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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관하여
(출전: 스피노자 <에티카/정치론>, 추영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서론
미리 형성된 보편관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완전하다고 하며, (…) 그것이 미리 파악해 놓은 형태와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불완전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연물에 대해서도 인공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보편관념을 형성하며 이러한 관념을 사물의 전형典型이라고 보고 자연이 이러한 관념을 고안하여 그들에게 전형으로 제시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자연물을 ‘완전’ 또는 ‘불완전’하다고 부르는 습관은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보다는 편견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목적인目的因이라고 불리는 원인은 충동이 어떤 사물의 원리 내지 제1원인이라고 생각되는 한, 인간의 충동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 실제로 이 충동은 동력인動力因이며, 이것이 제1원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자기의 충동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사고의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공리
자연 속에는 그것보다 유력하고 더 강력한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개체(개물)는 없다. 어떠한 것이 주어져도 그 주어진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다른 사물이 언제나 존재한다.
정리
그릇된 관념 속에 포함되는 어떤 적극적인 것도, 참된 관념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참이라는 것만으로는 제거되지 않는다.
상상은 참된 것이 나타나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만으로 소멸하지 않고 (…) 우리가 상상하는 사물의 현재적 존재를 배제하는 보다 더 강력한 다른 상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멸한다.
우리는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자기 혼자서만 생각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분인 한에서 작용을 받는다.
우리들이 그 부분적 원인에 지나지 않는 어떤 것이 우리들 안에 생겨날 경우, 바꾸어 말하면 우리 본성의 법칙만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어떤 것이 우리들 안에 생겨 날 때 우리는 작용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연의 일부분인 한 작용을 받는다.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계속하려고 하는 힘에는 한계가 있으며, 외적인 원인의 힘에 의하여 무한히 압도당한다.
인간의 능력은 다른 것의 능력에 의해서 규정되며, 외적인 원인의 힘에 의하여 무한히 능가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 아님은 불가능하며, 또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변화, 곧 자기가 그 타당한 원인인 것같은 변화밖에 받지 않는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개물과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는 능력은 신 또는 자연 능력 자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한 신 또는 자연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인 본질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이 인간 자신의 현실적인 본질에 의하여 설명되는 한, 그것은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의 일부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본질의 일부분이다.
만일 인간이 그 자신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변화만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멸망하지 않고 언제나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한한 능력을 가진 원인에서나, 그렇지 않으면 무한한 능력을 가진 원인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이 그 자신의 본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변화밖에 받지 않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무한한 능력에서 일어나야 한다. (…) 여기에서 인간은 무한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하다.
각 개체의 격정의 힘과 그 증대, 그리고 그 존재에의 고집은 존재를 계속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에 대비되는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해 규정된다.
어떤 격정 내지 감정의 힘은 그 밖의 활동 또는 능력을 능가할 수가 있다. 그만큼 감정은 집요하게 인간을 따라다닌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고, 또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감정에 의하지 않고는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
선이나 악에 대한 인식은 우리들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의 원인이 현재 우리 앞에 있다고 상상(표상)한다면, 그것이 우리 앞에 없다고 상상할 경우보다 한층 더 강력하다.
감정은 신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상이다. 그러나 이 상상은 외적인 대상의 현실적 존재를 배제하는 것이 전연 상상되지 않는 동안에는 더 활발하다. 미래나 과거의 대상에 대한 상상은 (…) 다른 조건이 같다면 현재의 대상의 상상보다 약하다. 따라서 미래나 과거의 것에 대한 감정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현재의 대상에 대한 감정보다 약하다.
우리는 곧 나타날 것이라고 상상하는 미래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 출현의 시기가 현재로부터 좀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경우 훨씬 더 강하게 자극된다. 그리고 그다지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고 상상하는 대상의 기억은 그것이 이미 멀리 사라졌다고 상상하는 경우보다 한층 더 강하게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의 상상으로는 결정할 수 없을 만큼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들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조금밖에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필연적이라고 상상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가능한 것 또는 우연적인 것, 즉 필연적인 것에 대한 감정보다 강하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필연적이라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긍정하며, 반대로 어떤 대상을 필연적이 아니라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따라서 필연적인 대상에 대한 감정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필연적이 아닌 대상에 대한 감정보다 강하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가능한 것이라고 상상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우연적인 대상에 대한 감정보다 강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우연적이라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정립하는 다른 대상의 상상에 의해서 자극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이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배제하는 어떤 대상을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을 미래에 있어서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한, 그 대상의 존재를 정립하는 어떤 사물을, 바꾸어 말하면 희망이나 공포를 조성하는 어떤 사물을 상상한다. 따라서 가능한 대상에 대한 감정의 힘이 더 강하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또 우연적인 것이라고 상상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그 대상을 현재 우리 앞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경우보다 훨씬 약하다. 현재 존재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사물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그 사물을 미래적인 것으로 상상할 때보다도 강하고, 또한 우리가 그 미래의 시간을 현재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경우보다도 한층 강하다. 이처럼 그 존재 시간이 현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사물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그 사물을 현재적인 것으로 상상하는 경우보다 훨씬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우리가 그 사물을 우연적인 것으로 상상하는 경우보다 더 강하다. 따라서 우연적인 사물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그 사물을 현재 우리 앞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약하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연적인 것에 대한 감정은, 그 밖의 다른 조건이 같다면 과거의 것에 대한 감정보다는 약하다.
우리가 사물을 우연적인 것이라고 상상하는 한, 그것의 존재를 정립하는 다른 것의 상상에 의하여서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것을 배제하는 어떤 사물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을 과거의 시점과 관계지어 상상하는 한 그것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 상상을 환기하는 어떤 사물을 상상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한 우리는, 그 사물을 마치 현재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 우연적인 것에 대한 감정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과거의 것에 대한 감정보다 약할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한 참된 인식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감정도 억제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한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감정이란 정신이 그것에 의하여 자기 신체의 존재력에 대해 이전보다 크게 또는 이전보다 작게 긍정하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감정에는 참된 것의 출현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는 어떠한 적극적인 것도 없다. 따라서 선과 악의 참된 인식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감정도 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인식이 감정인 이상, 그리고 그 감정이 억제되어야 할 감정보다 더 강력하다면 감정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의 참된 인식에서 일어나는 욕망은, 우리를 동요케 하는 감정에서 기인하는 다른 여러 가지 욕망에 의해서 압도되거나 억제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인식이 미래에 관계되는 한, 그 인식에서 일어나는 욕망은 현재에 있어서는 쾌적한 것에 대한 욕망에 의해서 훨씬 더 쉽게 억제되거나 압도될 수 있다.
선과 악의 참된 인식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그 인식이 우연적인 것에 관계되는 한,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욕망에 의해서 더 쉽게 억제될 수 있다.
“나는 좀더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좀더 나쁜 것을 따른다.” (오비디우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
기쁨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능력과 동시에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규정되며, 이에 반해서 슬픔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만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보다 강력하다. (…) 덕은 자기 고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고 각자는 자기에게 고유한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만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므로, (…) 덕의 기초는 자기 고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 자체이며, 행복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데에 있다. 덕은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되어야 할 것이며, 덕보다 가치 있는 것, 덕보다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 그것 때문에 덕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무력한 정신 소유자이며 자기의 본성과 모순되는 외적 원인에 전적으로 정복당하는 사람이다. (…) 인간에게는 인간만큼 유익한 것은 없다.
각자는 자기가 선 또는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자기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욕구하고 또는 기피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욕구)은 인간의 본질 내지 본성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 본성의 법칙에서만 필연적으로 자신이 선 또는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욕구하거나 기피한다.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 할수록,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많이 그것을 달성할수록 그만큼 유덕하다. 반대로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는 일을 등한히 하는 한 무력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본성에 대립되는 외부 원인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다면 자기의 이익추구 내지 자신의 존재의 보존을 포기하는 자는 없다. (…)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서 음식을 거부하거나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외부 원인에 의해서 강요되었을 때이다. (…) 이에 반해 인간이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자기가 존재하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다른 형상으로 변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생존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는 행복하게 살고 선하게 행동하고 선하게 생활하는 것을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행복하게 또는 선하게 생활하고 행동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 바꾸어 말하면 각자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덕도 자기 보존 노력보다 우선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덕의 으뜸이자 유일한 기초이다.
인간이 타당치 못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어떤 행동이 결정되는 한, 그 사람은 절대로 덕에 따라 행동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인식(타당한 인식)함으로써 행동이 결정될 때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주, 진정한 의미의 지적 인식이란 인간이 자유롭게 행위하는 일이며, 반대로 자유로운 행위는 참된 인식을 동반해야 한다.)
참으로 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며,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원리에 따라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남을 위해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이성에 따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인식하는 일뿐이다. 그리고 정신은 이성을 사용하는 한,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 말고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이성에 따라서 노력하는 것은 모두 인식을 위한 노력일 뿐이다. (…) 정신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한,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자기에게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인식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만이 선이며, 인식을 방해할 수 있는 것만이 악임을 확실히 안다.
정신의 최고선은 신의 인식이며,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완전한 덕은 인식하는 데 있다. 그런데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 또는 신을 아는 것이다.
그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전연 다른 개체(개물)는 우리의 활동 능력을 촉진하거나 억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물도, 만일 그것이 우리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선이나 악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사물도 그것이 우리의 본성과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으로 인하여 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악이 되는 경우 그것은 우리와 대립한다.
어떤 대상이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이다.
사물은 우리의 본성에 더 많이 일치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에게 유익하든가 선하며, 반대로 사물은 우리에게 유익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의 본성에 일치하는 것이 된다. (…) 만일 우리의 본성과 다르다면 그것은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없다. 그러나 만일 대립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일치되는 것과도 대립적이며, 바꾸어 말하면 선에 대립적이며 곧 악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선일 수 없다.
인간은 격정(열정)에 지배되는 한 본성에 있어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물은 본성에 있어 일치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능력에 있어서 일치한다는 뜻이며, 무능력 또는 부정이라는 점에서, 따라서 격정에 있어서 일치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격정(열정)이라는 감정에 동요되는 한 본성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그러한 동일한 인간도 격정에 의하여 동요되는 한 가변적이며 불안정하다.
모든 감정에는 우리를 자극하는 대상의 종류만큼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리고 인간은 동일한 대상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자극되며, 그러한 경우 본성에 있어 서로 다르고, 마지막으로 동일한 인간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자극되며 그러한 경우 가변적이며 불안정하다.
인간은 격정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동요되는 한, 서로 대립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한, 본성에 있어서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치한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개체는 자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인간만큼 유익한 개체는 없다. 저마다의 인간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
덕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고의 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며,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이를 즐길 수가 있다.
인간에게 최고의 선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본성 자체에서 발생한다.
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위해 추구하는 선을 타인을 위해서도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욕구는 그가 가지는 신에 대한 인식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클 것이다.
우리들이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살아가는 데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나는 도의심道義心이라고 한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 우정을 맺으려는 욕망을 나는 단정함이라고 한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나는 단정하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정을 맺는 데 방해되는 것을 나는 비열하다고 한다. (…) 참된 덕이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만 생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능력이란 인간이 자기의 외부에 있는 사물에 수동적으로 이끌리고 또 외부의 일반적인 상태가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처럼, 외부의 사물로 결정되는 것에만 존재하며, 그 자신만으로 생각된 자기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사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자연상태 아래에서는 선이든, 악이든 모든 사람의 동의에 의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상태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하며, 자기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자기의 이익만을 고려해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결정하고, 또 어떠한 법률에 의해서도 자기 이외의 타인에게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상태 아래에서는 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 자연상태에 있어서는 아무도 일반적 동의에 의하여 어떤 사물의 소유주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자연 가운데는 특히 이 사람에게 속하며 저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다.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극받도록 하는 것, 또는 인간 신체를 외적인 물체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극하는 데 적합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신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극되고 동시에 다른 물체에 자극을 주는 데 적합하면 할수록 그만큼 유익하다. 반대로 신체의 그러한 적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유해하다.
인간 신체의 각 부분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선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각 부분을 서로 다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갖도록 하는 것은 악이다.
인간의 공동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 혹은 사람들을 서로 화합해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유익하다. 반대로 국가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은 악이다.
기쁨은 직접적으로는 악이 아니라 선이다. 한편 슬픔은 직접적으로 악이다.
쾌활함은 결코 도에 지나칠 수 없으며 언제나 선이다. 이에 반해서 우울함은 언제나 악이다.
쾌감은 과도해질 수 있으며 또한 악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쾌감 또는 기쁨이 악인 한에 있어 선일 수 있다.
사랑과 욕망은 과도해질 수 있다.
증오는 결코 선일 수 없다.
여러 가지 사물을 이용하여 그것을 즐기는 것은 현자의 생활이다. 알맞게 섭취한 맛있는 음식과 향기와 싱싱한 푸른 식물의 아름다움, 장식ㆍ음악ㆍ운동경기ㆍ연극 기타 어떤 것이든 타인을 해침이 없이 각자가 이용할 수 있는 이러한 모든 종류의 것에 의해서 스스로를 상쾌하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은 현자의 생활이다. (…) 만일 모든 점에서 추천할 만한 최상의 생활 지침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자신에 대한 타인의 미움, 노여움, 경멸 등을 거꾸로 사랑이나 관용의 마음으로 갚도록 노력한다.
자기가 받은 불법을 미움으로 복수하려는 사람은 확실히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확실히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대항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 사람에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연히 대항하며 그리고 거의 운명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복된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복종하지만 그것은 힘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힘의 증대 때문이다.
희망과 공포의 감정은 그 자체로 선일 수 없다.
과대평가와 경멸의 감정은 언제나 악이다.
과대평가는 과대평가되는 사람을 쉽사리 교만하게 만든다.
연민憐憫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악이며 무용하다.
이성에 의해서나 연민에 의해서나 타인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비인간적이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호의好意는 이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치하며, 또 그것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자기만족은 이성에서 생겨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성에서 생겨나는 이 만족이야말로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이다.
자기만족은 참으로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 우리는 명예에 가장 많이 지배되며, 치욕의 생활은 거의 참을 수 없다.
겸손(자기비하)은 덕이 아니다. 즉 이성에서 생기지 않는다.
겸손, 즉 인간이 자기의 무능력을 관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은 참된 관조나 이성으로부터는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덕이 아니라 격정이다.
후회는 덕이 아니다. 즉 이성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행위를 후회하는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하거나 무능력하다.
인간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이들 두 가지 감정, 즉 자기 겸손과 후회 그리고 희망과 공포의 감정 역시 해악보다는 이익이 더 많다. 그러므로 만약 언젠가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러한 방면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 민중은 두려움을 모를 때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된다. (…) 실제로 이러한 감정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도록, 즉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행복한 생활을 향수하도록 이끌어질 수 있다.
최대의 교만 또는 최대의 자기비하는 자신에 대한 최대의 무지이다.
최대의 교만 또는 최대의 자기비하는 정신의 최대의 무능력을 나타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은 모든 덕의 기초를 모르는 사람이며 모든 덕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과 자기비하적인 사람은 여러 가지 감정에 가장 많이 종속한다. 그러나 자기비하는 교만보다 쉽게 교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만은 기쁨의 감정이지만 자기비하는 슬픔의 감정이어서 교만이 자기비하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교만(거만)한 사람은 추종하는 무리 또는 아첨하는 무리가 주위에 있는 것을 좋아하며, 관대한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비하는 교만과 반대되는 것이지만, 자기비하적인 사람은 교만한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 ‘불행한 사람의 위안은 나쁜 동료를 갖는 일이다.’
명예는 이성과 모순되지 않으며, 이성으로부터 생길 수 있다.
이른바 공허한 명예란 민중의 평판에 의해서 육성되는 자기만족이며 이러한 평판이 끝나면 만족 자체, 바꾸어 말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이 최고의 선도 사라진다. (…) 치욕 또한 연민과 마찬가지로 덕은 아니지만 그것은 치욕을 느끼는 인간에게는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이 있다는 증거인 한, 선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고통이 신체의 손상된 부분이 아직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의 어떤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슬픔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완전하다. (…) 욕망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분명 좋은 감정 또는 나쁜 감정에서 생기는 것에 따라 선 또는 악이다. 그러나 욕망은 수동이라는 감정에서 우리 속에 생기는 한 맹목적이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단지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만 생활하도록 쉽게 인도될 수 있다면 이러한 욕망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동적인 감정에 따라 결정되는 모든 활동에, 그 감정이 없더라도 이성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
모든 감정은 기쁨ㆍ슬픔 또는 욕망으로 환원되며, 그리고 욕망은 활동하려는 노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모든 활동을 그러한 감정이 없이 단순히 이성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그 일부분 또는 약간의 부분에만 관계되는 기쁨이나 슬픔에서 일어나는 욕망은 인간 전체의 이익을 생각지 않는다.
기쁨은 대체로 신체의 일부분에만 관계되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기를 원하면서 전신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를 가장 강하게 구속하는 욕망들은 다만 현재만을 돌아보고 미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성으로부터 생기는 욕망은 결코 과도해질 수 없다.
정신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사물을 파악하는 한, 관념이 미래나 과거 혹은 현재의 것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동일하게 자극받는다.
공포에 인도되거나 악을 피하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성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는다.
덕을 가르치기보다 결점을 비난하는 것을 터득하고, 사람들을 이성에 의해서 인도하는 대신에 공포에 의하여 억압하여 덕을 사랑하기보다는 죄악을 회피하도록 하는 미신가들은 타인들을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행하게 하려고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불쾌함을 주고 미움을 받게 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욕망에 의해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선을 추구하고, 간접적으로 악을 회피한다.
악에 대한 인식은 타당치 못한 인식이다.
인간의 정신은 만일 타당한 관념밖에 가지지 않는다면, 악에 대한 어떤 개념도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 선한 것 중 보다 큰 선에, 그리고 두 가지 악 중에서 보다 작은 악에 따를 것이다.
우리들이 보다 큰 선을 향수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실은 악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우리들이 서로 비교하는 한에서만 선 또는 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 의해서 보다 작은 악은 실은 선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우리는 보다 큰 선과 보다 작은 악만을 추구하거나 따르게 될 것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우리는 보다 큰 선을 위해서 보다 작은 악을 따르며, 그리고 보다 큰 악의 원인인 보다 작은 선을 단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다 작은 것이라고 불리는 악은 실은 선이며, 반대로 보다 작은 것이라고 불리는 선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단념할 것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 우리는 보다 작은 현재의 선보다 보다 큰 미래의 선을, 그리고 보다 큰 미래의 악보다는 보다 작은 현재의 악을 추구할 것이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만약에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들이 자유로운 동안에는 선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인의 덕은 위험을 회피함에 있어서도, 위험을 극복함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위대함이 나타난다.
자유인은 위험을 회피할 때, 위험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정신의 덕에 의해서 한다. 그러므로 적시에 후퇴하는 것은 전투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의 커다란 용기의 증명이다. 말하자면 자유인은 전투를 선택할 때와 같은 용기와 침착한 마음으로 후퇴를 선택한다.
무지한 사람 사이에 생활하는 자유인은 가능한 한 그들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자유인은 타인과 우정을 맺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감정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선의에 보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자기와 타인을 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에 의해 이끌려고 하고,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충동이 아니라 다만 이성에만 따르도록 그들의 선의를 되도록 회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무지하기는 하지만 역시 인간이며 우리가 위급할 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그러므로 타인의 친절을 피할 때 이익과 명예를 생각해야 한다.
자유인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할 수 있다.
맹목적 욕망에 지배되는 사람들이 서로 보여주는 감사는 대개는 감사라기보다 거래 내지는 계략이다. 은혜를 잊음은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열한 짓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개 인간이 지나친 미움이나 노여움, 교만, 탐욕 등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리석음 때문에 증여에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자유인은 결코 간교하게 행동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신의 있게 행동한다.
이성의 지도를 받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속에서 좀더 자유롭다.
이성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좀더 자유롭게 생활하기 위해서 국가의 공통적 법률을 지키려고 한다. 이러한 것과 우리가 인간의 진정한 자유에 관해서 제시한 이와 비슷한 것들은 정신의 강함, 바꾸어 말해서 용기와 관용에 관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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