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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는 영어 표시, 이탈리아어(語)로는 (베네치아:Venezia)라고 한다네요. -
이탈리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트리에스테항에 입항 중 6월 말경 어느 날, 겨우 날이 밝으려는데 선장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관부원(機關部員)이 주축으로 13명이 팀을 만들어 베니스(Venice)에 간다고 떠들썩하며, 돈 좀 빌려 달라고 한다. 그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기관장을 책임자로, 2등 기관사를 실무 담당자로 정하고, 안전 여행을 당부하며, 06시 출발 기차로 보냈다. 마치 교직(敎職) 시절의 소풍날 학동(學童)들처럼 ‘다녀오겠습니다’고 깍듯이 허리 굽혀 꾸벅 절을 하는 자도 있다.
그날은 오후 2시까지밖에 양하(揚荷)작업이 없다고 했다. 빌어먹을! 바로 전날 Agent는 연속 3일을 작업한다더니…. 역시 노조의 파업으로 일할 Stevedore(부두 노동자)의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유럽 노조의 힘이 막강했음을 보았다. 지나치게 오랜 정박은 책임자에게는 무척이나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출항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 다음날도 계속 날이 궂어 비가 오락가락했다. 모두들 각자의 침실에 틀어박혀 있다. 전날 Venice에 갔다 밤늦게 돌아온 피로들이 있기도 하고 또 모이면 그 얘기들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13명이 하나의 단체이면서도 행동이 통일되지 않아 고충이 많았다는 2등기관사의 보고도 있었다. 여행을 나서면 가장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배에서 평소 볼 수 없었던 진풍경(?)들이 더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녁 식사 중 싸롱식당에서 우연히 ‘우리도 Venice에 가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이 많은 일본인 와타나베(渡辺) 통신(通信)국장은 몸도 불편한데도 가고 싶단다. 전(全) 선원이 한국사람인데 유일한 일본인이었기에 선장(船長)으로써 가장 신경쓰야 할 사람이었기에 물어본 것이다. 아마 그는 이 배를 마지막으로 해상(海上) 생활을 청산할 참이라고 했다. 왕성한 청년시절부터 뱃길에 일생을 바친 그로서의 소감이 궁금하다. 여러 명의 일본인 통신국장을 경험했지만, 가장 연령도 높았고 점잖한데다 인품(人品)이 온화하여 일반 선원들도 존경스러워 한 분이다.
다음번 Las palmas항에서 교대 귀국한다고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그 순진성, 선물하나를 살 때마다 손수 들고 와서 자랑하던 그 천진난만한 점이 꼭 오래전 ㈜협성의 원목선(原木船)에서 함께 승무(乘務)했던 황이조 갑판장을 연상케 한다. 배에서 늙은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아닌지 모르겠다.
육지와 베니스의 관계
나를 포함한 와타나베(渡辺) 국장, 1등 항해사. 1등 기관사와 넷이서 09:20분 발 기차로 출발했다. 약 2시간의 거리다. 우선 1인당 10,000Lila씩을 갹출하여 승차권을 사고 플렛폼으로 나갔다. 역시 개찰구도 출찰구도 없다. 객차안에는 6명이 들어갈 수 있는 독방이다. 영화에서 가끔 본 일이 있어 낯설지는 않지만 막상 실지로 타보니 감개가 깊었다. 모처럼 외국에서의 기차여행! 쌓였던 마음의 답답함이 탁 트이는 듯하다. 끝없이 넒은 바다 위에서 트이지 않든 마음들이 땅 위에서 산과 들과 나무 그리고 집들로 막혀 있는데도 시원하게 틔어오는 기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누렇게 익은 밀밭, 한창 자라고 있는 옥수수, 우거진 이탈리아 포푸라 숲 덩어리, 아직 열매는 뵈지 않으나 한참 열기를 머금어 가고 있는 포도밭들이 우리의 농촌과 별반 다를 게 없으면서도 군데군데 자리 잡은 흰벽, 붉은 기와지붕의 아담한 집과 아파트에는 창마다 유난히 빨간 꽃들이 담긴 화분이 놓인 것이 우리와는 전연 다른 감흥을 준다. 싱그러운 녹음이 질서 없이 흩어진 속으로 기운차게 달리는 열차 여행에서 모두들 흡족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도중에 차표 검사가 한 번 있었다. 내리기 직전 1항사가 차표를 분실, 한바탕 소동을 벌이며 열차원(차장)에게 신고를 했더니, 자기가 검표(檢票)를 했으니 염려 말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느 역이고 출찰과 개찰이 없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으나 단, 열차 내에서 검표시 발각될 시는 사정없이 벌금을 물어야 한단다.
Venice로 들어가는 마지막 Mestre역에서 약 2마일은 기차와 자동차가 어께동무를 하고 바다 위를 함께 달린다. 얕은 바다 위에 약 75,000개의 파일을 박아 1846년에 육로(陸路)로 연결했고 기찻길은 1954년에 개통했단다.
Venice! 바로 거대한 하나의 도시가 물 위에 떠 있다. 역 광장이 곧 Grand Canal(대운하)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버스는 일반 객선(客船)이고 택시는 Motor Boat이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Gondola(곤도라). 운하를 걸치는 무지게 다리들!. 감동 그 자체였다.
땅 덩어리가 마치 물위에 뜬 것 같다(빌려온 사진)
남사스런 얘기지만, 내 자신도 ‘베니스’란 말을 맨 처음 들은 것은 언젠인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당시는 ‘샤일록’이란 유대인 상인이 빚 대신 살(肉) 1파운드를 원했던 ‘베니스의 상인’이란 동화책이 아닌가 가늠한다. 그래봐야 기껏 초딩시절 일텐데 ‘샤일록’ 이란 이름이 기억되는 걸 보면 꽤나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한참 후에 그것이 섹스피어 작품이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유명한 베니스는 꿈에도 몰랐다.
안내서를 보면, 이 Venice의 역사는 서로마제국의 쇠망과 함께 만족(蠻族)의 침입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만족의 침략으로 육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늪지대나 얕은 바다에 산재해 있는 작은 섬에 피난했는데. 이중 아퀼레이아(Aquileia)인(人) 등 몇 개의 소수민족들이 처음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운하와 다리를 건설하여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이것은 명실공히 도시계획에 의한 것으로 대운하와 소운하를 만들어 400개의 다리로서 118개의 작은 섬을 연결한 것이 곧 Venice란 도시가 됐단다.
원래 이 지역은 석호(潟湖)*였는데, 이후 꾸준히 난민들이 유입되고 주민 수가 늘어나는 동안 베네치아인들은 이 일대를 조금씩 간척(干拓)해 나갔다. 이 간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새만금이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던 간척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다를 막아 담수화시킨 후 매립하는 일반적인 간척과 달리, 베네치아인들은 이 바다를 막을 수도 없었고 막아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제방 없이 나무를 엮어 파도만 막을 수 있는 정도로 벽을 쌓고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기초를 만들었다. 이 말뚝 위에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점차 도시가 성장하면서 갈수록 간척지도 넓어지고 더 튼튼하게 기초를 쌓게 되었다.
* 석호(潟湖) : 사주(砂洲 :모래톱)가 발달하여 바다와 격리되어 만들어진 호수로서, 우리나라 동해안의 화진포, 송지호, 경포호 등 18개소가 산재되어 있다.
해저 기단과 당시의 작업 모형도(빌려온 사진)
베네치아 건물의 건축과정은 17세기에 이뤄진 연구에 의해 자세히 알려졌는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가 건설될 때는 1,106,657개의 나무 말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무 말뚝은 4미터 길이였으며, 이때 쓰인 나무가 바로 오리나무. 오리나무는 늪이나 습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이다. 따라서 습기에 매우 강하며, 공기 중에 있을 때보다 물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특성이 있었으므로 당시 베네치아인들은 오리나무의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기반을 다진 것 등이 기록상에 나와 있다고 한다.
유창한 영어를 쓰며 카드(Card), 슬라이드(Slid film) 등을 파는, 보리짚 모자를 쓰고 눈이 파란 청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하면서 상술 좋게 10,000L 가까운 매상고를 올린다. Taxi라 불리는 모타 보트의 늙은 운전수도 한몫 끼었으나 일단 시간이 되었으니 점심부터 먹고 보자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붐비는 관광객들, 거의가 유리제품인 기념품상들의 휘황찬란한 진열로 관광객을 꾀어 들인다.
지금이야 피자(Pizza)하면 꼬마 어린이가 더 잘 알지만, 당시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Pizza’가 이탈리아 고유의 음식이라기에 먹어보기로 했다. 쟁반 같은 크기의 넙적한 밀가루 빵 위에 고기, 버섯 등을 양념과 함께 버물러 얹고는 토굴 같은 아궁이에 자루 달린 삽 모양의 가래로 집어넣어 구워낸다. 별미로 먹을 만한데 둥근 빵의 태두리가 너무 딱딱하고 질기다. 그걸 억지로 칼질하다 한 조각이 미끄러져 앞자리의 와타나베(渡辺)씨 접시까지 날아간 것을 계기로 그냥 손에 들고 물고 뜯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맥도널드 함버거의 창시자가 ‘음식은 맨손으로 먹을 때 가장 맛있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알겠다. 제기랄 비싸기는 또 -.
현재도 베네치아 구도심 내부에는 자동차 도로가 하나도 없기에 자동차는 없다. 보행자도로도 좁은 다리나 계단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오토바이조차 한 대도 없다. 따라서 새벽에도 차량 소음 등은 전혀 없다. 거기에다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벌금을 문다. 따라서 현재에도 도심내의 이동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와 수상택시, 수상버스뿐이다. 심지어 이들도 운행시 발생하는 파도로 인한 도시 균열을 막기 위해 좁은 운하에서는 시속 7km, 넓은 곳에서는 시속 11km 이상이면 과속으로 단속된다고 한다.
유명한 곤도라(빌려온 사진)
버스(?)를 타고 Grand Canal을 거쳐 St. Mark's 광장을 구경, 다시 유리제품의 생산지인 Murano섬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버스비 일이당 100L. 싼 편이다. Grand Canal을 군데군데 거친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웅장한 교회 그리고 각색의 건축양식, 바로 문 앞까지 찰랑거리는 물결, 틈틈이 보이는 소운하(그게 바로 골목이다)를 오르내리는 곤도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산 마르코 광장. 대사원을 향해 폭이 57미터의 넓이로 1723년에 조면암(粗面岩)을 써서 건설했단다. 대사원 내부에 전 벽과 천장에 장식된 모자이크의 섬세함이 놀랍다. 그림 한 조각은 전부 모자이크이며 기둥과 기타 벽면은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윗층의 층계와 각 실 구조 등이 지금까지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중세기 수도원이나 사원 바로 그것이다. 광장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 그 복잡함을 더해주는 비들기 떼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노닌다.
한 노천(露天) 레스트랑 앞에 머리가 하얀 노인들로 이루어진 한 팀의 악단(樂團)이 감미로운 연주로 나그네의 시름을 달래준다. 아코디온을 켜는 백발 영감님은 젊었을 때는 제법 한가락 했을성 싶다. 일본인으로 본 모양인지 일본노래 한가락을 뽑아준다. 그러면서 사진을 찍으려면 들어와서 찍으라고 권한다. 광장 옆으로 지금은 모두 상점가로 되어있다.
한쪽 벽면에 여신상(女神像)이 크게 부각되어 있는데 두 여인이 마주보고 서 있다. 그런데 오른쪽 여신은 반나신(半裸人)에다 천을 둘렀는데 마침 한쪽 볼기짝이 살짝 들어나 보인다. 헌데 그 부분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졌기에 하얗게 닳았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다. 나도 한번 만져보았지만 결국 나(엉큼한)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저렇게 되었으리라. 사람의 마음(아니 전부가 남자였으리라 전 볼기짝을 만지고 간 사람들은…)은 똑같은 가 보다. 그 보다 더 탐스러운 양 젖무덤이 벗은 채 있으나 손이 닿기에는 너무 높다. 손이 닿지 않으니 먼지만 쌓인 체 걸려 있기 망정이지 만약 손이 닿을 곳이면 벌써 닳아 없어졌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는 너무 수월한 추측이었다.
다시 5번 버스를 갈아타고 Murano섬으로 가다. 이 섬의 유리세공은 1289년부터 시작. 15~16세기에 찬란하게 꽃피우다가 일시 쇠퇴했으나, 지금 다시 수공예 상품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되찾고 있단다. 공장 견학을 무료로 시켜주고 자기의 제품을 팔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가마속에서 유리액을 찍어낸 쇠꼬챙이를 입으로 불면서 조그만 핀센트 모양의 집게 하나로 마치 떡 주무르듯 아니 떡보다 더 자유자제로 만들어 나간다. 숙련이리라. 근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공장치고는 너무 규모가 작고 초라하지만, 아니 그래서 더욱 이름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유리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할만큼 갖가지 상품을 만들어낸다. 비싸지 않고 보관하기만 쉽다면 몇 가지 쌌으면 싶어진다. 현란한 샨데리아, 금박, 은박을 한 유리집기들, 값이 붙은 만큼의 가치는 있으리라 싶다.
현재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안경은 1200년대 이곳 베네치아 유리 제조공들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된 것은 1300년대라고 한다. 시력을 인위적으로 교정하는 이 위대한 결과는, 이곳 사람들의 기술력이나 세심한 정성을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Murano 이웃의 Burano섬에는 여성들의 뜨개질(Lace)가 유명했다. 이 수공예술 역시 이곳 경제를 변영시켰으며 한 개의 바늘로서 창작해내는 그 기묘하고 다양한 작품을 15세기부터 세계각국의 여성들이 애용해왔고 프랑스 왕비 메치치(Medici)가의 캐스린(Catherine)은 노련한 레이스 자수(刺繡)를 보호했단다. 이것은 옛날 우리 누나들이 직접 뜨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 큰 감동은 없었지만 그 작품의 규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Lace 전문점과 뜨개질 모습(빌려온 사진)
예약된 열차시간에 맞춰 오후 5시반 역까지 왔다. 겉만 보고 만 셈이다. 많은 박물관과 그 안에 있다는 미술품들을 못 보고 가는 것이 못내 서운함이 되어 뒤를 돌아보게 한다. ‘없는 놈이 이만한 여행도 과분한 것이렸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 재떨이와 라이타를 한 벌 쌌다.
영국의 문호 섹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 지독한 유태인 상인 샤일록을 어째서 이런 Venice를 배경으로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 그 파란눈의 젊은 청년, 음식점, 기념품상에서 한 푼 에누리없이 받아 챙기는 그 상혼에서 그럴 만하다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해상에 세운 피나는 노력의 대가를 잊지 못했으리라. 각 건물마다 장식된 수많은 조각품들은 이탈리아 예술의 한 부분이라 본다면 어느 정도 그 전체를 짐작해 봄직도 했다.
귀로! 짧은 시간에 쫓긴 피로가 따른다. 한참 가다 보니 기차를 잘못 탄 듯해서 열차승무원에게 얘기 하자, 어김도 사정도 없이 추가 요금을 받아 챙긴다. 외국인으로서 처음길이라 잘못 기차를 탔다는 한 조각의 동정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두어 시간 더 늦어 자정 가까운 시간에 귀선하다. $20 가까운 돈으로 모처럼 보람 있는 여행을 했다 후련하다.
후일담 : 그후 1990년 초반이던가 여행사를 경영할 때 대구사범(大師) 8회 여동기 10여 명을 안내하여 유럽을 여행하면서 로마와 베니스를 경유한 적이 있었다. 감개무량과 격세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남는다.
베니스 여행중의 대사8회 동기생(꽃밭이었다. 내게는 ...ㅎㅎㅎ)
첫댓글 샘나서 끝까지 즐겼습니다.ㅎ
미국 라스베가스에 가면 각국의 랜드마크를 경험할 수 있잖아요.^^
그때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타보긴 했지만.....ㅜㅜ
항해사+여행사=완전 지구인입니다.
난 강원도민 쯤 되남???
덕분에 베네치아가 지구 어느 쪽에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ㅎ
감사합니다.^^
Venice 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 감사합니다. 여행사까지 경영하셨다니 대단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