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고나무, 권일용 저, 알마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되고 그의 프로파일링 팀이 탄생하는 과정과, 그들이 사건 현장에서 기존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딛고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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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프로파일링의 살아 있는 역사 권일용,
그가 지나온 ‘진짜’ 범죄심리분석의 세계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전 경정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알마에서 출간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와 범인의 검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프로파일러들의 이야기를 권일용과 논픽션 작가 고나무가 공동으로 집필했다. 권일용 전 경정은 순경 공채 형사기동대 형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해 ‘프로파일링’이라는 말조차 생경하던 시대에 국내 첫 프로파일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범죄심리분석의 불모지와 같던 한국에서 범죄자들과 직접 부딪치며 그들의 심리를 철저히 연구해 프로파일링의 기반을 닦아놓는 한편, 경찰청 프로파일링 팀인 범죄행동분석팀의 창설에도 깊게 관여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순경 권일용이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되고 그의 프로파일링 팀이 탄생하는 과정과, 그들이 사건 현장에서 기존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딛고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프로파일러가 범인과 벌이는 치열한 심리 싸움, 낯선 수사 기법을 불신하는 현장의 분위기에 맞서 끝내 자신의 프로파일링을 관철하는 극적인 장면은 물론, 참혹한 범죄와 맞닿아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고뇌 등이 빠른 호흡으로 펼쳐진다.
프로파일러는 영화와 드라마 등의 소재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존재다. 그러나 일선의 그들은 여전히 묵묵히 암약한다. 이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사건 당시 현장의 경험을 가감 없이 옮긴 실화다. 독자들은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통해,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어두운 방과 같은 연쇄살인범의 마음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가는 프로파일러들의 세계를 추체험(追體驗)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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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형사는 1989년 경찰종합학교를 졸업한 다른 160기 형사기동대 순경 공채 동기들과는 좀 달랐다. 경찰학교 졸업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무술과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형사는 조직폭력배를 잡으러 다녔다. 옛날 경찰 선배들처럼, 터프하게 몸으로 범인들을 잡았다. 형사가 지문감식 교육을 처음 받은 것은 1993년 7월이었다. 주먹이 아니라 붓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재미를 느꼈다. 수표에 묻은 지문을 채취할 때 다리미로 다리면 결과가 더 좋다는 노하우도 스스로 터득했다. --- pp.13-14
2000년 1월, 권일용 등 네 명이 처음 만들어진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팀으로 발령받았다. 이 중 세 명은 범죄 통계를 분석하는 요원이었다. 오직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만이 현재 대중들이 ‘크리미널 프로파일링’이라고 부르는 ‘범인상 추정’ 작업을 담당했다. 크리미널 프로파일링은 범죄 현장의 법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범인의 성격, 심리, 지능, 직업, 특징 등을 추정해 피의자군을 좁혀 수사에 도움을 주는 기법이다. (…) 정신과 의사의 목표는 치료이고, 프로파일러의 목표는 수사다. 드라마나 영화는 종종 프로파일러를 범죄 현장을 보지도 않고 범인을 맞히는 천재 심리학자나 심령술사 같은 이미지로 다룬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에서 프로파일링이 탄생한 이유는 수사를 돕기 위함이었다. 범인의 개인적, 심리적 ‘프로필(특징)’을 추정하여 수사 대상 피의자나 탐색 지역을 좁히는 작업이 프로파일링의 본질이다. --- pp.28-30
마치 감도 높은 필름처럼, 권일용이 경험한 넓은 스펙트럼의 정서들은 그가 프로파일러로서 범죄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존 더글러스가 쓴 책에 ‘범인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야 프로파일링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범죄자들의 말을 들을 때는 저는 ‘그화(化)’되는 거예요. 상대로부터 어떤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제 상처가 같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화되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해요. 다만 초창기에는 그화됨을 느끼고 나면 다시 저에게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 p.48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지방경찰청 건물 고층에서는 북한산이 바라다보인다.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면서 범죄를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권일용이 일하는 서울지방경찰청 3층은 바깥과는 다른 세계 같았다. 날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 프로파일러와 형사들은 랜턴을 들고 일부러 어두운 곳만 걸어 다니는 사람과 같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므로. --- p.65
MO가 범행 수법을 의미한다면, ‘시그너처(signature)’는 범행 과정에서 범인이 충동과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범인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범행 도구나 상처의 패턴 등은 MO에 해당하는데, 가령 노인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낮에, 단독주택에 침입한다’는 것이 주요한 MO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개별 사건의 상처의 정도, 혹은 시신 위에 사정(射精)하거나 소변을 보는 행위 등은 시그너처에 해당한다. --- p.85
제압, 조종, 통제. 연쇄살인범의 특징이다. 권일용도 정확히 같은 것을 유영철과의 인터뷰에서 느꼈다. “유영철은 시체 토막 내는 얘기를 하면서도 말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계속 말을 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연쇄살인범이 갖고 있는 우월감, 통제력을 보여줬어요. 자기를 조사하거나 실체를 밝히려고 온 사람과의 대화를 통제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p.102
권일용과 윤외출은 이 보고서를 일선 경찰서 등에 제출했다. “2004년 초부터 벌어진 일련의 부녀자 공격 사건이 연쇄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선 경찰서는 여전히 범죄분석팀의 보고서 내용을 수사에 적용하기를 주저했다. 연쇄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번에 언론의 주목을 끄는 결과를 낳는다. 경찰은 이를 부담스러워했다. --- pp.124-125
2006년 1월, 권일용과 윤외출이 꿈꾸던 일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프로파일링 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달 충북 충주의 중앙경찰학교에서 졸업식이 있었다. 2005년 5월 채용된 1기 프로파일러 열여섯 명 중 열다섯 명이 다른 경찰 동료들과 함께 섰다. 한 명은 지병으로 이듬해에 졸업했다. 서울에 있던 권일용은 일부러 정복을 입고 충주로 내려갔다. 1기 프로파일러 중 세 명에게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1기 열다섯 명은 서울지방경찰청에 배치된 두 명을 포함하여 전국의 각 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한두 명씩 배치되었다. --- p.131
두 페이지 분량의 기사 한가운데 권일용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었다. 권일용에게도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방에 들어서니까 침구류가 그대로 깔려 있는데, 신문이 이만큼씩 쌓여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이놈은 다 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크랩을 들춰 보니 자기 사건 보도를 다 모아둔 겁니다. 밤마다 그걸 보며 즐거워했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서랍을 열었더니, 제 인터뷰 기사 사진이 딱 나왔죠.” 이 사건 이후로 권일용은 자신과 가족의 인적 사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 p.149
정남규는 한 그림을 보고는 “악마, 그것도 크고 거대한, 무시무시한 괴물이 죽이고 해치려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정남규에게 세상은 “무시무시한 악마가 자신을 죽이고 해치려 하는 곳”(경찰 백서)이었다. 세상이 악마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왜소한 남자는, 그렇게 스스로 악마가 되었다. --- p.155
거의 모든 살인 사건 현장에 임장했으며, 3일에 한 번꼴로 야근을 했다. 케이스링크를 하려면 사건의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되었다. 그런 식으로 연쇄성의 고리들을 겨우 하나씩 찾아냈다. 흩어진 척추뼈를 순서대로 발굴하는 고생물학자처럼,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 더미를 파헤치며 힘겹게 연쇄성의 고리를 이어갔다. 만 2년 동안 이런 일상을 보내고, 결국은 정남규를 잡았다. --- p.162
2006년 하반기는 한국 프로파일링의 전환점이다. 경찰들은 최상위 조직인 경찰청을 “본청”이라고 부른다. 2006년 11월 본청에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조직인 범죄행동분석팀이 신설됐다. 서울지방경찰청 범죄분석팀 소속이던 권일용은 경위로 특진한 뒤 12월 1일 범죄행동분석팀장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드디어 프로파일링의 필요성이 조직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 pp.169-170
에쿠스 승용차의 소유주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 실제 차를 이용한 사람은 차 소유주의 아들이었다. 경찰은 아들의 전과 조회를 했다. 강간 전과가 있었다. 아들의 직업은 마사지사였다. 경찰은 그가 일하는 마사지 업소로 찾아가 당일 행적을 물었다. 마사지사는 거짓 알리바이를 댔다. 공교롭게도 마사지사의집 근처에 시시티브이가 있었다. 그 폐회로텔레비전 화면으로 거짓 진술임이 들통났다. 경찰은 2009년 1월 23일 마사지사의 자택 등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마사지사는 교외에서 개를 기르는 축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개 축사에서 범행 도구가 발견됐다. 마사지사는 곧 체포됐다. 강호순. 그의 이름은 곧 전국적으로 알려질 것이었다. --- p.190
인간은 하나의 정보 체계다. 이 정보 체계는 주로 외부로부터 주어져 구성된다. 가정교육, 학교 등이 한 개인에게 모종의 정보 체계를 입히고, 개인은 그 정보 체계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범죄자는 악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사이코패스는 아예 정보 체계 자체가 ‘악’인 사람들이다. --- pp.244-245
저한테 다들 “왜 연쇄살인범 같은 괴물이 태어나는가” 하고 묻습니다. 총체적인 답은 여전히, 제가 할 능력이 없어요. 다만 분명한 점은 있습니다. 1960년대나 1970년대 중반까지는 양극화니 뭐니 할 것 없이 대부분 못살았잖아요. 그러다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한 양극화가 이뤄지고,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로 극심해졌죠. 아울러 익명성이라는 도시 공간의 특성도 있고요. 미국이나 영국도 197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된, 성과로 판정되는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김대두를 낳은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겠죠. 현재도 마찬가집니다.
--- pp.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