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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차 답사자료 (2017.02.28)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전남목포 답사자료
* 일 시 : 2017.02.28 (넷째 화요일) 07:30~18: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07:30) - 목포 - 유달산 노적봉 -
- 목포근대역사관 1관(구 목포일본영사관) - 국도 1,2선 기점 -
- 목포근대역사관 2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 삼학도/김대중노벨펑화상기념관 - -- 점 심 ( 남도밥상 식당) - 정기총회 --
- 자연사박물관 - 문예역사관 - (해양유물전시관) - 갓바위/해상보행교 - --- 마산박물관(18:30) ---
* 해 설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인 솔 : 이 사 : 김 인 국 010-3863-7570
마 산 문 화 답 사 회
2017-1차 답사자료 (2017.02. 28)
** 목포시 현황
전라남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동쪽과 남쪽은 영산호 (榮山湖)에 면해 영암군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신안군, 북쪽은 무안군과 접하고 있다.또한, 그 주위에 13개의 도서가 넓게 펼쳐져 있어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방파제 구실을 하여 천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보인다.
시가지의 서남쪽에 병풍을 둘러놓은 듯 기암절벽이 펼쳐진 유달산은 고려시대인 1351년(충정왕 3)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 (露積峰)이 있으며, 영산강· 삼학도 (三鶴島)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면적 50.65㎢, 인구 241,744명이다.
** 유달산 (儒達山)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인 산이다.
유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영달산'으로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일등바위(율동바위), 심판을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는 이등바위(이동바위), 이등바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간다는 전설이 내려져온다.
경치가 좋은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소요정 등의 많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수 이난영 '목포의 눈물' 기념비,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 등의 볼거리가 많으며,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는 목포시가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서남해안 지역의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해남 화원의 일성산 봉수와 무안 왕산의 군산 봉수를 연결하는 천혜의 요새로서 일찍부터 영산강의 목을 지키는 역할을 하여 왔고 임진왜란 때 이엉으로 바위를 덮어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는 이순신 장군의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露積峯)을 비롯하여 역사상 의미 있는 곳이 많다.
정상에 올라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목포의 유달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일몰이나 목포항의 야경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유달산(儒達山)은 온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바위산이다. 날카로운 암봉들이 많은 유달산은 악하고 모난 기운을 없애려고 많은 나무를 식재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바위와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으며 산마루마다 칼날 같은 암봉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어 목포 사람들의 단단한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의 기묘한 조화로 만들어진 유달산의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설과 사연을 간직하면서 오늘도 목포 땅을 굽어보고 있다. 이제 유달산의 등산로를 따라 그 바위들의 이야기와 형상을 찾아가 보자.
유달산 바위
북바위, 노적봉, 누운얼굴바위, 투구바위, 고래바위, 종바위, 조대바위, 애기바위, 마당바위, 손가락바위, 흔들바위, 일등바위, 얼굴바위, 장미바위, 이등바위, 거북바위, 장수바위, 남근석, 여근석, 장사바위, 신이붙든바위, 거북바위, 떡바위, 나막신바위, 입석바위
유달산 누정
대학루, 달선각, 유선각, 관운각, 소요정
유달산의 누정은 산의 정상이나 중턱 또는 높직한 언덕위에 위치하여 주위의 숲과 멀고 가까운 경관을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유달산의 누정은 우리들의 휴식처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공간이고, 홀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하는 곳이다. 편안히 모일 수 있는 곳, 전망이 좋은 곳,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예외 없이 누정이 자리 잡고 있다.
유달산을 돌아보기 위한 방편으로 누정을 따라 목포팔경(木浦八景)과 유달산 주위의 풍광들, 그리고 목포가 걸어온 삶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학루
정문에 위치한 대학루에는 북바위가 있습니다.
달선각
대학루를 지나 달선각에 이르기까지 누운얼굴바위, 노적봉, 투구바위가 있습니다.
유선각
달선각을 지나면 유선각이 위치하며 유선각과 관운각사이에는 고래바위, 종바위, 조대바위, 애기바위가 있습니다.
관운각
유선각을 지나 관운각에 이르게 되면 관운각의 왼쪽에는 애기바위, 조대바위, 장시바위, 남근석, 여근석, 산붙든 바위가 있으며,
관운각의 위쪽에는 입석바위, 나막신바위, 떡바위,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소요정
관운각을 지나 소요정으로 지나는 길에는 마당바위, 손가락바위, 흔들바위, 일등바위, 얼굴바위 보리마당이 있으며,
소요정을 지나면 장미바위, 이등바위, 거북바위, 장수바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연경관이 아기자기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철따라 변하는 산과 들과 강의 풍정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 우리 민족에게 누정은 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고, 널리 보편화되었다.
누정은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산천 경계나 들이 잘 보이는 곳에 의례 누정이 있다. 누정에는 그 누정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정자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기도 한다. 이런 현판의 글(누정의 이름)은 그 정자가 주는 정취를 알 수 있게 한다.
** 노적봉(露積峯)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 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이 때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전술을 펼쳤다.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이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적봉(露積峯)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 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의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전술을 펼쳤다. 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 목포근대역사관 1관 (구 일본영사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이 건물은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8년 10월 목포일본영사관이 목포에 설치됨에 따라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만호청(1895년 폐진된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였고,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목포일본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우편국 등을 함께 마련하였다. 당초 일본영사는 무안감리에게 목포일본영사관 부지 16,028평방미터를 요청하였으나, 이 신청을 접수한 조선정부는 9,483평방미터만을 승인하였다. 공사비 7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이 전해온다. 이후 목포 이사청, 목포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구)목포일본영사관, 1990년 1월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후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하였다.
** 국도 1,2호선 기점(목표도로원표)
골목길 지나 한 길로, 고갯길 넘어 바른 길 찾아서 남쪽으로 내달리면 뱃길과 찾길이 만나는 곳!목포에 늘 처음처럼 길머리에 시작을 알려주는 도로 원표가 있다.목포시 대의동에 위치해 있는 도로원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1번 국도는 목포에서부터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이며, 2번 국도는 부산까지인데, 이 1,2번 국도의 출발점이 바로 목포입니다. 남북방향의 국도는 홀수번호, 동서방향의 국도는 짝수번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번호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였으나 최근에 그 번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
이 길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국도 1호선 구간의 공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1904년부터 3년간 전구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답니다. "일제는 목포에 들어와 솜, 쌀, 소금을 가져갔어요. 이들은 모두 전쟁준비물자였지요. 그런데 당시 조선의"길"로는 이런 물품은 물론이고 군대도 이동할 수 없었죠. 그래서 8~10m폭의 신작로를 만든 거예요. 또한 동학농민군 등 산골의 '폭도'들을 소탕하려 해도 '길'로는 힘들었어요. 이 역시 국도 1호선을 서둘렀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라고 향토사학자 김성열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호선 공사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투입되었고,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2호선의 경우 동학농민 전쟁 때 '폭도'들이 주요 노동력이었다고 합니다.
주로 명당자리에 고택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고 그 집안에는 명성이 있습니다.길도 명당과 명성을 차지합니다. '국도1호, 2호'는 우리의 땅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땅에 길이 만들어지면 길도 신분의 변화가 생겨 서민에서 귀족으로 바뀝니다. '돈은 길을 따라 움직인다.' 격언이 있는데요, 이 길을 따라 가보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목포시 중심상가 길 주변에 있고, 목포역, 목포버스터미널이 있습니다.
** 목포근대역사관 2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우리에게 지난 세기는 격동과 파란의 시기였고, 슬픔과 기쁨이 무수히 교차했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항도 목포의 110년 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목포근대역사관에 그 해답이 있다.목포근대역사관은 근세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척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척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척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었으며 2000년에는 한반도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한의 화해∙협력관계 발전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는 민주주의∙인권∙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었다.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불의에 항거하며 한국 현대사 격동기의 중심에서 '행동하는 양심'의 삶을 실천했다. 또한 자신을 탄압하고 모함했던 이들과 화해하고 용서 함으로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의 면모를 보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1)선진경제국가 2)민주인권국가 3)생산적 복지국가 4)창조적 문화국가 5)한반도 평화정착을 목표로 대한민국을 21세기 선진국가의 대열에 오르는 초석을 마련했다.
김대중노벨평화상 기념관을 목포 삼학도에 건립하게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유년시절부터 정계에 입문하기 까지 활동한 곳이 목포이며 그의 철학과 신념은 목포에서 활동하며 태동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학도는 목포의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목포시민들의 꿈과 희망이 함께하는 곳이다.
김대중노벨평화상 기념관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를 통해 민주주의∙인권∙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전하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의 모습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객관적 사실과 사료에 의거해 체험적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앞으로 상설 및 기획전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교육과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인권∙평화', '화해와 용서'로 대표되는 김대중 정신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며 이를 통해 국가와 민족 그리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 일조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 목포자연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은 자연사관, 문예역사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사관은 중앙홀, 지질관 등 7개 전시실에 지구 46억년의 자연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세계에서 단 2점 뿐인 공룡화석 프레노케랍토스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 발굴해서 복원한 세계적 규모의 육식공룡알 둥지 화석이 전시되어 있으며 공룡모형, 화석, 식물, 곤충, 조류, 어류 표본등 국내 최대 규모로 총 4만여점의 방대한 자료를 소장, 전시하고 있다.
**문예역사관
문예역사관은 호남화단에 남종화의 맥을 창시한 운림산방 4대작품실, 남농허건 화백께서 기증해 주신 1,800여 점의 수석 중 대표석 100여 점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양화의 거장 오승우 화백께서 기증해 주신 대표작품 100여점을 교체 전시하고 있다.
** 해양유물전시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은 우리나라 대표 국립 해양역사박물관으로서, 해양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전시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야외의 바다풍경과 전통 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설전시실은 1층 고려선실과 신안선실, 2층 세계의 배 역사실과 한국의 배 역사실 등 총 4실입니다. 지하에는 바다풍경 넓게 펼쳐진 중앙홀, 어린이해양문화체험관, 기획전시실이 있습니다.
신안과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 인양된 중국 송원대 선박과 도자기, 동전, 총포류 등이 전시되어 있어 선박의 발달사와 함께 해양문화를 알아볼 수 있는 산교육장이다. 바닷가에는 새우잡이 멍텅구리선, 제주도 떼배 등을 복원 전시중이며 바다문화학교 운영 등 해양문화 학습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 갓바위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된 갓바위는 두 사람이 나란히 삿갓을 쓰고 서 있는 모습의 바위로 약 8천만년전 화산재가 굳어진 용결응회암이다.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던 갓바위를 해상에서 직접 조망할 수 있는 보행교를 바다위에 설치하여 더욱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갓바위는 저녁노을에 물든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운 곳으로 예로부터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한다. 파도․해류 등에 의해 바위가 침식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어 자연학습장으로 활용되며 자연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4월 27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되었다.
큰 갓의 형태를 하고 있는 입암산 바위에 석양의 마지막 빛을 바위에 쏟는 정경으로 슬픈 전설의 중바위와 그 뒤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입암산 그리고 영산강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노을빛을 연출한다.
독특한 형태가 형성된 이유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암석 표면에 파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염분을 함유한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수없이 되풀이 하고 수분에 녹아있던 실리카성분이 침전 되면서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모자모양의 경질부와 아래쪽이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이 형성되었다. 또한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갓바위는 인위적인 요인이 배제된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품으로 다른 지역 풍화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고 아름다운 자연학습장이다.
* 전설
여기 서 있는 한 쌍의 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 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고 불렀다.또 한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 이 영산강을 건너 이 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해상보행교
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던 갓바위를 해상에서 직접 조망할 수 있는 보행교를 바다위에 설치하였다. (2008.04.10)
물 위에 떠있는 보행교로 총연장 298m, 폭 3.6~4.6m로 밀물 땐 약 1m 정도 올라왔다가 썰물 때는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목교 118m, 도교 40m, 부잔교 140m, 난간 등 부대공사와 보행교의 야간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참고: 목포시청 홈페이지, 인터넷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