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가 변발을 자르고, 스스로에 민족 지사의 광휘를 덮어쓰게 했지만, 산해관을 열어 도르곤을 맞아 들인 사람도 오삼계였고, 그의 앞에서 머리를 자르고 변발을 한 사람도 오삼계였고, 이자성을 몰락하게 한 사람도 오삼계였고, 남명정권을 격파하고 영력제를 최후의 최후까지 추격하여 살해한것도 오삼계였습니다. 천하 사람들 중에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가히 단 한사람도 없었을 테니, 근본적으로 오삼계의 격문은 황당 무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삼계의 격문에 대한 호응이 전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청나라에 반감을 가지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설사 명나라의 부흥을 꾀하는 세력들에 있어서 오삼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 혼란을 이용해 한번 천하를 들쑤셔볼만은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삼계가 거병하며 "천하가 진동하고 거짓 격문이 전해지면서, 곳곳에서 호응이 일어나" 막힌 둑이 터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당초에 강희가 파견한 운귀총독 감문혼은 오삼계의 거병에 크게 놀랐고, 진원(鎭遠)에 있는 병력을 이용해 오삼계의 기세를 잠시나마 억누르고 사방의 병사를 불러와 운남과 귀주의 요충지를 지키려고 움직였습니다. 그는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가족 일곱 명을 자진하여 목숨을 끊게 하고, 스스로 넷쩨 아들과 함께 밤낮으로 말을 달려 진원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원을 지키는 장수 강의(江義)는 이미 오삼계의 패거리로 넘어간지가 오래라, 일이 그르치게 되었음을 알게 된 감문혼은 아들과 함께 자결했습니다.
오삼계는 감무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그는 아무런 고생없이 운남과 귀주를 완전 장악하여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병력은 무려 20만여만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운귀 지방에는 감문혼 말고도 청나라 조정의 사람들이 아직 있었습니다. 바로 오삼계의 철번을 돕기 위하여 식량, 선박 문제를 담당하려고 온 관리들로, 병부 낭중 당무례(撒木合)와 호부 원외랑 살목합, 호부 낭중 석란태, 병주 주사 신주, 필첩식 살이도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감문혼의 소식을 전해 듣고 몰래 빠져나와 진원에 이르렀는데, 앞서 말했듯이 진원을 지키는 강의는 이미 오삼계의 명령으로 출입을 엄금하고 있었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난관에 봉착했지만, 지금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살목합과 당무례는 몰래 말 두 필을 얻어 이를 타고 황급히 달아나 오삼계의 통제 구역을 간신히 벗어난뒤, 호남에 진입하여 역마를 갈아탔습니다. 그리고 11일 동안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12월 21일 북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두명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으로, 석란태는 진원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얻어서 탈출했고, 신주와 살이도는 탈출이 늦은 나머지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다지 날씨가 선선하지 않은 엄동설한의 북경이었지만, 말에서 내린 둘의 얼굴에는 땀이 송글공글 맺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지치고 숨이 막혀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두 명은 문기둥을 붙잡고 아무런 말도 못했고, 영리(營吏)들은 놀라서 그들을 부축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 두 그릇을 가져와서 억지로 입에 물을 넣어 주었고, 한참이 지나자 두 사람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그들은 또다시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반란이 일어났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들은 이윽고 오삼계가 운남 순무 주국치를 살해한 일, 그리고 소속 관병이 반란을 일으킨 일들에 대해 알렸습니다. 오삼계의 거병 소식을 드자, "온 조종이 진동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학사 색액도를 비롯한 다수 대신들이 오삼계의 철번을 취소하고, 또 철번 계획에 대해 사죄하는 방식으로 화의를 맺자고 주장했습니다. 본래 강희도 오삼계가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여줄것이라는 생각은 없긴 했으나, 강희는 이러한 화의 주장에 대해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미 철번에 대하여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대다수 조정 대신들은 이미 패닉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과거 한나라 오초칠국의 난에서, 한경제가 조조(晁錯)를 죽여 반란군을 누그러 뜨리려던 계책에서 본받아, 철번을 주장하던 관리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난리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철번을 주장하던 소수 대신을을 보호하여 대책을 세우는데 골몰했습니다. 이제 19살의 강희에게 요구되는것은 침착함과 대세를 봐야 하는 식견이었습니다.
우선 조정에서는 토오격문(討吳檄文)을 발표하여 오삼계의 격문에 있는 불합리한 내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대가 명 황실의 부흥을 그리도 원한다면, 옛날에 청이 산해관을 통해 중원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어찌 명 황실의 후손을 황제로 옹립하라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청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그대는 명 황실의 후예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옛 주인에 대한 충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신하된 자로서 두 주인을 섬기고, 또 두 주인을 모두 배반했는데, 이를 과연 도의(道義)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핵심을 찌른것으로, 오삼계에게는 딱히 반론할 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삼계가 반청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에게는 과거의 정성공과는 달리, 반청 세력인 명나라 유신들을 한 데 모을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이를테면 오삼계가 호남과 형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그는 당대의 위대한 대사상가 왕부지(王夫之)에게 접근을 하게 될 때의 일입니다.
왕부지(1619.10.7 ~ 1692.2.18)
이른바 일호도인(一瓠道人)이라고 불린 왕부지는 당대의 위대한 대사상가 중에 한명으로, 유학자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노장사상과 불교의 인식론(Erkenntnistheorie)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는 한편, 그리스도교와 서구의 근대과학, 자연진화론 등에까지 접근하였습니다. 일전에 숭정제에 대한 명나라 지식인들의 평가를 이야기하면서, 청나라 조정에 충성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 동시에 망국의 책임을 찾는 과정에서 숭정제의 실정을 비난하여 명, 청 모두를 비난하게 되는 와중에, 아예 군주제 자체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시각까지 생겨났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고염무, 황종희 등이 그러할진데, 왕부지도 그런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대단한 지식인이자 명망을 가진, 무엇보다 남명 정권에서 잠시나마 신하로 있던 경력이 있던 왕부지는, 분명 일관되게 반청을 주장하던 왕부지지만 오삼계에 대해서는 절대로 손을 잡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나중에는 급기야 오삼계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삼계에 대해 지지를 하는 명나라 유신들이 아주 없었던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번(二藩)이나 대만의 정씨왕조는 제외하더라도, 반란에 동조하는 총독과 순무, 제독, 총병 등 지방 관리 26명 중에 과거 명나라 조정의 무장이었던 인물만 20여명입니다. 그들로서도 오삼계에 대해서는 복잡한 기분이겠지만, 과거 정성공의 공격이 실패한 후, 당장 오삼계만큼 청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오삼계는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과 자신의 영향력으로, 운남과 귀주의 묘족(苗族), 토가족(土家族), 이족(彛族) 등도 끌어모아 소수민족의 부대만 수만명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강희는 팔기군을 형주(荊州),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호북성 강릉에 보내었습니다. 강희가 있는 본영이 커다란 전략의 틀을 짜고 지시를 내리는 기지라면, 형주의 대본영은 오삼계 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전진기지임과 동시에 오군 정벌을 위하는 일선의 최고지휘부였습니다. 형주는 장강 남북의 길목에 자리잡아, 이곳을 점령하면 중국의 어느곳이든 병사를 향해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희는 이곳을 중요시하게 여긴 것입니다.
순승군왕(順承郡王) 늑이금(勒爾錦)이 영남(寧南)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패륵 찰니(察尼), 도통 각라주만, 호군 통령 이이도재 등 만주 팔기를 믿고 그들이 형주로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거의 용사, 만주팔기들은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중임을 맡은 이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왕공 및 귀족들이었고, 어려운 환경에 대처할 만한 훈련을 하지 못했으며 전쟁의 실제 경험도 적었던 인물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오삼계로 말하자면 원숭환이 2만의 군대로 16만 누르하치 군단을 돌려세운 기적, 북경을 오고가며 홍타이지를 11번에 걸쳐 막아내던 긴박한 순간등을 보면서 자랐고, 그리고 홍승주가 홍타이지에게 대패하던 순간에 참가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지원조차 없던 5만의 군대로 청나라의 노도와도 같은 기세를 홀로 산해관에서 저지하면서, 세상을 뒤엎은 호걸 이자성과 존망을 둔 격전을 벌여 그를 몰락시켰으며, 군대를 몰고 장헌충을 물리치고 버마까지 추격하여 명나라 잔존세력을 뿌리뽑았습니다. 게다가 최근까지도 소수민족 토벌등으로 실전 감각을 잃지 않았으니, 애시당초 지휘관의 그릇으로 보자면 상대조차 되지 않을것입니다.
사태가 이러할진데, 늑이금은 출발하면서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되는 소리를 하기까지 합니다.
"운남과 귀주의 토벌은 8월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삼번의 난은 8년을 끌었습니다. 다만 사태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것은 장수들이나 관리들이나 심지어 강희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꼼꼼하게 대응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러방면을 수비하기 위해 공유덕의 사위였던 손연령(孫延齡)에게 광서의 수비를 맡겼고, 또한 한중(漢中)에 군대를 파견, 사천으로 진군하게 했습니다. 사천은 운남과 이웃하고 있으니 오삼계가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입니다. 강희는 이 서북 전선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남과 강서에 장군들을 파견하여 수비하게 함으로서, 오삼계 군이 강소 및 절강으로 이르는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동남의 물자와 세금이 넉넉한 지역을 막아내야만, 군수 물자의 징집을 원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또다른 도움이 되었는데, 경정충 번이 강서를 공격할때, 이 지역을 지켜 경정충과 오삼계의 연합을 막고, 경정충을 절강과 강서의 교차 지역에 묶어 둠으로서 장강으로의 진출을 막아었습니다.
일단 현지에 대한 파견은 그정도로 되었고, 연주((兗州)와 태원(太原) 등지에 정예병을 주둔시켜 유사시의 구원병으로 준비시키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예컨대 호북과 사천으로 진격할 경우, 필요한 병사가 있으면 따로 파견하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데다 병사와 말도 피곤하여 제대로 싸우기가 힘이 듭니다. 반면에 연주는 강남, 강서, 호광과 가깝고, 태원은 섬서 및 사천에 가까워서 병사를 주둔시키고 말을 대기시키기엔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또한 역참 시스템을 정비하여 수천 리 밖에서 지휘하는일을 원할토록 하였습니다. 다만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던지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동안에 오삼계는 순식간에 호남으로 진격하여, 원주(沅州)를 압박했습니다. 원주를 지키는 인물은 총병관 체세록이었습니다.
강희는 체세록이 오삼계를 막아낼 수단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주는 운남과 귀주로 통하는 길목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즉각 호광 제독 상아에게 군사를 이끌고 원주를 구원토록 했지만, 아무리 강희가 판단을 빠르게 내린다 하여도 현장에서의 급박함에 비할수는 없는 일입니다. 구원병이 당도하기도 전에 원주는 함락되었고, 체세록은 체포되었습니다.
원주가 무너지자, 장사(長沙)까지 영향이 미쳤습니다. 순무 노진이 겁을 먹고 악주까지 달아났던 것입니다. 강희는 즉각 노진을 체포해 사형을 처하도록 했지만, 장사는 이미 오삼계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순무가 달아난 마당에 싸우려는 사람이 없어 성내 민심이 흉흉했고, 오삼계는 장사의 병선(兵船)을 모두 수중에 넣었습니다. 오삼계의 수하 장국주는 수륙 양군을 통솔하고 동정호 근처의 악주를 공격했고, 악주의 참장 이국동이 "사사로이 헌납" 함에 따라 악주까지 평정했습니다.
이때, 강희는 호남성의 상덕(常德)을 요충지로 인식, 호군 통령 석대에게 선봉대를 이끌고 가서 방어 할것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무창(武昌)은 도통 주만등에게 방어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느즈막히 출발하여, 느즈막히 도착했습니다. 다행이 아직까지는 관군의 세력이었음으로 그 두명은 즉시 상덕 등으로 진입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하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의 위세가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못했' 기 때문입니다.
백전노장인 오삼계가 이런 기회를 놓칠리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상덕과 풍주(현재의 호남성 풍현豊縣)로 친히 진군하여 전투를 독려했고, 오군이 이르는 곳 마다 청나라 관군은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이며 투항했습니다. 청나라 제독 상아가 구원병을 이끌고 왔으나, 상덕의 지부였던 옹응조가 거절하여 할 수 없이 상아는 풍주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옹응조는 이미 오삼계와 이야기가 끝난 사이라,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내부에서 내응하여 상덕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일단 상덕이 이렇게 무너지자 오삼계는 즉시 풍주를 공격했고, 심지어 풍주에도 오삼계가 내부에 사람을 매수해놓아 안에서 호응하여 쉽게 함락시켰습니다. 상아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형주로 퇴각했습니다. 오삼계는 장국주를 보내 형양(衡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불과 3개월 만에 형양, 원주, 상덕, 진주, 악주 등 전략적 요충지를 모조리 함락하고, 호남 전체를 단번에 수중에 넣었습니다. 반란군의 선봉은 형주의 코앞까지 이르러, 관군의 총지휘부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삼계가 사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혼란을 조장하자, 삽시간에 사천에서 순무 나삼, 제독 정교린, 총병 담홍, 오지무 등이 오삼계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광서를 막으라고 보냈던 손연령도 반란을 일으켰으며, 경정충도 복건을 근거지로 청나라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섬서 제독 왕보신, 광동의 상지신 등이 연이어 들고 일어섰습니다.
가히 "오삼계의 세력이 매우 강하고 오래되어" "천하가 모두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있었" 습니다. 오삼계 군단이 기세로 강북으로 진격을 한다면, 집결이 덜되었고 혼란에 빠진 관군은 국면을 수습하기 어려운 형세로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강희와 청조에게 있어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삼계는 진군을 멈추고, 관군을 마주보고 있는 그 상황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처구니없게도 사소한 미신때문이었습니다.
첫댓글 오삼계 한명으로도 저렇게 애를 먹었는데 삼번이 동시에 힘을 합쳐서 반란을 일으켰으면... ㅎㄷㄷㄷ
그리고 형주 지도를 보니까 물어보게 되는 말인데, 오늘날의 형주에서도 소수민족 자치구가 있나요? 강남이 한화된지가 천년도 훨씬 넘었는데 저정도면 유비, 관우가 형주를 호령하던 시절에는 얼마나 야만인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이었을 것인지 상상도 안가네요 ㅎㄷㄷ
삼번이 동시에 힘을 합칠순 없겠죠..서로 어느정도 경계 한게 맞을듯합니다..권력이라는게 합쳐질수 없는거라..그런와중에 두명이 권력 내놓고 오삼계와 청 만 남은상태서 권력에 미련남은 오삼계가 드뎌..승기는 오삼계가 잡았음에도 속전속결로 해서 승패를 갈라야 하는데..담편이 기대 되네여..그리고 중국이 워낙에 소수민족이 많아서 중국인들 조차 남방인들 무섭고 조심하라고 할정도면 상상이 안갈정도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