페루를 정복한 피자로의 50기병을 기억해보면 한반도의 기마족들이 처음 규슈를 정복하고 잇달아 오사까-나라를 점령하는 데 그다지 많지 않은 기병으로 충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신예 무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네발 달린 탱크’격인 말을 소유한 군사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 지역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언제 어디서나 최첨단의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자는 양적인 숫자에 상관없이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숱하게 되풀이해온 것이다.
이때 부여-가야인들이 실어간 말은 오늘날에 보는 몽고말에 가까운 땅딸막하고 몸통이 넓으며 참을성이 강한 말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당대 ‘기마족 침입자’의 우두머리들(일본의 왕이 된 사람들) 무덤을 지키는 수많은 말모양 토우 하니와를 보면 명확해 진다. 일본에서 출토된 관(冠) 중에는 이런 종류의 말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 지금의 도꾜 부근에서 출토된 이 관은 부여-가야기마족들이 행동반경과 힘을 어느 한도까지 행사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기전 1세기 중국의 한무제는 중국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싶어해 군사들을 페르가나(아프가니스탄의 옛이름, 박트리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大宛國으로 불렀다: 역자)로 파견, 오늘날의 아라비아말과 연관된 품종인 피빛땀을 내며 질주하는 기마를 확보토록 하였다.
한국사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경주고분을 통해 입증되었다. 또한 일본사를 바꿔놓았던 말의 중요성도 5세기 이후 일본고분의 부장품이 그 이전 초기 무덤의 부장품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그 이전 일본고분에는 한국 또는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거울을 부장품으로 묻었다.
그러다가 400년 이후 고분에서부터 갑작스럽게 마구들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말굴레, 손잡이 달린 금속제 칼등 일본고분에서 출토된 이런 유물은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대구 근교의 출토품들과 완전히 똑같다. 당시 일본에서 그같은 무덤을 마련할 수 있었던 지배계층은 단연코 새로운 철기술과 기병술을 도입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일본정착지 이즈모에 거주했던 신라 뱃사람들, 어부들은 서기 3세기까지 일본 북방 및 중앙 해안지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400년-500년에 걸치는 시기 일본왕(천황)이 된 기마족의 무덤에서 나오는 부장품은 대구에서 낙동강을 따라 부산까지 뻗쳤던 가야지역 출토품과 흡사한 게 많다.
미국내의 웬만한 박물관이나 파리의 박물관 일본실에는 몽고조랑말 형태를 한 하니와 토기가 반드시 진열돼 있다. 말재갈이며 고삐, 금속제 말방울, 높이 올린 말안장 같은 것들이 진흙으로 빚어져 붙어있는 이 하니와 말은 일본 고분출토품으로 일본학자들이 뽐내며 말하는 바 ‘결코 정복된 적 없는’(물론 1945년 이전에 한해) 이라는 자랑을 떠올리게 하지만 일본 초기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역사기록이 남기 시작한 시대 이후’로나 고쳐 써야 할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일찍이 일본을 정복한 것은 분명히 369년 금의 바다 김해를 떠나온 야심만만한 일단의 사나이들이었다.
최근(1982년) 뗏목으로 고대 한일간의 바닷길을 답사하려는 한국 대학생들은 뗏목이 아니라 일본 하니와 토기에 나와있는 모양의 배를 타고 나서는 게 정당하다. 여기에 옛 선조들처럼 말도 대동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입증해낼 수 있을 것이다.
7.페르가나의 말과 천마
한국의 고고학과 역사는 한반도에 일찍이 두 종류의 말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몽고말이 땅달막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주 155호 고분 천마도의 천마는 몽고말과는 달라보인다. 여기 그려진 말은 긴 다리에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고 내려온 목덜미, 쳐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솟구친 꼬리를 하고 있다. 천마도의 천마가 실제 말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이상적인 표현으로 미화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처럼 날렵한 말은 틀림없이 신라 샤먼왕의 것으로 한반도에서 그와 같은 말은 매우 귀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말이었다면 그 조상은 아라비아 종으로 13핸즈(역자 주; 땅바닥에서 말등까지 말의 키를 손바닥 옆폭으로 재는 단위)를 넘어선 16핸즈의 말이다. 그처럼 훌륭하고, 우아하고 힘차보이는 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4-5세기 한국의 샤먼왕들이 지녔던 천마의 근원이 어딘지는 불가사의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느 정도 이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천마’는 신라 금관의 무늬가 유래한 곳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5세기의 신라회화로 그 출토가 너무 극적이라 이름 또한 천마총으로 명명된 고분출토의 이 천마는 일찍이 중국의 한무제가 그처럼 우아하고 빨리 달리는 종의 말을 구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시점에서 5백년후에 그림으로 남은 것이다. 이 당시를 말해주는 한국의 고대역사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무제의 말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 있다.
서기전 138년 한무제는 서방의 흉노족을 정찰할 사자(使者) 장건을 서역으로 보냈다. 장건은 서역에서 흉노족의 포로가 되었다가 12년후에 돌아왔다. 그는 흉노와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놀라운 정보를 입수해 왔다. 그의 견문록 일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곳 페르가나(아프가니스탄) 오랑캐들은 포도를 재배해 먹으며 아주 뛰어난 말을 기른다. 피빛 땀을 흘리는 이들 한혈마(汗血馬)는 천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말들이다”
말 중의 말, 최고의 훌륭한 말로서 이미 천마가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도 이와 같은 것으로 칠 수 있다).
피같은 땀을 흘리는 페르가나의 뛰어난 말, 천마는 한무제의 정열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들 말을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군대를 풀어 흉노족을 몽고로 내몰고 감숙성 지역을 통과하는 길목을 차지, 서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니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실크로드이다.
피빛땀을 흘리는 페르가나의 한혈마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말은 피부 밑에 서식하는 균들이 있어 달리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마치 피를 뿌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더욱 빨리 치닫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국서 온 사자가 말 무게 만큼의 금을 주겠다는데도 페르가나의 통치자는 이 귀한 말을 팔지 않았다. 그러자 6만 한나라군은 페르가나의 식수원을 끊어놓는 데 성공, 갈증을 이기지 못한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피빛 땀을 흘리는 최고 우량 종마 30마리와 여타 말 3천필이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이것이 서기전 102년의 일이었다.
페르가나의 한혈마는 오늘날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한무제가 군사 5만명을 희생시켜가며 서역에서 얻어낸 말은 반 아라비아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말은 처음엔 진한 밤색이다가 점점 밝은색으로 착색되어 간다. 순백색의 아라비아말은 아주 드물지만 점박이나 얼룩말은 많다. 이들이 공중으로 차오르듯 질주하는 모습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장관이다. 보통 말들은 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지만 아라비아말은 하늘로 감아 올린다. 경주 천마총 천마의 말꼬리가 위로 솟구쳐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후 수세기를 지나면서 중국왕실의 말은 중국미술사에서 보는 것같은 개량종으로 바뀌어갔다. 땅딸막한 몽골말은 점차 이상적인 질주마의 형태로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부여-가야기마족들이 일본에 실어간 전투용 말은 그당시 한반도의 일상용이던 몽골말이었다. 부여족은 통치자용의 천마도 그 개념을 지니고 갔다. 땅을 밟을 필요가 없이 하늘을 나는 천마는 부여-가야족 통치자 오진, 후일 진무천황으로도 불리게 된 왕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무속의 ‘천마’와 ‘일본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자와의 묘한 결합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서기전 108년 한무제는 4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페르가나의 말이 이로 인해 곧바로 한나라에서 낙랑에 직수입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경주 155호 고분의 말은 오히려 다른 경로로 해서 들어왔다고 본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서기 49년 부여왕이 중국황제를 만났다. 부여족들은 당시 한쪽에선 선비(鮮卑)족에게, 다른 한쪽에선 고구려에게 협공을 받고 있었으므로 중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려했다. 부여의 지배층은 한나라 수도 낙양성에서 이 놀라운 말을 목격했을 것이다.
페르가나의 말은 시베리아 초원시대를 거쳐온 천마의 전설에 꼭 맞아떨어졌다. 3세기, 아니면 늦어도 4세기 후반 부여는 페르가나의 말 여러 필을 확보했으며 무속신앙의 부여왕이 천계를 나는 데 이 말이 쓰여졌다.
한나라가 망한 뒤 313년에는 한사군도 부여 군사들과의 접전에 시달리다가 망했다. 326년 선비족이 부여를 쳐들어오자 패망한 부여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와 이미 남하해 있던 낙랑일족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동상황은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부여족들은 페르가나 말과 함께 피신해 남하했음이 분명하다.
페르가나는 서기전 102년 함락되어 없어졌으나 그의 훌륭하고 힘차며 나는 듯 질주하는 천마는 중국에 남았다. 부여가 이들 말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남으로 이동할 때 당연히 이들을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이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으므로 오로지 왕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경주 155호 천마총의 천마는 상류계층의 말이 점진적인 우량종으로 개량되면서 형성된 진짜 말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369년 부여족들이 일본정벌을 위해 바다를 건너갈 때도 이 말을 가져갔으리라 생각된다.
20세기 히로히토 일본천황의 ‘성스런 백마’는 페르가나에서 피빛땀 내는 말을 쟁취했던 한무제로부터 재차 부여기마족의 일본정벌을 거쳐 전래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8.쓰루가의 한국인 자취, 신공황후와 '용감한 큰 곰'
지금 4천만 한국인 중 대부분은 쓰루가(敦賀)란 지명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1천5,6백년 전 한국땅에서 떠난 사람들은 일본 서부의 이곳 쓰루가에 배를 대고 왜에 들어와 정착했다. 일본인들도 이곳을 통해 한반도의 문명이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옛날 부산 김해항을 떠난 한국인들은 우선 북 규슈를 거친 뒤에 왜국 내지로 들어가 야마도 지방에 정착했다. 쓰루가는 위도상 부산의 동쪽에 마주한 항구다. 북대서양과 동해의 해류를 타고 한반도를 떠난 배는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조류를 타고 내려와 닿게 되는 곳이다. 이 일대에서는 일본 제일의 항구로 꼽힌다.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이고 바닥이 깊어 큰 배들이 입항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최초로 한국사(그리고 일본사를)를 쓴 그리피스는 1880년대에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이곳 쓰루가에 오게 되었다. 그리피스가 쓴 책의 앞부분에는 그가 어떻게 해서 바다 너머 들리는 명랑한 종소리를 알게 됐으며 그곳에 애초부터 있던 두 개의 무속사당이 신공왕후와 그의 휘하 장군 다케우치노 쓰고네를 받드는 신또신사로 바뀌었는지가 쓰여있다. 다케치우치노 쓰고네(武內宿)는 ‘용감한 큰 곰’(역자주; 고사기를 영역한 도널드 필립은 무내숙미를 용감한 늙은 곰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피스는 다께치우치로 썼다.)이란 의미로서 그의 이름에 내포된 고마, 혹은 곰이란 말은 그의 조상이 부여-고구려사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의 두 사람이 함께 사당에 봉안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내가 조사한 바 두 사람은 비밀의 연인관계로서 신공왕후는 왕족 여성이고 다케치우치는 전투 지휘관이었다.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일본의 15대 왕이자 부여기마족의 일본 통치 초대 임금인 오진천황이다. 369년 진고(신공)는 부여족뿐 아니라 백제 가야 신라의 모험적인 투사들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로 떠났다. 이들이 말을 대동해 떠난 전투 선단은 한반도 남쪽항구에서 출발했다. 일부는 후사를 위해 뒤에 남겨졌다.
쓰루가에는 이곳에 상륙한 잊지 못할 두 사람에 대한 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리피스가 말한 종은 물론 일본이 한반도에서 탈취해가서 일본 절이나 신사에 걸리게 된 10여개 한국 청동종 가운데 하나다.
4세기에 왜로 떠난 한인들은 농부가 아닌 상류계층의 인물들이었다. 쓰루가에는 지금도 농부와 그보다 앞서 이주해온 어민, 뱃사람간의 싸움을 되살린 신또무속 축제가 있다. 후꾸이현 쓰루가 시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열리는 행사인데 흡사 전투와도 같은 양상을 띄었다!
양측이 각기 받드는 신이 있다. 신또에서 유래한 신들로서 농부들의 다이고구 신은 농부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는데 잘 먹어서 뺨이 불룩한 얼굴에 양팔에는 쌀이 가득 든 가마니를 안고 있다. 에비쓰는 바다에 의지해 사는 어민, 뱃사람, 항구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바다에서 나는 산물, 큰 도미생선을 꿰어든 낚싯대를 높이 쳐든 모양이다.
오후가 되면 마을 젊은이들은 다이고구 혹은 에비쓰처럼 보이는 옷과 가면을 쓰고 나온다. 농부와 상인이 편을 가른다. 줄다리기를 할 굵은 동아줄이 미리 준비돼 있다. 청년들이 가면을 쓰고 쓰루가의 거리 곳곳을 행진하고 난 다음, 한바탕 ‘전투’ 같은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에비쓰편이 이기면 물고기가 잘 잡힐 것이라 하고, 다이고구가 이기면 농사가 풍년 들겠다고 한다. 오직 역사가들만이, 이들의 상징적 줄다리기 싸움에 감춰진 역사적 진실, 천오륙백년전이나 그보다 더 오래전 한반도를 떠나 왜국땅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온 일단의 개척자들이 그보다 앞서 살고있던 사람들과 벌였던 실전을 깨달을 뿐이다.
일본의 역사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해 두지 않았지만 일본땅에서 출토되는 토기유물엔 그 자취가 남아있다. 서기전 200년경부터 서기 250년 사이에 만들어진 야요이(彌生)토기를 보면 한반도에서 쓰던 물레와 회전판이 비로소 수입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부산근처 고분에서 출토되는 김해토기와 같은 경질토기의 제작기법도 들어왔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쓰에끼(須惠器)토기는 대구 고령일대에서 출토되는 한국 가야토기의 완전한 복제품이다. 가야토기는 부산대 박물관과 진주박물관(김해박물관으로 옮김)에 훌륭한 소장품들이 많다. 긴 목과 나팔꽃처럼 퍼진 밑바닥, 귀신이 제기에 접근하는 세모 네모 또는 다른 모양의 가파른 수직상태로 뚫린 구멍들(역자 주; 이런 구멍은 받침대에 숯을 넣고 그릇의 음식을 데울 때 공기가 통하도록 하는 환기창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의 신선로 그릇 받침대를 보면 명확해진다) - 이런 요소는 김해토기와 쓰에끼토기 모두에서 볼 수 있다.
신공왕후와 다케우찌가 왜를 정벌하러 올 때 전사들만이 아니라 도공들도 동행해 온 것이다. 전쟁이 나면 통치자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한 제기용 토기를 빚었다. 일본역사서가 감추고 있는 부분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토기형태를 통해 구체화된다(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코벨지음 1986년 발행 ‘한국 도자기의 세계’ 18 -27면을 참조할 것).
나는 1960년대 어느날 한반도를 마주보는 일본 서해안 최북단의 강파른 어촌 도짐보의 한 여관에서 보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강한 바닷바람에 그대로 내놓이고 파도에 씻겨 암석들이 기괴한 모양을 한 어촌 마을이었다. 화산의 절벽이 가파르게 90미터높이로 솟아있어 거친 자연의 본색을 그대로 접할 수 있었다. 본토의 나라나 교토의 안온한 지형과는 비교도 안되는 일본북부 지역은 접근이 규제된 곳이다. 5세기, 6세기, 7세기에 왜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지금의 오사카 나라 지역에 정착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스카는 초기 정착자들이 형성한 한국인촌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완성된 아스카 불교유적은 지금 일본의 불교미술사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9.부여족의 바위와 이름-인덕천황, 바위공주 '이와노 히메'를 배필로
현대 한국인들은 산천과 바위를 사랑한다. 일찍이 부여 기마족들도 사람이름이나 땅이름에 ‘바위’가 들어가는 이름을 많이 붙였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지금도 한국의 어린아이 이름은 바우, 돌이, 차돌이 그런 아명이 많다.
일본건국시조 진무(神武)천황의 이름도 이와레(이와레 히꼬노 수메라 미꼬도)이다. 일본어로 이와는 바위, 레는 족속이란 뜻이며 진무는 바위배(天岩舟)를 타고 일본 본토로 동정(東征)해 갔다 한다. 이와레(磐餘)의 레는 부여의 여(餘)와 같은 한자다. 부여라는 이름은 영어의 Rockling 개념에 비견할만하다.
컬럼비아대학의 개리 레저드교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부여가 동해의 가섭원으로 갔다’는 구절을 ‘부여족의 한 일파가 왜국의 가시와라 평원으로 갔다’ 라고 해석한다. 가시와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섭원이라고 한다.
부여족이 왜국에서 왕권을 잡은 이후 1백여년간 그들의 배필은 가야혈통의 가쓰라기(葛城)가문 여성들이었다. 부여족 2대 왕인 닌도쿠(仁德)천황은 가장 거대한 능묘를 남긴 임금으로 가야의 왕족 아니면 귀족여성인 바위공주; 일본어로 이와노 히메(磐之媛)에게 장가들었다. 바위공주의 집안 가쓰라기(葛城)는 가야에 뿌리내린 호족이면서 동시에 왜국의 화족들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가쓰라기 가문은 바다 건너 왜에 정착한 부여기마족과의 동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가야와 왜국 양쪽에 모두 근거를 두고 있었고, 여러 나라 언어에 능한 만큼 한국과 중국과의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인물 - 일종의 외무장관을 많이 배출했다.
후일 근대 조선에서 서로 적대적인 가문 출신의 왕비들로 왕에게 문제가 생겼듯이 5세기 부여족 통치자들도 가쓰라기 가문에서만이 아니라 가야출신 아닌 여성도 비로 맞아들였다. 결국 500년 경에는 내분이 일어나 부여족의 왕권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신성한 임금’의 한국혈통이 500년에서 505년 사이에는 다른 혈통의 임금에게로 넘어가는 결과를 불렀다. 부여왕권의 재정적 힘은 한국에 입지한 것이었는데 그 연줄이 약화되면서 권력 또한 손에서 떠난 것이다.
그때까지의 순수 부여족 임금들이나 그 뒤를 이은 화족혈통의 왜국 통치자 모두 무속을 신앙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사서 위지(魏志)에 왜의 원주민을 두고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큰새의 깃털을 덮어 장사한다’고 묘사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무당은 모두 새털을 머리에 장식한다. 나아가 경주의 아름다운 금관에도 5세기의 무속왕이 사후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하는 날개장식을 붙였다.
일본의 고대기록에는 귀신을 쫓는 액막이 행사가 많았다고 적혀있다. 왕비들에게 자주 신이 내렸고 그녀들은 앞일을 예언하곤 했다. 무당이 그러는 것처럼 왕녀들이 신내림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수군병사들을 이끌고 왜국으로 원정 온 용맹한 전사 진구왕후 또한 무당이었다.
부여기마족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위지에 ‘3세기 왜국에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3세기 경에는 배가 작아서 말을 실을 수 없었거나 장사꾼들에게 난관을 무릅쓰고 배에다 말을 태워 원거리로 가져다 파는 일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다가 4세기 부여기마족이 왜일본에 들어온 뒤 갑자기 말은 무덤의 부장품이 되고 벽화에 말그림이 그려지거나 토기 말이 빚어지는 등 일본 예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4세기 고분 벽화에는 말과 함께 배가 그려져 있는데 사람이 배를 젓고 있거나 노가 달려 있는 정도의 단순한 그림이다. 후기의 그림에는 말이 배에 실려있거나 내리는 장면 모두가 그려져 있다. 이들은 부여기마족의 침입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기마족들은 1백여년이 넘게 왜국의 지배자로 통치하면서 일본역사에 무슨 영향을 끼쳤던가? 중요한 것은 통일에 따른 안정이었다. 강력한 군벌의 지배는 영토 전역에 단일집권체제를 실시하여 보다 평화로운 상황을 가져왔다. 부여족은 발달된 무기류를 가졌던 만큼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마구제작은 대단히 중요한 금속공예였다. 건축적 측면에서 부여족은 무덤주위를 물도랑 해자로 겹겹이 두른 거대한 능묘 매장제도를 행했다. 능 주변을 토기인형 토우를 둘러 장식함으로써 일본내의 토기 발달이 이루어졌다. 도기제작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선진국이었다. 도자기 빚을 때 쓰는 회전판과 물레의 도입은 그 당시 왜의 야요이토기에 자극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지금도 일본에서 쓰이는 오름가마(登窯)를 소개했고 4세기 후반에는 한국에서 온 새로운 타입의 받침대 있는 가야토기가 일본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이 일본의 쓰에끼 경질토기로서, 그 귀족적 토기는 일본이 또다시 한국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거진 1천년간 줄곧 쓰였다.
초기의 일본역사가들이 쓴 역사서에 나오는 오진(應神)천황은 여기서는 부여기마족 신성한 황통의 제 1대 왕인 오진을 말한다. 일본 초기의 역사가는 전부 한국에서 온 학자들이었다. 뒤이어 일본에도 유교서적이 들어왔다. 그렇긴 해도 불교만큼은 부여기마족의 전래물이 아니다. 부여족들이 백제를 떠날 당시 그들은 무속을 받들었다. 366-367년, 그리고 368-369년 두 번에 걸쳐 일단의 부여족이 백제권역에서 마한을 축출했다고 레저드교수는 주장한다. 그리고는 369년 왜를 정벌하러 온 것이다. 불교가 백제에 들어온 것은 공식적으로 372년이었다. 그후 2백년 가까이 지난 뒤인 552년에 이르러 백제 성왕이 비로소 왜에 여러 가지 불교용품을 전했다. 6세기와 7세기에 들어와 백제가 일본에 전한 불교예술에 관해서 쓰려면 또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9.일본으로 간 부여 한국인들, 5세기 왜국의 지배자
일본인들은 옛것을 보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서 이즈모 후도끼는 8세기 당시의 일본 통치자들을 위해 편찬된 지지이다. 여기에는 이즈모(出雲; 한반도 남부를 마주보고 있는 일본의 해안)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인용하고 있다.
‘신이 어느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땅을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이 전설이 뜻하는 것은 신라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말하는 민간전승 설화인 것이다. 땅이 남아돌았다기보다는 많은 한국인들이 오늘날 미국이민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그당시 일본으로 이주해간 것이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는 바람신 스사노 오노 미꼬또(素盞鳴尊)에 관한 기록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모국은 한국이었다. 서기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은 작은 배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가야 했기에 초기 무속신앙 형태로서 그들에겐 산신이나 해의 여신보다 바람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뱃사람이나 어부들에게 바람은 생존에 관련된 중요사항이었다.
스사노 오노 미꼬또는 이즈모 거주 한국인들에게 주신으로 섬겨졌다. 한국인들은 후기석기시대에 머물러있던 일본 본토내의 원주민들과 섞여 어울리고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는 일에 하등의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스사노 오노에 관한 유일한 무용담은 부부신이 아기를 가질 때마다 예쁜 아가씨를 제물로 삼키는 머리 8개 달린 뱀을 처단해 죽였다는 것이다. 스사노 오노는 다음번 아기가 태어날 즈음하여 술 여덟통을 차려놓으라고 일렀다. 용이 와서는 여덟 개의 머리를 술통 8개에 각각 들이밀고 술을 마셔 나른해지자 그 틈을 타 스사노 오노 미꼬또는 칼로 여덟 개의 머리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때 사용된 칼이 오늘날까지 일본 통치자에게 통치권의 증표로 내려오는 칼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이즈모의 한인 사회는 번창하였으며 바람신을 모시는 거대한 신또 사당을 짓기에 이르렀다. 옛날 척도로 그 사당은 몇백자나 되는 높은 건물로 당시로선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러나 그 사당은 1천5백년전 무너지고 오늘날 재건축된 바람신의 이즈모 신사는 해의 여신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 신사에 우위를 내주고 서열 2위로 물러나 앉은 신사가 되었다. 아마도 바람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신라출신 한국인과 해의 여신을 최고의 신으로 하는 한반도 남서부출신 한국인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스사노 오노 바람신은 해의 여신의 오빠로 낙착됨으로써 이즈모가 훨씬 앞선 거주지였음을 표명하게 되었다. 일본초기 역사가 기술될 당시 사관들은 해의 여신을 주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므로 바람신은 변덕스런 바람의 속성에 걸맞게 파괴적이고 심술궂으며 거친 성격의 신으로 그려지고 말았다.
평양의 사학자 김석형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세 그룹의 한국인 사회가 건설돼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이었다고 한다. 김석형은 이중 고구려계가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평양사람인 그로선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음직하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것은 신라와 이즈모이며 4-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은 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에 와서이다. 일본왕실의 스승으로 불교승려가 유입된 것을 위시해 일단의 승려들이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갔다. 지형학적으로 보더라도 북방의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신라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기간동안 한일 두 나라간의 정치적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첨예한 대립양상을 띤 것은 아니었으며 주민들간의 이동도 잦았다. 어업은 중요한 생업이었으며 한반도 긴 해안선 어디서든 배들이 떠날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사이의 해협을 건너 넘나드는 데 오늘날처럼 여권이니 지문같은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다. 중국사서에는 이 당시 일본에 수많은 부족사회가 산재해 있었다고 했다. 보다 발전된 문명을 누리던 한국인들은 능력상 잘 대우받을수 있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백년전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일었던 ‘가자 서부로’ 열풍과 흡사한 것이다. 동부의 안정된 사회를 벗어나 서부로 가면 보다 빠른 성공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1862년의 법령으로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360에이커의 농장이 이양되었다.
일본땅까지 험한 뱃길을 건너간 한국인들은 1세대 뒤에는 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 가는 한국인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며 19세기 ‘가자 서부로’의 젊은 미국인들도 똑같은 이유로 떠났던 사람들이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언제나 발전된 기술을 처녀지에 가져가 개척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일본에서 재일 교포들이 처해있는 낮은 위상에 대한 여러 가지 끔찍한 이야기와는 달리 5세기 일본의 한국인 부여족은 일본을 통치한 ‘신성한 천황’들이었으며 그에 따라 확실한 귀족계급으로 군림했다. 369년 부여족이 일본땅에 들어가 왜라고 하는 원주민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했지만 사실 이들 원주민들도 부여족에 앞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국인 피가 반 가량 섞인 한국인 후손들이었다.
서양인으로 내가 구별해내는 한국인과 일본인 용모의 다른 점은 한국인이 키가 더 크고, 콧대가 높고 콧날이 길며 곧바르고 얼굴은 그리 동글동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남방계 피가 섞여있기 때문에 콧대가 거의 없고 뺨에 좀더 살이 올라있으며 얼굴이 동글동글하다. 일본인의 코는 콧망울이 좀더 퍼져있고 허리 아래 다리길이가 짧다. 머리칼은 완전 흑색이며 결이 뻣뻣하고 거칠다. 피부색은 오늘날의 서울사람들보다 좀더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다.
한국인의 눈은 갈색을 띄고 있기도 하며 밝은 갈색눈의 경우도 있다. 햇빛에 비쳐보이는 머리칼은 갈색조를 띄고 있는데 이 모든 특징은 한국인에게 코카시언의 피가 섞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5천년전이나 7천년전 한국인의 먼 조상들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시베리아를 건너 동쪽을 향해 나아온 것이다. 서기전 2세기에는 몽고혈통이 가미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눈꺼풀이 몽고식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1백퍼센트 순종 한국인인 내 친구는 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몽고타입이 아니다.
요즘에도 눈에 띄는 이러한 차이점은 5세기에는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된 부여족은 해협을 건너는 일본행에 동행한 주변친지들을 요직에 기용했다. 나의 아들 알란 코벨은 기병 5백명과 보병 7백 정도가 한국으로부터 와서 규슈에 상륙했으리라 보고 있다. 이 정도 병력이면 당시 일본을 정복하기엔 충분한 규모였다.
일본으로 이주해간 한국인들은 잠업이나 직조, 도자기 제조에 있어 현지인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한 왕비가 죽었을 때 왕실에서는 이즈모(出雲;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찍이 이주해온 한국인들의 정착중심지)에 도공을 보내 능에 장식할 토기며 토우, 토용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하니와 흙인형들은 역사기록이 없던(나중의 역사서에는 부여족 1세대인 오진왕이 처음으로 일본에 문자를 도입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은 망실되었다) 5세기 당시의 일본 사회상을 어느 정도 반영해 준다.
하니와 토기에는 말과 배, 방패, 닭, 무당, 음악가, 병사 기타 여러 가지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부여족 2세인 닌또꾸(仁德)왕능에는 이런 토용이 2만개나 들어서 있었고 세겹의 해자가 둘러쳐져서 접근을 막았다. 이들은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5세기 초 닌또꾸왕의 사망 당시만 해도 무속신앙에서 잡귀가 얼마나 강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케 되는 것이다.
당시의 장제는 물론 무속신앙의 의례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고 대개 무녀가 집전했다. 하니와 토기에 붙어있는 조각에 보면 이런 무녀들은 곡옥 목걸이를 걸치고 있으며 소매가 좁고 깃이 밭은 저고리와 넓게 퍼진 치마를 입고 있다. 어떤 무녀들은 면류관같은 각진 모자를 쓰고 있다(바로 이 시기의 고대 중국황제들이 면류관을 착용했다). 처녀들은 머리 한가운데를 갈라 양쪽으로 묶어 내렸다. 5-6세기 남자들은 보석치장을 했다(5세기 경주고분의 발굴품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5세기의 일본은 오늘날의 일본과는 정반대 상황에 있었다. 오늘날의 한국은 비싼 댓가를 치르면서 외국인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기술을 전수 받는다. 5세기 일본에게 부여족은 최신기술을 지닌 외국인 전문가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여족들은 제일 좋은 땅을 차지하고 그 일족들에게 토지를 내리고 왕실의 요직을 맡겼으며 일본 원주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은 부여법에 따라 노예가 되었다.
몇주일전(1982년) 부산 조선호텔 앞 바다에서 동트기 전 용왕님께 제올리는 한 무당을 사진찍고 있을 때 부산 상공회의소에서 오는 6월 한국인 초기 이주민이 항해해간 뱃길을 따라 후꾸오까까지 가는 탐사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상황을 더 실감나게 재현하려면 현대식 엔진없이 오직 항해기술에 의지한 배에 말과 식량 등을 싣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비상시를 대비한 무전기만은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항해자들이 그 옛날 사람들 같은 옷차림을 하고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당시와 같은 조건아래 항해한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후꾸오까현 와카미야에 있는 다께하라 고분벽화가 이 일에 상당한 참고가 될 것이다. 고분 내부 석판 널 위에 광물안료로 그려진 이 그림에는 배에서 말을 끌어내리는 항해자의 옷차림이 분명히 보인다. 그 복식은 승마바지 같은 것에 높이 올라간 건같은 모자를 쓴 것이다. 무덤의 돌널은 140센티미터 높이이다. 여기에 칼러로 된 사진과 모사도를 소개한다.
그림에 보면 말은 거의 배만큼이나 크지만 말을 다루는 사람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또다른 말그림이다. 크기도 배에서 내리는 말보다 훨씬 크다. 이 말은 공중 높이 질주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 말 또한 샤먼왕의 하늘을 나는 말, 천마가 아닐까? (경주 155호 고분 천마총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후꾸오까의 이 고분벽화가 일본을 정벌하러 온 부여족이 규슈에 상륙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데서 부여족이 배에 싣고온 일반 기마용 말과 기수 외에 무속에 등장하는 천마까지 완벽히 갖춰 한반도로부터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두 그루 종려나무가 배 양쪽에 서있어 그림의 틀을 겸하고 있다. 규슈지방은 한국보다 날씨가 훨씬 온화하며 오늘날에도 종려나무가 자란다. 부여의 눈 많이 내리는 추운 고향에 비하면 규슈는 아주 따뜻한 기후대에 있다. 한반도 땅으로부터 길고 위험한 항해 끝에 와닿은 이곳의 부드러운 기후가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준 나머지 기념비적인 벽화에 비록 낯설긴 하지만 종려나무를 그려 넣게 된 것같다. 그리고 이 나무는 7개의 가지를 지니고 있다. 무속의 7천(天)세계를 상징하는 것일까?
10. 일본의 첫 사서 구다라기(백제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반한적인 시각이 문제시되는 가운데, 일본의 첫 역사서가 그 당시 일본의 쇼군(쇼군이란 말이 생기기 전이지만) 같았던 존재로 정권을 거머쥔 최고실력자 한국인과 절반 한국인인 그의 조카이자 사위인 섭정태자가 같이 써낸 책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바로 일본불교의 아버지로 호칭되는 쇼토쿠(聖德)태자와 그의 장인이자 2백년 가까이 왜국의 최고실력자로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아온 소가 우마코(蘇我馬子)가 그들이다. 이들의 조상은 4세기 가야에서 건너온 한국인으로, 다른 기마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왜로 이주해왔다.
오늘날 일본에서 아스카시대 불교미술로 호칭되는 호화로운 불교유물의 대부분은 이 두 사람에 기인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그때 짓도록 한 절과 만들게 한 불교조각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저한 역사책은 후일 소가가문이 대궐에서 일어난 정변의 희생이 되어 죽을 때 같이 불길에 던져져 남아있지 않다. 이때 이들이 찬한 역사는 초기 백제역사를 기술한 구다라(백제)기를 근저로 해 쓴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구다라기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 역사서에는 아마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 왜(671년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기기 전)를 지배한 한국인으로 왕가의 계보를 이룬 기마족과 그들의 바다 건너온 항해사가 기술되었을 것이다. 505년 이후 일본 본토종의 피가 혼합되긴 했지만 권력은 그때까지도 소가가문과 같은 한국에 근원을 둔 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의 귀족층은 다수가 한국인이었다.
정변이 있고 반세기쯤 지나서, 일본내 토착 세력들이 이젠 스스로의 역사책을 서술할 만하다고 생각된 그 시기, 역사서들은 구다라기와 함께 불길에 사라졌다.
그 당시 사서편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조국이 망하자 일본으로 도망쳐온 백제의 망명 학자들이 일본대궐의 사서편찬위원으로 발탁되었다. 한문에 능통한 이들 사서편찬자들은 그때까지 일본에서 지나간 역사를 암기하는 토착 직업인들을 듣고, 자료를 수집하는 능력이 있는 학자들이었다. 사서편찬의 유일한 금기는 밖에서 들어온 부여족의 왜 정벌을 철저히 삭제하고 그대신 현 집권자들의 계보를 늘려 오래전 중국의 역사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호한 과거에까지 가닿도록 꾸미는 것이었다.
백제학자들은 일본의 구비관(口碑官)들이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사건과 이름을 백제사에 결부시키고 일부는 가야사와 신라사까지 차용해다 일본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들은 ‘일본국의 창시자'라는 신비한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부여 가야의 왜정벌에서 얻어진 구체적 이야기들을 따다 쓴 만큼 사실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짜집기 되어 일본사는 서기전 660년부터 비롯된다는 왕실에서 만족할 만큼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접하는 역사적 사실은 진무(神武)천황이라고 하는 아말감 역사에서 나오는 내용일 뿐이다. 실제로 진무라는 이름은 초기 역사에서 그다지 영광스러운 위상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호무다왕자(15대 오진천황을 지칭)라고도 하는, 일본땅에서 처음 태어난 왜국정벌자 기마족의 왕자 15대 왜왕 오진의 행적을 가상의 진무천황에게 덮어씌워 영광스런 건국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8세기 초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왜를 정벌한 왕자 호무다는 이와레왕자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이와’는 일본말로 ‘바위’를 뜻하며, ‘레’는 씨족, 가문을 말한다. 따라서 이와레왕자는 바위족 집단의 우두머리, 바위왕자였다. 그리고 ‘바위’는 언제나 부여 가야를 배경으로 한다. ‘레’의 한자표기는 ‘夫餘’의 餘자와 같다. 부여의 이 바위왕자는 하늘에서 돌로 된 배를 타고 강림했다. 이 당시 관련된 사항들을 보면, 바위는 바로 한국인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8세기의 역사가들이 서기전 660년 시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4세기에 일어난 부여족의 일본(왜)정벌에 대해 알고있던 사실을 서기전 660년의 일로 가져다 썼다.
부여의 바위왕자가 수월하게 왜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6백년동안 한반도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루어 왜땅으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농업, 어업 무역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타고 간 배는 4세기 기마민족이 타고 간 배보다 작은 것이었다. 그래도 기마족들처럼 왜를 침입하려고 배에다 많은 말을 싣고 가는 모험은 하지 않았던 만큼 무사히 왜땅에 건너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出雲)였는데, 이곳은 여러모로 신라와 관련된 곳이다. 실제로 713년에 편찬된 일본의 한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신이 신라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땅 한조각을 떼어다 해협을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는 것이다. 바로 신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과 마주보고 있는 이즈모로 이주해 왓다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바람과 바닷물에 생활을 의지하는 어부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해서 해신보다는 바람의 신을 더 우러르게 된 것이다.
초기이주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통일국가가 되고나서 바람의 신 스사노우를 모신 이즈모신사는 해의 여신을 받드는 이세신사에 밀려 지위가 두 번째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받드는 이주민은 신라계통이 아니었다.
만일 60척의 배가 동원되어 한 배에 15명씩의 기마병과 말이 타고, 그중 4분지 1은 망실되엇다 해도, 규슈에 상륙한 기마는 적어도 1백여마리는 규슈에 상륙했을 것이고 기마병들의 전투장비인 갑옷과 무기는 비활동적인 원주민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부여족들은 선비족이 요동의 그들을 침입해온 346년이래 줄곳 이동중이었다. 침입에서 살아남은 부여기마족들은 남으로 이동해 한반도를 거쳐 배로 왜의 규슈로 건너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기마족들만으로도 일본의 역사는 대변혁을 이룩했다.
이들과 함께 깊이 있게 가꾸어진 그들의 신앙 샤머니즘도 왜로 건너갔음은 중요한 것이다. 기마족들은 무속적인 왕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왕은 사후 모든 공경을 다한 거대한 능에 안장됐다. 이후 일본역사에서 거대고분시대가 열렸다. 부여 기마민족이 왜에 가져다준 가장 큰 은혜는 중앙집권체제였다. 그 이전에는 잡다한 소수의 부족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가 후일 성숙해서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는 그들의 ‘모국’에까지 대들게 될 줄이야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11. 문화교류? 고대엔 한국서 일본으로 일방통행이었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일본에서 나온 책을 보았다. 83세의 히로히토천황은 오직 일제의 한국강점에 한해서 유감이라는 사과를 했을 뿐이다. 1983년 서울에 온 나카소네 총리는 그보다는 더 나아가 6,7세기 한국이 일본에 가져다 준 기술과 문화에 일본이 빚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 주제로 대한항공(KAL) 기내지 <모닝캄>에 글을 썼다.
얼마전 한 출판사는 현재 한일 양국에 있는 미술품중 구조가 엇비슷한 것들을 골라 칼러사진으로 인쇄한 일어판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한일 문화교류 2000년‘이라는데 책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교류란 양국의 문화수준이 비슷해야 사상이 교환될 수 있는 법이다. 이 출판사는 1982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나의 칼럼을 출판하기로 했다가 ’국내학자들한테 검증받고 내겠다‘해서 출판이 무산됐다. 그때 보았던 겁먹음이 오늘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신문의 서평도 그 책을 두고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라고 평했다.
무슨 얼어죽을 교류란 말인가. 3세기부터 4, 5, 6,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원주민들은 한국땅에서 문명화된 잠업과 문자, 금속문화를 가지고 오는 한국인들이 정착할 넓은 땅덩이만 제공할 수 있었을 뿐, 교류할 문화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에 남아있는 고대의 가장 큰 불상인 법륭사 금당의 아름다운 삼존불을 만든 한국인의 후예들은 그 대가로 23조에 달하는 땅을 받았다. 여섯 번이나 실패한 끝에 위임을 받아 동양최대의 53피트 높이 동대사 불상을 만든 한국인 후손도 그 성공에 대한 멋진 보답으로 벼슬을 받았다. 한 신문은 일본에서 ‘일본불교의 전파와 불교예술의 전통이 오로지 중국에 있을 뿐’이라고 한 일본의 불교선전 영화를 보고 난 한국인 유학생이 ‘놀랍다’며 감탄하는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이 한국학생은 일본항공 JAL의 장학금 수혜자였다.
이런 한심한 형편에다가 한일 문화적 교류 운운하는 책을 보면 한국인들은 뭘 제대로 아는 것 같지 않다(1984년 현재). 한국인 저자가 쓴 짧은 글에 한ㆍ일 양국어로 편집된 한 책은 앞표지에 교토 광륭사의 미륵보상살을 앞세우고, 한국의 똑같은 미륵보살상은 뒷장으로 밀어놓았다. 앞에 실리는 것과 뒤에 실리는 것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는 독자들이 잘 알 것이다.
반면 두 미국인이 공저한 책(한국이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 존 코벨과 알란 코벨 공저)은 이 주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루어서 앞표지에 한일 양국의 똑같은 미륵보살상 사진을 같이 실어 한눈에 두 불상을 비교해 보게 했다. 수백가지 문화를 그렇게 비교해 볼 때 알 수 있는 기본적 사실은 한일문화권에서 한국은 맏형이고 일본은 어린 동생이었다는 분명한 진실이다.
코리아 헤럴드의 고정 기고자인 이원설은 식민시대의 잘못을 인지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썼다.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국민 전체가(속셈이 따로 있는 정치가들이 아니라) 과거사를 깊이 알아서 문화가 일률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만일 거기에 ‘교류’라는 게 있었다면 섬나라에 문명을 가져다 준 한국인들에게 돌아간 땅, 명예와 부가 있었다. 김해에서 모험심 많은 어부, 상인들이 왜로 건너와 살면서 구석기시대의 왜인들에게 벼농사, 도자기성형의 회전판, 도공의 물레, 그밖의 수많은 문명의 제도를 전해 미개한 삶을 끌어올리면서 시작된 일이다. 문명은 언제나 미개한 쪽을 향해 흘러가는 법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오고 인력거와 분칠한 게이샤에서 반도체 산업국가로 탈바꿈했다. 서구의 기술로 일본은 세계 1등국으로 떠올랐다. 똑같은 방식으로, 오래 전의 왜는 바다 건너온 선진기술로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나아가고 근대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근대에 들어 서구의 신기술을 배울 때 일본의 유학생들이 서구 현지로 가서 배웠다. 또는 최근 IBM에서처럼 기술을 훔쳐왔다. 서방세계에서 일본으로 와서 가르치고 정착한 예는 드물었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미개한 왜인들을 깨워주러 가서 스승이 되고 원주민들로부터 존경과 함께 땅을 얻고 귀족계층으로 살았다.
일본이 귀족계급 성씨를 조사한 책 신찬성씨록에는 3분의 1 이상이 도래인들로서 대부분 백제, 고구려에서 온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기는 한반도의 삼국이 서로 싸우다가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이었다. 예술가나 학자, 지식인, 평범한 직업인들은 전쟁을 싫어했다. 그들은 별일 없는 왜국 땅에 가서 양반이 되어 새 삶을 시작했다.
한국의 도래인들이 쉽사리 왜국에서 지배계층에 진입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369년이래 7세기 말까지 왜, 일본을 지배한 임금들은 순수 한국인 혈통이었다. 이들은 일본 원주민과는 결혼하지 않았다. 사실상 원주민의 상위계층은 1세기경부터 3세기까지, 부여 기마족들이 왜를 침입하고 중앙집권화된 정권을 만들기 전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한국인들이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인을 처우하는 실태를 극히 역설적으로 보게 한다. 강제로 끌려와 가난 때문에 일본땅에 정착한 조선인, 한때 그토록 존중하던 민족에게 일본은 등을 돌린 것이다.
나는 다음 번 저작 ‘한국이 일본이 끼친 영향; 일본의 감춰진 역사(역자주 : 이 책의 제2권을 발행할 예정이였으나 발행되지 않았다)’에서 일본에서 천황이 된 모든 임금의 혈통을 파헤쳐 볼 생각이다. 완전무결한 한국인 혈통의 임금이름 옆에는 별표를 해둘까 한다. 전 천황 가운데 25대 까지-초기의 임금 25명이 순수 한국인이었다. 그 뒤에는 부분적으로 한국혈통을 가진 자들이 일본의 왕권을 쥐게 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데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맞아 1984년 11월호 특집을 꾸민 ‘역사와 여행’이란 잡지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앞표지에 신라 기마인물 토기 사진을 싣고 뒷표지는 규슈의 바다 위로 해가 뜨는 사진을 실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다음 번에 다시 논하겠다.
12.천황, 오진(應神)부터 게이타이(繼体) 전까지 완전한 한국혈통
1985년 11월 1일자 코리아 헤럴드에 370년부터 6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의 거주지였던 아스카에서 나무판에 그려진 키치(미완성 예술품) 유물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났다. 초기 한일관계사를 밝혀줄 많은 유물이 들어있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은 궁중 쓰레기더미 속에서 발견된 이 유물이 일본서기의 폐기된 초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7세기 일본 정부에는 역사편찬에 대한 고도의 검열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일관계 역사의 왜곡이 시작됐다. 최근 오사카 거주 한국인동포 일행이 내한해서 광주에서 부산까지를 도보여행하면서 왕인사당에 들려 참배했다. 왕인은 405년 왜에 당도하여 일본왕족을 교육시킨 두 번째 한국인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문을 수학하는 집단을 이루고 대궐의 역사편찬자가 되었다.
왕인보다 1년 전에는 백제인 아직기가 왜에 와서 글을 가르쳤다. 그는 백제임금이 왜왕에게 선물하는 길들인 말 두 마리를 가져온 사람이었다. 아직기가 말다루기 말고도 한문에 유식한 사람이었으므로 왜왕은 그에게 공부스승이 돼줄 것을 청했다.
왜왕이 묻기를 ‘백제에는 당신 말고도 학문에 유식한 사람이 있소?’아직기가 ‘왕인이 나보다 낫소이다’ 하고 추천해 그 다음해 왕인이 왜로 임금을 가르치러 왔다. 왕인은 학업의 신이 되고 후손들은 독점적으로 학문의 조합을 이루었다.
이 당시 왜국의 조정에는 두 개의 전문인 집단조합이 있었던 듯하다. 두 집단 모두 한문을 아는 자들로서 대궐에서 학자로 통했는데 왜는 당시 한자로밖에 달리 기록할 문자가 없었다. 백제인 아직기와 왕인의 평생동안 왜는 369년 한반도에서 건너와 규슈를 정벌하고 이어서 혼슈본토의 서쪽 절반을 점령한 부여기마민족의 후예들이 통치했다. 이들은 한국인이었지만 무인일 뿐 한문을 아는 유식한 학문인들은 아니었다.
왜에 와서 학문의 바탕을 닦은 두 백제인은 모두 진고(神功)왕후의 아들 오진(應神)왕 대에 왜로 건너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고왕후가 궁금한 독자라면 본인의 저작에 소개된 대로 진고왕후가 그의 아들에게 왜국 통치자의 자리를 주려고 왜로 건너온 저간의 사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역자주; 이 시리즈 3부에 소개할 예정).
일본역사에는 공식적으로 16대 천황으로 기록된 오진과 그의 후대를 이은 임금들은 지금 일본천황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507년 왕위에 오른 26대 게이타이 천황 전 무레츠(武烈)까지는 의심할 바 없는 한국인들이었다. 게이타이왕은 4세기에 왜에 온 순수 부여 백제 신라혈통의 기마민족 계열과 그보다 앞서 1세기경 왜국에 와 정착해 살아온 한국계와의 왕권투쟁에서 타협안으로 채택된 인물이었다.
507년부터 531년까지 재위한 게이타이천황은 기마족의 딸을 왕후로 맞고 그 사이에 출생한 긴메이(欽明)가 29대 천황이 되었다. 그의 통치때 소가(蘇我)가문이 왜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소가집안은 오진왕의 실제 부친인 것으로 보이는 다케우치노 수코네(武內宿미)의 직계손이었다. 다케우치는 진고왕후 생존시 그녀와 협력해 섭정정치를 했던 듯하다. 그의 이름은 ‘용감한 큰 곰’이란 뜻이다.
다케우치의 수많은 자손들은 부여왕족의 특징인 바위를 섬겼다. 나라(奈良)와 텐리(天理) 시 사이에는 기마민족들이 찾아 보고 군수품을 간수하던 부여 바위공주 사당(역자주; 石上신궁을 말한다)이 아직 있다. 바위는 한때 부여왕가의 적통을 상징했다. 일본이 받드는 건국신화에서 해의 여신(天照大臣)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돌로 된 동굴을 단번에 수리하고, 신또의 신들이 일본을 건국하려고 배로 된 배를 타고 강림했다는 것 등을 기억해야 한다.
바위가 물에 뜰 리 없으니 이는 바위의 굳센 힘을 말해주는 전설에 그칠 뿐이지만 서기 712년이라는 시기에도 신또의 역사서라 할 고사기(古事記)에 하늘에서 내려온 돌로 된 배의 이야기가 기록될 정도로 강한 전통인 것이다.
추측컨대 아직기의 후손은 왕인의 후손보다 더 친한적(親韓的)이었던 듯하다. 왕인의 후손들은 몇백년 뒤에는 자연스럽게 더 이상 백제가 아닌 일본에 최고의 충성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660년 백제가 신라에 망해서 흡수된 뒤로는 멀리서 바치는 조국에의 충성도 쓸데없었고 그보다 훨씬 전에 망한 부여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들 학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되자 그들은 망한 백제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되 그것을 반(反)신라적으로, 일본의 통치자 입맛에 맞게 왜곡해 기록했다. 그들은 친한세력인 소가가문을 타도해 죽이고 새로운 왕가로 등극하여 한국의 영향력을 축소하려한 후지와라(藤原- 中臣가문의 후손) 가문에 아부했다.
일본서기의 저자는 후지와라 왕가의 역사검열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아직기의 후손들은 이에 덜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5,6세기적 부터의 한국인마을 아스카에 그대로 거주한 반면 왕인의 후손들은 후지와라 가문이 통치하는 새로운 도읍으로 이사갔다. 물론 후지와라 혈통에도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다. 그렇지만 그 이전의 천황들처럼 그렇게 압도적인 한국피의 혈통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왕실소속의 역사가들을 감독했다.오늘날 벌어지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이처럼 흥미롭다.
14.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리피스의 진고(神功)왕후 일본정벌론
오늘날 한국정부는 아름다운 책과 인쇄물 등으로 외국인에게 한국의 인상을 심어주는 데 많은 예산을 쓰고 있다. 현대 미국인들은 텔레비젼, 라디오, 광고 붙은 책 등에 아주 익숙한 세대로서 요란한 선전물을 보면 뭔가 그럴만한 속셈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백여년전 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가 한국에 대해 영어로 쓴 책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 1백여년 전 발행되어 대단히 큰 영향을 준 책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 책은 1882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20여년 동안 9판이 발행되면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한국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유효한 저서로 통해왔다. 책이 나온 1882년은 한미간에 처음으로 우호조약체결이 진행중이던 때였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 땅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았음에도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한국관련 책을 썼다는 사실이 흥미를 갖고 이 책을 읽어보게 만든다. 그리피스는 주로 일본측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3년 걸려 ‘은자의 나라 조선’을 저술했다.
그는 한반도를 마주보고 있는 일본 땅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에 기술된 사실중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한국인 무녀였으며 후일 왕후가 되었고 4세기 일본을 정벌한 여장부로 우리가 믿고 있는 진고(神功)왕후를 받드는 쓰루가(敦賀)의 신또신사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피스는 진고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에 아무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리피스는 진고가 한반도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 때 군사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진고의 정부였던 다께치우치노 쓰고네(武內宿미) 신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코벨이 지은 <한국이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역자).
그리피스는 또 한국서 만든 거대한 동종을 바다건너 일본 땅으로 싣고 오다가 빠뜨려 아직도 물결따라 그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도 기술해 놓았다.
실제로 본인으로 하여금 부여-가야 기마족이 일본을 정벌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치도록 용기를 준 것은 1백년도 더 전에 그리피스가 언급했던 위의 진고왕후 일본 정복설이었다. 그리피스가 다룬 이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었으며 일본의 군국 세력은 불과 수년후 이또 히로부미 같은 정치가가 초기 일본역사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강력 부인하고 5세기에서 6, 7세기에 걸친 동안 일본보다 월등 우월했던 한국문화를 격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마민족설에 관한 주장이 1백여년전 처음 그리피스의 책으로 저술돼 나왔으며 뒤이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이 사실이 계속 억제되어왔음은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리피스는 일본의 한국통치가 한창 무르익었던 1926년 83세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에는 다녀가지 않았다. 그리피스의 이 저서는 1985년 현재 한국 내에서 오직 미 8군 도서관에 딱 한 권 있어 어느 기간동안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이해하는 도서로 활용되었다.
그리피스가 이 책을 저술하던 시기 한국은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어서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뉴욕주의 개신교 목사출신으로 그의 눈에 대원군의 정책은 당시 서구화에 열심이던 일본정세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요사이 한국 민화가 미국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순회 전시되고 있다. 그리피스의 책 <은자의 나라, 조선>에도 호랑이를 묘사한 긴 글이 나와 있고 악귀를 물리치는 호랑이 그림 설명도 나와 있다. 이 글은 한국 민화 -88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로 지정된 호돌이의 먼먼 조상 호랑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보인다.
전쟁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의 역사서에 큰 비중을 갖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과 히데요시의 일본군간의 전투라든가 일본군에 대항해 일어난 조선 승병 이야기 등은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미국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1904-1905년간의 국제사회에서(노ㆍ일전쟁 당시) 한국 아닌 일본편을 들고 나섰을 때 그리피스의 책은 그 영향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그리피스는 한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고 그 처지에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지만 대원군이 이끌던 1870년대 조선은 너무나 부패가 만연했고 분열이 심했던 작은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자료를 수집하던 1877년-1880년 한국의 여러 파벌간 싸움은 심히 우려되는 것이었다.
그리피스의 책은 중판을 거듭하고 저자는 계속 내용을 보강해 나갔지만 보다 잘 단결되고 보다 규범화 되어있는 일본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은 생산적인 정치단합이 되어있지 못하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기본 입장이었다.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미국에게 일본에 비해 한국이란 나라는 기이하며 뒤떨어진 국민들이고 마지못해 근대화되는 나라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데 이 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1890년대에 씌어진 이사벨라 비숍의 여행기에도 저자는 비록 한국과 한국인들을 매우 좋아하고는 있지만 가난하고 미신에 얽매인 나라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관련 저서로 외국인이 쓴 책은 한국인이 쓴 것보다 백배 - 혹은 천배가량 더 강력하게 세계여론에 이바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가슴에 그토록 강렬하게 와닿았던 그리피스의 글중 일부를 여기 인용한다.
'1871년 나는 일본 에치(愛知)현 후꾸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해변마을 쓰루가와 미꾸니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고대 브리테인의 색슨해변처럼 이곳 에치현의 해안도 오랜 옛날 맞은편 한국땅으로부터 건너오던 뱃사람, 이주자, 모험가등이 배를 대 상륙하던 장소였다. 이곳 쓰루가로 들어온 한국의 사절단들은 여기서 바로 미까도 궁전으로 길을 대어갔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마나의 한국왕, 진고(神功)왕후, 오진, 그리고 다께치우치를 모신 사당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역사에서 ‘서방의 보물로 가득한 나라’와 관련된 인물들이다.만에서 건너다 보이는 한국 땅에 소리가 청아한 종이 하나 걸려있었다. 이 종은 647년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원래 금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는 종이라고들 한다.
멀지 않은 곳 산 속에 몇 백년 전부터 종이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만 동네가 있었다. 주름잡힌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치현의 오래된 가문 사람들은 조상이 조선사람들인 데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온 동네가 모두 ‘바다 건너 고향의 것’에 정통해 있었다. 새와 가축, 과실, 매, 채소, 나무, 농기구류와 도공이 쓰는 물레, 땅이름, 예술, 종교이론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바다 건너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때 폐쇄된 사회였던 일본도 그 문호를 열고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이 왜 폐쇄되고 알 수 없는 나라로 남아있겠는가?
15.그리피스ㆍ페놀로사가 밝히는 일본문화의 근원, 한국
'한국이 일본예술의 근원임은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많은 자료가 일본에 넘쳐난다..... 일본 고유의 예술은 9세기에 들어서나 겨우 발아했다.‘이 글은 1919년 미국인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가 쓴 글이다!
하와이대 대학원 도서실 깊숙이에서 나는 1945년 유엔창립에 즈음해 발간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전에 쓰인 여러 글을 모은 책으로 저자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이중 가장 뛰어난 글은 역사가인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의 것이다. 그는 1869년 일본에 미국식 학교를 만들러 일본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동경제대에서 10년 간의 강의를 마치고는 한국역사를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보다 100년 앞서 그리피스는 부여족이 일본에 확고한 정부를 수립했음을 밝혀 같은 주장을 한 나의 선구가 되었다. 나는 그 시기를 369년으로 못박았는데 그리피스는 그렇게 시기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았어도 근접한 연대를 말했다. 나는 그리피스가 그때 자신의 한국사 연구에 인용할 한국 역사서를 다수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가르침 받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 나머지 걷어들여 불질러 버린 그 한국사 책들 말이다.
그리피스는 ‘1868년 이후 새로운 논리를 발판으로 한 제도가 발동하면서 일본은 언론을 지배하고 강요된 교육, 역사의 날조를 저질렀으며 새로이 조장된 미카도이즘(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잡아다 벌주기 시작했다’고 썼다.
‘역사는 편향되고 위조될 수 있다’고 그리피스는 썼지만 예술품들은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말한다. 미술사가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Penollosa; 후일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학예관)가 1880년대 일본에 있을 때, 일본정부는 그를 예술고문으로 임명하고 일본내 모든 예술품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법륭사에서 근 5백년간 한번도 풀어본 적 없던 비단헝겊보자기 안의 불상이 하나 있음을 알았다. 그보다 몇년전 이 불상을 풀어보려 했는데 하늘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쳐서 승려들은 두려워하고 중지해 버렸다. 이 불상은 ‘일본 불교의 아버지’라는 쇼도쿠(聖德)태자를 새긴 성상이라고 알려져 왔다(역자 주; 1997년 법륭사의 고문서를 통해 쇼도쿠태자상이 아니라 사실은 백제 위덕왕이 그 부왕인 성왕의 모습을 새겨 일본에 보낸 것임이 밝혀졌다). 그당시 페놀로사는 쇼도쿠태자가 당대 왜국의 정권을 손아귀에 쥔 한국인 실력자 소가 우마코의 조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이 미국인 학자가 불상을 싼 헝겊을 풀어내고 그 화려한 청동투조의 관을 보았을 때 그가 환희에 차서 내뱉은 말은 ‘이것은 한국서 온 보물이로구나!’ 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온통 서양 문물의 유입과 그 산물에 미쳐있었던 그때 법륭사의 보물인 이 불상은 ‘당연히 한국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면서 사정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변화됐다. 오늘날(1983년) 일본의 학자치고 이 불상을 연구하면서 1882년 페놀로사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게 한국 것이라고 진실을 밝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이 분명한 만큼 나도 페놀로사처럼 이 불상을 한국 것으로 확실히 인식한다. 지금 이 불상은 일본 전체의 자부심이자 기쁨이며 성스러운 유물이기 때문에, 페놀로사가 그 시대에 분명히 목도한 예술품임에도 한국것임을 밝히지 않는 역사왜곡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다시 그리피스가 쓴 글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에 관해 돌아가자. 이 글은 1919년 <아시아 매거진> 8월호에 처음 실렸다. 그 다음 1945년 한국의 주장을 청원하려는 목적의 작은 책자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발행되었다. 더 인용해 보겠다.
‘6세기 일본으로 흘러들어온 불교의 물결은 이후 수백년간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해뜨는 섬나라로 들어온 불교는 예술과 문자, 힌두, 중국, 한국의 문명을 담아 온 배달부였다. 그당시 신또(神道)는 조직적인 종파로 강화되던 중이었다. 부족장 미카도가 통치하던 좁은 지역의 야마토는 지금 우리가 일본이라 부르는 큰 나라 이전의 조그만 발아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의 국수적 역사관이나 거짓된 황국신민사상으로 인해 자칫 야마토가 일본전역에 걸쳐 통치했던 것처럼 속기 쉽다. 백제가 552년부터 시작해 일본으로 보내 쉬지 않고 빛을 발한 열정적이고 절대적인 불교전파는 세계 어디에도 비견할 만한 예가 없다.....‘
불교가 처음 일본에 들어갔을 때 일본은 지금처럼 전국적인 큰나라가 아니고 아리안, 말레이, 유태, 타타르 족속들이 서로 분열하여 서부와 남부에 걸쳐 살면서 야마도의 임금, 미카도의 지배를 받는 집단이었다. 불교유입으로 이들의 정치적 위상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격상했다. 새 종교인 불교를 통해 문자, 저술, 건축, 예술이 들어오고 한국으로부터 깨인 사람들이 수백명 들어와 열심히 왜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야만 왜인이 인간다워지고 사회와 건설전반이 통째로 변화된 것이다.
야마도국의 문화가 얼마나 왜소한 것이며 반대로 한국이 베풀어준 문명의 세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황국신민사상이 팽배하면서 직장을 잃거나 억압당한 일본 국내학자들의 저술이나 외국인의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아니면 그 당시 순수한 일본문학이나 문물 자산이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주는 자 한국의 풍요로움과 받은자 일본의 빈곤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자 고립됐던 일본군들은 본토로 철수했다. 그러면서 한국인 예술가, 장인을 아예 통째로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피스는 예술사가가 아니라 역사가였다. 나는 일본이 예술분야에서 한국에 진 빚은 나라(奈良)시대 전체를 망라하며, 8세기 중반에 가서도 하찮은 문명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피스는 한국의 강력한 영향력은 10세기까지도 일본에 미쳤다고 한다.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은 일본의 예술사가들이 일본의 보물 법륭사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중국, 인도, 그 위에 멀리 로마와 그리스까지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 경우 ‘역사의 날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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