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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그가 누구이기에
말씀 / 마가복음 4 : 35 ~ 5 : 20
요절 / 마가복음 4 :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자라나고 확장되고 열매 맺습니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말씀 권세가 어떠한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때는 해가 저물 때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호수를 건너 반대편으로 향하였습니다. 이 때 거센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높아져서 배안으로 물이 들어왔습니다.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이 지속되어 배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으며 살던 사람들이 여러 사람 있었으므로 그들의 경험과 노력으로 배를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바람과 물결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배에 들이치고 제자들이 온 힘을 다 하며 배를 지키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은 배의 후미입니다. 흔들림 심한 배 고물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거센 바람과 물결 속에서도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부르짖음에 일어나셨습니다.
39,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바람이 그쳤습니다. 물결도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권세는 바람과 물결을 즉시 순종하게 하는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사나운 바람도 순종하고 날뛰던 물결도 잠잠하게 가라앉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게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주 권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도 순종하고 거센 물결도 순종하여야 합니다.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 앞에서도 믿음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을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에 집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제자들의 마음과 눈은 바람과 물결을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무슨 사건이든지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을 의심합니다. 눈이 감긴 사람의 특징은 환경과 사람들이 자기를 해하려 한다는 의심을 가집니다. 이번에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은 그동안 알아왔던 예수님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 인줄은 알았습니다. 다만, 인간의 내재된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으로 인식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고치는 예수님,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내쫓아 주는 예수님,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예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을 만나고 이것들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은 자연만물과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 세계를 제어하고 주장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모든 물질 세계의 주인이었습니다.
5: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건너편에 도착하여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제라시라고 부르는데 헬라어 명칭인 거라사로 불립니다. 원래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이고, 로마의 속주 10대도시 데카폴리스의 하나 입니다. 거라사 지역은 돈이 많았습니다. 부유한 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는 사람은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귀신이 들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의 거주지는 무덤 사이 였습니다. 죽은 시체가 묻혀 있는 곳에 거처한 것은 그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나 산 속에서 소리를 질러 댔으며,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학을 하였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맺는 일을 못하는 것,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이었습니다.
귀신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마귀에 속한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당합니다. 사람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자아를 대단히 괴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대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어떤 사람들은 정신신경계 이상 있는 사람과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대화하려고 합니다. 귀신은 대적하고 내쫓아야 합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하고 귀신에 대해서 꾸짖고 내쫓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귀신의 반응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과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과 관계를 마다하며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셨습니다. 귀신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여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군대’라고 불린다고 대답하였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귀신은 자기들을 그곳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하였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대신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돼지떼에게 들어간 귀신은 돼지들을 물로 달려가 모두 빠져 죽게 하였습니다. 귀신이 하는 일은 죽게 하는 일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귀신들이 나가자 귀신들렸던 사람은 옷을 입고 온전하여 졌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먼저 하도록 하셨습니다. 가족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큰 일을 증언하도록 방향 주셨습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그는 데가볼리지역에 널리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인생을 억누르고 인생을 망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서 마귀와 마귀의 역사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의 세계에서도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하여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던 돼지 2천 마리가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사는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주변에 철광이 있어서 부유했다고 합니다. 돼지를 2천 마리나 사육한 것을 보면 그 지역에 대규모 축산이 가능한 대자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떼귀신이 사로잡고 있었지만, 멀쩡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거라사 광인속에 들어갔던 떼귀신은 예수님께서 내쫓아 주셨지만, 멀쩡하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 욕심에 사로잡혀 생명의 주 예수님께 자기 동네에서 나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하여 쇠사슬을 채워 제어하고자 하였지만, 자신들의 돈 욕심은 제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고단해 보입니다. 많은 백성들의 수많은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신성 모독, 반유대교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은 시골 출신이며, 랍비학교 좋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요구에 응해줄 것을 바라고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 갖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향하여 병 고쳐 달라 귀신 쫓아내 달라 도와 달라 하기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자 말씀이 시시하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으러’ 예배에 나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존경받는 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이 예배 보러 오지만 예배에 와서 눈물과 감동 있는 설교, 재미있는 설교 기대하고 그리하여 그런 설교를 듣고 가지만 삶의 변화는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 눈물 쑥 빼주는 카타르시스, 모두가 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종을 결단하는 일이 없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다 하면서도 예수님께 삶을 드리는 헌신이 없고 삶과 인격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람도 순종하고 물결도 복종하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사람을 멸망으로 몰고 가는 마귀와 그에 속한 악한 영들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 앞에 쫓겨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자연만물이 복종하여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도 모두 복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죄 많은 사람입니다.
원성동 원성천변이 장마때 비피해가 반복되었었습니다. 배수로를 넓히고 수해방지 공사를 하여 더 이상 원성천변에서는 피해가 없습니다. 백석동에도 비슷한 대비를 하여 수해방기 공사를 하여서 이제 비피해는 없겠구나 하였습니다. 갑자기 월봉산 주변에 집중호우가 내려 서쪽인 아산역이 물에 잠겼습니다. 그 동쪽인 신방동도 물에 잠겼습니다. 이곳에 배수로 공사를 했으니 안심인가요? 목천에 집중호우가 내립니다. 올해는 어디에 다시 기록적인 폭우가 내릴지 모릅니다. 이런 기상이변을 보면서 세상이 끝나가는 것인가? 염려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상이변이 나타날수록 오직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계선교에 힘쓰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피조물의 모든 세계가 모두 예수님 아래에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기독교를 혐오하고 기독교인을 조롱하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낙심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회를 ‘개독’이라 일컫는 것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 있음을 알고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도 권세자 이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복음 역사의 침체기’라느니 ‘역사의 정체기’라느니 하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 앞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바람보다 더 강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마귀와 그에 속한 악한 영도 꼼짝없이 복종하여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권세자 이십니다.
그동안 우리센터 개척역사가 동역하는 사람 한 사람 없이, 가진 돈 단 1원도 없이 시작되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개척자가 독립적이고 도전적이었다는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센터 얻을 돈도 없었고 우리 부부가 살 집도 살 집을 구할 돈도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개척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둘 뿐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안 된다, 어렵다 할 때 우리는 개척할 때부터 줄기차게 많은 학생들이 성경 말씀 공부하러 왔습니다. 지난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에게 열 명의 새로운 일대일 양들이 왔습니다. 그중에서 학생 목자들이 나왔고 선교사도 파송되었습니다. 코로나 봉쇄 3년 동안 모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 없는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어려움, 환경으로 말미암는 수고, 여러 괴로움들을 원망하고 탓할 곳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원망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차라리 잊어보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굳게 의지하며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며 고난의 강을 거뜬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55분 걸리는 서산 해미읍에 가면 여숫골이 있습니다. 신유박해 때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반복하여 ‘예수’ ‘예수’ ‘예수’ 부르며 갔는데, 멀리서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그 후로 ‘여숫골’이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네로의 박해로 혹독한 시련을 당할 때, 로마의 권세보다도 더 크신 이름 예수님의 이름권세를 믿었으며 구차히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콘스탄틴 황제 때에 더 이상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공식 인정하겠다는 칙령을 내리게 하셨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는 로마 제국 사람은 모두가 기독교를 믿으라! 하는 로마의 국교가 되게 하여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은 성도들의 믿음이 로마를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서양역사를 주도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온 세상 모든 새가 와서 깃드는 큰 무화과나무 같이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바람과 물결도 순종하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모든 영의 세계도 순종하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모든 권세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말씀을 공부한 여러 후배들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 앞에 순종하고 자기의 삶을 다 드렸습니다. 그랬을 때, 그가 믿고 순종한 예수님의 이름권세가 그의 삶을 풍성한 은혜와 열매로 크고 아름다운 영향력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세속적인 자기야망을 위한 신앙, 예수님과 관련된 몇 가지를 가지고 이기적인 자아실현을 추구하였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나이 드니까 좋은 점이 있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척하는 사람과 예수님의 이름에 순종하는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젊을 때는 잘 나지 않더군요. 나이 드니까 그 결과가 뚜렷해지는 겁니다. 열매 없고 영향력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울부짖는 원망이 되니 참 안타깝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께 더욱 집중하고 예수님 이름에 순종하고자 결단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인생의 바람을 잠재우시는 예수님 권세, 인생의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 이름 권세를 체험할 것입니다. 이런 주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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