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역사탐방(제14코스 : 고산자길)
◇ 중랑천 걷기 : 용산구 녹사평대로 지하 195
- 양주시 불곡샘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 서울의 7개 구를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
중랑천의 발원지는 불곡산 상투봉과 임꺽정봉 사이의 밑에 있다. 이 샘은 불곡산의 지명을 원용하여 ‘불곡샘’이라고 했다.
불곡샘은 양주시 산북동 샘터골을 지나 군부대가 주둔했던 터를 경유, 불곡산장과 부흥사 옆을 따라 흐르다가 산북초등학교 앞과 샘내, 양주시청을 지나 유양천, 그리고 광사천 · 어둔천과 합류된다.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 백석천 · 회룡천 · 호원천 등 모두 18개의 지천이 흘러 들어오며, 서울시로 유입되면서는 방학천 도봉천 우이천 청계천 정릉천 성북천 당현천 등 모두 14개 지천이 합류되어 성동구의 성수교 부근에서 한강과 합류되는 하천이다.
중랑천은 서울 시내의 노원 도봉 강북 성북 중랑 동대문 성북 등 7개 구를 거치면서 흐르다가 한강으로 유입된다.
중랑천 전체의 길이는 약 34.59km이지만, 서울시와 의정부시의 경계지점에서부터 한강 합류지점까지의 서울시 관내 하천의 길이는 20.81km, 유로면적은 394만 1,500㎡, 유역면적은 288㎢, 하폭은 90~220m이다.
◇ 응봉산 : 성동구 응봉동
-산의 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응봉산은 산 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성동구 응봉동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이 봉우리는 예로부터 주변의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다. 높이는 95.4m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이곳에서 매를 풀어 살곶이벌에서 꿩사냥을 즐겨 했는데, 그 때문에 매봉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산 기슭에는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학습을 위한 독서당이 있었는데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들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응봉산 남쪽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氷庫)를 설치했는데 서빙고(西氷庫)에 비해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빙고(東氷庫)라고 불렀다.
근린공원으로 지정된 응봉산은 한강의 조망 장소이다. 그리고 서울의 볼거리의 하나인 응봉산의 팔각정과 봄에 피는 샛노란 개나리꽃을 들 수 있다. 이곳은 산책코스, 일몰코스, 야경코스로 알려져 있다.
성동구는 응봉산 정상에서 ‘해맞이 축제’ 행사를 갖는데 2023년 1월 1일에도 이 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해맞이 행사를 가졌다.
◇ 무쇠막 터 : 성동구 독서당로 335(금호1가동 1558), 농협 금호동지점 앞
조선시대에 농기구, 무쇠솥 등을 주조(鑄造)하던 대장간 집단지
이곳은 조선시대에 선철(銑鐵)을 녹여 농기구, 무쇠솥 등을 주조(鑄造)하던 대장간 집단지로 무쇠를 녹이던 곳이라 하여 무시막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한강의 무수막 나루터를 통해 생필품과 땔감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었고, 또한 무쇠로 주조한 제품을 도성 안 사람들에게 판매하기 쉬운 이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여 그릇과 벽돌을 굽고, 메주를 쑤어서 팔거나 무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무쇠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장인(匠人), 야장(冶匠)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였다. 그래서 전에는 서울에서 ‘왕십리 배추장수’와 함께 ‘물쇠골(水鐵里) 솥장수’라고 일컬었다.
◇ 달맞이봉 : 성동구 금호동4가 산 27
- 정월 대보름에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가서 달을 맞이하여 유래된 이름
성동구 옥수동 동쪽에 있는 이 산봉우리는 오래 전부터 정월 대보름이면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가서 달을 맞이하였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달맞이봉공원은 해돋이 명소이자 달 야경이 아름다운 서울야경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서울의 남, 서 방향의 전망과 한강, 롯데월드타워, 청계산, 관악산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 저자도(楮子島) 터 : 옥수동과 금호동 4가 앞의 한강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퇴적 작용이 반복되어 만들어진 섬
저자도(楮子島)는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 4가 앞의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강물이 실어온 모래와 흙이 쌓이는 퇴적 작용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섬이다.
이 섬 안에는 구릉과 밭, 백사장이 있었다. 그리고 닥나무가 많이 자라 저자도로 불렸던 이 섬은 ‘옥수동섬’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섬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무동도(舞童島)’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 섬에 기우단(祈雨壇)이 있어서 날이 크게 가물면 정2품, 종2품의 고위 관리가 이 섬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이곳은 맑은 한강이 둘러 있고, 흰 모래와 무성한 갈대 숲 그리고 수목이 울창하여 경치가 매우 좋았다. 저자도에 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저자도는 삼전도(三田島) 서쪽에 있는데, 고려 때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아조(我朝 : 조선)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라고 하였다. 고려말의 문신으로 좌정승을 지낸 한종유(韓宗愈)는 저자도에 별장을 짓고 노후를 보냈다.
저자도의 풍경을 한종유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10리 편평한 호수에 가랑 지나갔는데, 긴 피리 한 소리 갈대꽃 사이로다. 금솥의 국 맛을 조화(調和)하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석양녘 모래 터로 내려온다네.
조선초 세종 때 이 섬을 차지한 안빈세는 이곳에 있는 정자를 수리한 뒤 한가할 때면 오가면서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며, 선비들에게는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조선 초에 정인지가 쓴 글에 보면, 저자도는 중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고 가는 곳이었다고 하였다. 동쪽의 제천정에서 서쪽의 희우정에 이르기까지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여러 개의 정자와 누각을 마련하여 그 풍경을 감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섬 동쪽 교외는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저자도에서 배를 띄우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17세기 후반에는 김창흡(金昌翕)이 이 섬의 주인이 되어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1686년부터 1688년까지 3년간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 섬에서 정자를 짓고 살았다.
이어서 철종은 부마인 박영효(朴泳孝)에게 이 섬과 함께 압구정(狎鷗亭)을 하사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이 섬은 한때 국가에 몰수되기도 하였지만 저자도가 수몰되기 전까지 박영효가 이 섬의 마지막 소유주였다.
일제 때인 1920년대만 해도 저자도는 동서 2㎞, 남북 885m, 면적 118만㎡(35만 4천여 평)에 이르는 큰 모래섬으로 경관이 빼어났는데 을축년(1925) 대홍수로 불어난 한강물에 휩쓸려 자갈과 모래투성으로 변해서 경작이 불가능해 졌고, 1937년경에는 모래 채취 허가신청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섬의 지목(地目)은 밭과 잡종지(雜種地)로 표시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저자도는 앵두가 많아 매년 국왕에게 잔상했다.
압구정과 저자도 사이에는 물이 얕게 흘러 샛강이 있었다. 샛강은 물론 강변 및 저자도에서는 시민들이 여름철이면 수영을 즐겼다. 하지만 을축년 홍수 이전만 해도 이 섬은 매년 여름이면 많은 시민들이 무수막에서 나룻배로 이 섬으로 건너와 텐트를 치고, 3복더위를 식히는 휴양지였으며,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 썰매와 스케이트 등을 즐겼다.
이 섬이 훼손된 것은 1936년 일제 때에 뚝섬 제방을 쌓으면서 이 섬의 모래와 흙을 파다가 메웠고, 설상가상으로 두뭇개 앞을 지나는 경원선 철도 둑을 고쳐 쌓을 때도 이 섬의 흙과 모래를 파다가 쌓았으므로 저자도는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저자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69년~1972년이다. 1968년에 현대건설이 저자도 남쪽 압구정지구 175,002㎡평의 매립 면허를 신청하였다. 매립 목적은 당초 「건설공사용 각종 콘크리트제품공장 설치 대지조성 및 강변도로 설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후 실시계획인가 과정에서 택지조성으로 변경되었다.
현대건설은 건설부로부터 공유수면 매립 허가를 받은 뒤 저자도의 모래 80만㎦를 파내 압구정지구 4만 8,000여 평을 매립하였다. 1972년에 매립이 끝날 즈음에는 저자도의 상당 부분이 물속에 잠겼다. 현대건설은 이 지역에 1975~77년 현대아파트 23동 1,562가구를 건설했으며, 뒤에 모두 76개동 5,909가구의 현대아파트단지로 확대됐다.
저자도 모래 위에 지어진 압구정아파트는 수많은 화제를 뿌렸다. 1978년 현대건설은 지어놓은 압구정동 아파트의 분양이 잘 되지 않자 정치인·언론인 등에게 특혜로 분양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부동산 투기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한국의 부와 유행의 중심이되었고, 오렌지족의 산실이었다.
서울토박이 성해용(66)은 저자도를 회상하기를 “저자도는 여름철엔 피서객에게 수영팬티와 튜브용 자동차타이어를 빌려주는 가게, 매운탕을 파는 가게가 백사장을 따라 펼쳐졌어. 겨울엔 아이들이 섬 주위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쳤지.”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현재 저자도가 있던 중랑천 어귀에는 모래와 자갈이 꾸준히 쌓이고 있다. 서울시 한강시민공원관리사업소는 2019년에 중랑천 하구 일대에 쌓이는 토사 3만㎥ 정도를 파냈다. 서울시는 중랑천·탄천·반포천 등 한강 지천 하구에 쌓이는 모래를 매년 걷어내고 있다. 1988년부터 2019년까지 모래 준설(바닥파기) 작업에만 911억원을 들였다.
저자도의 자취는 이제 한강이 아니라 압구정동의 한복판 ‘로데오 거리’에 스며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