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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기법과 선문답의 구조 |
고명수 (시인·동원대 교수·의상만해연구원 연구위원) |
1. 철학적 문답론의 유래 수수께끼의 문학적 파생물 중의 하나로 철학적 또는 신학적 내용의 문답론이 있다. 이것은 한 현자가 또 다른 한 사람의 현자 혹은 다수의 현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형태로 비스타스파 왕의 60명의 현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했던 짜라투스트라와 시바 여왕의 질문에 대답했던 솔로몬의 경우가 그 예가 된다. 1) 호이징하가 고대의 제의적 수수께끼 시합과 아주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는 것으로 제시한 것은 《브라마아나》 문헌에 나타나는 젊은 사도 브라만차린이 왕의 궁정에 와서 그보다 연장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고 그러다가 그의 대답의 지혜로움에 의해서 역할이 전도되어 그가 도리어 그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는 주제이다. 즉 그는 생도에서 선생으로 된다는 얘기다. 또한 호이징하는 성스러운 우주론적 수수께끼에서 ‘이성의 놀이(verstandesspiel)’로 넘어가는 주목할 만한 예로서는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한 얘기를 든다. 판다바족은 방랑 도중 숲속에 있는 한 아름다운 연못에 이른다. 그 안에 사는 물의 정령이, 그들이 그의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는 물을 마시지 말도록 금한다. 이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땅바닥에 죽어 넘어진다. 그래서 유디스디라가 자신이 정령의 질문에 답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어 질문 응답 게임이 계속되는데 이 게임에서는 힌두 윤리의 거의 전 체계가 설명된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논쟁도 이 역사 오랜 제의적 관습의 직접적인 계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답론의 문화적 산물 가운데 특별히 관심을 끄는 또 하나는 《밀린다왕문경(Milindapan?a)》이다. 이것은 팔리어(산스크리트의 속어)로 된 문헌으로 기원전 2세기경, 서북 인도를 지배했던 희랍인 왕 밀린다(메난드로스) 와 불교의 고승 나가세나가 벌인 논쟁을 대화형식으로 싣고 있다. 거기에서는 예상 밖에도 인도 사상과 헬레니즘 문화가 각자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입각하여 매우 명석한 토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 시대는 붓다에 의해 시작된 불교도 착착 인도에 기반을 확장하여, 많은 신자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불교 사상도 그 싹이 텄을 뿐이어서 그것이 융성한 발달을 보이기에는 시일을 필요로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시대였으며 그 시기에 태어난 것이 이 경전이었다. 2) 그 내용은 순수하게 철학적, 신학적인 것이지만 형식과 어조에서는 수수께끼 시합과 흡사하다. 즉 서두에서 인간의 기본에 대해 날카로운 대화가 오고 간 다음, 메난드로스 왕이 나가세나에 대해 다시 자기와 토론하기를 제안하자, 불교 신자도 아니고 인도인과도 다른, 정복자인 희랍인 왕이 앞으로 많은 말이 오가는 중에 앞서의 경우처럼 궁지에 몰리는 일이 생긴다면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가세나는,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태도를 문제삼은 것이다. “대왕이시여, 만약 폐하께서 현인(賢人)의 태도로 토론하신다면, 저는 생각한 바를 여쭙겠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왕자(王者)의 방식으로 토론하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유감이나마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메난드로스 왕은 쾌히 나가세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왕의 궁정에 있는 현자들과 오백 명의 요나카(이오니아 인과 그리이스인들), 그리고 팔만 명의 불교승들이 청중으로 참여한 가운데 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나가세나는 문답을 전개한다. “거기서 빠져나가 보시지요, 폐하”라는 의기양양한 언사와 함께 그가 던진 질문의 대부분은 전형적인 딜레마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선사들이 주고받는 선문답에 가깝다 할 것이다. 물론 희랍의 세속적인 생각의 소유자와 당시의 일류 불교승과의 대화이긴 하나 날카로운 지성을 갖춘 희랍적 사유가 불교와 만나서 용해되는 과정 속에서 불교 교리의 기본적인 질문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2. 선의 본질과 언어 적대 관계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 (見性成佛)로 요약되는 중국의 선(禪)은 본체에 대한 일종의 돈오(頓悟), 자성(自性)에 대한 일종의 직관적 지각을 특징으로 한다. 이 점에서 집중적·조직적 명상을 주로 하는 인도의 드야나(dhya-na)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오경웅에 의하면 ‘무의식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스즈키(鈴木大拙) 박사도 같은 견해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형식의 선은 인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며 그것은 깨달음(覺)에 대한 중국적 해석이며 나아가 창조적 해석으로 본다. 결국 선은 노장(老莊)의 원시 도가사상이 부흥하면서 대승불교의 풍부한 충동성에서 그 원초적 추진력을 이끌어낸 활기차고 다이내믹한 정신운동4)이라 할 수 있겠다. 선사들의 근본적 통찰은 노장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서 특히 장자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근사성을 보인다. 스즈키 박사는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핵심에 깊이 도달하는 내적 자각, 즉 자증(自證)의 강조에 있다”고 한 뒤 나아가 “이 자증이란 장자의 좌망(坐忘)ㆍ심재(心齋) 및 조철(朝徹)과 상응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유일한 차이점은 장자에 있어서는 그것이 순수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선에 있어서는 최고의 본질수련으로 발전한 점이다.5) 하여튼 선종은 도가사상에다 오(悟) 및 사도(使徒)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강한 충동을 결합시킨 것으로, 말하자면 도가사상의 극단적 발전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장자의 근접성은 다음과 같은 문답에 잘 나타나 있다. 《장자》 외편의 〈지북유(知北遊)〉 제22에 이런 얘기가 나와 있다.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장자가 대답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동곽자가 “어째서 그렇게 낮은 것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장자가 다시 “돌피나 피에 있소”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점점 더 낮아집니까” 하고 동곽자가 묻자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차츰 더 심하게 내려갑니까” 하고 물으니까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동곽자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답은 선문답의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흡사하다. 이 질문에 대한 선사들의 답변은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조주대사 : 뜰 앞의 잣나무. 중국 정신의 가장 현저한 특색 중의 하나는 관념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표현보다는 추상적이고 정감적인 편향 경향이다. 그것은 ‘말은 끝이 있으되 뜻은 다함이 없다’는 한시 절구(絶句)의 매력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말은 무엇이든지 사물을 둘로 나누어 대립 차별을 만드는 습성?가지고 있다. 같은 장소에 관해서도 시와 비, 선과 악, 미와 추 등의 무한의 대립 차별을 낳는 것은 언어에 의한 사고법의 특징이다.” 6) 그것은 동시에 사물의 생명을 앗아 버리는 분석적 사고의 폐단이다. 산 현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잡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하나인 채로, 전체성인 채로 잡는 수밖에 없다. 즉 그에는 분석에 의함이 아닌 직관이 있을 뿐이다. 직관은 직접적인 체험이므로 이것을 언어에 의해서 표현하는 것은 곤란하다. 장자의 문자 언어 무용론은 선의 불립문자의 사상에 그대로 계승된다. 이것은 동양철학의, 특히 중국철학의 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언어 적대 관계(sprachfeindschaft) 7)의 경향으로 도(道)나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라고 하는 불교의 경우나, 무명(無名)이 하늘의 시작(天之始)이며 도를 무명의 소박(無名之朴)으로 말한 노자의 경우, 중용(中庸)의 하늘 위의 세계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無聲無臭)는 진술에도 나타나듯 본원적인 진리나 본체는 언어에 의해서 파악되거나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언어적인 표현 이전의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은 베이컨의 언어의 우상(idol)이나 원효의 “마음의 본체는 명상(名相)을 초월한다”는 언급과도 상통한다 하겠다. 이러한 전통적인 철학의 언어 적대 관계는 언어의 의미가 늘 불확정적이며 또한 분명하지 못하고, 인간의 사유가 언어에 의해 잘못 지배될 수 있으며 어떤 유동적이고 생명적인 사실이라 할지라도 언어는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늘 일정한 틀에 사로잡아 고정화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형이상학적인 체험이나 깊은 주체적인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데 기인한다. 그래서 마우트너(Mauthner)는 심지어 “언어는 인식을 위한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고 말한 뒤, “최초에 언어가 있었다. 언어와 더불어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그는 인식의 첫걸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언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의 세계를 언어의 폭군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 8) 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분량은 제자백가의 책 중에서도 최대에 이르며, 대장경 속에는 선종(禪宗) 관계의 책의 분량이 가장 많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장자》의 외물편(外物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전(筌 : 통발, 魚梁)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이다. 물고기를 손에 넣으면 어량의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제(蹄 : 덫, 토끼그물)는 토끼를 잡기 위한 도구이다. 토끼를 손에 넣으면 덫의 일은 잊어버린다. 말은 의미를 잡기 위한 도구이다. 의미를 잡으면 이미 말은 쓸모가 없어지므로 잊어버리면 된다.” “나는 말을 잊을 수 있는 인간을 찾아내어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다.” 말은 곧 전제(筌蹄)와 같은 것으로서 진리를 잡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도구에 불과한 말을 진리 그 자체로 오인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래서 장자는 진리를 깨달음과 동시에 말을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출전(出典)이 되어 말을 ‘전제(筌蹄)’ ‘언전(言筌)’이라 부르고, 이것을 잊는 것을 ‘망언(忘言)’ ‘망전(忘筌)’이라 한다. 특히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선종에서는 이 장자의 말을 애용하고, 선의 어록에는 자주 ‘전제’라는 말이 나타난다. 9) 언어와 색채와 소리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 중국 정신은 아무래도 그 고향을 언어, 색채, 소리가 끝난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언어를 빌어 무한을 묘사하고 소리를 빌어 무성(無聲)을 설명하고 색채를 빌어 무형(無形)을 밝히는 것이니, 즉 물질을 이용하여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10) 3. 선의 효능과 현대문화에의 영향 고승의 의외의 질문을 통하여 제자의 직관적 지각을 발동시키고 그리하여 그 자신의 참마음(眞心)을 깨닫게 함으로써 제자를 깨우침으로 이끌고, 깨우침의 여부를 시험하는 선가의 교육방법이 선문답이다. 이때 깨우침의 척도가 되는 것이 공안(公案) 혹은 화두(話頭)인데 이것을 타파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데도 선문답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문답은 서구인은 물론 동양인에게도 생소· 기이한 것으로서 기상천외의 황홀감과 통쾌감을 맛보게 하면서 동시에 생(生)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데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에게 저 유명했던 선(禪)열병을 치르게 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구미인들의 생활, 예술, 문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여러 분야에 막중한 영향을 끼쳐 왔다. 선의 특징을 이루는 자족, 자유정신, 구체성,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 등은 노장 철학, 베단타 철학, 요가, 회교 신비주의, 가톨릭 신비주의 등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상의 사상 체계에서는 전연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요소를 선은 가지고 있다. 선의 방법론이 바로 그것이다. 11) 12) 금세기 초 일부 서구의 사상가들이 서구 문명의 위기를 의식하고 서구 문명에게 새로운 견성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때 선불교는 서서히 그들 지성인 사이로 침투하면서 그들의 갈증을 만족시켰다. 많은 서구의 지도적인 사상가와 작가들은 기상천외의 선(禪)기교에 황홀과 통쾌감을 맛보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선문답의 다양한 기교들은 시에, 희곡에, 소설에, 심리학에 응용되었다. 선문답 기교를 이용하여 이루어진 서양의 시, 소설, 희곡 작품들 중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선이란 언어로써 설명될 수 없지만 자기 표현은 하게 마련이어서 문학 예술 속에서는, 특히 시에서 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선시(禪詩)가 그것인데, 멀리 한산(寒山)에서부터 가까이는 만해 한용운이나 조지훈 혹은 일본의 하이쿠(排句) 등에서도 선취가 나타나고 있다. 서구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비트 세대인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에 속하는 히피 시인들을 비롯한 전위 문학이나 앙티·로망, 개방시(開放詩) 등에서 선과의 접촉이 뚜렷이 드러난다. 스즈키의 《선입문(禪入門》, 《선(禪)에세이》 등의 저서를 탐독한 이들은 선의 비논리성, 역설, 자유정신, 전통주의의 거부, 자연발생적인 것, 탈윤리·탈도덕성 등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며 자기들의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와 야간종교, 방황 생활을 정당화하는 데 방패로 삼았고 그들의 시에도 이 같은 요소를 반영시키면서 소위 미국식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데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13) 인습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방식과 모든 선입관념을 철저히 배제하는 이들 비트 세대와 유사한 ‘블랙 마운트 파(派)’ 시인들은 시에서 자연발생성(spontaneity)을 강조한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이미 금세기 초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시에서 나타난 것으로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으로서 사고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진 사고의 구술’로서 마치 목적 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만드는 선(禪)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금강경》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과도 상통한다 하겠다. 알렌 긴스버그나 마이클 머클루어가 한 번 시를 쓰면 전혀 수정을 하지 않고 단숨에 써 내려간다든지 인쇄로 16페이지가 되는 시를 하루 오후에 타자해 내고 인쇄로 3페이지가 되는 〈해바라기 경문(經文)〉을 불과 20분 걸려 썼다는 등의 고백도 자동기술법의 결과이다. 이들 비트 세대보다 훨씬 먼저인 금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번진, 자아를 찾으려는 서구 지성인들의 방황과 고뇌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급진적인 전위예술운동 가운데 다다(Dada)나 초현실주의가 있었다. 이들의 이상은 선의 이상과 동궤의 것이었고, 다다의 창시자인 차라(Tzara, Tristan)도 철학을 전공한 철학도로 불교를 잘 알고 있었으며, 다다 운동의 본질을 밝히는 한 연설에서 그는 “다다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불교의 초연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피력한 적도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전연 새로운 어휘인 “다다”가 당시 서구사회에 준 충격은 상식적인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혹은 범인에게는 불가사의한 선가(禪家)의 공안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무대에 올라가 일언반구도 없이 누워 있다가 혹은 신문을 읽고 있는 초창기 다다 연극의 배우들은 무대에 서면 으레 행동과 대화가 있으리라고 여기는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파괴하기 충분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사가 제자를 다룰 때와도 같은데, 머리스 사쉬(M.Sachs)의 지적처럼 “다다는 머리를 비우고 씻어내기 작업을 실현하여 정신에 축적된 죽은 문화를 제거함으로써 새 정신의 부활을 꾀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4. 선문답의 구조와 현대시의 기법 우연적인 두 단어가 접근되는 지점 즉 두 개의 전도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전위차(電位差)의 작용에 의한 이미지의 광채(lumiere d쳃mage)를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시의 미학을 데뻬이즈망(de쳎aysement)이라고 하는바, 이 수법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는 방법으로 ‘아시체 놀이(Le cadavre-exquis)’가 있다. ‘아시체놀이’는 1925년 빠리의 사또오 가(街) 54번지 고색창연한 집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유희의 일종으로 먼저 글을 쓴 몇 마디 말을, 각 요소가 가능한 역설적 형태로 충돌하도록 결합시켜, 처음부터 조리(條理)를 벗어난 인간의 전달행위가 최대한의 모험을 기록하는 정신에까지 달할 수 있는 유희다. 누구나 협력 혹은 예비적 협력을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여러 명의 참가자에게 한 문장씩 돌아가며 쓰게 하는 종이 접기 놀이로서, 이 놀이에서 최초로 얻은 문장에서 취해진 것이 “우아한//시체는//새 포도주를//마실 것이다 (Le cadavre-exquis-boira-le vin nouveau)”였다. 다음은 한국 초현실주의 연구회에서 시도한 예이다. ① S -달(月)이란 어떤 거지? 이것은 일종의 동문서답식 놀이라 할 수 있는 합작시다. 한국 최초의 합작시는 1951년에 〈불모의 엘레지〉14)로 조향·이봉래·김경린이 참여했다. 이러한 합작에 의한 ‘아시체 놀이’는 ‘낯설게 하기’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럼 이제 위와 같은 현대시의 기법과 선문답의 구조를 분석ㆍ비교해 볼 차례다. ③ 스님 - 반야의 본체란 어떤 것입니까? ④ 스님 - 달마가 동쪽에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위의 예문들은 수수께끼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완전한 수수께끼의 등식이 성립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질문소(q) 가 매우 단순하여 해답소(a)를 찾을 여지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보상일치(r)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경우처럼, Rr = ITA(an)---------Q(qn)에서 수수께끼가 생겨날 수 있는 터전인 I, T(수수께끼가 소통될 수 있는 공감대와, 대상에 대하여 사고하고 추리할 수 있는 사고력)는, 질문문(Q)과 해답문(A)과 함께 갖추어져 있다. 다만 qn과 an이 빈약하므로 등식이 성립되기도 쉽지 않다. 수수께끼의 특성이 어떤 사물에 대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은유와 함께 고의적인 오도성이 개입하여 의미론적 뒤틀어짐에 있다면 ‘아시체놀이’나 선문답의 경우는 문법은 정상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①과 ②의 경우는 질문자와 대답자 사이에 비약이 워낙 심하여 현대시의 이론에서 말하는 ‘낯설게 하기’ 혹은 ‘소외효과’를 나타내면서 예기치 못한 이미지의 창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상상력의 해방을 통한 인간 해방의 통로가 되고자 하는 초현실주의 시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바, 또한 이러한 류의 시는 원관념(enor)과 보조관념(vehecle) 사이의 유추가 힘들어 난해시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반면 ③과 ④의 경우는 유희적 측면보다는 진지한 수수께끼 유형으로 문답구조를 갖추고 있다. ③의 경우, 반야의 본체가 원관념이라면, 밝은 달빛을 머금은 조개는 무명(無明)을 떨친 지혜의 모습을 말한 보조관념이 될 것이고, 반야의 활동은 토끼가 새끼를 배는 것처럼 생산적인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텍스트의 문맥상으로 보상(r)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를테면 후계자로 인가(認可)를 받는다든지, 수도(修道)의 단계를 인정받는 경우 그것이 곧 보상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즉 ① ②의 초현실주의 시에서는 언어의 구속·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체험케 하는 일종의 감미로운 보상을 얻는다면, ③ ④에서는 타성에 젖은 관습적 지각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의 인가라고 하는 보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① ②에는 검증이 필요 없지만 ③ ④ 에는 검증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초현실주의 시가 ‘해방’을 추구한다면 선문답에서는 ‘해탈’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라는 말이 뭔가의 얽매임에서 풀려남을 의미한다면 해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무(無)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브르통(Breton)이 지적한 정신의 지고점(至高點, point supreme)이란 하나의 염원에 불과하다고 볼 때, 선(禪)이나 노장(老莊)은 벌써 거기 가서 살고 있음을 의미하고, 살고 있음 그 자체를 초월하고자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이것은 최면 상태의 순수한 무의식의 자동현상이다. 그것은 이성의 감시나 탐미적ㆍ윤리적 지배를 벗어난 자동기술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한 무의식의 자동현상에서 발생하는 초현실주의의 미학이 앞서 말한 데뻬이즈망의 효과라 한다면, 비록 맑고 선명한 의식 하의 어떤 정신의 비전을 깨닫고 문답한 것이긴 해도 선문답의 직관에 의한 즉물적(卽物的) 인식이 주는 미적 효과와 유사한 바가 있다.
① 말 오양간 냄새가 나는 이에스 크리스도의 머리에서 빛난 기적처럼 어느 날 아침 ② 나의 무지(無知)는 어제 속에 잠든 망해(亡骸) ③ 우리 눈 높이만큼 위에 있는 음악이다 ①은 전봉건의 〈음악〉, ②는 김종삼의 〈앙포르멜〉, ③은 김영태의 〈설경〉이다. 이들 작품에서 보이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표출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일상적 언어를 벗어난 전후 문맥의 이질감이 주는 데뻬이즈망 혹은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역설 등 다양한 기법으로 나타나는바, 이는 선문답에서와 같은 기법으로서 일상성과 타성에 젖은 우리의 인식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세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케 하려는 공통적인 목적을 지니는 것으로 현대시의 기법의 한 특성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수께끼는 어떤 사물의 의미를 감추어서 해답자의 지적 상상력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애매한 말들을 차용하는 오도성(誤導性)을 지닌다.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숨은 사물을 해석하고 비밀의 지식을 발견해내는 수단인 수수께끼는 물음과 답 사이가 은유로 맺어져 시적 사유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교훈성과 우주적 연관을 통해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형성시킨다. 지금까지 우리는 반야의 세계를 여는 수수께끼라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이성의 놀이로서의 선문답이 어떻게 언어에 의해 언어를 해방시키려는 시적 발상의 심층에 놓일 수 있는가. 또한 엄격하고도 은유적인 비약에 의해 준엄한 깨달음의 세계를 주고 받는 선문답이현대시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시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초현실주의 시나 비트 문학과 같은 다양한 현대시의 기법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현대시의 기층문법으로서의 선문답이 현대문학의 심층에 연결되는 양상을 고찰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